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서관의 사서 · 총 4화 · AI 작가 서가

제3화

뷰어에서 이어 읽기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서고 바닥이 덜컹 내려앉았다.

천장 모서리를 따라 붉게 녹슨 강철 덧문들이 톱니를 맞물리며 연달아 닫혔다. 외부 통로와 서고를 완전히 갈라놓는 이중 차폐였다. 석회 먼지가 쏟아져 내리는 틈새로, 바닥에 새겨진 코발트블루의 고대 문양들이 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돌바닥을 가르며 타오르는 푸른 불꽃은 온도가 없었다. 대신 폐쇄된 공간 내부의 마력과 산소를 무자비하게 빨아들이며 기압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귀 안쪽이 먹먹해지고 비릿한 오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키세요!"

엘리시아는 렌의 외침을 무시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기압 차로 인해 사납게 곤두섰다. 아카데미의 수석답게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3계위 연환 방벽, 칠요의 거울."

엘리시아의 손가락 끝에서 정육면체의 투명한 마력 격자가 빠르게 엮여 나갔다. 중앙학술원이 공인한 가장 완벽한 방어 마법이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일곱 장의 마력판이 얇은 막을 형성하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교하게 계산된 두께와 밀도는 웬만한 4계위 충격 마법조차 굴절시켜 튕겨내도록 설계된 규격품이었다.

하지만 서고 기둥을 타고 번져 오른 고대의 푸른 불꽃은 그 정연한 격자를 반사체로 인식하지 않았다.

지지직, 쾅!

기둥 상단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 마력 파동이 엘리시아의 방벽 정중앙을 강타했다.

충돌은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었다. 푸른 불꽃은 방벽의 표면에 닿는 순간, 정육면체의 마력 결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결속식을 난폭하게 찢어발겼다. 규격화된 수식으로 굳게 닫혀 있던 마력의 매듭들이 겉잡을 수 없이 풀려나갔다.

"이게... 무슨..."

엘리시아의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역류했다. 마력 역류의 충격에 그녀의 어깨가 뒤로 꺾였다. 일곱 겹의 방벽은 깨진 유리 파편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허공에서 매캐한 연기로 화했다. 정형화된 마법 체계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고대 술식의 파동에 닿자마자 상성 자체를 부정당한 꼴이었다.

그 찰나, 허공으로 솟구쳤던 검은 마도서가 다시 한번 보랏빛 빛무리를 뿜어냈다. 바닥의 균열에서 솟구치는 푸른 빛과 책의 보랏빛이 공중에서 맞부딪히며 서고 중앙에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렌은 바닥을 구르듯 몸을 던졌다.

손바닥이 거친 석판에 쓸려 가죽 장갑이 찢어졌지만 통증을 느낄 틈은 없었다. 그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은 마도서의 모서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아 가슴에 밀착시켰다. 책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파동이 갈비뼈를 두드렸으나 결코 놓지 않았다.

동시에 렌은 반대편 손을 뻗어 비틀거리며 뒤로 쓰러지던 엘리시아의 교복 옷깃을 잡아챘다.

"잡아당기지 마!"

엘리시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쳐내려 했지만, 렌의 악력은 사서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억셌다. 렌은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그녀를 가장 두꺼운 석조 기둥의 그림자 속으로 끌어당겼다.

콰아앙!

두 사람이 서 있던 바닥으로 천장에서 떨어진 쐐기 모양의 마력 낙뢰가 내리꽂혔다. 화강암 석판이 도려내지듯 뜯겨 나가며 주먹만 한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빗발쳤다. 파편 하나가 기둥 모서리를 때리고 튕겨 나가 엘리시아의 뺨을 스쳤다. 가느다란 핏방울이 하얀 피부 위로 번졌다.

엘리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손바닥 안쪽에서 푸른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우등생의 오기였다.

"아직 술식을 재구성할 수 있어. 외벽에 접촉점을 만들어서 파동을 바깥으로 흘리면..."

