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마력수가 거칠게 출렁이며 부서진 석판 모서리를 때렸다. 배수관이 터져 나가며 쏟아낸 원초적인 수류는 관리실 바닥을 뒤덮은 은도료 회선을 끊어 놓았고, 물 표면 위로는 제어반에서 쏘아 올린 푸른 영사빛이 어지럽게 번졌다.
허공에 떠오른 양피지 형상에는 교무처 상임이사회의 붉은 인장과 함께 이번 작전의 실체가 날짜별로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즉결 처형이다! 반역자들의 손발을 묶고 숨통을 끊어라!"
칼릭스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 뇌화가 파지직 튀었다. 그의 단정한 예복 자락은 진흙탕 물에 젖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창백하게 질린 안면 근육은 흉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지른 호통에도 무장한 집행관들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집행관 부대장의 시선이 허공에 정지한 채 떨리고 있었다. 투영된 행정 문서의 오른쪽 하단, 긴급 현장 투입 및 즉결 처형권 위임란에 찍힌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부대 인장이었다.
"내 직인이 왜 저기 있는 거지?"
부대장의 굵직한 음성이 물소리를 가르고 낮게 울렸다.
"부대장! 저건 금서 접촉자가 만들어낸 환각 술식이다! 학칙을 수호해야 할 집행관이 일개 사서 놈의 요술에 현혹될 셈인가!"
칼릭스가 핏발 선 눈으로 윽박질렀지만, 엘리시아는 이미 손에 든 실물 양피지를 부대장의 코앞으로 내민 뒤였다.
"환각인지 아닌지는 이 종이에 남은 결재 마력의 파장을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부대장님."
엘리시아는 쥐고 있던 규격 집광 투영구를 천천히 거두어 허리춤에 차고는, 문서의 직인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상임이사회 고유의 암호화 룬과 교무처 보좌관실의 인쇄 규격입니다. 학장님의 직무대행 인가도 없이, 상임이사회 소속 위원 세 명의 합의만으로 지하 서고를 파괴하고 장학생과 관리 직원을 폭주 사고로 위장 사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 총괄 책임자로 당신들의 부대 명의가 무단 기재되었고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신들은 지금 학칙을 수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상임이사회의 불법 은폐 공작이 지상에 드러났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군사재판에 넘겨질 허수아비로 세워진 겁니다. 칼릭스 보좌관의 독단적인 발포 명령에 응하는 순간, 당신들은 전원 살인 공범으로 규정됩니다. 아카데미 징계 규정 제12조와 집행대 행동 강령 제4항을 상기하십시오."
부대장의 손에 쥐여 있던 뇌화창의 끝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의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다른 집행관들 역시 창끝의 전개를 풀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들의 명예와 목숨이 상임이사회의 비열한 꼬리 자르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칼릭스의 명령은 더 이상 군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부대장!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감히 상임위원회의 권위에 항명하겠다는 것인가!"
"입을 다무십시오, 칼릭스 교수님."
부대장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집행대는 학장의 정규 서명과 학무국의 정식 감사 결재가 없는 비공식 즉결 처형권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 문건의 진위가 아카데미 본관 감사실에서 규명될 때까지, 집행대는 현장을 봉쇄하고 모든 발포를 유예합니다."
치지직, 퍽!
그 순간 제어반 중심부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었다. 바닥에 고인 고대 마력수가 콘솔 하부의 전선관을 타고 기어오르며 채증용 공명석에 과도한 전압을 걸기 시작한 탓이었다. 동력 홈에 꽂힌 공명석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허공의 투영상이 일렁거렸다.
이 기록이 파괴되면 상임이사회의 공작을 입증할 물리적 증거가 통째로 날아간다.
렌은 지체 없이 제어반 측면으로 몸을 붙였다. 그는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뒤, 침수된 금속 판넬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구리 배선의 결은 대침묵 이후의 형식적인 직선 배선과 달랐다. 생명체의 혈관처럼 불규칙하게 뻗어 나간 고대 합금 도선이었다.
