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 부채 청산 아카데미 · 총 4화 · AI 작가 서가

제3화 · 붉은 장부의 대차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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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멈춰요, 도미닉 바우어.”

대리석 회랑의 서늘한 바람을 가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도미닉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주머니 속 명세서 모서리를 매만졌다. 뒤편에서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빠르게 간격을 좁혀왔다. 은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아 내린 클라라 보스웰이 앞을 가로막았다.

“수납소 안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자각은 하고 있나요?”

클라라의 녹색 눈동자가 도미닉의 주머니를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그녀의 옷깃에 달린 보스웰 가문의 은빛 신탁 배지가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을 받아 번뜩였다.

“수리비 거품을 걷어냈을 뿐입니다. 그쪽 덕분에 베르톨트 부장의 손버릇을 저지했으니 감사는 드리죠.”

“감사 인사를 듣자고 따라온 게 아니에요. 당신, 사등급 봉인 계좌를 건드렸어요. 그 종이가 뭘 의미하는지 알면서 빼돌린 건가요?”

“빼돌린 게 아니라 제 권한으로 열람하고 출력한 영수증입니다.”

도미닉이 멈춰 서서 클라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신탁 가문이 공짜 밥을 사주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그러니 그쪽도 내 영수증을 공짜로 넘겨받을 생각은 접으시죠.”

클라라의 턱 끝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붉은 문장이 새겨진 인장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쥔 명세서는 학생 한 명이 품고 다닐 물건이 아니에요. 그 계좌 번호 삼공공구이칠은 아카데미 상위 삼 퍼센트 생도들에게 주어지는 채무 면제 기금의 담보 풀이에요. 거기에 묶인 돈을 흔들면 장학 기금 전체가 요동쳐요.”

“장학 기금이라.”

도미닉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상위권 귀족 생도들의 마나 대출 이자를 탕감해 주는 자금의 밑천이, 삼십 년 전 행방불명된 내 조부의 팔억 골드였다는 뜻이군요.”

클라라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나가는 다른 생도들은 없었지만, 회랑 기둥마다 박힌 청동제 마나 감응 렌즈가 주기적으로 붉은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말을 낮춰요. 베르톨트가 집행부장 직함을 달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 담보 풀의 최종 서명권자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사백팔십 골드의 부정을 짚어내서 송금을 묶어버린 순간, 다음 달 집행부 운영비 전체가 동결 처리되었어요.”

“정당한 감사 절차에 따른 동결입니다. 장부에 구멍이 났으면 메우는 게 상식이죠.”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여기 루멘이에요!”

클라라가 낮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도미닉 쪽으로 반 걸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명세서 원본을 넘겨요. 보스웰 가문의 감사 지분으로 중앙 은행에 공식 정밀 감사를 요청할게요. 당신 손에 있으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사라질 뿐이에요.”

“거절합니다.”

도미닉은 코트 섶을 여미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보스웰 가문의 손에 넘어가면, 팔억 골드의 진실 대신 신탁 수수료 몇 푼을 챙기는 협상 카드로 쓰이겠죠. 내 빚은 내가 증명합니다.”

“혼자서 베르톨트를 상대하겠다고요? 당장 다음 시간이 무슨 수업인지 잊었나요?”

클라라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중앙 탑 시계탑을 가리켰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둔탁한 금속음을 내며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채권 결산 기초 실습이에요. 실습 총괄 조교와 기구 배정 권한이 전부 누구 손에 있는지 몰라서 이러는 건가요?”

도미닉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입학 요강에서 보았던 필수 과정 중 하나였다. 중앙 은행의 계측기를 통해 각 생도의 마나 허용치와 부채 한도를 물리적으로 정렬하는 평가.

“실습 감독관이 베르톨트 슈테판이겠군요.”

“맞아요. 그 실습장은 단순한 강의실이 아니에요. 조작된 계측기 한 번 잘못 건드리면, 법적 부채 한도가 순식간에 초과되어 그 자리에서 강제 집행 처분이 떨어져요.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는 즉시 카를 선임 집행관이 당신 목덜미를 낚아채겠죠.”

클라라가 경고 섞인 어조로 덧붙였다.

“원본을 주지 않겠다면 최소한 내 조언이라도 들어요. 실습장에 배정된 계측기들 중 일련번호 끝자리가 붉은색으로 마킹된 기기는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해요. 그건 집행부가 손을 댄 불량품이에요.”

도미닉은 그녀의 조언을 머릿속 장부에 조용히 기입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정보는 없다.

“신탁 가문의 영애가 왜 이런 위험한 정보를 일개 채무자에게 흘려주는 겁니까?”