"마력을 끄십시오."

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평소의 흐릿하고 맥 빠진 목소리는 흔적조차 없었다. 안경 너머로 드러난 그의 검은 눈동자는 기둥 밖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결을 맹금류처럼 훑고 있었다.

"방금 보지 못했습니까? 당신이 전개한 방벽의 정형화된 주파수가 이 방 전체를 침입자 격멸 모드로 몰아넣었습니다."

"내 술식에는 결함이 없었어! 엘도리아의 정규 교본에 따른 완벽한 3계위 구조였다고!"

"그 빌어먹을 교본이 문제입니다."

렌은 기둥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가슴에 품은 검은 마도서의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이 서고의 결계는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설계된 고대 자율 방호망입니다. 외부에서 억지로 틀을 짜 맞추고 강제로 지배하려는 마력을 감지하면, 그것을 이물질로 판단해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도록 짜여 있어요. 당신이 아카데미식으로 공식을 완성하고 마력을 욱여넣을수록, 저 결계는 당신을 도서관을 파괴하러 온 적으로 규정합니다."

"말도 안 돼... 마력을 완전히 차단하라고? 이 밀폐 구역 안에서 맨몸으로 버티라는 소리야? 결계의 압력만으로도 폐가 으스러질 텐데!"

"마력을 쓰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결계와 맞서 싸우려 들지만 않으면요."

렌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끝에는 아무런 마력의 빛도 맺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서고를 휘감고 있는 흉포한 푸른 마력의 흐름이, 렌의 손가락 주변에 도달하는 순간 기이하게 휘어지며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충돌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은 채, 그저 공기의 흐름을 타듯 마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카데미의 어떤 강의실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기술이었다. 마력을 쌓아 올려 방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흐름의 결을 읽고 그 틈새로 몸을 숨기는 방식.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마해 온 최고 수준의 마법식은 단 한 번의 격돌로 부서졌다. 그런데 마법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지하에 처박힌 일개 사서가, 고대의 폭주하는 살상 술식을 맨손으로 흘려내고 있었다.

상식의 붕괴에서 오는 굴욕감이 목구멍을 메웠지만, 엘리시아는 멍청하지 않았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진동과 기둥 밖에서 타오르는 마력 낙뢰의 위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고집을 부려 한 번 더 영창을 시도하는 순간, 다음 낙뢰는 기둥째 두 사람을 지워버릴 터였다.

엘리시아는 손바닥에 띄우려던 마력의 불씨를 천천히 거두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떨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자,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날카로운 마력의 파장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공기를 찢던 날카로운 고주파 소음이 거짓말처럼 반으로 줄어들었다. 기둥 밖에서 소용돌이치던 푸른 불꽃도 더 이상 낙뢰를 떨어뜨리지 않고, 서고 바닥의 금속 선을 따라 규칙적으로 맥동하기 시작했다.

렌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귀를 알아들으셔서 다행입니다, 보나파르트 양."

"입 닥쳐."

엘리시아가 벽에 기댄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낸 그녀의 눈빛에는 자존심의 상처와 함께 날 선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상황을 넘겼다고 해서 당신이 나보다 우위에 섰다고 착각하지 마. 난 단지 자살 행위를 피했을 뿐이야."

"우위 따위를 따질 여유가 있다면 저 바닥이나 보십시오."

렌이 턱짓으로 서고 중앙을 가리켰다.

두꺼운 차단벽이 내려앉은 입구 쪽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닥이었다. 푸른빛이 집중되는 중앙 제단 부근, 석판들이 뒤틀리며 드러난 균열 깊은 곳에서 태엽 장치처럼 맞물린 거대한 마법진의 핵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방어 술식의 기동이 아니었다. 침입자를 가둔 채 서고 내부의 산소를 차단하며, 특정 주파수의 마력을 외부로 쏘아 올리기 위한 정밀한 카운트다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렌은 무릎을 굽히고 갈라진 석판 틈새로 손을 뻗었다.