렌은 바닥을 가득 메운 고대 마력수의 파동을 호흡과 맞추었다. 마력을 강제로 찍어 누르는 대신, 공명석으로 쏠리는 과부하의 흐름을 쥐고 벽면 매설 접지선 쪽으로 틀어 넘겼다.
푸른 불꽃이 튀던 제어반의 잡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공명석의 과열이 멈추고, 허공에 뜬 투영 문건은 다시 안정적인 형태를 되찾았다. 렌의 손가락 끝에 검은 그을음이 묻어났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릭스의 시선이 렌을 거쳐 엘리시아에게로 사납게 꽂혔다. 증거 인멸도, 현장 사살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자의 눈빛에는 짓눌린 악의만이 남아 있었다.
"엘리시아... 네가 네 손으로 무슨 문을 열어젖혔는지 정녕 모르는구나."
칼릭스는 이를 바득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아비가, 네 잘난 가문이 이 도서관 지하를 묻어버리기 위해 상임이사회에 어떤 약조를 건넸는지 알기나 하느냐? 네가 증명하려 드는 그 학문적 정의가, 네 가문의 목줄을 가장 먼저 끊어놓을 밧줄이 될 것이다!"
엘리시아의 턱 끝이 빳빳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내 가문이 교내 청문회와 평의회에서 직접 치를 일입니다. 적어도 당신처럼 더러운 뒷골목 쥐새끼마냥 비상 배수로에 은도료를 칠해 학생을 미끼로 던지는 짓은 하지 않아요. 집행관 부대장님, 피의자 칼릭스 교수를 즉시 직무 정지 처분하고 구금선 안으로 격리하십시오."
부대장이 손짓하자 두 명의 집행관이 다가가 칼릭스의 좌우를 막아섰다. 지팡이를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집행관들의 방패가 칼릭스의 퇴로와 마력 전개 범위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칼릭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폐해진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렌은 제어반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시아와 칼릭스가 언쟁을 벌이는 사이에도, 렌의 감각은 관리실 한쪽 구석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배수관이 터져 나가며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관리실 우측 벽면이었다.
박살 난 편마암 지지대와 흙더미 사이로 묵직한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건축용 석재의 냄새가 아니었다. 잉크와 오래된 양피지, 그리고 수백 년간 바깥 공기를 쐬지 못한 금속 함이 풍기는 서늘한 냄새였다.
렌은 무릎을 적시는 마력수를 가르며 잔해 더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깨진 석판 조각들이 발밑에서 사각거리며 밟혔다.
무너진 비밀 수납벽 안쪽, 두꺼운 주철 격벽 뒤편에 은폐되어 있던 중형 내화 금고의 전면부가 찌그러진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금고 중앙, 반쯤 뜯겨 나간 걸쇠 안쪽에서 고대 문자로 봉인된 검은 석판 하나가 묵직한 마력의 맥동을 토해내고 있었다.
품속에 넣어둔 고대 마도서가 그 고동에 반응하듯, 가슴팍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렌은 망설임 없이 금고의 부서진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젖은 손가락 끝이 검은 석판의 싸늘한 표면에 닿는 순간, 가슴속 마도서에서 흘러나온 미약한 마력 맥이 석판 외곽의 잠금 룬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갔다.
상임이사회가 반역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 서고 전체를 수몰시키면서까지 감추려 했던 대침묵 이전의 기록 장치였다.
탁,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석판을 옭아매고 있던 주조 봉인이 바스러져 내렸다. 석판 표면의 검은 광택 사이로 은색의 고대 문자열이 물결치듯 떠오르며, 대침묵 이전의 서고 심층부로 향하는 진입 좌표가 허공에 선명한 빛의 궤적으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파열된 주조 봉인의 부스러기가 물웅덩이 위로 흩어졌다.
