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서관의 사서 · 총 3화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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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박힌 마석 조명의 푸르스름한 빛이 깜빡거리며 사그라들었다.

렌은 손바닥 위에 머물던 푸른 불꽃의 숨을 조용히 거두었다. 불씨가 꺼지자 지하 서고의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 내렸다. 곰팡이 핀 양피지 냄새와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먼지의 텁텁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은 마도서는 이제 아무런 빛도 내뿜지 않았다. 표면에 새겨졌던 보랏빛 상형문자 역시 돌에 새긴 음각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책장을 만졌던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바늘로 찌르는 듯한 얼얼함이 남아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렌은 안경을 벗어 옷소매로 렌즈를 닦았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지하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 쪽에서 찬 공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폐기 마도서관은 지표면에서 까마득히 내려앉은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어 계절의 변화조차 닿지 않았지만, 상층부의 결계가 주간 순환으로 전환될 때면 늘 특유의 비릿한 오존 냄새가 환기구를 타고 내려왔다.

서둘러야 했다. 마도서를 품에 넣고 겉옷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두꺼운 양모 코트 안쪽에 책의 모서리가 갈비뼈를 짓눌렀지만, 이 묵직한 이물감만이 그가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닻이었다.

그가 바닥에 흩어진 낡은 목판본 두 권을 서가에 도로 꽂아 넣으려던 찰나였다.

끼이익.

수년간 기름칠 한 번 하지 않은 거대한 석문이 마찰음을 내지르며 밀려 열렸다. 경첩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서고의 높은 천장을 타고 메아리쳤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폐기 마도서관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낙오자들의 유배지였고, 교수들이나 학생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은 죽은 공간이었다.

렌은 서가 뒤편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반쯤 숨긴 채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발소리는 규칙적이고 가벼웠다. 밑창이 단단한 가죽 장화가 화강암 계단을 또각또각 두드렸다. 흐트러짐 없는 보폭, 망설임 없는 진입.

어스름한 서고 입구로 먼저 들어선 것은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정교하게 재단된 감청색 아카데미 정복, 옷깃에 금실로 수놓인 세 줄의 덩굴 문양. 엘도리아 아카데미의 수석 학생만이 착용할 수 있는 견장이 어두운 실내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엘리시아였다.

그녀의 손에는 표준 감응석이 달린 황동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나침반 중심의 푸른 보석이 나직하게 웅웅거리며 렌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바늘을 떨고 있었다.

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부러 낡은 깃털 먼지털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둔한 사서처럼, 허리를 굽히고 서가 하단의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잿빛 먼지가 허공으로 부옇게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엘리시아가 소매로 코를 가리며 걸음을 멈췄다. 푸른 눈동자가 서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렌의 등을 매섭게 훑었다.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하시네요, 사서님."

목소리는 맑았지만 칼날처럼 서늘했다.

렌은 짐짓 놀란 척 몸을 돌리며 낡은 안경을 코끝에 걸쳤다. 멍청해 보일 정도로 굼뜬 동작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학생이었습니까. 먼지가 많아서 문을 닫아두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여긴 폐기 처리된 서적들만 모아둔 곳이라 학생 열람은 금지되어 있을 텐데요."

엘리시아는 렌의 대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나침반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보석 안의 마력 침이 요동치며 렌의 가슴패기, 정확히는 그가 품속에 숨겨둔 마도서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렌에게 세 걸음 더 다가왔다. 장화 굽 소리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서고의 가라앉은 공기가 잘게 흔들렸다.

"금지 구역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확인이라니요?"

"새벽녘에 아카데미 외곽 결계를 스친 파동이 있었습니다. 공식 마법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장인데, 사서님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엘리시아의 시선이 렌의 창백한 얼굴과 깃털 먼지털이를 쥔 손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렌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파동이라니요. 저는 아카데미 결계 같은 거창한 건 잘 모릅니다. 시험에서도 낙제해서 이 지하로 쫓겨난 몸이니까요. 방금 전까지는 그냥…… 서가 구석에 쥐가 갉아먹은 종이 찌꺼기를 치우고 있었습니다. 곰팡이가 심해서 마석 등잔도 제멋대로 꺼지더군요."

"쥐라."

엘리시아가 나침반을 쥔 손을 내렸다. 그러나 의심은 전혀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고 천장에 어지럽게 얽힌 환기용 석조 파이프와 낡은 서가들을 둘러보았다.