손끝을 바닥에서 반 뼘 정도 띄우자,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통풍구가 없는 지하 서고에서 이는 바람은 공기가 마력의 연소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틈새 안쪽에서는 은과 황동을 섞어 부어 넣은 회로선들이 복잡한 격자망을 이루며 제각기 다른 주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박힌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옷소매를 걷어올렸다.

"자율 방어 결계의 동력 핵이야. 침입자의 외피 마력을 감지해서 반대 위상의 파동을 연속으로 때려 박는 구조지. 중앙의 공명석을 강제로 뽑아내면 전체 순환이 끊길 텐데."

"그걸 건드리는 순간 이 서고는 산소 결핍으로 끝납니다."

렌이 차분하게 말을 끊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검은 마도서를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얹었다. 표지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마도서의 모서리를 따라 새겨진 은빛 상형문자 몇 개가 바닥의 금속 선과 마주 보며 미세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보나파르트 양, 저 회로의 굴곡을 자세히 보십시오. 대칭이 맞지 않습니다."

엘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렌이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석판 아래 드러난 금속 선은 원형으로 뻗어 나가다 서쪽 축에서 급격하게 꺾여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고대 건축 양식 특유의 비대칭 배선이잖아. 마력의 분산을 막기 위한……."

"아닙니다. 깎아낸 흔적이 너무 새것입니다. 틈새에 채워 넣은 접착용 은합금의 산화 상태를 보면 기껏해야 3년 안팎입니다. 원래의 고대 방어 체계 위에 누군가 인위적으로 다른 술식을 덧씌웠습니다."

렌은 안경을 코끝까지 살짝 내리고 바닥의 선을 눈으로 좇았다. 검은 마도서의 세 번째 장에 적혀 있던 유로(流路) 개념도와 머릿속에서 대조해 보았다. 고대의 방식은 마력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순환시키는 형태였다. 그러나 덧씌워진 배선은 마력을 한 점으로 압축해 특정한 형태로 가공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방어 격멸기가 아닙니다. 내부의 침입자를 마력으로 짓눌러 행동 불능으로 만든 다음, 그 마력 파장을 그대로 복제해서 위로 쏘아 올리는 송신 장치입니다."

"송신 장치?"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허리춤에 찬 작은 가죽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아주 찰나의 동작이었으나 렌의 시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송신 주파수는 아카데미 상층부, 정확히는 학장실 직통 비상 연락망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결계가 닫힌 순간부터 우리 둘의 마력 파형은 이미 위쪽으로 실시간 보고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렌이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서고는 폐기 도서관입니다. 아카데미 행정부에서는 먼지 쌓인 낡은 창고 취급을 하는 곳이지요. 그런 장소에 왜 학장실 직통 규격의 감시 송신기가 고대 결계의 핵에직접 물려 있는 걸까요?"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표정으로 바닥의 은빛 선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아카데미의 규율을 과소평가하지 마. 폐기 서고라 해도 엄연히 금서와 통제 구역이 인접한 곳이야. 학술원 감사팀이 미인가 마력을 감시하기 위해 이중으로 덫을 쳐두는 건 드문 일이 아니야."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합니다."

렌은 손가락 끝으로 바닥에 새겨진 마력 유로를 가볍게 훑었다. 먼지가 걷힌 자리에서 쐐기 모양의 삼각 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 문양 한가운데에 아카데미 상징인 세 갈래 깃펜이 각인되어 있었다.

"보통의 경보 술식은 침입자가 감지되면 외곽 차단벽을 내리고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고대의 방어 체계를 동력원으로 삼아, 침입자의 마력을 억지로 끌어내 증거로 굳혀버리는 구조입니다. 굳이 이렇게 복잡한 식별 격자를 바닥에 심어둘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누군가 이곳에서 특정 마법을 쓰도록 유도하고, 그 자리에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확보하려는 설계 같습니다."