허공에 맺힌 은색 룬 문자는 렌이 품에 품은 마도서 표지의 요철과 같은 간격으로 진동했다. 차가운 석판의 표면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렌의 손가락 마디를 훑고 지나갔다.
렌은 곧바로 석판을 빼내지 않았다. 금고 내부의 하중을 지탱하던 편마암 지지벽이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기에, 무게 균형을 무너뜨리면 상단에 얹힌 두꺼운 주철 덮개가 기록물 전체를 짓이길 위험이 있었다.
그는 젖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금고 바닥에 깔린 철제 수납함을 천천히 밖으로 끌어당겼다. 물에 젖지 않은 기름종이 뭉치와 양피지 철들이 녹슨 경첩 사이로 밀려 나왔다.
"비켜 봐요."
엘리시아가 다가왔다. 그녀의 바짓단은 흙탕물에 젖어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 봉인은 도서관 시설 관리 규약 제4조에 따른 영구 결재 봉인이에요. 일반 사서 권한으로는 열 수 없는 기록군입니다. 내가 해독 순서를 확인하겠어요."
엘리시아는 규격 집광 투영구의 초점 렌즈를 비틀어 빛의 폭을 좁힌 뒤, 렌이 꺼내놓은 수납함 내부를 비췄다. 금속 함 안쪽에는 수십 년 동안 밀봉되어 있던 서류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대부분의 표제에는 붉은색 먹으로 ‘폐기 마도서관 심층부 접근 차단 및 기록 소각 계획’이라는 관인이 찍혀 있었다. 상임이사회의 날인이 해마다 갱신된 흔적이었다.
"단순한 폐기 목록이 아니야."
엘리시아가 장갑 낀 손으로 가장 겉면에 놓인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매년 마력 배관 점검을 핑계로 서고 벽면을 깎아내고 있었어요. 고대 기록 장치의 반응을 줄이기 위해서 차폐 합금을 덧댄 기록도 있고. 전부 교무처 예산으로 집행된 일입니다."
"그들이 숨기려 한 건 마도서만이 아니었으니까."
렌이 담담하게 말을 얹으며 수납함 깊숙한 곳에서 가죽으로 덧댄 두꺼운 결의서 한 권을 꺼냈다.
"금서를 위험물로 규정하고 서고를 폐쇄하는 건 겉포장일 뿐이야. 진짜 목적은 대침묵 이전의 기록망이 다시 이어지는 걸 끊어내는 거였지. 이 밸브와 배관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지식 회로였어."
엘리시아는 렌이 건넨 결의서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표지의 굵은 양각 문양을 훑었다. 상임이사회 의결 번호와 함께 집행 책임자의 직인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던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팔랑거리던 종이 소리가 관리실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서류 하단, 검은 철인(鐵印)이 찍힌 서명란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렌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교무처의 공인 외에, 사적인 청탁이나 배후의 후원을 증명할 때 사용하는 특수 가문의 봉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세 개의 교차된 나침반과 월계수 잎.
형식 마법의 체계화를 주도하고 현 엘도리아 아카데미의 교과 과정을 독점해 온 가문, 보나파르트 가문의 가주 직인이었다.
서류의 문장은 명료하고 잔인했다.
‘폐기 마도서관 지하 3구역에 잔류한 원형 기록핵의 완전 침묵화 청원. 해당 구역의 관리 사서 렌의 비인가 접촉을 유도한 뒤, 금서 오염 혐의를 적용하여 즉결 제적 및 영구 격리 조치할 것. 발생 비용 일체와 교무처 상임위원 보좌는 본 가문이 인수함.’
날짜는 불과 보름 전이었다. 렌이 서고 바닥에서 제목 없는 마도서를 처음 주워 올렸던 그 시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게……."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양피지를 쥔 손가락 끝을 하얗게 질리도록 굳혔다.
