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릭스의 입술이 닫히며 마지막 음절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 끝에 매달린 세 개의 은제 고리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승강구 철문 틀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문양이 핏빛으로 번뜩이더니, 문틈 사이로 푸른빛의 살얼음 같은 마력 결이 뿜어져 나왔다. 정합의 족쇄가 마력핵 영구 동결 모드로 전환되는 파동이었다. 들이쉬는 숨마저 차갑게 굳어버릴 듯한 냉압이 통로 벽면의 이끼를 순식간에 하얗게 바스러뜨렸다.
"지금이야!"
엘리시아가 소매에서 꺼내 든 것은 황동 테두리가 둘러진 아카데미 정규 집광 투영구였다. 시험과 측량에 쓰이도록 규격화된 표준 마법 도구였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회전하는 렌즈는 전혀 다른 용도로 각도를 틀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투영구 중심 핵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마력이 렌즈의 다각 프리즘을 통과하며 날카롭게 꺾였다. 일곱 갈래로 굴절된 푸른 광선이 문틀 상단, 정합의 족쇄 술식이 가장 빽빽하게 교차하는 중앙 접속 룬을 정확히 타격했다.
본래 아카데미의 형식 마법은 술식의 규격을 엄격히 준수할 때만 작동한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규격 마법의 굴절률을 고의로 비틀어, 족쇄의 감응 소실점에 완전히 반대되는 파장의 간섭광을 찔러 넣었다.
지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검붉은 문양이 거칠게 뒤틀렸다. 문틀을 타고 번지던 결빙의 기운이 방향을 잃고 헛돌기 시작했다.
"멍청한 짓을."
문 너머 칼릭스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규 도구로 학무국의 제압식을 흔들 수 있다고 배웠더냐,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주파수를 교란해 보았자 정합의 족쇄는 자가 수복된다. 찰나를 벌었을 뿐이다."
칼릭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짓이기듯 내리쳤다. 비틀렸던 검붉은 회로가 다시 중심 룬으로 결속되며 배로 짙은 냉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집행관들의 사슬창 끝에서도 일제히 은색 뇌화가 튀었다.
"충분합니다."
렌이 낮게 읊조렸다. 찰나면 족했다.
렌의 왼손이 바닥 석판의 깊게 패인 틈새를 움켜쥐었다. 품속에 품은 제목 없는 고대 마도서의 두꺼운 가죽 표면이 바닥의 진동에 반응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서고에서 읽어 낸 고대의 문장은 형식적인 주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력이 흐르는 자연스러운 결이자 통로였다.
렌은 바닥 아래 숨겨진 심상 합금 배관의 마력 흐름을 감지했다. 아카데미가 수백 년 동안 콘크리트와 억제 룬으로 짓눌러 둔 배수로의 거대한 맥동이, 족쇄가 비틀린 바로 그 틈새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정합의 족쇄는 형식에 묶인 마력만을 구속합니다."
렌이 오른손으로 수압 제어 레버의 잠금 핀을 부러뜨리듯 뽑아 올렸다. 뻑뻑하게 굳어 있던 밸브의 톱니들이 맞물리며 거대한 기계음이 지하 암반을 울리기 시작했다.
"본래 배수관을 흐르던 고대의 수류는 법통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렌의 검지가 석판 바닥에 굵게 파인 마력 유로를 따라 단숨에 미끄러져 내렸다. 맨손 끝에서 번져 나간 푸른빛 맥동이 차단벽 아래 묻힌 심상 합금의 수로망을 관통했다.
우르릉거리는 둔중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차올랐다. 통로를 메우고 있던 서늘한 냉기가 바닥 밑바닥에서 치솟는 거센 수압의 열기와 충돌하며 하얀 김을 뿜어냈다.
"무슨 짓을……!"
철문 너머에서 칼릭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단단하게 통제되던 그의 음성에 처음으로 틈이 벌어졌다.
지상 관리실 바닥을 받치고 있던 오래된 편마암 지지대가 비틀리는 소리가 회랑을 타고 내려왔다. 렌이 개방한 것은 단순한 지하 배관이 아니었다. 대침묵 이전부터 폐기 마도서관 심층부의 거대한 결계열을 식히기 위해 순환하던, 고밀도 마력이 녹아든 원초적인 수류였다. 수백 년간 억눌려 있던 수압이 배출구를 찾아 승강구 하부 틈새로 일제히 쏠려 들었다.
