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자격 심사 대상자, 도미닉 바우어.”
요새화된 철문 앞, 서기실 직원이 철제 안경 너머로 낡은 문서를 치켜들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스며든 새벽안개가 구둣발 주위를 차갑게 맴돌았다.
“신용 등급 최하위, 마나 자산 전무. 선대 부채 총액 팔억 삼천만 골드. 이 서류가 가짜가 아니라면 자네는 지금 입학처가 아니라 수도 제삼 변전소 폐기장으로 가야 맞네.”
직원은 깃펜 끝으로 도미닉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검은 제복에 달린 단추 하나까지 꼼꼼히 살피는 눈동자에 노골적인 멸시가 번졌다.
“입학 허가서 제삼조를 보십시오. 총재 직인이 유효하다면 서기실은 서류 접수를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 자네 같은 파산자 시체한테 소명할 권한 따위는 없어. 중앙 은행의 추심 영장이 하루만 늦게 접수되었어도 자네 뇌수는 이미 전력 공급용 수조에 담겨 있었을 텐데.”
“하루 늦은 게 아니라 영장 자체가 기각되었습니다. 불법 유용 마나로 발부된 청구서는 무효니까요. 혹시 그 사유를 입학처장이 아니라 감사원 본청에 직접 물어보시겠습니까?”
도미닉이 턱을 약간 치켜들며 직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뭐라고?”
“직원 번호 삼일칠번. 지난달 감사 지침 개정안에 따라 서류 접수를 고의로 지연시킨 하급 관리는 징벌적 지연 이자를 개인 급여에서 공제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시각이 오전 칠시 오십사 분인데, 팔 시 정각까지 접수인을 찍지 않으시면 분당 삼십 골드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습니다.”
직원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깃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더니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인장이 찍혔다.
쾅.
붉은 마나 인장이 양피지 위에서 타오르다 스러졌다. 직원은 침을 퉤 뱉으며 철제 출입증을 바닥으로 던졌다.
“주워 가라, 시체 놈. 어차피 오늘 치러질 적격성 실기 평가에서 네놈 장기가 몇 개나 담보로 잡힐지 아주 기대되는군.”
도미닉은 허리를 숙여 차가운 돌바닥에서 출입증을 집어 들었다. 옷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 육중한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안뜰은 일반적인 아카데미의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잔디밭이나 분수대 대신 높이 솟은 감시탑과 사슬로 묶인 마나 측정계가 회랑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오가는 학생들의 가슴팍에는 화려한 문장 대신 각자의 마나 잔고를 뜻하는 푸른색 숫자 판이 매달려 깜빡였다.
“저게 그 바우어 가문의 잔여 담보물이냐?”
“팔억 골드짜리 살아있는 빚더미라더니, 꼴이 저게 뭐야. 단복 원단조차 이십 년 전 구형이잖아.”
속닥거리는 비아냥이 회랑 곳곳에서 날아와 박혔다. 값비싼 은실로 테두리를 두른 제복을 입은 귀족 신입생들이 도미닉을 벌레 보듯 훑어보며 비켜섰다. 도미닉은 그들의 수군거림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본관 중앙의 원형 평가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가장 입구에는 두꺼운 양장본 법전을 옆구리에 낀 여학생 하나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단정하게 땋아 내린 은갈색 머리카락과 날카롭게 벼려진 짙은 녹색 눈동자가 도미닉의 낡은 옷차림에 닿았다.
“바우어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맞지?”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탁 덮으며 다가왔다.
“누구시죠?”
“클라라 보스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렸어.”
“보스웰이라면 수도 제일 마나 신탁의 대주주 가문이군요. 고리대금업으로 번 돈으로 장학 재단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만, 채무자에게 무슨 용무입니까?”
도미닉의 건조한 대꾸에 클라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귀가 험하네. 난 가문의 방식을 옹호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네가 정문에서 서기실 직원을 상대로 써먹은 그 조항, 회생법 제칠조 말이야. 그걸 일개 채무자가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집행 정지를 걸었다는 게 사실인지 확인하러 왔어.”
