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으로 곤두박질쳤다.
부서진 4층 집무실 바닥 밑으로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암흑뿐이었다. 벽면을 따라 삐져나온 굵은 배관과 부러진 철골들이 날카로운 손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균열 벽면 곳곳에 엉겨 붙어 있던 보랏빛 지맥 찌꺼기들이 마찰열에 터져 나가며 매캐한 유황 냄새를 뿜어냈다.
머리칼이 거세게 뒤흔들리는 가운데, 바로 위쪽에서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어내린 펠릭스가 고함을 질렀다.
“다리 부러지기 싫으면 내 등 뒤로 붙어, 룬 족쇄 풀린 결계가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펠릭스가 껍질 벗겨진 양팔을 아래로 뻗었다. 족쇄가 타버린 살갗에서 솟구쳐 오른 주황빛 마나가 허공에서 기하학적인 다면체로 엮였다. 이전처럼 마나의 흐름을 안쪽으로 갉아먹는 반작용은 없었다. 단단하게 벼려진 결계판 세 개가 낙하 궤적 아래로 층층이 겹쳐 깔리며 거센 하강 풍압을 뚝 꺾어 놓았다.
“바람길이 아직 거칠어요!”
뒤이어 낙하하던 베로니카가 벨트에서 두꺼운 주석서를 뽑아 들었다. 펄럭이는 책장 사이로 깃펜 끝을 찔러 넣자, 잉크 방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나선형의 돌풍을 일으켰다. 위로 치솟는 기류가 펠릭스의 완충판을 받치며 낙하 속도를 완만한 활강으로 바꾸었다.
“우와아악!”
가장 늦게 몸을 던진 말콤이 사제복 자락을 펄럭이며 허우적대자, 베로니카가 깃펜을 틀어 바람 줄기로 사제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바닥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쿵, 하는 둔탁한 진동과 함께 최하단 결계가 깨지며 충격을 집어삼켰다. 연달아 두 번째, 세 번째 완충 결계가 충격을 지워내자 일행의 장화가 젖은 암반층에 미끄러지듯 닿았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중심을 잡은 로간은 곧장 코트 안주머니의 음각 열쇠판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금속판의 서늘한 냉기가 늑골을 타고 전해졌다. 온전했다.
“여긴…….”
펠릭스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은 지상 본관의 석조 양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거대한 지하 회랑이었다. 아카데미 건립 초기, 신탁의 첫 문장이 새겨졌던 시기에 지어졌다는 전설 속의 고대 통로였다. 이끼조차 자라지 못하는 검은 현무암 벽면에는 퇴색된 성유 찌꺼기가 핏자국처럼 말라붙어 있었고, 아득한 복도 끝에서는 붉은빛 섬광이 맥박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땅 밑바닥 전체가 낮게 울리는 진동. 하인츠가 먼저 도착해 의식을 시작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멈춰요.”
로간이 앞장서 달려 나가려던 펠릭스의 어깨를 잡아챘다.
“로간? 왜 그래, 시간이 없다고!”
“발밑을 봐.”
로간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본 펠릭스가 숨을 멈췄다.
매끄러워 보이던 현무암 바닥판 틈새마다 백은의 눈물과 섞인 끈적끈적한 은빛 액체가 거미줄처럼 그어져 있었다. 그 액체는 단순한 기름이 아니었다. 하인츠가 뒤쫓아오는 추격자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해 깔아둔 신성 역류 함정이었다.
로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왼쪽 눈의 시각을 최대로 개방했다.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 푸른 문장들이 빠르게 회전했다. 은빛 액체가 흐르는 궤적을 따라 공중에 투명한 신성어 명제들이 사슬처럼 얽혀 떠올랐다. 하인츠의 손글씨로 새겨진 살인 명제였다.
[이 회랑을 밟는 침입자의 생명 마나를 양분 삼아 인과를 반전하고, 그 육신을 석맥의 마찰열로 소각한다.]
“지맥 쐐기에서 쓰던 방식을 그대로 베껴 뒀군.”