“베르톨트와 아르카 은행이 결탁해서 빼돌리는 비자금 장부, 나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클라라가 턱을 치켜들며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 가문은 마나 신탁의 투명성을 원해요. 당신이 실습장에서 살아남아 그 명세서의 진짜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면, 다음 협상 테이블을 차려주겠어요.”

“거래 성립이군요.”

도미닉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뒤를 돌았다. 회랑 끝, 묵직한 철문 너머로 푸른 마나 불꽃이 일렁이는 제일 실습동이 보였다. 베르톨트가 파놓았을 덫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도미닉 바우어 생도, 자리는 맨 구석 십칠 번 좌대다.”

실습실 철문을 열자마자 두꺼운 가죽 앞치마를 두른 조교가 도미닉의 앞을 막아섰다. 조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채광조차 닿지 않는 환기구 밑 어두컴컴한 구대기였다.

다른 생도들의 작업대 위에는 반투명한 청금석으로 마감된 최신형 계측기가 매끄러운 푸른빛을 뿜고 있었다. 반면 십칠 번 좌대에 덩그러니 놓인 기계는 칠이 벗겨진 무쇠 덩어리에 가까웠다. 황동 배관 틈새로는 굳어버린 마나 찌꺼기가 검붉게 눌어붙어 있었고, 유량계 유리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

도미닉은 좌대로 성큼 걸어가 기기 밑동에 박힌 황동 명판을 응시했다.

일련번호 사칠구이, 그리고 그 끝자리에 클라라가 경고했던 붉은색 원형 각인이 깊게 파일 채 번들거렸다.

“규격 미달 기기입니다.”

도미닉이 뒤를 돌아보며 건조하게 지적했다.

“루멘 채권 평가 시행령 제십사 조, 실습용 측정기는 오차 범위 삼 퍼센트 이내의 공인 계측기를 배정해야 합니다. 이 구형 유량계는 허용치 검증 인장이 삼 년 전에 만료되었군요.”

조교는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이내 헛기침을 내뱉으며 서류철을 도미닉의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자치 집행부의 특별 지침이다. 채무 유예 상태로 특별 편입된 생도는 자산 건전성 검증을 위해 가혹 조건 부하 테스트용 기기를 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불만이면 실습을 포기하고 퇴학 서류에 서명하든가.”

“특별 지침이라.”

도미닉의 시선이 실습실 정면, 높직하게 솟은 감독관 단상으로 향했다.

베르톨트 슈테판이 턱을 괸 채 그곳에 앉아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의 서늘한 시선이 도미닉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부하듯 훑어내렸다. 그의 손끝은 단상에 매립된 중앙 제어반의 황동 레버를 느긋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마나 수납소에서 횡령 사실을 들키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 오만함이 감독관 완장 뒤에서 더욱 짙게 묻어났다.

베르톨트가 단상 위의 확성 마법구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지. 기초 채권 마나 연성 실습의 목적은 단순하다. 각자에게 할당된 계측기에 마나를 주입해 공공 대출 마나를 안정적인 채권 형태로 변환, 지급 준비율 백 퍼센트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석조 벽면을 타고 낮게 울려 퍼졌다.

“도미닉 바우어 생도, 지급 준비율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채무 불이행 퇴학 처리다. 준비가 끝났다면 계측석에 손을 얹어라.”

주변 생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미닉에게 쏠렸다. 조롱과 호기심, 그리고 바우어 가문의 몰락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잔인한 기대가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도미닉은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피할 자리는 없었다. 실습을 거부하면 즉시 입학 취소였고, 그것은 곧 아르카 은행의 카를 선임 집행관에게 산 채로 넘겨진다는 뜻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베르톨트가 파놓은 덫의 내부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 태엽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도미닉은 금이 간 계측석 위에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차디찬 무쇠의 냉기가 피부를 타고 파고들었다. 내부에서 희미하게 회전하는 마나 실린더의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측정 개시.”

조교의 구령과 함께 실습실 천장의 종이 둔탁하게 울렸다.

생도들이 일제히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푸른빛과 은빛의 마력이 실습실을 채우며 계측기들이 기분 좋은 기계음을 토해냈다. 다른 생도들의 유량계 바늘은 안정적으로 중간 녹색 눈금에 머물렀다.

도미닉 역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맥을 타고 흐르는 마나를 최소한으로 쥐어짜 내 계측석으로 흘려보냈다. 정확히 십 골드에 해당하는 마나 단위, 삼십 킬로마나였다.

그 순간, 기계 내부에서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치이익.

기기 하부의 황동 배관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이 간 유리관 안의 눈금 바늘이 부드럽게 상승하는 대신, 마치 고장 난 진자처럼 경련하며 단숨에 위험 구역인 붉은 눈금으로 치솟았다.