"외곽 결계의 경보장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순수 마력의 간섭이 분명히 기록되었습니다. 그건 공명 마법학 교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형태였어요. 삼차 원소 변환식도, 기하학적 룬 배열도 거치지 않은 채 순수한 파동만으로 결계를 울렸죠. 아카데미 안에서 그런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원로 교수는 없습니다. 존재해서도 안 되고요."

그녀의 말투에는 기이한 열망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규칙을 어긴 자를 잡아내려는 감시자의 태도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해답의 단서를 목격한 연구자의 집착에 가까웠다.

렌은 품속의 마도서가 피부에 닿는 감각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서가에 기댔다.

"글쎄요. 아카데미의 훌륭한 마법 이론에 나오지 않는 거라면, 그저 환기구로 새어 나간 마석 찌꺼기의 폭발 잔향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지하 수로에서 부패한 가스가 역류할 때도 있으니까요. 수석 학생께서 그런 잡다한 사고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사서님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엘리시아가 렌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반 보에 불과했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라벤더 향과 함께 날카롭게 벼려진 상급 마력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규격화된 마법식 외에는 전부 잡음이나 사고로 치부하는 것. 그게 지금 아카데미가 썩어가는 방식이죠. 교수들은 책에 적힌 공식 한 글자만 틀려도 이단이라 몰아세우지만, 정작 그 공식들이 왜 작동하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해요. '대침묵' 이전의 기록은 전부 불태워버렸으니까."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렌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런데 방금 전 그 파동은…… 살아 있었어요. 죽은 기호들을 억지로 꿰어 맞춘 가짜가 아니라."

렌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마른침을 넘겼다. 엘리시아의 통찰은 예상보다 훨씬 예리했다. 그녀는 단순히 침입자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우고 있는 마법의 껍데기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마도서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탐구의 기회가 아니라 즉결 처분뿐이었다. 칼릭스를 위시한 아카데미 평의회는 경직된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서고 전체를 불태우는 것도 서슴지 않을 자들이었다.

"수석 학생."

렌이 목소리를 낮추며 안경 너머로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평소의 어리숙한 표정 밑으로 서늘한 침묵이 비쳤다.

"지하 서고는 위험한 책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답을 찾으려다가 질문 자체가 죄가 되는 법이지요. 더 머무르시면 제가 규정 위반으로 상급 사서실에 보고해야 합니다."

엘리시아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그녀가 입을 열어 렌의 허술한 방어를 다시 한번 파고들려던 순간이었다.

타악. 타악.

계단 위,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무거운 지팡이가 바닥을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데미 정식 교수의 지팡이에 박힌 은제 고리가 부딪히며 내는 특유의 금속성 파열음. 그 규칙적이고 고압적인 박자는 서고의 공기를 일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그림자 속에서 칼릭스 교수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곧게 재단된 짙은 남색 교수복 위로 은색 학장 보좌관 휘장이 번쩍였다. 그의 손에 들린 흑단 지팡이 끝에는 세 개의 은제 고리가 매달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이른 아침부터 쥐새끼처럼 서고 구석을 뒤지는 자들이 누구인가 했더니."

칼릭스의 시선이 먼저 엘리시아에게 닿았다. 짙은 회색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자리가 오만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규정된 수업 시간 전에 허가도 받지 않은 폐기 서고를 배회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엘리시아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평소의 당당함 위에 예의라는 얇은 막을 씌운 태도였다.

"수석 연구 과제인 제3결계의 마력 손실률을 검증하던 중이었습니다. 중앙 정원의 결계 지표가 지하 통로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배출구를 확인하러 내려왔을 뿐입니다."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재주는 늘었군."

칼릭스는 콧방귀를 뀌며 지팡이로 바닥을 짓이겼다.

탁.

석재 바닥이 메마르게 울렸다. 칼릭스의 시선이 서가 구석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렌에게로 옮겨갔다. 렌의 낡은 사서복에 묻은 하얀 책 먼지와 삐뚤어진 안경을 훑어내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너. 렌이라고 했나."

"예, 칼릭스 교수님."