“그게 궁금해서 길을 막은 겁니까?”
“현행 금융 마법 체계는 썩었어. 순수한 마법 원형식을 은행의 대출 계약으로 왜곡해서 사람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지. 그런데 넌 그 왜곡된 규칙의 빈틈을 찔러서 집행관을 역으로 털어먹었잖아. 어떻게 한 거지?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마나 연결 경로를 육안으로 읽어낸 거야?”
클라라의 눈빛등에는 호기심을 넘어선 집요한 탐구욕이 묻어 있었다. 도미닉은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한 뒤 고개를 저었다.
“규칙을 연구한 게 아닙니다. 장부를 확인했을 뿐이죠. 돈이 오간 자리에 마나가 흐르고, 마나가 흐른 자리에는 반드시 결산의 흔적이 남습니다. 마법은 신비가 아니라 단순한 거래 명세표에 불과하니까요.”
“마법이 고작 거래 명세표라고?”
클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원형 마법의 숭고한 구조를 고작 회계 장부 따위로 격하시키다니, 실망이네. 넌 그저 빚에 쫓겨 벼랑 끝에 몰린 사기꾼에 불과했던 건가?”
“숭고한 마법 타령은 은행에 이자를 제때 낼 수 있는 귀족 영애나 부릴 수 있는 사치입니다. 제게 마법은 갚아야 할 원금이고,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담보 계약입니다.”
도미닉은 미련 없이 클라라를 지나쳐 평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 평가장은 사방이 마나 차단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경기장이었다. 천장 중앙에는 거대한 기계식 천칭이 매달려 있었고, 양쪽 접시에는 각각 황금색 마정석과 핏빛을 띤 붉은 계약서 뭉치가 얹혀 있었다.
“전원 정렬하라.”
단상 위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얇은 은테 안경을 쓴 화려한 금발의 청년이 완벽하게 재단된 감청색 제복을 입은 채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세 개의 금장 배지는 그가 아카데미 자치 집행부장임을 나타냈다.
베르톨트 슈테판.
하층민 출신으로 오직 잔인한 채권 회수 실적만으로 특례 진학하여 전 학년 수석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올해 신입생 적격성 평가는 단순하다. 너희가 아카데미에 들어와 중앙 은행의 자산을 관리할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당장 길거리로 내쫓겨 채무 불이행자로 영혼을 몰수당할 쓰레기인지 가려내는 자리다.”
베르톨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의 마법진이 회전하며 중앙에 푸른빛을 뿜는 구체 세 개가 솟아올랐다.
“모의 채권 집행석이다. 각자 배정된 상대와 일대일로 마법을 겨루되, 발현에 사용된 모든 마나는 현 시간부로 개인 신용 계좌에서 실시간으로 대출 처리된다. 제한 시간 오 분 내에 상대의 마나 잔고를 바닥내 파산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자만이 합격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곧 빚을 지는 행위였다. 실습 중에 사용하는 마나조차 공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패배자의 마나 사용액은 승리자가 회수 실적으로 가져간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자퇴서를 쓰고 생체 골렘 구동실로 걸어가도록.”
베르톨트의 입꼬리가 능글맞게 올라갔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도미닉을 향해 내리꽂혔다.
“첫 번째 대진을 발표하지. 도미닉 바우어.”
호명과 함께 전광판의 숫자가 교차했다. 맞은편 대기석에서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 남학생이 거만하게 걸어 나왔다.
“길버트 폰 아르님. 바우어 가문의 주 채권자 중 하나인 아르님 자작가의 삼남이다.”
베르톨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덧붙였다.
“흥미로운 대진이군. 집행관 후보생과 채권자 가문의 대리전이라. 규칙은 설명했다. 시작하라.”
