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 부채 청산 아카데미 · 총 3화 · AI 작가 서가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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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은 서명이 끝난 양피지를 두 번 접어 옷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흑연 심의 까만 가루가 엄지손가락 끝에 묻어났지만 털어내지 않았다.

베르톨트의 손가락이 허공을 긁듯 멈칫했다. 여유만만하던 금발 청년의 미간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영수증 원본은 집행부 보관용이다. 돌려받아야겠군.”

“차용증 원본을 채권자가 보관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급 보증 영수증 원본은 대위변제를 약정한 보증인의 권리죠.”

도미닉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제국 금융통일법 제십구조, 보증 채무의 확정 조항입니다. 채무를 인수한 자는 해당 자금이 실제로 투입될 목적지 계좌의 거래 명세를 검증할 권리를 갖습니다. 선배가 방금 제게 내민 종이에 아주 또렷하게 적혀 있던데요.”

베르톨트의 은테 안경 너머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는 구두 끝으로 바닥을 짓이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신입생 주제에 어디서 주워들은 법조문 쪼가리를 들이미는군. 그 계좌가 어떤 곳인지 안다면 그런 한가한 소리는 나오지 않을 텐데.”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도미닉은 품 안의 종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삼-영-영-구-이-칠. 조부님이 쓰러지시던 날 밤, 아르카 은행 본점에서 빠져나간 팔억 골드가 최종적으로 흡수된 종착지입니다. 그 돈이 왜 이 아카데미의 실습장 수리비 계좌와 일치하는지, 집행부장께서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단상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귀족 학생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졌다. 팔억 골드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둔감한 이들의 귀마저 틔울 만큼 거대했다. 길버트가 허위 담보로 날려 먹은 천팔백 골드 따위와는 자릿수부터 달랐다.

“헛소리를 길게 늘어놓는구나, 바우어.”

베르톨트가 품에서 푸른색 집행석을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차가운 마나 광채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번뜩였다.

“그 계좌는 아카데미 전체의 고위험 마나 폐기물을 정화하고 결계를 유지하는 총괄 완충 금고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불명예 자금이나 채무 불이행자의 동결 자산이 잠시 거쳐 가는 임시 유치 계좌일 뿐이지. 네 조부의 파산 잔고가 그곳으로 청산 집행되었다 한들 이상할 게 뭐냐?”

“이상하죠.”

도미닉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잘랐다.

“임시 유치 계좌라면 입금 즉시 국고나 채권단 본계정으로 분배 출금되어 잔고가 영으로 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서명한 청구서에는 여전히 일일 유지 수수료가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마나 백 이십 리터, 금화로 환산하면 사백 골드씩.”

도미닉은 베르톨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돈이 빠져나가지 않고 고여 있다는 건, 그 금고 안에 여전히 활성화된 마나 핵이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부님의 팔억 골드는 분배된 게 아닙니다. 누군가 금고 속에 그대로 처박아 두고 사적으로 굴리고 있는 거지.”

“그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클라라 보스웰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깃펜을 집어 들지도 않은 채, 두 사람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녹색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고의 빛이 서려 있었다.

“도미닉 바우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계좌는 당신 같은 일개 신입생이 들쑤실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보스웰 양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데.”

베르톨트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끼어들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도미닉을 꿰뚫고 있었다.

클라라는 베르톨트를 차갑게 흘겨본 뒤, 도미닉의 눈앞으로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삼-영-영-구-이-칠은 단순한 금고가 아니에요. 수도의 마나 신탁에서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사등급 봉인 구역이에요. 아카데미 이사회와 중앙 은행 최고위층의 공동 인장이 없으면 잔고 증명서 한 장 뗄 수 없는 곳이라고요. 그 계좌의 보증인이 되었다는 건, 당신 발로 도살장에 걸어 들어간 것과 같아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미닉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목걸이에 묶인 줄의 반대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알아야 당겨서 끊든가 할 것 아닙니까.”