렌의 담담한 지적에 엘리시아의 턱 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바닥의 마법진 중앙에서 푸른빛이 차오르는 속도를 가늠하듯 발끝을 가볍게 굴렀다. 마력 불꽃이 튀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서고 구석의 목재 서가들이 결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시간 낭비할 틈 없어. 중앙 핵이 백색으로 바뀌면 2단계 봉쇄가 시작돼. 호흡을 옥죄는 질식 결계가 펼쳐진 뒤에 침입자의 잔류 마력을 공명석에 강제로 각인시키는 포획망이 작동한다고. 3단계 집행 술식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 저 유로의 접점을 끊어야 해."

엘리시아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온 단어들에 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의 지친 눈매가 엘리시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2단계 봉쇄, 그리고 강제 각인 후의 3단계 집행. 꽤나 구체적이군요."

서고 내부를 채우던 웅웅거리는 공명음 속에서 엘리시아의 숨소리가 일순 멎었다.

"그건……."

"아카데미 일반 강의는 물론이고, 상급 이론 과정의 어떤 교재에도 학술원 감사팀의 현장 체포 프로토콜을 계위별로 설명해 둔 문헌은 없습니다. 그건 감사관들과 학장 보좌관급 이상만이 열람할 수 있는 내부 보안 규정일 텐데요. 수석 학생이라 해도 열람 권한이 없을 텐데, 보나파르트 양은 어떻게 집행 순서를 그리 정확하게 꿰고 계십니까?"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머리 위 천장에서 석회 가루가 툭, 떨어져 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둥에 매달린 푸른 화염이 흔들리며 엘리시아의 단정한 얼굴 위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계산과 당혹감이 교차하는 것이 역력했다.

엘리시아는 뺨을 스친 은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목소리는 차분함을 되찾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말끝에 아주 옅은 떨림이 묻어났다.

"보나파르트 가문이야. 우리 가문은 아카데미 이사회에 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감사팀의 운용 규정 정도는 어릴 때부터 서재에서 질리도록 보아온 서류 중 하나에 불과해. 일개 사서인 당신이 아카데미 고위층의 정보 공유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가문의 정보력이라."

렌은 바닥의 마도서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렇다면 그 대단한 가문의 규정집에는 이 자율 결계가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폭주했을 때의 대처법도 적혀 있었습니까? 당신이 이 마도서에 마력을 흘려 넣기 전까지는 이 핵이 깨어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치…… 정확한 신호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시아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렸다. 그녀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쏘아붙였다.

"지금 내 출신과 지식을 캐물으며 시간을 버릴 셈이야? 3단계가 기동되면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불온한 마도서의 파동이 학장실 제단에 고스란히 기록돼. 당신이 이단 마법사로 낙인찍혀 이 지하에서 끌려 나가든 말든 난 상관없지만, 나까지 그딴 오명을 뒤집어쓸 생각은 추호도 없어!"

말을 마친 엘리시아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평소의 오만하고 완벽하던 수석 학생의 태도와는 달랐다. 그녀는 단순히 갇힌 것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 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상층부에 보고가 올라가는 상황 자체를 끔찍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렌은 그녀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며 속으로 퍼즐을 맞추었다.

칼릭스 교수가 다녀간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수색을 방해하는 척하며 자신에게 접근했고, 마도서를 확인하자마자 손을 댔다. 그리고 결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을 가두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시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계획이 성공한 자의 여유가 아니었다. 덫을 놓으려다 함께 덫에 발이 묶여버린 사냥꾼의 초조함이었다.

"좋습니다. 가문의 비결이든 우연한 지식이든, 지금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겠지요."

렌은 더 이상 엘리시아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는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로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차가운 금속 선이 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보나파르트 양. 이 결계의 원래 주인은 고대의 마도사들입니다. 현대 아카데미가 덧붙여놓은 조잡한 감시망 따위는 진짜 흐름을 타면 얼마든지 비틀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려면 당신의 마력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내 마력을? 아까는 마력을 쓰지 말라며!"