렌은 안경테를 슬쩍 밀어 올리며 고개를 반쯤 숙였다. 아카데미의 모든 교직원이 기억하는 쓸모없고 무기력한 폐기물 관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서고 결계의 기록 장치에 잡음이 찍혔다. 상급 마법사가 의도적으로 외벽을 두드린 듯한 파동 흔적이었지. 허가되지 않은 마력의 방출은 학칙 제12조에 의거한 중대 위반이다. 규율에서 벗어난 변칙은 마법이 아니라 오염일 뿐이다. 마법 재능조차 없는 사서에게 그런 잡념은 과분하겠지. 책장 사이에 쌓인 먼지나 쓸 줄 아는 놈이 대체 서고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통로의 쥐덫을 확인하고 서적 목록을 정리하던 중이라…… 결계의 신호 같은 고차원적인 현상은 알지 못합니다."

렌이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품속으로 파고드는 찬 기운을 견뎠다. 가슴 안쪽에 숨겨둔 검은 마도서가 칼릭스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온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칼릭스는 렌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지팡이를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지팡이 머리에 박힌 투명한 육각 마석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지. 아카데미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물은 그 자리에서 태워 없애는 것이 교조의 원칙이다."

칼릭스가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드러나라, 정합(整合)의 눈이여."

지팡이 끝에서 날카로운 파란색 광선 서너 줄기가 뻗어 나와 바닥을 기어가듯 퍼져나갔다. 아카데미가 이단 마법이나 미등록 마석을 적발할 때 사용하는 정밀 탐색 술식이었다. 광선은 공기 중에 흩어진 마력의 결을 격자무늬로 잘라내며 책장과 바닥, 그리고 렌의 발밑을 향해 빠르게 조여들었다.

렌의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번졌다. 저 격자가 가슴팍에 닿는 순간, 품속의 마도서가 품고 있는 순수한 파동이 터져 나올 터였다. 현대 마법식의 잣대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살아 숨 쉬는 상형문자의 잔향이.

그때, 엘리시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구둣발이 탐색 광선의 한 갈래를 정확히 밟아 뭉갰다.

"교수님. 그 탐색 술식은 공간의 균일성을 전제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폐기 서고의 마석 조명들은 이미 수명이 다해 불안정한 맥동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런 조잡한 간섭파 속에서 지팡이를 과부하시키면, 학술원 본관의 동조석까지 균열이 갈 텐데요."

칼릭스의 눈썹이 팍 꺾였다. 자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토를 다는 제자의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한층 서슬 퍼레졌다.

"건방지구나, 엘리시아! 감히 학장의 보좌관이자 이론학 주임인 내게 술식의 정합성을 논하려 드는 것이냐? 규격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악이다. 설령 그것이 낡은 조명에서 나온 잡음이라 해도 철저히 박멸해야 마땅하다!"

칼릭스가 엘리시아를 쏘아보며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팡이 끝의 육각 마석이 붉은빛으로 전환되며 출력을 높이려던 찰나였다.

칼릭스의 시선이 엘리시아에게 쏠린 그 찰나의 틈.

렌은 손가락 끝을 바지 솔기 안쪽으로 가만히 밀어 넣었다. 어젯밤 깨달았던 ‘연결’의 감각. 마력을 억지로 틀어쥐고 밀어붙이는 아카데미식 기법이 아니었다. 렌은 서고 바닥을 구성하는 차가운 점토벽돌의 틈새, 천장 환기구를 타고 맴도는 곰팡내 나는 바람, 그리고 칼릭스가 지팡이로 쏘아 보낸 날 선 마력의 줄기를 머릿속에서 하나의 실로 이어 붙였다.

그는 칼릭스의 마력을 거스르지 않았다.

단지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광선의 꼬투리를 살짝 잡아, 바닥 틈새를 흐르는 지하 수로의 자연스러운 수맥 쪽으로 슬쩍 방향을 틀어주었을 뿐이다. 물길이 바뀌듯,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탐지망의 초점이 렌의 가슴을 비껴가 서고 반대편의 거대한 금속 차단벽으로 흘러 들어갔다.

치직.

지팡이 끝의 육각 마석에서 신경질적인 불꽃이 튀었다. 허공을 맴돌던 탐색 격자가 차단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며 무력하게 꺼져버렸다.

칼릭스가 혀를 차며 지팡이를 거두었다. 마석에는 아무런 이물질도, 금지된 이단의 반응도 잡히지 않았다. 오직 벽 너머의 낡은 배관이 덜컹거리는 진동만이 탐지되었을 뿐이다.