로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발을 들이는 순간 침입자라는 주어에 반응해 바닥 전체가 지맥 폭류를 뿜어내도록 짜여 있어. 밟고 지나갈 틈 따윈 없다. 섣불리 마법을 쏴서 건드리면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이 회랑 전체가 무너져 내릴 거야.”
베로니카가 깃펜을 겨누며 눈살을 찌푸렸다.
“해체할 수 있겠어요? 결계의 마나 코어를 뜯어내려면 최소한 십 분은 걸릴 구조인데.”
“코어를 뜯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어만 고쳐 쓰면 됩니다.”
로간은 품에서 하인츠의 금고에서 챙겨온 잉크병을 꺼내 들었다. 백은의 눈물이 섞인 특수 먹물이었다. 잉크를 오른손 검지 끝에 듬뿍 적신 로간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함정의 감지선 바로 앞, 허공에 드리워진 얇은 인과의 실타래가 로간의 왼쪽 눈에만 선명한 붉은 획으로 잡혔다.
“침입자의 마나를 감지해 터지는 조건문이라면…….”
로간은 숨을 멈추고 검지를 내리뻗었다. 먹물이 묻은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떠 있는 신성어 명제의 첫머리, ‘침입자’라는 글자의 획을 가로질렀다.
치이익!
손끝에서 살이 타는 듯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명제를 강제로 건드리는 순간 신성 언어가 주는 압력이 손가락 뼈마디를 부러뜨릴 듯 짓눌러왔다. 로간은 이를 악물며 왼쪽 눈에 힘을 주었다. 동공 깊은 곳의 푸른빛이 먹물 궤적에 스며들며 문장의 뼈대를 강제로 비틀었다.
침입자라는 단어의 윗획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4층에서 쏟아져 내린 잔해의 문맥을 덧칠했다.
[이 회랑을 뒹구는 잔해의 충격을…….]
글자가 바뀌는 순간, 바닥을 뒤덮고 있던 은빛 액체가 차갑게 굳어지며 잿빛으로 탈색되었다. 회랑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날카로운 살기가 한순간에 흩어지며, 마나 역류의 기운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발동 조건이 사람이 아닌 굴러떨어진 돌덩이로 변조되자, 살인 함정 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문장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됐어. 지나갈 수 있다.”
로간이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옷소매로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펠릭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털었다.
“단어 하나 바꿔서 고위 함정을 쓰레기로 만들다니,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하네. 어쨌든 길은 열렸다.”
펠릭스가 앞장서 회랑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잿빛으로 죽어버린 바닥판은 거구의 체중이 실려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베로니카의 날카로운 금안이 대열 맨 뒤로 향했다.
말콤은 조금 전부터 유난히 숨소리를 죽인 채 일행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공포에 질려 다리를 저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제복 넓은 소매 안쪽으로 감추어진 오른손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옷자락 틈새로 신전 특유의 은빛 룬이 음각된 묵직한 쇠붙이, 이단 심문용 특수 구속 쐐기의 끝부분이 언뜻 드러났다.
말콤의 홀쭉한 뺨 위로 지나가는 눈빛은 더 이상 겁먹은 패잔병의 것이 아니었다. 앞서 걷는 로간의 등허리, 정확히는 음각 열쇠판이 들어 있는 코트 안쪽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말콤의 거동을 눈치채고도 당장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주석서의 페이지를 조용히 넘기며, 깃펜 끝에 묵직한 지연 결계의 획을 은밀하게 머금었다. 저 사제가 딴마음을 품고 손을 뻗는 순간 손목을 날려버릴 준비를 마친 채였다.
회랑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섬광이 내뿜는 열기가 피부를 바짝바짝 태웠다. 회랑 너머에 버티고 선 것은 아카데미가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다는 태초 원전 예언서 영구 보관소의 거대한 외벽 정문이었다.
문설주 전체를 감싼 고대 청동 부조 위로, 성도 바티카의 제1원전과 연결된 핏빛 마법진이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한가운데, 양각 열쇠판을 든 학사처장 하인츠의 뒷모습이 붉은 마나의 폭풍 속에서 일렁였다.
로간은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제단을 향해 쇄도했다.
제단 우측의 깊게 파인 홈에는 이미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양각 열쇠판이 꽂혀 있었다.