"이 직인은…… 숙부님의 인장이 아니야. 본가의 서고에서 가주만이 꺼낼 수 있는…… 정식 의결 인장이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문서의 잉크 위로 번졌다.
"말도 안 돼. 가문에서는 내게 그저 서고의 이상 마력 파동을 감시하라고만 했어. 칼릭스 교수가 학칙을 벗어난 조사를 벌이고 있으니, 수석 학생의 자격으로 그를 견제하고 보고하라고…… 그렇게 지시받았는데."
"네가 견제역이었을 리가 없지."
벽 쪽에 가로막혀 있던 칼릭스가 젖은 흙탕물을 걷어차며 낮게 뇌까렸다. 두 집행관의 방패가 그를 막아섰지만, 칼릭스는 굳이 마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채 엘리시아를 비열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보나파르트의 아가씨, 아직도 네가 정의로운 감찰관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네 아비가 나한테 직접 넘긴 서류다. 서고의 쥐새끼 하나를 이단으로 엮어 없애고, 지하의 잔해를 영구히 콘크리트로 메우는 데 네 명성과 수석이라는 감투가 가장 그럴싸한 방패막이가 되니까."
칼릭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네 가문이 지금의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갔다고 생각하나? 형식 마법의 표준 룬 체계, 그게 전부 대침묵 이전의 방대한 지식을 검열하고 잘라내서 만든 통제된 찌꺼기다. 그 찌꺼기를 독점 판매해서 부와 권력을 쌓은 게 바로 네 조상들이다. 지하 서고의 원형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날, 가장 먼저 모가지가 날아갈 자들이 누구겠느냐? 바로 네 가문이야!"
집행관 부대장이 방패의 모서리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칼릭스의 앞을 막아섰다. 둔탁한 금속음이 수면을 울렸지만, 칼릭스가 내뱉은 말의 파편은 흩어지지 않고 관리실 안을 무겁게 채웠다.
엘리시아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쥔 양피지가 잘게 떨렸다. 장갑 틈새로 드러난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그녀는 문서를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가주 직인은 위조가 불가능했다. 가문 직계의 마력 파장이 아니면 문양 내부의 은도료가 녹청색으로 변색하지 않는다. 지금 그 나침반 문양은 너무도 맑고 선명한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입학 이후 줄곧 가문으로부터 지시받았던 학사 보고, 서고 출입 일지, 그리고 이상 마력 징후에 대한 정기 보고서들이 모두 이 한 장의 사살 청원서를 완성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쓰였다는 뜻이었다.
렌은 칼릭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엘리시아의 손에 들린 결의서의 조항들로 향해 있었다.
"보름 전."
렌의 건조한 음성이 물 흐르는 소리를 갈랐다.
"내가 서고 3구역의 붕괴된 서가 밑에서 표지 없는 책을 꺼내 올린 날짜가 14일 전이야. 그리고 그 사흘 뒤, 네가 폐기 마도서관의 대출 규정을 들먹이며 처음 서고 문을 열고 들어왔지."
엘리시아의 시선이 렌을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아카데미 수석으로서 지니고 있던 오만함이나 날카로운 논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렌, 난 정말 몰랐어. 가문에서는 그저 칼릭스 교수가 독단적으로 상임이사회의 금기 구역에 손을 대려 하니, 학생 신분으로 서고를 순찰하며 그의 비위를 포착하라고만……."
"서류의 결재선 세 번째 칸을 봐."
렌이 손가락으로 양피지의 중앙부를 가리켰다.
"현장 확인관 지정란.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비인가 마법 행사 확인 시 즉시 정합의 눈을 통해 신호를 송출하고, 대상자의 마력 핵을 파손하여 저항 불능 상태로 만들 것. 비고란에는 현장 즉결 처분 시 발생하는 법적 책임은 보나파르트 장학재단이 전액 보증한다고 적혀 있어."
