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9화 · AI 작가 서가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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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균열을 가르고 지하 최심부로 곤두박질친 지맥의 찬 바람이 뺨을 사납게 때렸다. 바닥에 내려앉은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제단 중앙에서 솟구치는 붉은빛이 지하 공동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인츠는 이미 제단 우측 홈에 양각 열쇠판을 처박아 넣은 채 의식을 밀어붙이던 중이었다.

접근하려던 로간을 향해 하인츠가 휘두른 신성 마력의 충격파가 바닥을 쪼개며 로간의 어깨를 스쳤고, 밀려 넘어진 로간의 쇄골 위로 하인츠의 푸른빛 마력 단도가 서슬 퍼렇게 내려앉았다. 뒤편 바닥에는 처장실에서 모든 전의를 잃고 끌려온 말콤이 벽을 등진 채 넋 나간 얼굴로 웅크려 떨고 있었다.

하인츠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굳어졌다. 푸른 칼날을 쥔 손끝에 파리한 힘이 들어갔지만, 단도는 더 이상 로간의 눈꺼풀로 파고들지 못했다.

“헛소리다. 학부 낙제생 따위의 입놀림에 내가 흔들릴 것 같으냐? 총대주교 예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성물이다. 성도의 파멸을 지맥 깊은 곳으로 가라앉히고, 아카데미의 원전 좌표를 바티카의 성채 아래로 끌어올리는 엄연한 치환식이야!”

하인츠가 윽박지르듯 소리쳤지만, 목소리 끝자락은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시선은 이미 제단 우측 홈에 처박힌 양각 열쇠판의 밑동으로 쏠려 있었다. 붉게 물든 신성 문장들이 마치 살아 있는 핏줄처럼 맥동하며 바닥의 은박 회로를 타고 퍼져나가는 광경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로간이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눈에 맺힌 푸른 빛줄기가 열쇠판 바닥을 예리하게 겨냥했다.

“그 열쇠판 최하단, 바티카의 삼각 관류 문양 바로 아래에 박힌 총대주교의 낙인. 그것은 축성 인장이 아닙니다. 인과 치환이 완료되는 순간, 열쇠판에 고인 모든 지맥의 반작용을 시전자의 심장으로 뿜어내도록 설계된 일회용 기폭관입니다.”

벽가에 웅크리고 있던 말콤의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 속을 파고들었다. 이미 위층에서 자신이 버려진 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말콤은, 하인츠마저 같은 함정에 빠졌다는 로간의 지적에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아무런 말도 얹지 못했다.

하인츠가 단도를 쥔 채 제단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의혹은 순식간에 독기 어린 공포로 번져 나갔다. 그가 황급히 왼손을 뻗어 양각 열쇠판에 주입하던 마나를 거두려던 찰나, 로간의 서늘한 경고가 귓전을 때렸다.

“손을 떼지 마십시오, 처장님. 그 순간 당신의 흉곽 안쪽부터 타들어 갈 테니까.”

하인츠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낙인에 엮인 조건문은 단 하나입니다. ‘흐름이 멈출 때 잔여 마나를 모조리 회수하여 시전자의 피를 불태운다.’ 당신이 지금 회로를 끊으면, 그 즉시 기폭관이 터져 심장이 잿더미로 변합니다. 끝까지 밀어붙여도 소각되고, 손을 떼도 타 죽는 외통수입니다. 교황청은 애초에 당신에게 살아서 추기경관을 쓸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하인츠의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손을 뗄 수도, 그렇다고 마나 주입을 계속할 수도 없는 끔찍한 구속에 묶여 버린 원로 교수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 빈틈을 로간은 놓치지 않았다.

하인츠의 칼날이 미세하게 흔들린 순간, 로간은 바닥을 구르며 몸을 일으켰다. 신경을 갉아먹듯 어깨를 짓누르던 하인츠의 마력 파편을 털어내며 왼쪽 눈의 시야를 제단의 왜곡된 회로에 집중했다.

“로간!”

제단 계단 아래쪽에서 펠릭스의 고함이 터졌다.

거대한 수호 골렘의 석재 팔뚝을 방패로 간신히 쳐낸 펠릭스가 피투성이가 된 어깨로 바닥을 굴렀다. 펠릭스는 부서진 방어벽 파편 하나를 쥐어짜듯 집어 들어, 제단 위에서 망설임 끝에 로간의 목을 향해 단도를 내리꽂으려던 하인츠의 손목을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던졌다.

