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덩이가 살점을 파고들기 직전, 도미닉은 피하지 않고 왼손을 뻗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가락이 쇄도하는 강철 족쇄의 연결 관절을 정면에서 움켜쥐었다.
파산 표식이 새겨진 손목 안쪽에서 찢어지는 파열음이 일었다. 외부 공급 마나가 영으로 곤두박질친 신체는 팔억 삼천만 골드의 실시간 이자 파동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뼈마디가 타들어가는 압박감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도미닉은 눈을 감지 않았다. 족쇄 안쪽에서 뻗어 나온 여섯 가닥의 흡수 침이 손바닥을 꿰뚫는 감각을 그대로 응시했다.
“미친놈이 제 발로 걸려드는구나!”
카를이 붕대 감긴 목덜미에 핏대를 세우며 족쇄의 기계식 레버를 비틀었다. 집행용 구속 도관이 도미닉의 혈관을 물고 영혼의 잔류 마나를 강제로 긁어내려 했다.
그 순간 뒤편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사설 용병이 둔기를 꼬나쥐고 좁은 통로를 좁혀 들었다.
“물러서요!”
클라라가 허리춤에서 꺼낸 은빛 인장함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녹색의 신탁 결계가 부채꼴 모양으로 터져 나가며 용병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신탁 감사 대상 구역 내 사설 무력 행사는 전원 자격 박탈 사유예요! 한 걸음만 더 내딛는 순간 보스웰 가문의 청구권으로 당신들 용병 면허를 박탈하겠어요!”
용병들의 발이 굳어지자 카를의 시선이 사납게 흔들렸다. 그러나 카를은 도미닉의 목덜미를 겨눈 다른 한 손을 거두지 않았다. 족쇄는 이미 피부를 뚫고 들어가 영혼 핵을 옭아매고 있었다.
“소용없다, 아가씨! 이놈은 이미 기초 잔고가 바닥났어. 파산자의 생체 압류는 중앙 마나 은행의 최우선 기본권이다!”
도미닉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김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을 파고든 흡수 침을 타고 들어오는 것은 은행의 청구 집행 신호였다.
카를이 장부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들이댄 삼공공구이칠 봉인 계좌의 집행 코드. 그것이 도미닉의 체내에 잠들어 있던 선대 계약서의 가장 밑바닥 조항과 충돌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통증 속에서도 머릿속의 계산식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마나 은행의 대출 시스템은 완벽한 복식부기를 원칙으로 한다. 대변에 기록된 채무가 존재한다면, 차변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담보의 실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선대 가주가 서명한 팔억 삼천만 골드의 원초 계약서. 거기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오래된 특약이 숨겨져 있었다.
도미닉은 족쇄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카를의 멱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집행관, 네가 들이댄 그 족쇄가 바로 내 가문의 동결 채권에 걸린 역청구 도화선이다.”
“뭐라고?”
도미닉의 심장 부근 옷감이 붉게 타들어가며 금빛 문자열이 솟아올랐다. 백 년 전 아르카 마나 은행과 바우어 가문이 맺었던 최초의 소비대차 계약 원문이었다.
채무자의 잔고가 은행 측의 인위적이고 불법적인 조작으로 완전한 결손 상태에 빠질 경우, 채무의 보전 책임을 물어 현장 집행자의 마나 지분을 즉시 가압류한다.
“말도 안 돼…… 이건 백 년 전 폐기된 고대 구제 특약……!”
카를의 턱에 감긴 붕대 틈으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흡수관의 흐름이 반대로 꺾였다. 도미닉의 몸을 뜯어내려던 강철 족쇄가 거꾸로 카를의 팔뚝을 타고 그의 체내 마나를 무자비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카를의 소매 안쪽에서 푸른 마나 액화 증기가 역류하며 족쇄의 톱니바퀴들이 맹렬한 속도로 역회전했다.
“크아아악! 밸브, 밸브를 끊어라!”
카를이 족쇄를 떼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금빛 문양은 족쇄를 넘어 그의 목덜미 붕대까지 뱀처럼 감겨 올라갔다.
도미닉의 멈춰 섰던 마나 순환선으로 방대한 양의 정제 마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왼쪽 손목에 타오르던 붉은 파산 경고등이 꺼지고, 푸른 잔고 숫자가 맹렬한 기세로 차올랐다.
오십, 백이십, 삼백.
카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단단했던 거구가 마나 고갈의 반동으로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꺾였다. 선임 집행관의 마나 통로를 강제로 털어낸 도미닉은 차가운 시선으로 족쇄를 비틀어 뜯어냈다. 피 묻은 쇳덩이가 덜컹거리며 돌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카를에게서 강제로 회수한 마나의 파동이 지나치게 거대했다. 규격 외의 마나가 배전실의 좁은 공간에 흩뿌려지자, 벽면에 설치된 수십 개의 기숙사 배전 밸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배관 연결부마다 하얀 서리가 얼어붙고 붉은 과부하 경고등이 요란하게 회전했다.