열쇠판의 양각 룬이 맞물려 돌아가자, 청동 대문에 새겨진 수천 개의 신성어들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태초 원전 예언서가 뿜어내는 푸른 안개와 성도 바티카 지하에서 길어 올린 파멸의 독기가 공중에서 엉켜 검붉은 소용돌이를 그렸다.
제단 앞에 선 하인츠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겨진 원로 교수의 법복 자락 아래로 탐욕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기어코 여기까지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왔구나, 바르도 학인. 아니, 진작에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폐기되었어야 할 낙제생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
하인츠의 오른손이 제단 위로 떠오른 붉은 궤적을 어루만졌다.
“학사처장의 권한과 신전과의 밀약, 지맥 쐐기까지 전부 네놈들이 헤집어 놓았더군. 하지만 헛수고였다. 이 문이 열리고 인과가 맞바뀌는 순간, 성도의 파멸은 이곳 아카데미의 영구 보관소로 쏟아져 내린다. 나는 교황청이 약속한 영원한 성좌로 올라서게 될 것이고.”
“바티카 지하의 제1원전이 이미 통제 불능으로 터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더군요.”
로간이 품속의 음각 열쇠판을 꽉 쥔 채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쏘아붙였다.
“그 붕괴를 학원의 무결한 원전과 맞바꿔치기하고, 아카데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 증거를 지우는 게 당신의 계획입니까? 수천 명의 학인들과 교수진을 통째로 성도의 거름으로 던져주면서?”
하인츠가 목을 젖히며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 섞인 음성이 보관소 외벽의 거대한 석조 기둥들을 때렸다.
“통제 불능의 재앙을 엉뚱한 제물에게 떠넘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들이 가르쳐준 예언의 본질이다! 제1원전의 폭주는 바티카도 막지 못해. 그렇다면 학원이 대신 삼키는 것이 순리 아니겠느냐? 더구나 내게는 그 문맥을 단단히 굳혀줄 완벽한 쐐기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다.”
하인츠의 뱀 같은 시선이 로간의 얼굴, 정확히는 얇은 안경 너머에서 푸르게 젖어 있는 왼쪽 눈으로 꽂혔다.
“네놈의 그 불경한 왼쪽 눈이야말로 바티카의 재앙을 삼키고 나를 신좌로 올려놓을 마지막 제물이다!”
로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인츠가 양손을 펼치며 제단의 붉은 마나를 움켜쥐었다.
“문장을 읽고 인과를 비틀어버리는 변종의 눈. 그것이 단순한 돌연변이인 줄 알았더냐? 그것은 태초 원전의 법칙을 현실에 강제로 새겨 넣는 유일무이한 인장이다. 그 눈깔을 적출해 저 제단 중앙 핵에 박아 넣어야만, 바티카의 파멸이 아카데미의 멸망으로 영구 불변하게 굳어지는 법!”
하인츠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거대한 청동문 좌우에 서 있던 흑요석 거상 둘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보관소를 지키던 고대 수호 골렘들이었다. 그러나 그 전신에는 이미 하인츠가 주입한 성유와 붉은 침식 문장이 혈관처럼 불거져 나와 있었다. 석상의 거대한 주먹이 맹렬한 파열음을 일으키며 로간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로간, 물러서!”
펠릭스가 제단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양팔을 옭아매던 하인츠의 족쇄 룬이 찢겨 나간 펠릭스의 피부 위로, 순수한 마나의 푸른 궤적이 그물망처럼 솟구쳐 올랐다. 펠릭스는 주저 없이 거대한 석상의 주먹 밑으로 두 손을 뻗어 올렸다.
“더는 당신이 새겨준 더러운 족쇄에 휘둘리지 않아!”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충격음과 함께 펠릭스의 방어 결계와 골렘의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발밑의 석판이 사방으로 튀며 거미줄 같은 균열을 만들어냈지만, 펠릭스의 다리는 단 한 뼘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결계 테두리가 삐걱거리며 불꽃을 튀겼으나 펠릭스는 턱에 핏대를 세우며 거상의 체중을 고스란히 버텨냈다.
“베로니카 선배, 오른쪽 녀석 궤도를 틀어요!”