쐐애액!

날카롭게 회전하며 날아간 석재 파편이 하인츠의 단도 칼날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챙강!

불꽃이 튀며 마력 단도가 허공으로 높게 튕겨 나갔다. 단도는 제단 바닥에 박히며 푸른빛을 잃고 부러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하인츠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기폭관의 위협 때문에 양각 열쇠판에서 왼손을 완전히 떼지 못한 채, 그는 오른손을 치켜들어 품속에서 붉은 두루마리를 짓이겨 터뜨렸다.

“퇴로는 없다! 네놈들이 진실을 알든 모르든, 여기서 살아서 나갈 놈은 아무도 없다!”

붉은 두루마리가 터지며 뿜어낸 피비린내 나는 마력이 제단 사방의 벽면으로 뻗어나갔다. 외벽을 지키던 침식된 수호 골렘 세 닢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일제히 제단의 유일한 출입로인 계단을 가로막아 섰다. 벽면 전체에 학살을 위해 조율된 살상 결계진이 핏빛 그물처럼 얽히며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완전히 폐쇄했다.

그와 동시에 베로니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욱한 먼지를 뚫고 울려 퍼졌다.

“펠릭스, 숙여!”

베로니카가 허리띠에서 뽑아낸 주석서의 두꺼운 갈피를 거칠게 뜯어 공중에 흩뿌렸다. 깃펜 끝에서 뿜어진 은빛 먹물이 양피지 조각들과 맞물리며 거대한 연막성 주석 결계를 폭발시켰다. 자욱한 먹빛 안개가 제단 상부를 순식간에 뒤덮으며 하인츠와 수호 골렘들의 시야를 단번에 차단했다.

“콜록! 멍청한 것들, 이 안개 따위로 내 결계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인츠가 고함을 지르며 맹목적으로 살상 광탄을 난사했다. 붉은 마력탄들이 연막 속을 찢으며 바닥을 파괴했지만, 이미 로간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로간은 어깨를 스친 마력의 잔해를 털어내며 자세를 낮췄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찌릿한 통증이 덮쳐왔지만 주저할 틈은 없었다.

안갯속에서 바닥을 더듬던 로간의 오른손 끝에 차갑고 각진 금속의 감촉이 걸렸다.

처장실 금고에서 회수해 온 음각 열쇠판이었다.

“베로니카 선배! 펠릭스!”

로간이 쉰 목소리로 외치며 품속의 음각 열쇠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저 양각 열쇠판에 이 음각 판을 꽂아 넣어야 합니다. 자폭 회로를 멈추고 인과 치환을 강제로 끊어내려면 두 판석을 맞물려 문맥 자체를 파쇄해야 합니다!”

연막 너머에서 펠릭스가 방패를 다시 고쳐 쥐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베로니카의 서늘한 대답이 메아리쳤다.

“길은 내가 연다. 망설이지 말고 꽂아 넣어!”

로간은 왼쪽 눈의 푸른 인과선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붉은 광탄이 빗발치는 제단 중심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양각 열쇠판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붉은 번개가 제단 바닥을 사납게 짓이겼다.

지맥의 억눌린 마력이 거꾸로 솟구치며 돌가루와 유황 냄새를 한꺼번에 뿜어냈다.

“닥쳐라, 낙제생 놈이 감히!”

하인츠가 피에 젖은 양각 판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나머지 한 손을 뻗어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솟구친 핏방울이 공중에서 다섯 갈래의 진홍빛 송곳으로 굳어졌다.

학사처장의 법복 안쪽에서 흘러나온 흑마법의 기운이 사혈 송곳에 엉겨 붙었다.

“네놈의 눈깔을 도려내 이 판석에 박아 넣으면 모든 게 끝난다! 헛소리로 교황청의 안배를 모함하려 들지 마라!”

진홍빛 송곳 다섯 개가 음속을 넘나드는 속도로 로간의 안면을 향해 쏘아졌다. 공기가 타들어 가는 비명이 귀를 찔렀다. 로간의 시야에서 푸른 인과선이 송곳의 궤적을 짚어냈지만, 찢겨 나간 어깨의 통증 탓에 몸을 완전히 비틀기 어려웠다.

