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걷히지 않은 실습대 위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퍼졌다.
도미닉의 손에 들린 금속판 표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세 겹의 금화 문양이 선명했다. 황동 계측기의 내벽을 태우며 녹아내린 찌꺼기 사이로 푸른빛의 미세한 마나 도선 세 가닥이 여전히 깜빡였다.
자치 집행부 완장을 찬 상급생 둘이 멈칫하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실습용 마나 유량계 안쪽에서 사설 금융사의 압류 문양이 튀어나올 것이라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베르톨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외부에서 가져온 불법 부품을 실습기에 밀어 넣고 고의로 기물을 터뜨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허위 증거로 자치부를 모함하는군.”
“모함입니까?”
도미닉은 금속판의 모서리를 엄지로 긁어내렸다. 그을음 아래 숨겨져 있던 열두 자리 일련번호가 빛을 받았다.
“계측기 내부 은선과 일체형으로 용접된 연결부입니다. 방금 주입한 것도 아니고, 최소 사흘 전 좌대 하판을 뜯어내고 중앙 마나 유로에 직접 결착한 흔적이지요. 납땜 부위에 남은 마나 잔류 파동만 감정해도 설치 시점이 바로 나옵니다.”
도미닉은 금속판을 단상 쪽으로 반 뼘 더 내밀었다.
“이 인장판의 시리얼 넘버가 아르카 중앙 서버에 등록된 순간, 당신은 학생 자치부장이 아니라 일개 사채업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베르톨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안경 렌즈 너머의 눈동자가 도미닉의 손에 쥐인 금속판과 바닥에 흩어진 계측기 파편을 번갈아 훑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바우어. 증거물의 진위는 자치 집행부가 회수해 조사실에서 판단한다.”
베르톨트가 집행관들을 향해 손짓했다.
“공공 기물 파손 현행범이다. 증거물을 압수하고 피의자를 즉시 징계실로 압송해라. 저항하면 실력 행사를 허가한다.”
완장을 찬 집행관들이 허리춤의 구속용 마나 족쇄를 풀며 도미닉을 에워쌌다. 묵직한 쇠사슬이 바닥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물러서세요.”
클라라가 도미닉의 앞을 가로막으며 가슴팍에서 꺼낸 은색 문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푸른빛이 도는 신탁 문양이 허공에 퍼지며 서늘한 냉기를 뿜어냈다.
“아카데미 학칙 제 사십사 조, 교내 시설에서 외부 인가 금융사의 부정 개입 징후가 발견될 경우 해당 기물과 증거는 학생 자치부가 아닌 신탁 감사인의 참관하에 봉인 보관한다. 보스웰 가문의 이름으로 이 물증의 즉각적인 단독 압류를 거부합니다.”
집행관들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신탁 대주주 가문의 인장은 일개 자치 집행부장이 거스를 수 있는 권한이 아니었다.
베르톨트가 턱을 굳히며 낮게 읊조렸다.
“보스웰 영애, 권한을 남용하는군. 신탁 가문이라 해도 교내 자치 규율을 무력화할 수는 없어. 저자가 터뜨린 계측기는 국가 예산으로 도입된 일등급 표준 장비다.”
“장비의 손상 원인이 먼저 규명되어야죠.”
클라라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았다.
“사설 압류 단말기가 왜 군용 규격 유량계 안에 박혀 있었는지, 왜 특정 생도의 마나를 계측하는 순간에만 과부하 회로가 작동했는지 감정위원회에 정식 제소하겠어요.”
도미닉은 두 사람의 설전 사이에 시선을 내리깔고 손바닥의 금속판을 관찰했다.
단순한 봉인 인장이 아니었다.
판의 뒷면에 아주 얇게 새겨진 마나 집적 회로는 측정값을 외부로 송출하는 일반 감시 소자가 아니었다. 정해진 주기에 맞춰 외부의 강제 집행 신호를 직접 수신하도록 설계된 일방향 동기화 단말기였다.