"흥. 과연 쓰레기장답군. 썩은 배관의 진동 따위가 결계 중앙에 혼선을 일으키다니."

칼릭스는 헛걸음을 했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불쾌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서. 네놈의 게으름 때문에 쓸데없는 인력과 마력이 낭비되었다. 이번 주말, 학술원 감사팀을 대동해 이 버려진 서고 전체를 전수 검열하겠다. 장부와 서책의 일련번호가 하나라도 맞지 않는다면, 그 즉시 너를 탑 밖으로 추방할 것이다."

렌은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철저히 준비해 두겠습니다."

칼릭스는 침을 뱉듯 돌아섰다. 그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엘리시아에게 명령했다.

"엘리시아, 너도 당장 연구동으로 복귀해라. 다음 강의 시간까지 마력 결손에 대한 반성문 형태의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이번 학기 수석 자리는 장담할 수 없을 줄 알아라."

칼릭스의 무거운 발소리와 지팡이의 은제 고리 소리가 나선형 계단을 타고 멀어져 갔다. 지상으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서고 안에는 다시 묵직하고 서늘한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렌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손끝에는 아직도 차단벽으로 마력을 흘려보낼 때 느꼈던 서늘한 진동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계단 쪽을 등지고 서 있던 엘리시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방금 전 칼릭스의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졌던 차단벽의 틈새, 그리고 렌의 오른손 끝을 정확하게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그 간섭."

엘리시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식을 쓰지 않았어. 영창도, 손짓도 없이…… 지팡이의 궤적 자체를 비틀어버렸죠."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금 렌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두 굽이 차가운 돌바닥을 짓누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엘리시아는 단 두 걸음 거리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렌은 낡은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책 먼지가 묻은 코트 자락을 털어냈다. 언제나처럼 둔하고 맥없는 사서의 태도였다.

"무력화라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가씨. 지하는 석회암 틈새로 지하수가 흘러 늘 습합니다. 배관을 타고 흐르는 정전기가 마침 지팡이 끝의 잔류 마력과 맞물려 접지가 튄 것뿐이지요. 3백 년도 더 된 건물이라 이런 오작동은 흔합니다."

"거짓말."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매끄럽고 단호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렌의 오른손 끝을 못 박듯 응시했다.

"기초 학부 1학년이나 속아 넘어갈 변명을 내게 늘어놓지 마. 칼릭스 교수가 펼친 건 표준 4계위 식별 격자였어. 배관의 습기 따위로 결이 흐트러질 정도로 엉성한 술식이 아니야. 당신은 주문을 읊지도 않았고,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그리지도 않았어.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지팡이 끝의 파동을 잡아당겼지. 물길을 트듯, 자연스럽게."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안경알 너머로 엘리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어설픈 부인은 오히려 상대의 확신만 키울 뿐이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려 서고 구석에 쌓인 채 썩어가는 고서 더미들을 훑었다. 그녀의 턱 끝이 살짝 치켜올려졌다.

"방금 교수님의 탐지 마법을 무력화시킨 건 공식 술식이 아니었어. 당신, 도대체 이 폐기 서고 안에서 무엇을 찾아낸 거지?"

"찾아내다니요. 이곳은 폐기된 종이들의 무덤입니다. 아카데미가 쓸모없다고 버린 쓰레기를 정리하는 게 제 일입니다."

"그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당신이 무엇을 만졌는지 묻고 있잖아."

엘리시아가 반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마력의 향이 서고의 곰팡내를 밀어냈다. 아카데미 수석다운 빈틈없는 기형(氣形)이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규율을 지키려는 자의 엄격함 대신 다른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칼릭스 교수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장학금을 독점하는 우등생의 변덕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카데미의 마법은 죽었어."

엘리시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학장의 수제자이자 수석 학생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것이 아니었다.

"교재에 적힌 공식, 정해진 영창, 오차 없는 기하학적 도식. 교수들은 마법을 마력으로 작동하는 정밀 시계쯤으로 여겨. 그 틀에서 반 인치만 벗어나도 이단이라 부르며 파문하지. 하지만 결과는 어때? 백 년 전의 술식을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하고 반복 재생산할 뿐이야. 대침묵 이후로 우리는 지식을 잃은 채 껍데기만 흉내 내고 있어."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푸른빛의 정갈한 마력 구체가 규칙적인 주기로 깜빡였다. 완벽하게 통제된, 그러나 아무런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방금 당신이 건드린 그 흐름은 달랐어. 억지로 틀을 짜 맞추지 않고, 주변의 환경과 이어지듯 흔들렸지.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반응했어. 그런 형태는 아카데미의 어떤 고위 교본에서도 본 적이 없어."