그 궤적 한가운데로 거대한 쇳덩이가 끼어들었다.

콰앙!

귀청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펠릭스의 사각 룬 방패가 피의 송곳을 받아냈다. 송곳의 날카로운 끝이 두꺼운 강철판을 뚫고 들어가 펠릭스의 팔뚝을 스쳤지만, 펠릭스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교수님!”

펠릭스가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어깨에서 찢겨 나간 족쇄의 흉터 위로 푸른 마력이 끓어올랐다.

“결계학 기초 원론 4장에서 가르치셨잖습니까! 방출구가 닫힌 결계 핵에 마력을 강제로 밀어 넣으면 반작용은 시전자의 명치로 꽂힌다고요! 저 양각 판의 룬은 교황청이 당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건방진 패배자 놈이 어디서 훈계질이냐!”

하인츠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며 더 많은 피를 뿜어냈다. 수십 개의 핏빛 화살이 제단 전체를 뒤덮으며 펠릭스의 방패를 난타했다. 강철판이 우그러지고 불꽃이 튀었다. 펠릭스의 무릎이 바닥으로 꺾여 들어갔다.

그 틈을 타 뒤편에 엎드려 있던 말콤이 몸을 일으켰다.

말콤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성도 감사관의 황금 문양패를 꺼내 들었다. 교황청에서 내려준 권한의 증표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하인츠! 네놈이 멋대로 소각식을 발동하면 나까지 죽는단 말이다!”

말콤이 감사관 패를 제단 오른쪽 마력 회로를 향해 집어던졌다.

황금패에 새겨진 성스러운 각인이 바닥의 붉은 회로와 부딪치며 거센 섬광을 일으켰다. 치환 마법진의 우측 배선 하나가 타닥거리며 단락을 일으켰고, 하인츠가 쏘아 보내던 피의 화살 절반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이 빌어먹을 감사관 쥐새끼가!”

하인츠의 시선이 흔들렸다. 마력의 흐름이 한순간 흐트러진 그 틈을 놓칠 베로니카가 아니었다.

“로간, 지금이야!”

베로니카가 양손으로 펼쳐 든 주석서에서 은빛 활자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깃펜이 공중을 가르며 신성어의 문맥을 다시 썼다.

“문장의 주어를 강제로 결속한다. 역류의 대상은 판석 자신이다!”

은빛 문장들이 사슬처럼 엮이며 로간의 왼손에 쥐어진 음각 열쇠판을 휘감았다.

로간은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 귓가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왼쪽 눈은 오직 제단 중앙에서 회전하는 양각 열쇠판의 십자 홈만을 응시했다.

푸른 인과선이 허공에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하인츠가 뒤늦게 반대편 손을 뻗어 마력탄을 쏘아 올리려 했지만, 펠릭스가 방패를 던져 그의 팔목을 찍어 눌렀다.

“가, 로간!”

로간은 전신의 체중을 실어, 은빛 문맥이 감긴 음각 열쇠판을 양각 열쇠판의 붉은 십자 홈에 그대로 짓이겨 박았다.

쩌저적!

금속과 석판이 맞부딪히며 살을 에는 굉음이 지하 공동을 뒤흔들었다.

음각의 홈과 양각의 돌기가 완벽하게 맞물렸다.

두 판석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뿜어져 나오던 붉은 지맥 폭류가 단번에 멎었다. 하인츠가 허공에 띄워 두었던 피의 마법진들이 유리창 깨지듯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안 돼! 내 추기경 좌석이! 내 거래가!”

하인츠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기폭관 역할을 하던 양각 판의 마력 순환이 음각 판의 정정 문맥에 가로막히자, 누적되었던 역류의 충격이 고스란히 하인츠의 마나 회로를 찢어발겼다. 하인츠는 경련하며 제단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로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결합된 두 열쇠판을 내려다보았다.

양각과 음각이 맞물리자, 감춰져 있던 바닥 면의 진짜 신성 문장들이 푸른빛을 띠며 떠올랐다. 금고에서 보았던 문맥의 뒷장, 그리고 교황청이 감추려 했던 진정한 인과의 전말이었다.

로간의 왼쪽 눈이 활자들을 훑어 내렸다. 활자 하나하나가 심장에 박히듯 무거운 진실을 토해냈다.