칼릭스가 다급히 지팡이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전원, 방진을 바닥으로 전환해라! 차단벽 하부를 결빙시켜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시아가 투영구로 비틀어 놓은 정합의 족쇄는 여전히 중앙 접속 룬에서 헛돌며 집행관들의 마력 명령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규격화된 아카데미의 방어 술식은 정형화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날것의 수류를 규정된 이단 마법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술식의 톱니바퀴가 헛물리며 문틀 전체에서 붉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콰아앙!
승강구 철문 바로 앞, 관리실 바닥의 중앙 석판이 솟구쳐 오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균열 사이로 푸른빛을 머금은 짙은 탁류가 폭포처럼 치솟았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수압은 일렬로 늘어서 있던 집행관들의 은제 결계 방패를 밑바닥부터 쳐올렸다.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방패를 지탱하던 집행관 둘이 무게중심을 잃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깔려 있던 은도료 차단선들이 수류에 쓸려 나가며 끊어졌고, 관리실 내부에 구축되어 있던 구속 결계망이 일제히 파열음을 내며 꺼져 들어갔다.
엘리시아는 솟구치는 물보라 속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투영구의 초점을 넓히며 부서진 문틈 사이를 향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칼릭스 교수님, 아카데미 감사 규정 제7조를 위반한 건 당신입니다."
칼릭스의 흑단 지팡이가 탁류의 파편을 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던 그의 로브 자락이 진흙 섞인 마력수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지팡이 끝의 은제 고리 하나는 수압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일그러져 멈춰 서 있었다.
"감히 일개 학생이 학무국의 권능을 입에 담느냐!"
"권능은 절차에서 나옵니다!"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붕괴하는 관리실의 굉음을 뚫고 울렸다.
"퇴로 차단과 연쇄 구속 인가는 학장실 직속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았어요. 당신이 손에 쥔 건 정당한 집행권이 아니라 개인적인 증거 인멸에 불과합니다!"
렌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완전히 개방된 배수 레버 아래로 마지막 마력의 매듭을 흘려 넣었다.
끼기긱, 쾅!
배수실 안쪽의 주 밸브 차단판이 완전히 젖혀지며 한 층 더 거대한 수류가 관리동 하부를 때렸다. 지상 관리실 바닥의 절반을 차지하던 석판들이 지지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아래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무장 집행관들의 대열은 완전히 무너졌다. 사슬창의 뇌화는 쏟아지는 물줄기에 닿아 허공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기울어진 바닥 틈새로 관리실 내부의 집기와 기록 보관함들이 쏟아져 내렸다. 두꺼운 승강구 철문은 경첩이 뜯겨 나가며 지상 쪽으로 털썩 쓰러졌다. 비상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봉쇄선이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갔다.
렌은 젖은 옷자락을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승강구 너머, 붕괴한 바닥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관리실 제어반의 금속 콘솔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석판 틈으로 검붉은 녹물과 마력수가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승강구 문틀을 짚고 일어선 칼릭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 뺨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에는 평소의 학구적인 오만함 대신 날카로운 살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수직으로 내리찍으며 쓰러진 집행관들을 향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일갈했다.
"전열을 재정비하라! 즉결 처형 대상이다. 뇌화창을 장전해 두 놈의 사지를 바닥에 박아 넣어라!"
물속에서 버둥거리던 집행관 세 명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허리춤에서 푸른 번개가 튀는 투척용 사슬창을 뽑아 들었다. 쇠사슬이 긁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제어실 천장을 울렸다. 고전압의 뇌전이 사슬 표면을 타고 흐르며 바닥에 고인 탁류를 찌릿하게 태웠다.
그러나 그들이 창을 겨누기도 전에 엘리시아가 한 발 앞서 움직였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소형 집광 투영구의 다이얼을 능숙하게 비틀었다. 집광 렌즈에서 뻗어 나온 백색 광선이 바닥에 고인 물줄기를 정확히 관통했다. 빛은 무작위로 퍼지지 않았다. 수류에 휩쓸려 잘려 나간 은도료 배선, 바로 그 절단면의 구리 심선에 렌즈의 초점이 닿았다.