특정 시각이 되면 아르카 은행 본점의 통제망과 직접 연결되도록 배선이 짜여 있었다.
‘베르톨트 혼자 꾸민 짓이 아니다.’
도미닉의 머릿속에서 은행 집행관 카를의 오만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계측기를 터뜨리지 않았다면, 이 단말기는 도미닉의 회로를 태우는 동시에 아르카 중앙 은행의 강제 압류 집행관을 아카데미 정문 안으로 합법적으로 불러들이는 유도 표식이 되었을 터였다.
베르톨트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깃펜으로 거칠게 휘갈겨 쓴 붉은 인장이 찍힌 서류였다.
“좋다. 물증은 보스웰 가문의 입회하에 중앙 보관함에 봉인하지. 하지만 파손된 공공 기물의 대체 비용은 즉시 정산되어야 한다.”
베르톨트가 서류를 도미닉의 가슴팍으로 내던졌다.
퍼석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양피지 상단에는 ‘임시 행정 처분 명령서’라는 문구가 붉은 먹물로 찍혀 있었다.
“자치 규정 제십이 조, 고의 과실로 인한 표준 계측기 손괴에 대한 긴급 예치금 처분이다. 오늘 자정까지 자치위원회 계좌로 임시 보증금 삼백 골드를 납부해라.”
클라라가 서류의 금액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삼백 골드라니요? 계측기 한 대의 공용 조달가는 팔십 골드를 넘지 않아요. 명백한 과잉 청구입니다.”
“현장 감정이 끝날 때까지 발생할 실습실 폐쇄 손실과 긴급 점검 비용을 합산한 금액이다.”
베르톨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자정이다, 도미닉 바우어. 단 일 분이라도 늦으면 보증금 미납에 따른 즉각 제적 처리가 내려진다. 제적되는 순간 네가 쥐고 있는 청산 아카데미의 채무 유예 권한은 영구 박탈이야. 아르카 은행 집행관들이 정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겠지.”
베르톨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집행관들, 철수한다. 증거물은 신탁실로 이송해 봉인함에 넣어.”
집행관들이 부서진 계측기 본체를 조심스레 천으로 감싸 안고 단상 뒤편으로 물러났다. 실습실 문이 닫히며 육중한 쇠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실습동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클라라가 도미닉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나요?”
“손등이 조금 긁힌 정도입니다.”
도미닉은 피가 밴 손등 대신 바닥에 떨어진 행정 처분서를 집어 들었다. 자정까지 삼백 골드. 신입 생도에게 몇 시간 안에 마련하라고 내밀기에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하지만 도미닉의 눈길을 끈 것은 액수가 아니었다.
‘자정.’
베르톨트는 왜 하필 시한을 자정으로 못 박았는가.
정규 청문회는 아무리 빨라도 다음 날 오전에나 열린다. 그런데도 굳이 몇 시간 남지 않은 한밤중을 마감으로 잡은 것은, 단순히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자정이 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는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클라라 영애.”
도미닉이 품에서 낮에 수납소에서 빼돌렸던 봉인 계좌 삼공공구이칠의 명세표를 꺼냈다.
“이 단말기, 단순한 감시 장치가 아닙니다. 특정 시각에 외부 신호와 회선을 맞추도록 설정되어 있었어요.”
“외부 신호라면…… 설마 아르카 은행의 본점 회선인가요?”
“예. 그리고 자정이라는 시한은 그 회선이 열리는 시간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미닉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하 서고로 가야겠습니다. 베르톨트가 오늘 자정 일정으로 결재해 둔 내부 시설 사용 장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도미닉은 피 묻은 손등을 옷소매로 훔치며 실습실 비상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라가 그 뒤를 바짝 쫓으며 허리춤의 열쇠패를 달그락거렸다.
“본관 지하 채권 서고는 학생 자치회와 신탁 이사회 공동 관할 구역이에요. 내 패용증으로 삼 등급 열람실까지는 열 수 있지만, 설마 사등급 이상 서류를 보겠다는 건 아니겠죠?”