“끊어?”

베르톨트의 입꼬리가 다시 비틀려 올라갔다. 조금 전의 경계심을 감추려는 듯, 그는 과장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디 끊을 수 있으면 끊어 봐라. 하지만 그 전에 현실부터 마주해야 할 거다, 신입생.”

베르톨트가 들고 있던 모의 채권 집행석을 바닥으로 던졌다. 쨍그랑하는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 새겨져 있던 마나 측정진이 붉은색 경고등을 점멸하기 시작했다.

“내규 제사십이조 삼항. 파산자의 부실 채무를 인수한 연대보증인은, 계약 체결 즉시 해당 실습실의 마나 회로 복구 선급금을 일차 납입해야 한다.”

평가장 바닥에 붉은빛으로 숫자가 새겨졌다.

[즉시 청구액: 육백팔십 골드]

[납부 기한: 당일 이십사시 정각]

[미납 시 조치: 신입생 자격 잠정 박탈 및 등록 유예 취소]

“길버트의 허위 담보 마법으로 박살 난 바닥 회로부터 고쳐 놓아야 평가를 계속 진행할 것 아닌가.”

베르톨트가 도미닉의 턱밑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던졌다.

“오늘 자정까지 육백팔십 골드를 납부하지 못하면, 네 입학 허가와 채무 유예 조치는 즉시 취소된다. 그러면 널 기다리는 건 교문 밖에 대기 중인 아르카 은행 집행관들이겠지.”

주변의 상급생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도미닉의 주머니에 동전 한 닢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입학 서류의 재산 항목만 봐도 명백했다.

조부의 흔적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발목에 곧바로 쇠사슬이 감긴 격이었다.

“시간은 반나절 남았군. 네 그 잘난 회계 지식으로 어디서 금화 육백팔십 닢을 긁어모을 수 있는지 구경해 보도록 하지.”

베르톨트는 등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그의 망토 자락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쓸었다.

도미닉은 붉게 타오르는 바닥의 청구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덟 시간 남짓. 당장 교내에서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카데미 서쪽 별관에 자리한 마나 전당포뿐이었다.

“서쪽 별관으로 갈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아요.”

원형 평가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뒤따라온 클라라가 도미닉의 앞을 막아섰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찌푸려진 녹색 눈동자가 똑바로 박혀 들었다.

“아카데미 전당포는 학생 자치 집행부의 입김이 닿는 곳이에요. 베르톨트가 손을 써두지 않았을 리 없어요. 신입생 신용 등급으로는 마법봉 하나 맡겨도 백 골드조차 안 쳐줄 텐데요.”

“안 갑니다.”

도미닉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회랑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그럼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자정까지 육백팔십 골드예요. 당신 수중에 동전 한 닢 없는 거, 저 서류에 적힌 잔고 증명만 봐도 알아요.”

“교내 마나 수납소로 갑니다.”

“수납소요? 거긴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마법 시전에 들어간 공공 마나 사용료를 징수하는 곳이에요.”

“징수한다는 건, 돈이 드나드는 장부의 입출금 내역이 실시간으로 집계된다는 뜻이죠.”

도미닉은 품속에서 조금 전 베르톨트가 던져주고 간 청구서 양식을 꺼내 들었다. 붉은 인주로 찍힌 마나 회로 복구 선급금 명세서였다.

“길버트의 삼등급 화염 마법이 깨지면서 평가장 바닥의 동판 회로가 녹아내렸습니다. 베르톨트는 그 복구 비용을 연대보증인인 내게 청구했고요.”

“그게 내규니까요. 억지스럽지만 법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규정을 보려면 겉장만 넘기지 말고 각주를 봐야 합니다.”

도미닉이 손끝으로 서류 하단의 미세한 마나 인쇄 문구를 짚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손톱 끝에 닿는 종이 결의 요철에서 마나 파동이 읽혔다.