펠릭스의 고함에 베로니카가 이미 품에서 펼쳐 든 두꺼운 주석서를 허공으로 던졌다.
책장이 파르르 소리를 내며 넓게 펼쳐지는 사이, 베로니카의 은빛 깃펜이 공중의 붉은 술식을 가차 없이 빗금 쳐 갈랐다. 깃펜 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은색 마력이 다른 골렘의 무릎 관절에 박혀 있던 인과선을 정확히 끊어냈다.
“문맥 이탈, 타격 좌표는 지반으로 강제 반환!”
베로니카의 서늘한 영창과 함께 두 번째 골렘의 거대한 발길질이 허공을 헛돌며 제단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지반이 뒤흔들리며 솟구친 암석 파편들이 골렘의 흉부를 되받아쳤다.
베로니카가 로간의 등 뒤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지체할 시간 없어, 로간! 놈의 헛소리에 일일이 대꾸해 줄 여유 따윈 없다! 저 양각 열쇠가 제단의 핏빛 마법진을 한 바퀴 다 채우기 전에 중앙 핵을 찔러!”
골렘 두 마리가 펠릭스와 베로니카의 결계에 묶여 허우적거리는 틈새로, 제단 중앙으로 통하는 좁은 직선 경로가 열렸다.
로간은 품속에서 차갑게 요동치던 음각 열쇠판을 꺼내 들었다.
제단에 박힌 양각 열쇠판과 로간의 손에 들린 음각 열쇠판이 같은 핏줄을 알아본 것처럼 웅웅거리며 마나를 격돌시켰다. 손바닥을 에는 듯한 반동이 팔꿈치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로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왼쪽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제단 중앙 핵의 신성 문맥이 시야에 똑똑히 박혀 들어왔다.
[치환의 성립: 주어를 비우고 대상을 고정한다.]
그 비어 있는 주어의 자리에 하인츠는 로간의 눈을 짓이겨 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음각 열쇠판의 문장을 먼저 때려 박아 인과 역전의 획을 그어 넣어야 했다.
로간이 제단 중앙의 홈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그 바로 뒤편, 파편의 그림자 속을 조용히 기어오던 말콤의 눈동자가 차갑게 뒤틀렸다. 사제복 소매 깊숙한 곳에서, 신전 특수 쐐기의 날카로운 은박 끝이 살기 어린 궤적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쐐기 끝이 바람을 찢었다.
제단 중앙 홈에 음각 열쇠판을 밀어 넣으려던 로간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순간, 왼쪽 견갑골 안쪽으로 차가운 쇠붙이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푸욱,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살점이 짓이겨졌다.
“크윽!”
폐부가 찌그러지는 듯한 격통에 숨이 단번에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균형을 잃은 로간의 몸이 제단 바닥으로 처박혔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음각 열쇠판이 미끄러져 돌바닥 위를 챙그랑거리며 굴렀다.
로간의 등을 짓누른 것은 거친 가죽 장화였다. 말콤이 부러진 감식봉 속에서 뽑아낸 신전 특수 구속 쐐기를 두 손으로 쥐고 로간의 어깨뼈를 바닥에 박아 넣듯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고 있었다. 쐐기 표면에 새겨진 신성 은박이 로간의 마나 통로를 사정없이 틀어막으며 핏줄을 태웠다.
“로간!”
저 멀리서 골렘의 팔을 결계로 쳐내던 펠릭스의 경악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베로니카가 깃펜을 허공에 그으며 방향을 틀려 했으나, 빗나갔던 석상의 거수가 다시 바닥을 내리치며 둘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암반이 무너지며 자욱한 석회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말콤은 짓밟힌 로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제단 상층부를 향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하인츠를 올려다보았다.
“처장님! 보시다시피 방해꾼은 제가 확실히 묶었습니다!”
말콤의 목소리는 탐욕으로 가늘게 떨렸다.
“약속대로 저를 성도로 데려가 주셔야 합니다. 감사관 직위 따위는 버려도 좋습니다. 바티카 중앙 추기경단의 수석 비서관, 그 한 자리면 충분합니다! 원전 보관소의 결계를 완성하려면 저놈의 눈이 온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바쳤습니다!”