길버트가 허리춤에서 보석이 촘촘히 박힌 호화로운 마법봉을 꺼내 들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팔억 골드짜리 거지 새끼가 뻔뻔하게 여길 기어들어 와? 네놈 할아버지가 우리 가문에서 빌려 간 돈의 이자만 쳐도 네놈 뼈마디를 열 번은 갈아 마셔야 해.”
도미닉은 아무런 무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과 흑연 심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을 뿐이었다.
“아르님 가문의 대출 계약서는 이미 검토했습니다. 연이율 삼십사 퍼센트. 제국 마나 금융법이 허용한 법정 최고 금리를 칠 퍼센트 초과한 불법 사채 계약이더군요.”
“닥쳐라! 내 마나는 정당하게 아르카 은행에서 신용한도를 부여받은 특등품이다!”
길버트가 마법봉을 허공에 휘둘렀다.
웅웅거리는 굉음과 함께 그의 발밑에서 세 겹으로 얽힌 황금색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공기 중의 산소가 타들어 가며 거대한 화염의 창 세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 등급 고위 화염 마법, 연옥의 창.
“크하하! 일 회 시전에 무려 삼천 골드짜리 대출 승인이 떨어졌다! 네놈 같은 빈털터리가 평생 구경도 못 할 화력으로 뼈까지 태워주마!”
관람석의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저 화력을 어떻게 막아? 신입생 수준의 방어막으로는 전신이 녹아내릴 텐데.”
“도미닉 저 녀석, 방어 마법을 전개할 한도조차 없을 텐데 미친 거 아니야?”
클라라 역시 미간을 굳힌 채 법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에도 도미닉의 행동은 자살 행위에 가까워 보였다. 도미닉은 마나를 끌어올리지도, 회피할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길버트의 마법진 가장자리에 새겨진 작은 룬 문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염의 창, 전진!”
길버트의 외침과 함께 세 자루의 불기둥이 공기를 찢으며 도미닉을 향해 쇄도했다. 바닥의 대리석이 열기에 녹아내려 검게 그을렸다.
도미닉은 침착하게 흑연 심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차용인 길버트 폰 아르님. 거래 식별 번호 구칠사-이일.”
도미닉의 입술에서 차가운 숫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용 마나 출처, 아르님 가문 예탁 계좌 제사 번. 담보물, 수도 남부 곡물 창고 마나 공급권. 승인 코드 불일치.”
“뭐,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당신의 부친은 어제 자정부로 남부 곡물 창고를 담보로 다른 사모 펀드에 이중 저당을 설정했습니다. 즉, 당신이 지금 당겨 쓰고 있는 신용 한도는 실재하지 않는 허위 담보에 기반한 불법 대출입니다.”
도미닉의 손끝에서 희미한 회색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불꽃을 향해 뻗어나가지 않았다. 대신 길버트의 발밑, 마나를 공급하는 바닥의 연결 회로를 정확히 타격했다.
탁.
작은 마찰음과 함께 도미닉의 목소리가 평가장에 울렸다.
“지급 거절. 담보 가치 상실에 따른 강제 대출 회수.”
순간, 도미닉의 코앞까지 날아왔던 세 자루의 화염 창이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불꽃의 황금빛이 급격하게 바래더니, 잿빛 연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내 마법이 왜……!”
길버트가 경악하며 마법봉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허공에 떠 있던 마법진은 동력을 잃고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삐-익!
평가장 천장에 매달린 마나 계측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붉은색 숫자가 전광판을 가득 채웠다.
경고. 차용자의 잔고 부족. 계약 불이행. 잔여 채무 삼천 골드 현장 청구.
“크아악!”
마법이 강제로 취소되면서 발생한 마나 역류가 길버트의 몸을 덮쳤다. 지불되지 않은 마법의 반동이 그의 마나 회로를 사정없이 쥐어짰다. 길버트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고급 제복 위로 시커먼 그을음이 번져나갔다.
“너, 네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마법을…… 내 계좌를 어떻게 건드린 거냐고!”
도미닉은 천천히 걸어가 길버트의 발치에 멈춰 섰다.