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물웅덩이 표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단순한 거리 조절이 아니었다. 렌의 발끝이 닿은 바닥의 마력 맥이 엘리시아의 발밑으로 이어지는 결을 미세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가 지팡이를 쥐거나 투영구를 돌리는 즉시, 바닥의 마력수를 솟구치게 만들어 시야와 술식을 동시에 차단할 수 있는 위치였다.
엘리시아는 그 거리감을 알아챘다. 렌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배신에 대한 분노조차 없었다. 그저 고대 도서관의 훼손된 고문서를 대하듯, 사실과 위험도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관찰자의 눈빛이었다.
그 무감각한 경계심이 엘리시아의 숨통을 더 죄어왔다.
"내가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알았든 몰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네 가문은 나를 죽이려 했고, 그 수단으로 너를 서고 안으로 밀어 넣었어. 네가 쥐고 있던 채증용 공명석도, 칼릭스의 지시가 아니라 네 가문의 결재 라인을 타고 내려온 도구였겠지.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너는 이미 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야."
엘리시아의 호흡이 멎은 듯 굳어졌다. 그녀는 손에 쥔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증명해 온 학문적 성취와 가문의 명예가, 실은 대침묵 이전의 지식을 매장하고 진실을 아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교한 족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이 독점해 온 형식 마법 체계.
정해진 술식 외의 모든 직관적 영창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마력의 맥을 읽는 행위를 미신으로 치부했던 아카데미의 규율들.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이 바로 이 어두운 도서관 관리실 금고 안에 묻혀 있었다.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종이를 찢을 건가?"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찢어서 증거를 없애고, 칼릭스에게 모든 혐의를 덮어씌운 뒤 보나파르트의 충실한 후계자로 남을 생각인가? 아니면 집행관들에게 넘겨 네 가문의 이름을 교내 청문회 단상 위에 올릴 텐가."
선택을 요구하는 렌의 어조는 서늘했다. 그것은 엘리시아가 지금까지 렌에게 강요해 왔던 수많은 규정과 원칙들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뒤편에 구금되어 있는 칼릭스에게 닿았다. 칼릭스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엘리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파멸은 정해져 있다는 조롱이었다.
이어 엘리시아는 다시 렌을 보았다. 렌의 낡은 사서복 소매에는 아직도 배수관에서 튀어 오른 녹물과 흙탕물이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가문의 비호도, 아카데미의 직위도 없었지만, 바닥을 흐르는 마력의 실타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쥐고 있던 결의서를 렌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를 쥔 그녀의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회수해 가요."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관리실의 습한 공기를 가르고 똑바로 울렸다.
"이 문건은 내가 서고의 비인가 출입을 승인한 당사자로서, 정식 감사 절차가 시작될 때 증거물로 제출하겠어요. 내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든, 그 배후에 누가 있든 간에…… 내가 확인한 기록을 내 손으로 인멸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녀는 투영구의 초점을 렌의 발밑이 아닌, 금고 중앙의 검은 석판으로 옮겼다.
"나는 아카데미의 수석이고, 지식을 다루는 마법사예요. 가문의 사냥개 노릇을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건, 행동으로 증명하겠어요."
렌은 엘리시아를 잠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계산이나 도망칠 구석을 찾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가문의 죄과를 온전히 마주하겠다는 명백한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렌은 손을 뻗어 그녀가 건넨 결의서를 낚아챘다. 바스락거리는 양피지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렌은 종이를 접어 품 안의 마도서 갈피 사이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증거물은 내가 보관하지."
렌이 엘리시아를 지나쳐 금고 정면으로 다가섰다.
"네 가문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저 석판 안에 든 기록부터 감당해야 할 거야. 네가 배워온 마법의 기초가 저 안에서 완전히 부정당할지도 모르니까."