파지지직!
순간적으로 단락된 고대 회로의 잔류 마력이 은도료를 타고 역류했다. 물웅덩이 전체가 번뜩이는 은빛 전류망으로 돌변했다.
"크아악!"
발을 딛고 서 있던 집행관들의 무릎 아래로 강한 감전 충격이 번졌다. 사슬창을 쥐려던 집행관들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며 굳었고, 번개를 머금은 창날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진흙 속에 처박혔다.
"감히 폐기 도서관의 천출 사서 놈과 결탁해 학무국의 정당한 영장을 거부하는가, 엘리시아!"
칼릭스의 지팡이 머리에서 날카로운 마력의 탄환이 응축되었다. 그가 지팡이를 겨눈 곳은 렌이 아니라 바로 엘리시아의 미간이었다. 수석 학생을 향한 실낱같은 배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당한 영장에는 학장 직속의 승인 인장이 있어야 하죠. 당신의 사설 통제반 인장 말고!"
엘리시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녀는 젖은 옷자락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벽면 상단의 비상 제어반을 가리켰다.
"아카데미 복무 규정 제14조 2항, 긴급 통제권 발동 시 최소 3인 이상의 평의원 연서가 첨부되어야 하며, 대상 구역의 기록핵을 임의로 차단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서고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배수로 차단 밸브의 물리적 봉쇄를 명령했어요. 기록핵의 회선도 잘라 두었더군요. 이건 조사가 아니라 학살 준비입니다."
엘리시아의 차갑고 또렷한 음성이 관리실 벽을 타고 울렸다. 무릎을 꿇은 채 감전의 여파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집행관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은 칼릭스의 직속 수하들이었지만, 엄연히 아카데미의 규율과 학칙에 묶여 있는 정규 무장 요원들이었다. 학생 수석의 입에서 법조문이 정확한 조항과 함께 쏟아져 나오자, 명령에 따라 무기를 쥐었던 손끝에 망설임이 서렸다.
"닥쳐라! 저자는 금서의 잔류 마력을 다루는 이단이다! 그자를 비호하는 순간 너 역시 동일한 죄목으로 학적에서 영구 박탈된다!"
칼릭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은제 고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회전했고, 백색 섬광의 마력탄 세 발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공격의 궤적을 예측한 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렌은 바닥에 흩어진 석판 파편을 딛고 비스듬히 몸을 던졌다. 그는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붕괴한 바닥 틈새로 드러난 고대 배수관의 굵은 밸브 손잡이를 걷어찼다.
쾅!
밸브가 헛돌며 배관 내부의 압축 증기가 치솟았다. 지하 마력수와 섞인 뜨거운 증기 막이 엘리시아와 칼릭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궤도를 잃은 마력탄이 증기 속에서 굴절되며 관리실 천장의 석재 몰딩을 부수어 버렸다. 파편과 먼지가 하얗게 비처럼 쏟아졌다.
증기 너머에서 칼릭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비겁한 쥐새끼가……!"
칼릭스는 품 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정합의 눈을 꺼내 들었다. 렌즈 형태의 보석이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증기 막 너머의 마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투시하기 시작했다. 그 붉은 안광이 증기를 가르고 렌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냈다.
"사서 놈을 먼저 짓이겨라! 저놈의 손에 들린 고서를 확보해!"
그러나 렌의 목적은 칼릭스와의 육탄전이 아니었다.
렌은 자욱한 증기 속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관리실 한구석에 반쯤 기울어져 있는 주 제어반 콘솔로 쇄도했다. 바닥이 무너지면서 콘솔의 하부 외벽이 뜯겨 나가 내부의 복잡한 마도 수정 판과 기계식 톱니바퀴들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수정 판 표면에는 학무국의 표준 규격 인장이 찍힌 푸른색 룬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렌은 품에서 직전에 압수한 칼릭스의 채증용 공명석을 꺼냈다.