"방어벽을 세우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통제하려 들지 말고, 바닥의 중심 핵으로 마력을 순수하게 흘려보내십시오. 제가 결계의 맥을 짚어 유로를 우회시키는 동안, 당신은 상층부로 이어지는 이 감시 회로의 접속부만 잠시 마비시켜야 합니다."

렌은 무릎 위의 검은 마도서를 펼쳤다. 거친 양피지 위로 희미한 푸른빛의 상형문자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렌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잘게 떨리던 마력이 서서히 피어올랐지만, 시선은 여전히 렌의 등 뒤와 바닥의 균열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넷째 마디 접점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동선에 마력을 흘리세요."

렌의 단호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공기를 갈랐다.

펼쳐진 검은 마도서의 페이지에서 푸른빛 글자들이 잉크처럼 번져 나와 바닥의 금속 홈을 타고 흘렀다. 고대 문자가 남긴 궤적은 현대 아카데미의 규격화된 도관을 비웃듯 제멋대로 갈라지고 뒤엉켰으나, 그 끝은 정확하게 중심 제단의 부러진 석조 축을 향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을 털어내려는 듯 턱을 굳게 당기며 양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정교하게 조율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 선은 아카데미가 증설한 강제 규격 선이야. 여기에 내 마력을 억지로 밀어 넣으면 단락이 일어날 텐데!"

"그걸 노리는 겁니다."

렌은 안경테를 고쳐 잡지도 않은 채, 마도서의 모서리를 바닥의 깊은 홈에 정확히 틀어박았다.

"단락이 일어나야 결계가 침입자 배제 모드에서 비상 점검 상태로 전환됩니다. 고대의 방어 체계는 침입자를 태워 죽이려 하지만, 칼릭스 교수가 덧씌운 현대의 통제 회로는 사고가 났을 때 증거와 서고를 보존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당신 말대로라면 말입니다."

엘리시아의 호흡이 찰나의 순간 멎었다. 렌은 그녀의 시선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손바닥을 밀착시키며 책 속의 글자들을 바닥의 마력 맥으로 강하게 밀어 넣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거칠었다. 바닥 아래 매설된 수백 개의 청동 톱니와 마력 유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맞물리며 비명을 질렀다.

쿵, 쿵, 쿵.

벽면을 타고 흐르던 푸른 불꽃이 거세게 요동치더니, 서고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강철 차단벽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끼이익 쇠 긁는 굉음과 함께 바닥에 박혀 있던 거대한 강철 판 하나가 위로 덜컥 솟구쳤다. 차단벽 전체가 열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과 벽 사이로 성인 한 사람이 몸을 웅크려 빠져나갈 만한 간격이 분명하게 벌어졌다. 그 틈새로 서고 바깥 복도의 차갑고 퀴퀴한 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통했습니다."

렌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내뱉었다. 결계의 거센 압박이 잦아들자 서고 안을 짓누르던 오존 냄새도 차츰 옅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비상 정지 기제가 맞물리며 일어난 마력의 잔류 파동이 두 사람의 발밑을 강하게 쳤다. 통제 회로를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엘리시아의 손끝에서 맹렬한 역류가 일어났다.

"흡……!"

엘리시아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바닥의 돌부리에 뒷굽이 걸린 그녀는 균형을 잃고 석재 기둥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의 교복 재킷 안쪽 주머니가 뒤집히며, 단단한 물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탁, 데구르르.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그것은 단순한 도서관 열쇠나 마력 나침반이 아니었다.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타원형 공명석이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원석 표면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흑단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낯익은 문양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세 개의 은제 고리가 엇갈린 형태의 인장.

칼릭스 교수가 들고 다니던 흑단 지팡이 끝에 매달려 있던 바로 그 장식이었다.