렌은 금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무너진 주철 틀 안쪽, 은색 룬 문자를 뿜어내던 검은 석판이 렌의 접근에 맞춰 더욱 거칠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석판 표면에 새겨진 홈들은 단순한 문자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목 없는 고대 마도서의 가죽 표지에 음각된 선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기하학적 궤적이었다.
석판의 중심부에서 회전하는 차가운 마력의 기류가 렌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대침묵 이전의 잠금 체계였다.
렌은 품속 깊은 곳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이 마도서의 두꺼운 표지에 닿는 순간, 책 안쪽에서 흘러나온 묵직한 온기가 렌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그 온기가 금고 안의 냉기와 부딪히며 미세한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뒤편에서 칼릭스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멈춰라! 그 석판에 손을 대지 마! 그건 상임이사회의 최고 등급 봉인이다! 네놈 같은 무재능 사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집행관들이 칼릭스를 더욱 강하게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마도서를 꺼내 들었다.
책 표지의 낡은 룬 문자가 금고 내부의 검은 석판과 마주하는 순간, 두 개의 서로 다른 고대 유물이 하나의 파장을 그리며 관리실 전체를 울리는 깊은 파동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공명음은 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잘게 떨게 만들었다.
렌은 손에 든 고대 마도서의 무게를 가늠했다. 표지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검은 석판 중앙에 파인 기하학적 홈은 마도서 표지의 돌출된 룬 궤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형태였다.
옆에 선 엘리시아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손에 쥔 규격 집광 투영구의 금속 테두리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맞물리면 결계의 심층핵이 완전히 개방돼요. 상임이사회가 아카데미 교재의 편찬 권한을 독점하면서 정립한 표준 술식 체계…… 그 기반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게 두려운 건가?"
렌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제식 마법은 정돈되고 안전해요. 통제되지 않는 고대 마법은 재앙일 뿐이라고, 그렇게 배워왔어요. 그런데…… 방금 그 서류에 찍힌 상임이사회의 직인은 너무나 명확했죠. 진실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면, 내가 배운 정통성은 도대체 무엇 위에 서 있는 건가요?"
엘리시아는 자신의 지팡이 끝을 검은 석판의 모서리로 향했다. 마력을 불어넣지 않은 채 그저 겨누고만 있는 동작이었다. 만약 그녀가 지금 당장 규격 집광 투영구의 고출력 광선을 쏟아붓는다면, 석판의 핵을 깨뜨려 영구히 침묵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이 교무처 상임이사회의 규율을 따르는 수석으로서 취해야 할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렌은 그녀의 지팡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가죽 표지의 룬을 석판의 중앙 홈에 수직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지식은 억누르고 가둘수록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뿐이야. 상임이사회가 틀어쥔 체계가 진짜 정통이라면, 과거의 기록 따위에 흔들릴 이유가 없겠지."
렌은 망설이지 않고 마도서를 석판의 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딸깍, 하는 명료한 기계적 마찰음이 관리실 안을 울렸다.
순간, 검은 석판의 표면을 뒤덮고 있던 먼지와 마력 잔재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홈을 따라 붉은빛과 푸른빛의 마력선이 교차하며 치솟았다. 마도서의 갈피가 저절로 거세게 펄럭이며, 종이 사이에 끼워 두었던 상임이사회의 비밀 결의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쪽에서 결박당한 채 버둥거리던 칼릭스가 악을 썼다.
"닫아라! 당장 뽑아내! 그 봉인은 대침묵의 규율이다! 학무국 전체가 뒤집힌단 말이다!"
하지만 렌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양손으로 마도서의 등가죽을 단단히 쥐고, 석판에서 역류해 나오는 거친 마력의 맥을 몸으로 받아냈다. 무재능이라 불리며 마력의 양을 늘리지 못했던 그의 체질은, 역설적으로 마력의 결을 왜곡 없이 읽어내고 흘려보내는 데 가장 적합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렌은 팔을 타고 올라오는 날카로운 파동을 바닥의 편마암 지지대로 흘려보냈다. 거친 마력이 정돈된 파형으로 바뀌자, 석판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던 세 개의 동심원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치익 하는 증기음과 함께 석판의 중앙핵이 열렸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파괴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푸른빛을 띤 수천, 수만 개의 미세한 마력 입자였다. 그 입자들은 무너진 천장과 침수된 바닥 사이에 넓게 퍼져 나가며, 관리실의 허공 전체를 거대한 입체 투영막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건…… 투영 마법이 아니야."