“시설물 복구 선급금은 교내 파손 방지 공제 기금에서 일차 지출된 뒤 채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 즉, 아카데미는 이미 해당 수리비를 수납소 계좌에서 지출 처리했다는 소리입니다.”

클라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그 지출 내역에서 헛점을 찾겠다는 건가요?”

“헛점이 아니라 오류를 잡는 겁니다. 관료들이 서둘러 만든 장부는 반드시 구멍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서쪽 회랑 끝에 자리한 마나 수납소는 한산했다. 높은 창살 너머로 보이는 놋쇠 격자창 뒤편에서 늙은 계수관 둘이 안경을 콧등에 걸친 채 지루하게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오가는 모든 마나 흐름의 수수료와 벌금을 정산하는 자리였다.

도미닉은 망설임 없이 격자창 앞으로 다가가 청구서를 창살 틈으로 밀어 넣었다.

탁.

청구서가 대리석 카운터에 부딪히는 소리에 계수관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긴 관자놀이에 푸른 핏줄이 돋아난 노인이었다.

“뭐냐, 신입생? 납부 창구는 저쪽 끝이다. 여긴 영수증 대조 창구야.”

“대조하러 온 게 맞습니다.”

도미닉이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오후 세 시 십이 분, 제이 실습장 바닥 동판 마나 회로 파손에 따른 긴급 보수 공제 기금 집행 내역의 승인 번호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입생 따위가 공제 기금 원장을 왜 들먹여? 집행부에서 발부한 청구서 들고 왔으면 금화나 내놓고 도장 받아 가.”

“내규 제백십이조 회계 열람권 조항입니다.”

도미닉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구상권을 청구받은 채무자는 청구 원인의 근거가 되는 원천 지출 결재서의 마나 계측 오차율을 실시간으로 실사할 권리를 가집니다. 오차율이 영점 오 퍼센트를 초과할 경우, 집행은 즉시 동결되며 재감정이 이뤄질 때까지 납부 기한은 자동 연장됩니다.”

노인의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에서 멈칫했다.

“꼬마 녀석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노인은 혀를 차며 뒤편의 거대한 마나 보관함으로 손을 뻗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정 구슬이 박힌 회계 마도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장부 위로 떨어지며 오늘 자 지출 명세가 숫자로 쏟아져 나왔다.

[집행 번호: 칠-사-이-일]

[항목: 제이 실습장 삼등급 내화 동판 교체 및 결손 마나 충전]

[지출액: 육백팔십 골드]

[결재 승인자: 자치 집행부장 베르톨트 슈테판]

옆에서 지켜보던 클라라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결재 승인자가 베르톨트 본인이에요. 그가 직접 집행 기금을 결재하고 당신에게 청구서를 날린 거라고요. 형식상 아무런 하자가 없어요.”

“형식은 완벽하죠.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못 합니다.”

도미닉이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계수관님, 오늘 오전 제이 실습장에서 소모된 전체 마나의 유량 총합을 불러주십시오.”

“유량 총합?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확인하지 않으시면 지금 즉시 감사실로 직행해 직무 유기 및 허위 지출 방조로 고발하겠습니다. 감사가 시작되면 이 창구의 장부 일체가 압류될 텐데, 감당하시겠습니까?”

도미닉의 어조는 낮고 건조했으나,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놋쇠 창살보다 단단했다. 노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수정 구슬의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숫자가 찍혀 나왔다.

“오전 총 유량은 사만 이천 아르카다. 됐냐?”

“그렇다면 삼등급 내화 동판의 규격 저항값은 일 미터당 오십 아르카입니다. 파손된 면적은 가로 십 미터, 세로 십 미터. 총 백 제곱미터의 면적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순수 마나량은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삼천 아르카를 넘지 않습니다.”

도미닉이 품에서 잉크가 마르지 않은 깃펜을 꺼내 카운터 위에 놓인 간이 계산지에 선을 그었다.