“합법적인 서류를 보러 가는 게 아닙니다.”
도미닉은 층계참을 돌며 품속의 금속판을 단단히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쇠 표면에는 카를의 고유 압류 식별 번호가 음각되어 박혀 있었다.
“베르톨트가 조작한 장비의 결제 내역과 기숙사 마나 배분 장부가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실습실 장비 하나를 고치는데 삼백 골드를 청구한 건 단순한 횡포가 아니에요. 자정까지 시간을 끌며 시선을 묶어 두려는 수작입니다.”
지하 이 층으로 내려가는 철문 앞에는 푸른 마나 등불이 메마른 빛을 뿜고 있었다. 문짝 한가운데 박힌 두꺼운 놋쇠 자물쇠 위로 보스웰 가문의 신탁 인장이 닿자, 끼익 하는 거친 마찰음과 함께 빗장이 풀렸다.
서고 안쪽은 서늘한 냉기와 묵은 양피지 냄새로 가득 찼다. 벽면 전체를 메운 육중한 서가들 사이로 수만 권의 채무 대장과 마나 대출 원부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클라라가 걸음을 멈추고 서가 번호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쪽이 생도 기숙사 마나 할당량 기록철이에요. 하지만 이상하네요. 오늘 자 날짜가 적힌 장부 철이 비어 있어요.”
그녀가 비어 있는 서가 틈새를 가리켰다. 도미닉은 곧장 다가가 양옆에 꽂힌 장부의 표지를 살폈다.
전날까지의 배전 기록과 내일 자 예약 대출 장부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오직 오늘 날짜의 마나 유로 관제 기록부만 통째로 뜯겨 나간 상태였다. 뜯겨 나간 자리의 가죽 끈에는 아직 채 굳지 않은 붉은 밀랍 조각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조금 전에 손을 댔습니다.”
도미닉이 바닥을 훑었다. 서가 모서리 아래쪽, 버려진 파지 더미 사이에 얇은 종이 한 장이 짓밟힌 채 구겨져 있었다.
종이를 집어 들어 구김을 펴자, 상단에 선명하게 찍힌 루멘 청산 아카데미 자치 집행부의 직인이 드러났다.
“이건 파기된 결재 품의서의 부본입니다.”
클라라가 도미닉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서류 첫 줄을 내려다보았다.
“내용이 뭐죠?”
“기숙사 서관 일 번 구역, 긴급 마나 안전 점검 및 불량 도관 차단 명령서.”
도미닉은 종이에 적힌 세부 항목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시행 일시, 오늘 밤 자정. 대상 구역은 신입 생도 특별 기숙사. 차단 사유는 도관 누수 위험에 따른 강제 단수 조치. 결재권자 자치 집행부장 베르톨트 슈테판.”
“자정에 기숙사 마나를 끊겠다고요? 거기는 신입 생도들이 입학 시 승인받은 기초 생계 마나를 공급받는 유일한 통로예요. 채무 유예 상태인 생도는 외부 마나 공급이 중단되는 즉시 체류 자격을 상실해요.”
클라라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그럼 삼백 골드 보증금 청구는…….”
“청문회는 연막이었습니다. 저들은 말싸움을 할 생각이 아니라, 오늘 밤 기숙사 전체의 숨통을 끊어 강제 불이행 상태를 만들 작정이에요.”
도미닉은 품에서 꺼낸 사설 압류 인장판을 서류 하단의 빈칸에 겹쳐 놓았다.
종이 위에 찍힌 외부 위탁 집행자 등록 번호와 인장판 뒤쪽에 음각된 식별 코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렸다.
“외부 위탁 집행관, 중앙 마나 은행 아르카 소속 선임 집행관 카를. 베르톨트는 자기가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카를에게 기숙사 지하 주 배전반의 통제권을 통째로 넘겼습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 외부 집행관이 들어오는 건 학칙 위반이에요. 신탁 이사회의 승인 없이는 원천 차단 밸브에 손을 댈 수 없다고요.”