“건드린 적 없습니다. 당신이 지불 능력을 상실했을 뿐이죠. 허위 담보로 끌어쓴 마나는 계약 취소와 동시에 은행으로 강제 반환됩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와 마나 역류 손해는 전적으로 시전자 본인의 몫이고요.”
도미닉은 바닥에 떨어진 길버트의 마법봉을 구둣발로 툭 걷어찼다. 마법봉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모의 채권 회수 완료. 몰수 가능 자산, 삼등급 마법봉 일점. 감정가 천이백 골드. 이걸로 당신이 방금 날린 마나 대출금의 일부를 변제 처리하겠습니다.”
평가장 안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도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고, 거대한 방어벽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몇 줄의 금융 규정과 허위 담보 사실을 지적했을 뿐인데, 상급 귀족의 화려한 삼 등급 마법이 시전자의 목을 조르는 덫으로 변해버렸다.
“말도 안 돼…….”
클라라가 들고 있던 깃펜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도미닉의 메마른 등 뒤에 못 박혔다. 상대의 마법식을 해체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이 성립되는 법적, 경제적 기반 자체를 무너뜨려 자멸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마법 이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괴하고 이단적인 방식이었다.
짝, 짝, 짝.
적막을 깨고 단상 위에서 느릿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르톨트 슈테판이 난간에 기댄 채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훌륭하군, 도미닉 바우어. 상대의 대출 취약점을 파고들어 무혈 회수를 달성하다니. 집행관으로서 아주 모범적인 실적이야.”
베르톨트가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의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디딜 때마다 서늘한 금속음이 울렸다.
“하지만 회계 장부만 들여다보느라 정작 중요한 규정을 놓친 모양이군.”
도미닉이 시선을 돌려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규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카데미 특별 내규 제사십이조.”
베르톨트가 품에서 얇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허공에 펼쳐 보였다. 양피지 위에는 푸른빛을 띤 아르카 은행의 공식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교내 실습 중 상대의 자산을 강제 회수하여 파산에 이르게 한 자는, 해당 채무의 부실화로 인해 발생하는 시스템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잔여 연체금의 연대보증 책임을 진다.”
도미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길버트 폰 아르님이 허위 담보로 발생시킨 부실 채무 천팔백 골드. 그리고 그로 인해 손상된 아카데미 실습장 마나 회로 복구 비용 오천 골드. 총 육천팔백 골드의 지급 보증 영장이 방금 네 계좌로 이관되었다.”
베르톨트가 서류를 도미닉의 가슴팍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축하한다, 신입생. 네가 방금 거둔 화려한 승리의 대가로, 네 총부채는 팔억 삼천만 육천팔백 골드가 되었다. 합격과 동시에 빚이 더 늘어났으니 기분이 어떠냐?”
주변의 귀족 학생들이 일제히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기형적인 기술로 발악해 봐야 결국 자본과 규정을 쥐고 흔드는 상층부의 손바닥 안이라는 조소였다.
도미닉은 내밀어진 서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양피지에 적힌 복잡한 마나 차용 번호와 이자율, 그리고 하단에 찍힌 승인 직인을 낱낱이 훑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특정 항목에서 우뚝 멈췄다.
“이 복구 비용 계좌.”
도미닉의 낮은 음성이 베르톨트의 웃음기를 거두어갔다.
“뭐라고?”
“실습장 마나 회로 복구 비용을 청구한 예치 계좌 번호 말입니다. 삼-영-영-구-이-칠.”
도미닉이 고개를 들어 베르톨트의 은테 안경 너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부님이 실종되던 날, 팔억 골드가 일시 송금되었던 바로 그 아카데미 지하 특별 금고의 관리 계정 아닙니까, 베르톨트 선배?”
베르톨트의 입가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안경테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날카로운 살기를 뿜어냈다.
도미닉은 서류 하단의 서명란을 흑연 심으로 강하게 내리누르며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연대보증 계약, 승인합니다. 영수증은 제가 보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