공명석 표면에 새겨진 칼릭스의 개인 인장과, 제어반 콘솔 내부의 동력 입력부가 정확히 일치했다. 렌은 망설임 없이 공명석의 모서리를 제어반의 주 동력 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지잉!
거친 기계음과 함께 제어반 전면에 장착된 세 개의 수정 영사구가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했다. 녹색과 청색의 투영 광선이 허공으로 뻗어 나가며 반파된 천장에 기록 문단들을 어지럽게 투사했다.
"그 손 떼지 못해!"
칼릭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명백한 당혹감이 섞여 들었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올려 제어반을 통째로 파괴하려는 듯 거대한 파쇄 술식을 구축하려 했다. 그의 지팡이 끝에 맺힌 은빛 고리들이 맹렬한 속도로 맞물리며 공기를 찢는 고주파를 토해냈다.
그 찰나, 엘리시아가 집행관들의 버려진 사슬창 하나를 발로 걷어차 올렸다.
그녀는 허공으로 뜬 창대를 낚아채 그대로 칼릭스의 발밑, 균열이 간 석판 틈으로 힘껏 내리꽂았다. 창날에 남아 있던 잔류 뇌전이 바닥의 갈라진 틈을 타고 파고들었다.
콰지직!
칼릭스가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의 석재가 마력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꺼풀 더 꺼져 내렸다. 칼릭스의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고, 지팡이 끝에 모이던 은빛 파쇄 술식의 집속점이 허공으로 빗나가 천장 들보를 강타했다. 거대한 석재 기둥 하나가 부러지며 굉음과 함께 둘 사이에 장벽처럼 가로놓였다.
"교수님, 당신의 그 조급함이 모든 걸 증명하고 있군요."
엘리시아는 부러진 석재 기둥 너머로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천장에 투사되기 시작한 제어반의 기록 일지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서고 폐쇄 명령 시간은 어제 오후 4시. 내가 당신의 연구실을 방문하기 세 시간 전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렌을 감시하러 들어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내가 그곳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뒤, 서고의 방어 결계를 강제로 폭주시켜 우리 둘 다 생매장할 계획이었죠."
기둥 뒤편에서 칼릭스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일개 장학생 출신이 아카데미의 유구한 질서를 논하려 들다니. 이곳은 불필요한 의문을 품는 자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너는 지나치게 영리했고, 저 천출 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그것으로 처분의 이유는 충분하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로브를 바로잡으며 부러진 기둥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통상적인 집행 수준을 넘어선, 흑색 룬이 새겨진 마법 통제권 박탈 인장이 들려 있었다. 학무국 보좌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상위 강제 진압 술식이었다.
"집행관들은 들어라. 본관의 비상 전권으로 이 자리의 모든 기록을 폐기하며, 저 두 반역자를 현장에서 영구 동결 처분한다. 따르지 않는 자는 불복종죄로 즉각 참수하겠다."
칼릭스의 엄포에 휘청이던 집행관들이 다시금 허리춤의 보조 단검을 뽑아 들며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바늘 끝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대치 상태 속에서 렌은 묵묵히 제어반의 내부 구조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회로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아래 묻힌 고대 합금 판재의 이음매를 짚어냈다. 칼릭스가 억지로 덧씌워 둔 규격 룬들이 벗겨져 나가면서, 콘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두꺼운 황동제 비밀 수납함의 빗장이 탁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왔다.
서랍이 덜컹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오자, 밀폐되어 있던 납 봉인 원통들과 두꺼운 양피지 묶음이 부서진 콘솔 상판 위로 쏟아졌다. 배수관 파열로 흘러든 마력수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지만, 서랍 내부는 발수 마법이 걸려 있어 종이 한 장 젖지 않은 채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미 제어반 중앙의 마력 수신 핵에 틀어박힌 공명석의 파동을 타고, 푸른빛의 마력 잔상이 콘솔 상공으로 더욱 넓은 부채꼴 모양을 그리며 펼쳐졌다. 칼릭스의 개인 서명과 함께 은폐되어 있던 비공식 행정 기록들이 줄줄이 허공에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멈춰라!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칼릭스가 흑색 룬 인장을 쥔 채 쇄도하려 했다. 그러나 무너진 석재 기둥의 잔해와 발밑을 채운 마력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엘리시아가 바닥에 꽂아 넣은 사슬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류 뇌전과 집광 투영구의 왜곡된 마력이 물을 타고 번져, 집행관들조차 섣불리 발을 들이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 중 가장 붉은 인장이 굵게 박힌 문건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빠르게 행간을 훑어내려가던 그녀의 시선이 하단의 서명란에서 굳어졌다.