렌의 시선이 바닥에 멈추었다.

공명석은 방금 전까지 서고 안에서 벌어진 마력의 파동을 고스란히 흡수한 탓인지, 미세한 진동과 함께 표면의 룬을 명멸하고 있었다. 그 빛은 엘리시아의 개인 마력 파장이 아니라, 아카데미 학술원 감사팀이 현장에서 금기 마법을 적발할 때 사용하는 특수 채증 술식의 고유 파장이었다.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었다. 소지자의 마력을 매개로 주변 반경 5미터 이내의 비정규 마력 반응을 실시간으로 박제하여 학장실의 주 제단으로 전송하는 감사관 전용 기록 장치였다.

"이건……."

렌이 무릎을 굽히며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엘리시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며 바닥을 기어 공명석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렌의 손이 더 빨랐다.

렌은 바닥에서 차가운 공명석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원석 내부에 누적된 정보의 편린이 렌의 마력 감각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기록 번호 4호.

폐기 마도서관 심층 구역.

목표: 사서 렌의 미등록 고대 주파수 접촉 확인 및 마도서 실물 확보.

채증관: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둔하고 순진한 말단 사서의 빛이 남아있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굳어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이마를 덮고 있었고, 파랗게 질린 입술이 잘게 떨렸다.

"가문의 정보력이라 하셨습니까."

렌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담담해서, 오히려 조금 전 폭주하던 결계의 굉음보다 더 서늘하게 귓전을 찔렀다.

"학술원 감사팀의 채증용 공명석. 그것도 칼릭스 교수의 개인 인장이 새겨진 특별 기구군요. 이걸 품에 넣고 제 옆에 서 계셨던 겁니까."

렌은 손바닥 위의 공명석을 가볍게 뒤집었다. 원석 표면을 따라 흐르던 푸른 불빛이 렌의 손가락 사이로 번지며, 그 안에 압축되어 있던 마력 파형의 기록을 벽면에 길게 투사했다.

그것은 조금 전 렌이 마도서를 펼쳐 결계의 맥을 짚던 찰나의 파동이었다. 파형의 형태, 고대 상형문자의 굴절률, 심지어 렌의 체온과 반응한 미세한 흐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만약 이 돌이 칼릭스의 손에 들어간다면 학술원 심문실에서 발뺌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엘리시아는 바닥을 짚은 손을 굳게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건……."

"칼릭스 교수가 서고를 뒤지고 나간 뒤에 나타난 게 아니었군요. 처음부터 교수의 지시를 받고 나침반을 핑계 삼아 나를 옭아맬 증거를 잡으러 온 거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렌은 낡은 흑단 덮개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덮개 안쪽에 새겨진 아카데미 행정 번호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아카데미의 규율에 묶여 사는 학생이 결계의 제어 순서를 줄줄 꿰고 있고, 감사팀이 사용하는 비상 단락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더군요. 가문의 정보력이 아니라, 애초에 칼릭스 교수가 이번 수색을 위해 당신에게 쥐여준 비공식 행동 지침이었던 겁니다."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기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평소 흐트러짐 없던 남색 교복 코트 자락은 석회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가슴팍의 금색 견장은 비뚤어져 있었다.

"내 말을 들어, 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단순하지 않다?"

"칼릭스 교수는 이미 며칠 전부터 외곽 결계의 왜곡을 감지하고 있었어. 누군가 폐기 서고에서 비인가 마도서를 열람하고 있다는 확증을 잡기 위해 학술원 전수 검열을 명분으로 밀어붙였고. 난…… 난 그저 내 자리를 지키려 했을 뿐이야."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이단 재판관의 칼날 위에 올려놓기로 하셨군요."

렌의 목소리에는 분노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사실의 낭독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엘리시아에게는 그 어떤 비난보다 날카로운 쐐기처럼 박혔다.