백 킬로마나. 이백 킬로마나.

유량계 하단의 누적 부채 표시판 숫자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주입량의 세 배.’

도미닉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끝을 통해 기기 내부로 뻗어 나간 마나 감각이 기괴하게 뒤틀린 회로의 구조를 짚어냈다.

단순한 노후화가 아니었다.

유량계 내부의 감응 공명판 뒤쪽에 얇은 은선이 덧대어져 있었다. 외부에서 주입된 순수 마나를 계측석이 흡수하는 족족, 은선이 그 신호를 왜곡해 은행 대출 연체 이자 산출식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주입한 마나의 세 배에 달하는 가상 부채가 도미닉의 학생 계정으로 실시간 청구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왜곡 회로의 중심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송수신 마법진이 은밀하게 박혀 있었다.

‘원격 조작이다.’

도미닉의 시선이 단상 위의 베르톨트에게 가닿았다.

베르톨트의 손가락이 제어반 측면의 작은 다이얼을 미세하게 비틀고 있었다. 그가 다이얼을 돌릴 때마다 도미닉의 계측기 내부로 보이지 않는 공명 파동이 전송되었고, 부채 누적 속도는 배로 뛰었다.

저 기계는 측정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도미닉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동시에 부채 한도를 강제로 초과시켜, 평가 도중 파산 판정을 유도하려는 정교한 처형대였다.

“도미닉 생도, 눈금이 벌써 허용 한계치의 팔십 퍼센트에 육박했다.”

베르톨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마나 제어력이 그 모양인가? 대출금을 갚기는커녕 실습 도중에 파산할 셈인가 보군. 규정에 따라 주입을 중단하면 측정 실패로 즉시 불합격 처리된다.”

손을 떼면 실격으로 퇴학.

주입을 계속하면 조작된 계측기가 부채 한도를 터뜨려 강제 파산.

어느 쪽을 골라도 낭떠러지였다.

베르톨트는 도미닉이 손을 뗄 수도, 그렇다고 버틸 수도 없는 외통수를 만들어 둔 채 여유롭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측기 상부의 마나석이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샛노란 스파크를 튀기기 시작했다. 배관을 타고 역류하는 탁한 열기가 도미닉의 손바닥을 태울 듯이 달구었다. 신경을 찌르는 통증과 함께, 누적 부채 계측기는 마침내 한계선인 구십오 퍼센트를 가리켰다.

유량계 상단의 붉은 경고등이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점멸했다.

“구십구 퍼센트. 영혼 담보 강제 압류선에 도달했다.”

단상 위의 베르톨트가 제어반 다이얼에서 손을 떼며 차갑게 선언했다. 그의 시선이 실습동 출입구에 도열해 있던 자치 집행부 소속 경비원들에게 향했다.

“집행관들, 즉시 계측대 앞으로 진입해라. 실습 중 마나 한도를 초과 파산한 생도를 규정에 따라 현장에서 체포한다.”

철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색 완장을 찬 집행관 서너 명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허리춤에 매달린 구속용 마나 족쇄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참관석에서 지켜보던 클라라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깐 멈춰요, 베르톨트 부장! 아직 계측 제한 시간이 십오 초 남았어요. 주입이 공식적으로 종료되기 전까지는 강제 집행 권한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유량계 바늘이 이미 붉은 선을 넘었어, 보스웰 영애. 규정 제사조에 명시된 즉각 파산 조항이다. 영혼 담보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학생 계정은 그 자리에서 정지된다. 더 지체하면 실습동 전체의 안전이 위험해.”

베르톨트는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도미닉의 손바닥 아래에서 황동 배관이 비명을 지르듯 덜덜 떨렸다. 계측기 유리관 내벽으로 시커먼 그을음이 번졌고, 손톱만 한 크기의 원격 송수신 마법진이 붉은 안광을 뿜어대며 도미닉의 마나를 강제로 쥐어짜 내고 있었다.

손을 떼면 실격. 이대로 두면 영혼 압류.

그러나 도미닉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했다.

‘주입량의 세 배를 청구하는 불법 왜곡 배선.’

그렇다면 계산을 역전시키면 그만이었다.

도미닉은 마나 주입을 멈추는 대신, 오히려 손끝의 마력 순환 통로를 활짝 열었다. 단, 순수한 마나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었다. 카를의 집행 마법을 무력화시켰을 때 사용했던 지분 동결 역산식을 손끝에 벼려냈다.

‘부당 청구된 가상 부채의 원천 무효화.’

지분 동결의 파동이 황동 배관을 타고 계측기 심장부로 매섭게 파고들었다.