"이 문서... 학장님의 결재가 아니라, 교무처 상임이사회의 날인이 찍혀 있어."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종이를 집행관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올렸다.
"발령 일자는 사흘 전. 폐기 마도서관 지하 심층 구역의 자율 방어 결계를 강제 과부하 상태로 유도하여 영구 폐쇄 조치할 것. 발생한 마력 폭주는 관리 사서의 금서 접촉으로 인한 폭주 사고로 위장할 것. 그리고 현장에 투입될 감시 요원은 진실 유출 방지를 위해 현행범과 함께 격리 조치할 것."
집행관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번졌다. 칼릭스의 독단적인 현장 지휘인 줄로만 알았던 명령이, 실제로는 아카데미 상임이사회의 비밀 결의였으며 그 목적이 증거 인멸과 은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탓이었다.
"거짓이다! 선동에 휘둘리지 마라!"
칼릭스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의 창백해진 안색과 떨리는 지팡이 끝은 문서의 진위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인장으로 제어반 자체를 내려쳐 부수려 했다. 물리적으로 핵을 파괴해 투영을 꺼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렌의 손이 더 빨랐다. 렌은 제어반의 고대 회로 분기점을 손가락 끝으로 짚어, 칼릭스의 인장이 방출하는 충격을 금속 접지선으로 고스란히 흘려보냈다. 둔탁한 금속음만 울렸을 뿐, 제어반의 투영은 꺼지지 않았다.
렌은 허공에 떠오른 방대한 마력 지도와 지하 배관 계통도를 응시했다. 수백 년간 덮여 있던 도서관 지하의 본래 설계도가 공명석의 연산력을 빌려 적나라하게 복원되고 있었다.
"칼릭스 교수가 찾으려던 것은 금지된 마도서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렌이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콘솔 바닥에 쏟아진 문서들의 날짜와 결재 번호를 정확히 대조하고 있었다.
"도서관 지하에 잠든 대침묵 이전의 기록 장치 자체를 지우려 한 겁니다. 이단 마법사를 색출한다는 명분은 허울에 불과했습니다. 고대 도서관의 자율 방어 결계는 외부 침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지하 깊은 곳에 보존된 원본 기록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환기 순환계였습니다. 상임이사회는 그 기록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겁니다."
"네놈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느냐! 일개 서고지기 주제에 감히 아카데미의 대의를!"
칼릭스는 이를 갈며 지팡이를 다시 치켜들었다. 하지만 집행관들은 더 이상 그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투영된 마력 문서의 하단에는 집행관 부대장의 직인마저 날조되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이용당하고 버려질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엘리시아가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문건이 바스락거렸다.
"대의라고 하셨습니까? 교무처 상임이사회 몇몇의 안위를 위해 아카데미 규정 4조와 17조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정규 장학생과 관리 직원을 결계 폭주로 위장 살해하려던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대의인가요?"
"엘리시아 보나파르트, 네 가문조차 이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게냐?"
칼릭스의 협박 섞인 추궁에도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내 가문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당신이 파놓은 함정에 개처럼 끌려 들어가 침묵 속에서 죽는 것보단 낫습니다."
렌은 투영된 기록핵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콘솔 옆 벽면의 붕괴된 틈새 너머를 응시했다. 무너진 비밀 수납벽 안쪽, 칼릭스가 은폐하려 했던 두꺼운 내화 금고 한가운데에 고대 문자로 봉인된 검은 석판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 석판의 문양은 렌의 품에 들어 있는 고대 마도서의 표지 룬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도서관 관리동을 뒤흔든 폭발음은 이미 바깥 광장까지 울려 퍼졌을 터였다. 아카데미 상층부가 결코 덮을 수 없는 균열이 이곳 지하에서부터 지상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