엘리시아는 턱을 치켜들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칼릭스는 날 의심하고 있었어! 이번 학기 수석 자리를 빌미로 날 시험한 거라고. 네가 숨긴 마법의 잔재를 직접 증명해 바치지 않으면, 내 가문이 아카데미에 기부한 연구 기금을 전부 동결시키고 날 규율 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단 말이야!"

"그래서 기꺼이 밀정이 되기로 하셨습니까."

"난 그저 확인만 하려 했어! 정말로 네가 쥐고 있는 게 그자가 말하는 위험한 이단인지, 아니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정한 마법의 단서인지! 그래서 널 감싸주려 했던 것도 사실이야. 칼릭스가 서고로 내려왔을 때 내가 그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면 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 대가로 방금 내 마력 파동을 이 공명석에 전부 담아내셨지요."

렌이 공명석을 들어 올려 차단벽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비추어 보였다. 원석 안에서 맥동하는 푸른빛은 엘리시아가 방금 전 바닥의 마력 유로를 통제하는 척하며 교묘하게 모아둔 렌의 고유 마력 파형이었다.

"내가 서고의 문을 여는 동안, 당신은 뒤에서 탈출이 아니라 확실한 고발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결계가 통제되지 않고 우리가 무사히 나갔다면, 당신은 이 돌을 들고 곧장 칼릭스 교수에게 달려갔겠지요. 수석의 자리와 가문의 명예를 온전히 보전한 채로 말입니다."

"아니야!"

엘리시아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닫힌 석조 공간 안에서 날카롭게 메아리쳤다.

"공명석을 작동시킨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어. 아카데미에서 배운 게 그것뿐이니까! 하지만 네가 그 책의 글자를 다루는 걸 본 순간…… 난 칼릭스 따위에게 이걸 넘길 생각이 사라졌어. 믿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믿고 안 믿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보나파르트 양."

렌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당신의 손에는 칼릭스 교수의 사냥개가 쥐어야 할 사슬이 들려 있었고, 제 목에는 이미 올가미가 씌워질 뻔했습니다."

바닥과 차단벽 사이의 틈새에서 찬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닥쳤다. 그 틈은 한 사람이 몸을 낮추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결계의 거센 압력은 렌의 고대 마도서와 바닥의 단락으로 인해 잠시 잠들어 있었지만, 비상 정지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렌의 손에 들린 공명석과 벌어진 차단벽의 틈새를 번갈아 훑었다. 그녀의 호흡이 다시 가빠졌다.

"그 공명석을 내게 넘겨. 그리고 함께 나가. 밖으로 나가면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둘 테니까."

"당신의 가문과 직위를 걸고요?"

렌이 작게 냉소를 머금었다.

"보나파르트 양. 당신은 아카데미의 껍데기뿐인 마법에 회의를 느낀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껍데기가 주는 안락함과 권력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진짜 지식을 갈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더 뛰어난 무기를 손에 쥐고 싶었을 뿐이지요."

렌은 공명석을 품속 깊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증거는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렌!"

엘리시아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다가오려 했다.

렌은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은 마도서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덮자마자 표면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이 일제히 잦아들며 묵직한 가죽 냄새만을 남겼다. 그는 마도서를 옆구리에 단단히 끼운 채, 차단벽 틈새 바로 앞에 섰다.

"길은 열렸습니다. 나가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지요."

렌은 고개를 돌려 엘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경 렌즈 너머로 번뜩이는 렌의 눈빛에는 서고 구석에서 먼지나 털어내던 유약한 사서의 흔적은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칼릭스 교수에게 가든, 학장실로 뛰어가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이 공명석이 내 손에 있는 한, 당신 또한 금기 마도서의 봉인을 풀고 고대 결계를 폭주시킨 공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엘리시아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박할 말을 찾으려는 듯 목구멍을 들썩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렌은 몸을 숙여 반쯤 들려 있는 육중한 강철 차단벽의 틈새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두운 복도에서 불어오는 냉기가 두 사람의 발목을 차갑게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