엘리시아는 손바닥을 움켜쥐어 마력 구체를 꺼버렸다.

"당신은 재능 없는 사서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손끝에는 이 폐허의 마법이 묻어 있어. 주말이면 칼릭스가 감사팀을 끌고 올 거야. 서고 전체를 뒤집어엎고 금서를 찾아내겠지. 당신 혼자서는 숨길 수 없어. 무엇을 보았는지 내게 보여줘, 렌.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

렌은 바닥에 드리운 엘리시아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명석함 뒤에 도사린 오만, 그리고 그 오만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지식에 대한 갈증. 그것은 칼릭스 같은 교조주의자들의 경직된 독선보다 훨씬 위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부하기 힘든 동질감을 풍기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며칠 남지 않았다. 주말의 전수 검열이 시작되면 이 고서고의 차단 구역은 샅샅이 파헤쳐질 터였다.

렌은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주머니 깊은 곳, 낡은 가죽 끈으로 묶어둔 검은 책의 차가운 표지가 손가락에 닿았다.

"도움이라. 수석 학생의 호기심치고는 대가가 너무 큽니다. 아카데미의 질서를 부정하는 지식은 구원이 아니라 단두대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 문을 열 용기도 없는 자들이 만든 질서 따위는 상관없어."

렌이 코트 안에서 검은 마도서를 꺼냈다.

아무런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칠흑 같은 가죽 장정. 그 표면에는 어젯밤 렌이 봉인을 해제하며 새겨 넣은 가느다란 마력의 흔적이 굳은 먹물처럼 메말라 붙어 있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책에 닿는 순간, 그녀의 호흡이 멎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고순도의 마력이 무의식중에 책을 향해 뻗어 나갔다. 지식을 갈망하는 상위 마법사의 본능적인 탐색이었다.

그 맑고 날카로운 파장이 책 표면에 닿는 찰나, 이변이 일어났다.

치지직.

마도서 표면의 굳어 있던 상형문자들이 보랏빛 불꽃을 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렌은 책을 거두려 했으나 늦었다. 엘리시아의 잘 벼려진 마력 파동이 마도서의 봉인 잔여물과 맞물리며 폭발적인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의 마찰음이 서고의 적막을 산산조각 냈다.

"이게... 무슨 문자지? 현대 마법 기호학에는 이런 굴절률이..."

엘리시아가 손을 뻗으려 했다.

"물러서십시오!"

렌이 소리쳤다.

마도서에서 튀어 오른 보랏빛 글자들은 허공에서 흩어지지 않고, 서고 바닥의 균열 속으로 뱀처럼 스며들었다.

쿠구구궁.

발밑 깊은 곳에서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수백 년 동안 책 먼지와 곰팡이에 덮여 있던 바닥의 석판들이 요동쳤다.

석판의 틈새를 따라 묻혀 있던 고대 금속 선들이 선명한 코발트블루의 광채를 내뿜으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었다. 도서관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원형의 방어 결계망이, 외부의 마력 자극을 침입으로 인식하고 강제로 기동한 것이다.

쾅!

지상으로 통하던 두꺼운 강철 차단벽이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벽면을 따라 쇠창살 같은 푸른 방어벽이 솟구치며 나선형 계단으로 향하는 통로를 완전히 밀폐시켰다.

서고의 천장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석조 기둥마다 푸른 마력의 불꽃이 벽화처럼 번져 올라갔다.

밀폐된 서고의 공기가 순식간에 희박해지며, 맹렬한 마력의 파도가 두 사람의 옷자락을 사납게 휘감았다.

엘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방어 술식을 전개하려 했지만,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불꽃의 압력에 밀려 뒤로 휘청거렸다.

"결계가... 외부와 차단되었어. 마력 제어가 전혀 먹히지 않아!"

렌은 공중에 떠올라 격렬하게 요동치는 검은 마도서를 움켜쥐며 외쳤다.

"영창을 멈추십시오! 당신이 마력을 쓰면 쓸수록 저 결계는 침입자를 태워버리려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