“삼천 아르카의 표준 시세는 백오십 골드입니다. 특수 공임비와 긴급 할증료 삼십 퍼센트를 붙여도 이백 골드를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르톨트 부장은 공제 기금에서 육백팔십 골드를 빼갔습니다.”

클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백팔십 골드가 비어요.”

“남는 사백팔십 골드는 어디로 갔을까요?”

도미닉이 묻자, 늙은 계수관의 안경이 콧등 아래로 미끄러졌다. 노인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뒤편의 금고를 힐끔거렸다.

“그, 그건…… 잔여 예치금으로 처리되어…….”

“잔여 예치금이 아니라 특정 계좌로 바로 빠져나갔겠죠.”

도미닉은 계산지를 툭 쳤다.

“결재 서류의 마나 귀속 코드를 까십시오. 사백팔십 골드가 송금된 목적지 계좌 번호가 적혀 있을 겁니다. 그 번호가 베르톨트 개인의 차명 계정이든, 다른 비밀 장부든 간에, 허위 청구서로 공제 기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 청구서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창살 안쪽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노인의 손이 덜덜 떨리며 수정 구슬 위의 레버를 놓쳤다. 챙강, 하는 맑은 소리가 창구를 울렸다.

“신입생, 그만둬.”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사정하듯 말했다.

“그 계좌를 열어보면 안 돼. 그건 자치 집행부만의 돈이 아니야. 손을 대면 나도, 너도 무사하지 못해.”

“이미 내 목에 빚줄이 감겨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줄을 쥔 놈의 손목을 비트는 게 먼저입니다.”

도미닉이 창살 틈으로 손을 뻗어 결재 원장의 마나 봉인을 가리켰다.

“코드 번호를 부르십시오. 셋을 셀 때까지 열지 않으면, 이 계산서를 들고 바로 아카데미 본관 감사실 벽에 붙여버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하나.”

도미닉의 눈빛에 자비는 없었다. 그 메마른 시선 앞에서 노인은 결국 수정 구슬의 잠금장치를 비틀어 풀었다.

딸깍.

수정 구슬 안쪽에서 빛이 굴절되며 허공에 푸른 활자 여덟 자리가 떠올랐다.

사백팔십 골드가 실시간으로 빠져나간 목적지 계좌였다.

[수취 계정: 삼-영-영-구-이-칠]

글자를 본 클라라가 헛숨을 들이켰다.

“말도 안 돼…….”

도미닉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조부가 실종되기 직전 팔억 골드를 쏟아부었던 그 의문의 계좌였다. 길버트의 연대보증 서류에 적혀 있던 그 번호. 그리고 지금, 베르톨트가 실습실 수리비를 부풀려 빼돌린 공금이 흘러 들어간 곳 역시 똑같은 번호였다.

모든 부정한 돈이 아카데미 지하의 사등급 봉인 구역, 바로 그 단 하나의 계좌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계좌의 명의인이 누구입니까.”

도미닉의 손끝이 수정 구슬 표면을 두드렸다. 차가운 유리면에 맺힌 푸른 활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노인은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창살 너머 책상 모서리를 짚은 앙상한 손가락에 파랗게 힘이 들어갔다.

“모, 모른다니까 그러네! 삼 번으로 시작하는 계좌는 학내 일반 계정이 아니야. 중앙 본부에서 직접 내려보낸 특수 목적 계좌라고! 나 같은 말단 계수관은 이름 석 자도 조회 못 해!”

“거짓말.”

클라라가 한 걸음 다가서며 창살 안쪽의 명부대를 노려보았다.

“삼 번 식별 코드는 아카데미 설립 초기에 배정된 심층 금고 전용 식별 번호예요. 본부 직할 계좌라면 국가 코드인 제로 번이 붙어야죠. 이건 학원 내부, 그것도 지하 사등급 구획의 봉인 계좌예요. 맞죠?”