“도미닉! 메인 배전반 압력이 한계를 넘고 있어요!”
클라라가 결계를 유지한 채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용병들은 이미 의식을 잃어가는 카를을 버려둔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파이프가 터져 나가면 이 지하 공간 전체가 고농도 마나 폭발에 휩쓸릴 판이었다.
도미닉은 손바닥의 상처를 옷자락으로 거칠게 동여맸다.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카를의 몸을 지나쳐 하얗게 얼어붙은 일공삼호 배관 밸브가 아닌, 배전실 중앙의 메인 제어 콘솔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미닉은 메인 제어 콘솔의 황동 잠금장치를 거칠게 젖혔다. 카를에게서 회수한 마나가 손가락 끝에서 푸른 불꽃을 튀기며 제어반의 마력 입력구로 밀려 들어갔다.
배전반 상단의 압력계 바늘이 붉은 위험선을 치고 내려오며 거친 증기를 뿜어냈다.
“일공삼호 밸브를 열어야 해.”
클라라가 카를의 흩어진 외투를 발로 차내며 배전판 옆 수동 레버로 다가섰다. 차갑게 얼어붙은 밸브 손잡이 위로 성에가 하얗게 내려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미닉은 제어반의 금속 다이얼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수동은 걸려 있습니다. 중앙 바이패스 회로를 태워야 합니다.”
그가 손바닥의 상처를 눌러 콘솔 중앙의 은색 접점에 피 묻은 마력을 짓이겼다. 회수한 마나가 도관을 타고 뻗어가며 차단되었던 일공삼호 선로의 냉각 쇄기를 단숨에 녹여 내렸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관을 막고 있던 마나 얼음이 부서지며 푸른 유체가 배관을 타고 위층으로 솟구쳤다. 손목의 표시창에 기숙사 방의 마나 라인이 정상 복구되었다는 녹색 잔고 불빛이 반짝였다.
바로 그 순간, 배전실의 묵직한 철문이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튕겨 나갔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은테 안경을 쓴 베르톨트 슈테판이 자치 집행부 생도 여덟 명을 대동한 채 문간을 막아섰다. 생도들의 손에는 마나 구속용 흑철 봉과 방패가 들려 있었다.
베르톨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카를과 열려 있는 메인 제어 콘솔을 차례로 훑었다. 안경 렌즈 너머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기숙사 하층 배전실 무단 침입에 핵심 동력원 강제 탈취. 게다가 중앙 은행의 선임 집행관을 습격해 중상을 입혔군. 도미닉 바우어, 현행범으로 즉시 구속한다.”
자치 집행부 생도 넷이 즉각 방패를 앞세우며 좁은 통로를 좁혀 왔다.
도미닉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카를의 가슴팍에서 삐져나온 서류 한 장을 낚아채듯 뽑아 올렸다. 푸른 압류 인장이 찍힌 양피지였다.
“기물 파손 현행범이라니, 베르톨트 학생회장. 당신 서명이 적힌 이 불량 도관 폐기 지시서가 바로 살인 교사 증거입니다.”
도미닉의 단호한 목소리가 배전실 벽면을 울렸다.
베르톨트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횡설수설하지 마라. 정당한 시설 점검 위탁서일 뿐이다.”
“단순 점검 위탁서에 이런 특약이 붙습니까?”
도미닉이 서류의 세 번째 조항을 손톱 끝으로 강하게 짚어 보였다.
“도관 폐쇄에 따른 채무자의 마나 잔고 소멸 시, 중앙 마나 은행은 즉시 생체 담보권을 발동하여 대상자의 뇌수 신경망을 영구 동결한다. 동결된 신체는 아카데미 외곽의 중력 골렘 동력원으로 영구 귀속된다.”
종이를 든 도미닉의 손끝이 흔들림 없이 베르톨트를 겨누었다.
“이건 단순 단수가 아닙니다. 자정이 되기 전 나를 폐인으로 만들어 영구히 입을 막으려 한 살인 교사 계약입니다. 하단에 찍힌 직인, 자치 집행부장 베르톨트 슈테판의 인장이 선명하군요.”
배전실 안으로 들어서던 자치 집행부 생도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멎었다. 방패를 든 상급생 둘의 시선이 도미닉이 치켜든 양피지 하단의 붉은 인장으로 쏠렸다.
아카데미 내에서 생도의 신체에 손을 대는 처분은 학장의 결재와 징계위원회의 전원 합의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자치 집행부장의 전결로 생체 담보를 발동하여 뇌수를 영구 동결한다는 것은 명백한 학칙 위반이자 제국 형법상의 중죄였다.