엘리시아가 지팡이를 내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억 그 자체예요. 기록핵의 파동을 공간에 직접 인화하고 있어……."
허공에 떠오른 상은 수백 년 전, 대침묵이 발생하던 바로 그날의 도서관 지하 회랑이었다.
지금처럼 물에 잠기고 무너지지 않은, 순백의 대리석 기둥들이 끝없이 늘어선 웅장한 고대 마도서관의 풍경이었다. 수백 명의 사서들이 서고 사이를 오가며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손끝에서는 규격화된 영창이나 마법진 없이도 자유로운 마력의 형상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기록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화면 속에 나타난 침입자들은 이단의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엘도리아 아카데미의 전신이 된 초기 마법사 길드의 정예 병력들이었고, 그들의 선두에는 교무처 상임이사회의 초대 문양이 새겨진 중장갑 예복을 입은 자들이 서 있었다.
투영된 과거의 음성이 관리실 공기를 진동시켰다.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위험하다. 지식이 만인에게 분산되면 질서가 무너지고, 통제할 수 없는 혼란만이 남는다. 도서관의 심층 지식망을 절단하라. 언어를 규격화하고, 등록된 혈통만이 술식을 영창할 수 있도록 회로를 봉인해야 한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기록 속의 침입자들은 고대 마도서관의 중앙 마력핵을 강제로 정지시키기 위해 거대한 차단 쐐기를 박아 넣었다. 수많은 고대 사서들이 기록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으나, 통로가 차단되고 차례로 쓰러져 갔다. 마력핵이 파괴되면서 지식과 마법의 거대한 흐름이 끊겼고, 세상의 마력 밀도는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그것이 바로 대침묵이었다.
자연적인 재앙도, 마력의 고갈도 아니었다. 기득권을 쥔 소수의 귀족과 마법사들이 지식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대 도서관의 맥을 인위적으로 절단해 버린 잔혹한 학살이자 통제 공작이었다.
엘리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거짓말……."
그녀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침묵은 고대 마법사들의 오만으로 일어난 마력 역류 재앙이라고…… 그래서 형식을 갖춘 안전한 마법만이 정답이라고 배웠는데……."
투영된 마지막 잔상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한 고대 사서가 자신이 품고 있던 가죽 장정의 책을 비밀 수납벽 안의 검은 석판에 결속시키는 모습이 비쳤다.
‘언젠가 지식의 가치를 아는 자가 와서, 침묵을 깨뜨리기를.’
그 사서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은 렌이 입고 있는 낡은 폐기 마도서관 사서복의 옷깃 문양과 정확히 같았다.
기록의 투영이 끝나고, 푸른 마력 입자들이 관리실 바닥의 수면 위로 눈송이처럼 가라앉았다.
허공에는 오직 침묵만이 흘렀다.
칼릭스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굳어 있었고, 그를 제압하고 있던 집행관들 역시 무기를 쥔 손을 늘어뜨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켜온 아카데미의 근간과 학칙이, 날조된 역사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렌은 홈에 꽂힌 마도서에 손을 얹었다.
석판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며 마도서의 백지였던 첫 페이지에 은빛 잉크로 룬 문자들이 빠르게 새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봉인되었던 고대의 지식망이 사서의 책 속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렌은 마도서를 천천히 회수하여 품에 안았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이게 네가 증명해야 할 진실이다."
렌의 담담한 목소리가 물방울 떨어지는 차가운 관리실에 낮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