노인의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했다. 클라라의 말은 정확한 급소를 찌르고 있었다. 대형 신탁 가문 출신인 그녀에게 은행과 아카데미의 계정 분류 체계는 손바닥 안의 지도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조부의 팔억 삼천만 골드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베르톨트 부장이 조작한 사백팔십 골드가 추가로 입금되었죠.”

도미닉은 품 안에서 입학 허가서와 함께 접어두었던 가압류 신청서를 꺼내 들었다.

“제국 마나 금융법 제사십사 조, 부정 청구 혐의가 발생한 계좌는 직권으로 입출금 정지를 걸 수 있습니다. 지금 즉시 이 삼-영-영-구-이-칠 계정으로의 지급 승인을 취소하고, 사백팔십 골드의 입금 내역 명세서를 발행하십시오.”

“미쳤어! 신입생 나부랭이가 어딜 감히 봉인 계좌를 동결하겠다는 거야!”

“동결하지 않으면 당신이 횡령의 공범으로 엮입니다. 이 수리비 청구서에 최종 계인을 찍은 건 당신이니까요.”

도미닉이 책상 위에 올려진 구리 인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인장 표면에 묻은 붉은 인주가 아직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베르톨트의 서명을 승인하고 마나 유출을 결재한 손은 바로 이 늙은 계수관의 손이었다.

노인의 시선이 책상 위 인장과 도미닉의 메마른 눈동자 사이를 갈팡질팡 오갔다.

“출력해.”

도미닉이 낮게 뇌까렸다.

“횡령금 반환 영수증과 목적지 계좌 거래 명세서. 둘 다 내놓으십시오.”

노인이 비명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수정 구슬 옆의 놋쇠 손잡이를 돌렸다. 덜컥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계수대 아래쪽 틈새에서 뻣뻣한 양피지 한 장이 밀려 나왔다. 푸른빛으로 인쇄된 거래 명세서였다.

사백팔십 골드의 예치 승인이 취소되고, 해당 금원이 부정 청구 의심 계정으로 분류되어 임시 묶였다는 붉은 마나 낙인이 찍혔다.

도미닉은 종이가 완전히 빠져나오기도 전에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명세서 하단에는 도미닉이 찾던 바로 그 번호와 함께, 지금까지 그 어떤 서류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문구 한 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최종 관리관: 자치 집행부장 베르톨트 슈테판]

[연계 원천 채권: 바우어 마나 채무 팔억 삼천만 골드]

클라라가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베르톨트가…… 이 계좌의 최종 관리자라고요? 학생 신분으로 사등급 지하 금고 계정을 쥐고 있다고요?”

“학생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은행과 아카데미 수뇌부가 손을 잡고 조부의 돈을 이 안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그리고 베르톨트는 그 하수인이자 파수꾼이고.”

도미닉은 차갑게 식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퍼즐의 귀퉁이가 맞춰졌다. 조부가 남긴 거액의 채무는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지하에 고스란히 묶인 채, 누군가의 거대한 마법적 담보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톨트는 그 틈새에서 푼돈을 횡령하며 계좌의 덩치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회계 서기실의 두꺼운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젖혀졌다.

서늘한 복도 바람과 함께 복도를 메우고 있던 푸른 제복의 집행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맨 앞에는 화려한 금발을 단정하게 넘겨 빗은 베르톨트 슈테판이 서 있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평소의 여유롭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란스럽다 했더니, 쥐새끼 한 마리가 곳간을 헤집고 있었군.”

베르톨트가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창구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으로 도금된 집행부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지휘봉 끝에서 푸르스름한 집행 마나가 찌릿하게 튀었다.

“부, 부장님……!”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베르톨트는 노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도미닉의 주머니로, 방금 들어간 거래 명세서의 모서리로 곧장 내리꽂혔다.

“신입생 도미닉 바우어. 평가장에서 분에 넘치는 재주를 부려 살아남았으면 조용히 기숙사 구석에 처박혀 있을 일이지, 여긴 왜 기어 들어왔지?”

“자치 집행부에서 청구한 실습실 수리비를 정산하러 왔습니다.”