“이건…”

로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베로니카가 주석서를 거두며 다가왔고, 피투성이가 된 팔을 감싸 쥔 펠릭스와 넋이 나간 말콤도 제단 위로 시선을 돌렸다.

“바티카 지하의 제1원전이 폭주한 건 마력 제어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로간이 맞물린 판석의 마지막 조항을 가리켰다.

“교황청 놈들이 원전을 태운 건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태초의 예언서가 기록한 자신들의 죄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말콤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바르도 학인! 성도에서 그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여기 적혀 있습니다, 감사관님.”

로간이 서늘한 눈빛으로 말콤을 응시했다.

“신들이 남긴 태초의 예언서에는 교황청이 권력을 잡기 위해 조작한 신탁의 원본과, 교단의 성립 자체가 거대한 날조였다는 진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록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제1원전에 불을 질렀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길이 커지자 그 재앙을 이곳 루미나리스의 원전 보관소와 맞바꿔 통째로 묻어버리려 한 겁니다.”

하인츠가 성도로부터 약속받은 추기경 좌석은 학원을 팔아넘긴 대가가 아니라, 교황청의 거대한 치부를 함께 묻어버릴 무덤의 팻말에 불과했다.

진실이 제단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바로 그때였다.

쿵!

지하 최심부 바닥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인과 치환의 자폭 회로는 멈췄지만, 두 열쇠판이 강제로 맞물리며 발생한 막대한 신성어 간섭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제단 뒤편,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태초 원전 예언서 영구 보관소의 외벽 대문이 비명을 질렀다.

끼기긱, 콰아앙!

청동 대문에 새겨져 있던 고대 봉인식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거대한 두 짝의 문이 틈을 벌리며 안쪽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갔다.

봉인이 풀린 어둠 속에서,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는 차갑고 순수한 신성 광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푸른 광휘가 제단 바닥의 돌들을 하얗게 표백했다. 공기 중에 떠돌던 그을음과 쇳가루 냄새가 순식간에 날아가고, 서릿발 같은 냉기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얼어붙는 통증이 번졌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막아야 해!”

베로니카가 허리춤의 주석서를 펼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하인츠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찢겨 나간 소매 사이로 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노인의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하인츠는 비틀거리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틈이 벌어진 청동 대문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놓칠 수 없다! 원전의 본체만 손에 넣는다면…… 바티카든 제국이든 내 발밑에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어!”

하인츠의 발밑에서 붉은 마나의 파편들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마나 회로가 찢긴 상태에서도 억지로 쥐어짠 살혈의 동력이었다. 그 반작용으로 살갗이 터져 나가며 피보라가 튀었지만, 그는 통증조차 잊은 채 보관소 안쪽의 중앙 제단을 향해 쇄도했다.

“저 미친 노인네가 끝까지……!”

펠릭스가 짓무른 팔을 뻗어 바닥을 내리쳤다. 바닥에 새겨진 방어 룬 회로가 뒤집히며 돌바닥에서 솟구친 암석 기둥 세 개가 하인츠의 진로를 틀어막으려 했다.

콰앙!

하인츠는 멈추지 않았다. 품속에서 꺼낸 원로 처장의 은제 인장을 바위에 그대로 들이받아 부수며 억지로 길을 뚫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은제 인장이 박살 나며 뿜어낸 충격파가 펠릭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펠릭스, 무리하지 마!”

베로니카가 깃펜을 허공에 휘두르며 주석서의 페이지를 뜯어냈다. 흩날리는 양피지 조각들이 공중에서 굳어지며 하인츠의 양 발목을 향해 날카로운 사슬 형태로 얽혀 들었다.

“정정 조항 제사조, 구속 대상의 이동 궤적을 영점으로 한정한다!”

사슬이 하인츠의 발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진 하인츠가 바닥을 긁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이미 보관소 중앙, 흑요석 좌대 위에 놓인 거대한 고문서를 향해 뻗어 있었다.

보관소 내부는 지상보다 서늘했다. 원형으로 둘러선 여덟 개의 기둥 위로 신성어 문장들이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중앙 좌대 위에는 가죽 장정조차 삭지 않은 거대한 예언서가 영겁의 침묵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은 문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꺾이게 만들 만큼 무거웠다.

하인츠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책장 모서리를 움켜쥐려 했다.