제단 우측, 양각 열쇠판의 붉은 회로를 조율하던 하인츠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기특하군, 말콤 감사관. 교황청의 사냥개인 줄만 알았더니, 주인을 갈아치우는 솜씨가 제법 쓸 만해.”
하인츠가 계단을 천천히 밟고 내려왔다. 품속에서 꺼내 든 마력 단도의 푸른 칼날이 지맥의 붉은빛을 받아 번뜩였다. 날끝이 향한 곳은 바닥에 짓눌려 피를 토하는 로간의 왼쪽 얼굴통이었다.
“그래. 이 보관소의 인과를 저 바티카의 제1원전과 완전히 맞바꾸려면 마침표가 필요하지. 문맥을 통째로 현실에 결속시키는 저 괴물 같은 왼쪽 눈. 저것만 도려내어 양각 열쇠의 중심 홈에 박아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인츠의 장화가 로간의 코앞에 멈춰 섰다. 단도의 서늘한 칼끝이 로간의 왼쪽 눈꺼풀 바로 위를 겨누었다.
피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어깨를 꿰뚫은 쐐기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로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터져 나오는 핏물을 바닥에 뱉어내며, 화염처럼 타오르는 왼쪽 눈의 초점을 단도가 아닌 하인츠의 등 뒤, 제단 홈에 깊숙이 박힌 양각 열쇠판에 고정했다.
문장이 보였다.
하인츠의 마나를 빨아들이며 회전하는 붉은 각인들. 그 껍데기는 성도 바티카의 파멸을 아카데미로 전가하는 인과 치환식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교황청 총대주교의 비문, 가장 밑바닥에 극소형으로 새겨진 신성어 구문의 뼈대가 왼쪽 눈의 시야 속에서 하나씩 해체되어 드러났다.
로간의 입술 사이로 낮고 메마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인츠가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칼끝이 로간의 눈꺼풀 살갗을 찔러 핏방울을 맺히게 했다.
“죽음을 앞두고 실성했나, 낙제생?”
“하인츠 처장님.”
로간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왼쪽 눈동자 속의 푸른 인과선이 양각 열쇠판의 심장부를 관통하며 강하게 박동했다.
“교황청이 당신에게 쥐여준 그 양각 열쇠는 구원의 패가 아니라 성도와 당신을 통째로 지워버릴 자폭 장치입니다.”
정적이 제단을 갈랐다.
골렘을 밀어붙이던 펠릭스의 거친 숨소리와 베로니카의 깃펜이 석판을 긁는 소리마저 멎은 듯 공간이 굳어졌다.
말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인츠의 손끝 역시 미세하게 굳었다.
“헛소리로 시간을 벌 셈이냐. 치환식은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바티카의 파멸은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어!”
“치환식의 주어를 보십시오.”
로간은 어깨를 꿰뚫은 쐐기의 고통을 씹어 삼키며, 피투성이가 된 턱을 들어 올렸다.
“문장의 앞머리는 ‘치환한다’이지만, 귀결절에 붙은 조건은 ‘소각한다’입니다. 교황청 총대주교의 직인이 찍힌 진짜 목적어는 아카데미의 원전 보관소만이 아닙니다. 열쇠판을 가동한 시전자 본인,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바티카 제1원전 주변의 하층민 수십만 명까지 지맥의 연료로 일괄 지정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말콤이 사색이 되어 발에 주던 힘을 풀었다.
“바티카는 제1원전의 폭주를 수습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로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제단 바닥을 울렸다.
“그들은 폭주하는 원전의 불길을 아카데미로 넘기는 척하면서, 이곳과 성도 하층부 전체를 지맥의 영구 소각 룬으로 묶어 통째로 날려버릴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폭주도 멈추고, 자신들의 과오도 묻히고, 당신이라는 위험한 거래 상대도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니까요. 당신이 얻을 추기경 좌석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인츠의 얼굴에서 여유가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충격과 의혹이 뒤섞인 눈동자가 단도를 쥔 손을 떠나, 제단에서 불길하게 웅웅거리는 양각 열쇠판으로 사납게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