“규정은 힘이 있는 자들이 적는 겁니다. 긴급 안전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서류를 꾸몄으니, 카를은 정당한 기술 점검 요원으로 위장해 배전실로 들어오겠죠. 그리고 자정이 되는 순간 내 방으로 이어지는 마나 밸브를 잠글 겁니다.”
도미닉의 어조는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아카데미 생도는 학내 마나 공급망에 의존해 일일 이자를 정산한다. 바우어 가문의 팔억 삼천만 골드라는 거액 채무는 매시간 단위로 환산되어 실시간 이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기초 마나 라인이 차단되면 불과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체납 경고가 뜨고, 삼십 분이 지나면 자동 파산 절차가 개시된다. 파산한 채무자는 더 이상 생도가 아니라 은행의 담보물에 불과했다. 카를은 그 자리에서 도미닉의 목덜미에 생체 골렘 노역 징집 낙인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즉시 신탁 감사실에 이 부본을 제출하고 베르톨트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해요.”
클라라가 품에서 가문의 인장함을 꺼내려 들었다. 하지만 도미닉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감사실 접수 마감은 오후 여섯 시였습니다. 당직 감사관이 서류를 확인하고 소환장을 발부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려요.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입니다.”
“그럼 손놓고 당하자는 건가요? 당신 방의 마나가 끊기면 그걸로 끝이에요. 아르카 은행의 강제 압류권은 청산 아카데미 학칙보다 상위에 있어요.”
“그러니 서류로 막을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도미닉은 찢겨진 결재 품의서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배전반으로 직접 가야 합니다. 카를이 밸브에 손을 대기 전에 물리적으로 차단기를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는 내일 아침 청문회장에 서 보지도 못하고 끝납니다.”
도미닉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지하 서고의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하 서고를 빠져나온 도미닉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따라붙은 클라라의 가벼운 구둣발 소리가 돌바닥을 잘게 울렸다.
두 사람이 기숙사 하층부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에 들어섰을 때,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 탑 꼭대기에서 세 번 낮게 떨어졌다. 벽면에 박힌 마나 유도등은 일제히 푸른빛을 죽이고 비상용 주황색 불빛만 가늘게 깜빡였다.
“복도 통행이 이미 막혔어요.”
클라라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돌아갈 시간 없습니다. 배전실 밸브가 잠기면 그걸로 끝입니다.”
도미닉은 외투 안쪽에 쑤셔 넣은 차단 명령서 사본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하층부 배전실로 향하는 통로 끝, 묵직한 주철 문 앞에는 그림자 넷이 버티고 섰다. 중앙 마나 은행 아르카의 검은 집행관 제복을 입은 사설 용병들이었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채무자 구속용 은빛 마나 케이블이 굵직하게 감겨 있었다.
용병들 한가운데에서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낮에 일어난 계측기 역류 반동 때문인지, 목덜미부터 턱선까지 흰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선임 집행관 카를이었다. 붕대 틈으로 드러난 카를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쥐새끼처럼 서고 구석을 뒤지더니, 결국 여기까지 기어내려왔군.”
카를은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으로 배전실 문의 육중한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도미닉은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시선은 카를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놋쇠 열쇠와 그 뒤쪽 배전실 틈새로 흘러나오는 냉기로 향했다.
“아카데미 기숙사 관리 규정 제 십이 조. 외부 금융기관의 집행관은 학내 주 거주 구역 배전 시설에 반경 십 미터 이내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즉각 물러나지 않으면 불법 침입 및 기물 점거로 고발하겠습니다.”
도미닉이 서류철을 빼들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클라라도 그 옆으로 바짝 붙어서며 허리춤의 가문 인장함을 들어 보였다.
“보스웰 신탁 가문의 이름으로 경고해요, 카를 집행관. 당신이 손에 쥔 열쇠가 어디서 나왔든, 아카데미 자치위원회 단독 명의의 긴급 점검은 신탁 감사위원회의 추인 없이는 효력이 정지돼요.”