도미닉은 베르톨트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런데 계산서에 거품이 너무 많이 끼어 있더군요. 마침 공제 기금 규정 위반이 확인되어 제 권한으로 취소 처리했습니다.”

“네 권한?”

베르톨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집행부원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도미닉과 클라라의 퇴로를 막아섰다.

“채무 불이행자로 들어온 무지랭이가 아카데미의 자금 흐름을 논해? 네가 지금 건드린 계좌가 어떤 곳인지 알고나 짖는 건가?”

“조부의 돈 팔억 골드가 잠겨 있는 계좌입니다. 그리고 방금 당신이 횡령하려던 사백팔십 골드가 회수된 계좌이기도 하죠.”

도미닉의 대답에 베르톨트의 눈꼬리가 가늘게 경련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비밀을 들켰다는 당혹감보다는, 자신이 설계해 둔 완벽한 체계에 감히 흠집을 냈다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였다.

“그 종이 내놔.”

베르톨트가 지휘봉을 들어 도미닉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지휘봉 끝에서 뿜어져 나온 고밀도의 마나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학내 보안 규정 제十二 조, 인가되지 않은 특수 계정의 거래 내역을 열람하거나 유출한 자는 즉시 자격을 정지하고 마나를 압류한다. 얌전히 넘기면 이번 학기 동안 숨은 쉬게 해 주지.”

“거절합니다.”

도미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품에서 입학 허가서를 꺼내 명세서 위에 겹쳐 쥐었다.

“제국 금융 청산원 공인 서류입니다. 정당한 채무 이의 제기 절차로 발급받은 영수증을 압류하려면, 아카데미 감사원과 제국 중앙 은행의 합동 감사관 입회가 필요합니다. 당신 개인 지휘봉 따위로 뺏을 수 있는 종이가 아닙니다.”

“이 건방진 버러지가.”

베르톨트의 지휘봉 끝에 서린 마나가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가 마법을 시전하려는 찰나, 옆에 서 있던 클라라가 품에서 붉은 문장이 새겨진 인장을 꺼내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바닥에 깔린 대리석 위로 보스웰 가문의 신탁 문양이 붉게 번져 나가며 베르톨트의 마나를 밀어냈다.

“베르톨트 부장, 그쯤 해요.”

클라라가 차가운 음성으로 경고했다.

“나도 이 자리에 있었어요. 신탁 감사 위원회의 참관인 자격으로 이 거래 정지 건을 중앙에 공식 보고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힘으로 뺏겠다면 가문 대 가문으로 마나 회수 소송을 걸어줄게요.”

베르톨트의 시선이 클라라의 발밑에 펼쳐진 문장으로 향했다. 수도 제일의 마나 신탁 가문. 아무리 학생 집행부장이라 해도 보스웰 가문의 공식 입회를 무시하고 마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베르톨트가 천천히 지휘봉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비틀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좋아. 그깟 명세서 한 장 쥐고 있어 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베르톨트가 도미닉에게 바짝 다가섰다. 차가운 금속 냄새와 날 선 마나의 압박감이 도미닉의 뺨을 스쳤다.

“그 계좌에 조부의 돈이 들어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 계좌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네 손에 없어. 아카데미가 왜 그 돈을 지하에 묶어두었는지, 그 담보로 무엇을 돌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꼬리를 흔들지 마라.”

베르톨트의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넌 이번 학기를 넘기지 못해. 네 숨통에 달린 팔억의 빚, 내가 직접 하나씩 집행해서 네 껍데기만 지하 금고의 동력원으로 집어넣어 주마.”

“시험해 보십시오.”

도미닉이 메마른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누구의 껍데기가 먼저 벗겨지는지.”

도미닉은 베르톨트의 어깨를 밀치듯 지나쳐 서기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거래 명세서의 감촉이 손끝에 또렷하게 전해졌다.

단순한 채무자가 아닌, 진실을 추적하는 감사관으로서의 첫 번째 패가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