“내 것이다…… 이 루미나리스의 원전만 바티카로 가져가면……!”

그 손가락이 책 표면에 닿기 직전, 로간이 성큼 다가와 하인츠의 손목을 짓밟았다.

오도독,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인츠의 입에서 헐떡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놓아라, 건방진 낙제생 놈이……!”

“추기경 좌석은 애초에 당신 몫이 아니었습니다, 처장님.”

로간은 안경을 밀어 올리지도 않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발밑의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눈 속에서 타오르는 금빛 문자들이 하인츠의 온몸을 얽어매고 있는 마나 흐름을 낱낱이 해체해 보여주고 있었다.

어깨 관절 깊숙한 곳, 펠릭스에게 새겼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역류형 룬 핵이 붉은빛을 뿜었다. 교황청이 심어둔 일회용 기폭 장치였다.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리는 말이었습니다. 바티카는 당신에게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어요. 이 보관소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의 심장을 터뜨려 자폭의 불씨로 쓸 계획이었을 뿐입니다.”

“거짓말 마라! 총대주교 성좌의 직인이 찍힌 서약서가 내 품에……!”

“그 직인은 성좌의 문장이 아니라, 폐기 대상에 찍는 소각 낙인입니다.”

로간이 낮게 읊조리며 왼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맺힌 신성어의 획이 하인츠의 쇄골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주어 말소.”

치지직!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하인츠의 어깨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던 룬 핵이 완전히 부스러졌다. 마나 회로의 강제 결속이 끊겨 나가자, 하인츠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노인은 저항할 동력을 완전히 잃은 채 차가운 흑요석 바닥에 뺨을 대고 늘어졌다.

“끝났습니다.”

로간이 숨을 고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뒤따라 들어온 베로니카가 하인츠의 양손에 봉마 족쇄를 채웠고, 말콤은 보관소 입구 문틀을 붙잡은 채 넋이 나간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빼돌리려 했던 성물이 눈앞에 있었지만, 이미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비틀거리며 좌대 옆으로 다가왔다.

“이게…… 우리 학부가 지켜왔다는 태초 원전 예언서인가요?”

펠릭스의 떨리는 목소리에 베로니카도 고개를 들었다. 주석서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학부의 전설로만 내려오던 원전. 신성 언어로 기록된 세계의 청사진이자, 제국의 모든 재앙과 구원의 궤적이 적혀 있다는 운명의 책이었다.

로간은 조심스럽게 좌대 앞으로 다가섰다.

책은 펼쳐져 있었다. 성스러운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두꺼운 양피지 뭉치. 그러나 그 빛의 중심을 바라보던 로간의 왼쪽 눈이 날카롭게 수축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책장의 배열이 어긋나 있었다. 거대한 책의 가장 앞부분, 마땅히 존재해야 할 신성어의 머리말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칠고 서늘한 공백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간이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책장의 안쪽 경계면을 매만졌다.

손끝에 닿은 것은 자연스러운 양피지의 질감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칼날로 단번에 그어낸 듯, 반듯하고 날카로운 절단면이었다.

“선배.”

로간의 부름에 베로니카가 다가왔다. 좌대 위를 내려다보던 베로니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책의 제1장. 세상의 멸망과 그 기원을 명시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대한 서두 열두 장이 통째로 잘려 나가고 없었다. 남겨진 절단면의 모서리는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누렇게 바래 있었고,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고대의 봉인 속에서 그 단면만이 흉터처럼 굳어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인츠가 그 광경을 보고 핏물을 토해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 설마…….”

로간이 절단면 아래쪽에 굳어 있는 말라비틀어진 인장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번에 하인츠가 파괴하려 했던 지맥 흔적도, 바티카의 최신 공문서 인장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아카데미가 세워지기도 전에 쓰였던 형태의 미지의 낙인이었다.

“하인츠 처장, 당신이 훔치려던 예언서의 심장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누군가가 뜯어간 빈 껍데기입니다.”

로간의 서늘한 목소리가 적막한 보관소 안을 무겁게 울렸다.

교황청이 감추려 했던 치부도, 하인츠가 거래하려 했던 무기도, 이 원전 안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 재앙의 기록은 이미 아카데미의 손을 떠나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로간은 뜯겨 나간 단면에 찍힌 낯선 뱀 문양의 인장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