카를은 대꾸 대신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 압인이 찍힌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도미닉의 코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규정, 규정, 빌어먹을 규정 타령. 네놈들이 그 책장 넘기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현실은 이미 끝났다, 도미닉 바우어.”
양피지 상단에는 익숙한 일곱 자리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삼공공구이칠.
도미닉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등급 봉인 계좌.”
“정확히는 네 조부의 미상환 채무가 묶인 특수 목적 담보 계정이지.”
카를의 거친 손가락이 서류 하단의 특약 조항을 짓이겼다.
“베르톨트 학생회장이 넘겨준 건 배전실 열쇠 따위가 아니다. 이 계좌에 귀속된 채권자 대표의 원천 징수 집행권이지. 담보 가치가 하락하거나 채무자의 도주 및 파산 위험이 감지될 경우, 은행은 사전 통보 없이 채무자에게 공급되는 모든 기본 생계 마나 라인을 즉시 단절할 권리를 갖는다. 바우어 가문이 백 년 전에 서명한 계약서다.”
“그 계약서는 아카데미 입학 허가서가 발효된 순간 효력 정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입학 허가서는 학업 중 사적 집행을 유예할 뿐이지, 본안 담보 계좌의 물리적 보전 조치까지 막지는 못해. 넌 낮에 실습실 계측기를 고의로 파손했지? 아카데미 기물에 손해를 끼친 채무자는 신용 등급이 즉각 최하위 불량 등급으로 강등된다. 베르톨트가 한 시간 전에 그 서류에 직인을 찍었다.”
카를이 턱짓을 하자,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용병 두 명이 배전실 문을 활짝 젖혔다.
문 안쪽 벽면에는 신입 생도들의 방 번호가 적힌 수십 개의 마나 배관 밸브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배관들은 푸른 마나 액화 증기를 내뿜으며 정상적으로 맥동했으나, 맨 오른쪽 구석의 배관 하나만은 이미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채 굳어 있었다.
일공삼호. 도미닉에게 배정된 기숙사 방 번호였다.
“설마 자정까지 기다릴 줄 알았나?”
카를이 붕대 감긴 턱을 일그러뜨리며 낮게 웃었다.
“네 방으로 통하는 단독 공급 밸브는 삼 분 전에 잠겼다. 배관 안에 남아 있던 잔류 마나도 방금 회수관을 통해 아르카 은행 계좌로 전액 이체됐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미닉의 왼쪽 손목 안쪽에 새겨진 아카데미 생도 등록 인장이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파르르 떨렸다.
도미닉은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피부 위에 은은하게 감돌던 푸른빛 마나 잔고 표식이 차갑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숫자가 무서운 속도로 깎여 나갔다.
십오, 십, 삼, 일.
그리고 마침내 숫자가 완전히 지워진 자리 위로, 채무 불이행을 알리는 붉은빛 파산 경고 문양이 타투처럼 살갗을 뚫고 솟아올랐다.
호흡이 단숨에 무거워졌다. 심장을 둘러싸고 흐르던 기초 마나의 순환선이 뚝 끊기며 폐포 끝까지 서늘한 냉기가 번졌다. 팔억 삼천만 골드라는 채무의 실시간 지연 이자가 공급선이 끊긴 도미닉의 영혼 본체로 직접 청구되기 시작한 탓이었다.
“말도 안 돼…….”
클라라가 한 걸음 물러서며 창백해진 얼굴로 배전반을 응시했다.
“기초 유지 마나를 완전히 영으로 떨어뜨렸다고요? 이건 규정 위반이 아니라 살인 미수예요!”
“살인이 아니라 합법적인 담보 보전이다, 보스웰 영애.”
카를이 허리춤에서 묵직한 강철 족쇄를 풀며 도미닉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족쇄 끝에 달린 마나 흡수관이 굶주린 뱀처럼 쉭쉭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도미닉 바우어, 네 방의 마나 잔고는 방금 영으로 떨어졌다. 이제 합법적인 생체 압류 집행 시간이다.”
카를의 거친 손아귀가 허공을 가르며 도미닉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