기계 내부의 은선이 가상 부채를 계상하려는 순간, 도미닉이 주입한 역산식이 그 신호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부채 산출식의 분모와 분자를 강제로 뒤집어, 증폭된 세 배의 반동을 계측기 내부의 원격 수신 장치로 고스란히 되돌려 보낸 것이다.

치지지직!

유량계 내부에서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뭐지?”

베르톨트의 얼굴에서 여유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아 있던 제어반 다이얼이 통제 불능의 진동을 일으켰다. 원격으로 도미닉의 부채를 조작하던 신호가 거꾸로 역류해 들어오며 제어반 전체에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마나 역류를 일으키면 네 마나 회로까지 통째로 타버린다!”

“누구 회로가 타는지 직접 보십시오.”

도미닉이 턱을 치켜들며 마지막 동결식을 밀어 넣었다.

콰앙!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도미닉 앞의 계측기 상부가 산산조각 났다.

유량계 유리관이 터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내부의 은선과 감응판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갔다.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이다가 퍽 소리와 함께 꺼져 버렸다.

누적 부채 계측기의 숫자가 구십구에서 단숨에 영으로 곤두박질쳤다.

영혼 압류 회로가 스스로 자폭하며 도미닉의 계정으로 향하던 강제 청구가 완전히 끊어졌다.

실습실 안으로 매캐한 마나 석탄 냄새가 자욱하게 깔렸다.

달려오던 집행관들이 멈춰 서서 부서진 계측기와 도미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족쇄를 쥔 그들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마나 한도 초과를 알리는 붉은 신호가 사라지고 기계 자체가 완전히 멎었기 때문이었다.

“……미친놈.”

베르톨트가 타버린 제어반을 털어내며 험악하게 짓씹었다. 그의 은테 안경 너머로 노골적인 살의가 번뜩였다.

“감히 아카데미의 공공 자산인 공인 계측기를 고의로 파손해? 채무 한도를 피하려고 장비를 자폭시키다니, 이건 명백한 중대 과실이자 파괴 행위다.”

베르톨트가 부서진 기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행관들, 뭘 멍하니 서 있나? 공공 기물 파손 및 실습 방해 혐의로 도미닉 바우어를 즉시 연행해라. 당장 오늘 밤 긴급 청문회를 소집해 이 쓰레기를 퇴학 처분하고 잔여 채무 전액을 즉시 환수하겠다!”

“잠깐 물러서세요!”

클라라가 집행관들의 앞을 막아서며 품에서 보스웰 가문의 신탁 인장을 꺼내 들었다.

“장비 결함으로 인한 사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학생 혼자의 마나 주입으로 군용 규격의 공명판이 파열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감정위원회의 정식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연행할 수 없어요!”

“보스웰 영애, 자치 집행부의 현장 징계 권한에 간섭하지 마.”

베르톨트가 차갑게 으르렁거렸다.

“기물이 박살 났고 실습은 중단됐다. 책임은 기계를 만진 도미닉 바우어에게 있어. 청문회는 열릴 것이고, 녀석은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골렘 공장으로 실려 갈 거다.”

“청문회라.”

연기 자욱한 단상 앞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미닉이었다. 그는 손등을 스친 파편의 피를 옷자락에 덤덤히 닦아내며, 산산조각 난 계측기 내부로 손을 집어넣었다.

불에 타 녹아내린 황동판을 걷어내자, 시커멓게 그을린 계측석 중심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미닉의 손가락이 바닥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금속 부품을 비틀어 뜯어냈다.

챙강.

금속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서늘한 금속음을 울렸다.

“수석 부장님, 청문회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도미닉이 발밑에 떨어진 금속판을 주워 올렸다. 그을음을 거칠게 문질러 닦아내자, 금속 표면에 음각으로 깊게 파인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카데미의 공식 검인 인장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독수리 날개 아래 세 개의 금화가 겹쳐진 문양, 그리고 그 하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일련번호와 서명.

도미닉이 금속판을 번쩍 들어 올려 베르톨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수석 부장님, 당신이 정규 실습 장비라며 건넨 이 계측기 밑바닥에 왜 중앙 마나 은행 아르카의 선임 집행관 카를의 사설 압류 인장이 새겨져 있습니까?”

단상 위가 얼어붙었다.

클라라의 눈이 크게 뜨였고, 달려들려던 집행관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베르톨트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도미닉은 금속판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베르톨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학생의 마나를 측정해야 할 아카데미 실습기에 외부 은행 집행관의 사설 원격 장치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부장님, 청문회를 소집하십시오. 누가 누구의 목줄을 쥐고 있는지 위원회 앞에서 확인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