베르톨트의 얼굴에서 여유가 한 꺼풀 벗겨져 나갔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위조된 문서다. 사설 추심관과 결탁해 배전실을 불법 점거한 범죄자의 날조를 들을 이유는 없다. 압류 대상자와 증거물을 즉각 확보해 격리실로 압송하라.”
베르톨트가 손짓하자, 멈칫거렸던 생도들이 다시 흑철 봉을 고쳐 쥐며 전진했다.
그 순간 클라라가 품에서 은색 문장이 새겨진 보스웰 가문의 감사 인장을 꺼내 바닥에 내리찍었다. 맑은 금속음과 함께 은빛 마나 파동이 원형으로 번져 나가며 바닥에 선명한 경계선을 그렸다.
“멈추세요, 자치 집행부장.”
클라라의 서늘한 목소리가 배전실을 가득 채운 증기 사이를 파고들었다.
“수도 마나 신탁 감사위원회 규정 제 십이 조. 불법 채권 집행 및 인명 살상 음모가 확인된 현장은 신탁 감사관의 입회하에 모든 증거와 기록을 동결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배전실의 모든 물건은 감사위원회의 관리 자산이에요.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오면 자치 집행부 전원을 감사 방해 현행범으로 고발하겠습니다.”
생도들의 발이 굳은 듯 멈춰 섰다. 보스웰 가문의 인장이 뿜어내는 은빛 휘장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카데미의 운영 자금을 틀어쥔 거대 금융 세력의 법적 구속력이었다.
베르톨트가 이를 악물며 클라라를 쏘아보았다.
“보스웰 양, 학생 자치 기구의 정당한 사법 집행을 방해할 셈입니까? 신탁 가문의 특권을 남용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정당한 집행인지 불법 은닉인지는 배전반의 전송 기록을 대조해 보면 알 일이죠.”
도미닉이 메인 제어 콘솔의 모니터 판넬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녹색으로 돌아온 일공삼호 배관의 압력 수치 아래로, 카를의 사설 단말기가 강제로 송출하던 불법 차단 신호의 원본 로그가 시퍼런 글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베르톨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카를의 손목에 묶인 검은 단말기로 향했다. 그 기계 안에는 베르톨트의 개인 통신망과 연결된 원격 승인 코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였다.
“증거를 훼손하려는 침입자를 제압하는 것이 자치 집행부의 본분이다.”
베르톨트가 품에서 황동으로 된 자치부 인장판을 꺼내 들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파동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도미닉을 공격하는 대신, 바닥에 쓰러진 카를의 손목을 향해 파괴 마법을 날려 단말기를 통째로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
파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쐐기 모양의 마나 송곳이 카를의 손목 단말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증거를 인멸하려는 기습이었다.
도미닉은 망설이지 않고 메인 콘솔의 수동 방출 레버를 아래로 꺾었다.
콰아아앙!
일공삼호 배관을 복구하며 콘솔 내부 바이패스 관에 모여 있던 고압 마나 증기가 허공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하얗게 타오르는 마나 안개가 베르톨트의 마나 송곳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거센 충격파를 일으켰다. 파편 하나가 튀어 카를의 외투 깃을 찢었지만, 손목에 결착된 단말기는 온전한 형태로 바닥에 굴렀다.
도미닉이 안개를 뚫고 성큼 다가가 카를의 손목에서 단말기를 단숨에 뜯어냈다. 금속 외피가 찌그러졌지만 내부의 기록 수정구는 여전히 붉은빛을 뿜으며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단말기를 부수려 드는군요, 베르톨트 부장. 자치 집행부의 명예를 걸고 정당한 처분을 내린다던 분이 증거부터 파기하려 듭니까?”
도미닉이 차가운 눈으로 베르톨트를 마주 보았다.
베르톨트는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갑게 식은 미소를 지었다. 증거 인멸 시도가 실패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의 태도는 여전히 오만했다.
“그 알량한 장난감에 무엇이 들어 있든, 공식 회계 장부와 대조되지 않는 사설 단말기의 기록은 법적 효력이 없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물 파손 보증금 삼백 골드를 납부하지 못하면 너는 그 자리에서 제적이다. 시계탑의 종이 울리기까지 이제 십 분도 남지 않았다.”
베르톨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생도들은 들어라. 보스웰 양의 인장을 존중하여 물리적 진압은 잠시 유예한다. 다만 자정이 지나 도미닉 바우어의 제적이 확정되는 즉시 이 배전실에서 저 자를 끌어내 지하 감옥에 투옥하라. 누구도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자치 집행부 생도들이 배전실 출구를 흑철 방패로 틀어막으며 겹겹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도미닉은 문을 막아선 자치 집행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메인 콘솔 화면에 떠오른 배전실 중앙 서버의 내부 장부 데이터로 향해 있었다.
“십 분이면 충분합니다.”
도미닉이 단말기의 연결 케이블을 콘솔 중앙 포트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단말기의 접속 단자가 중앙 콘솔에 맞물리자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원형 모니터 표면 위로 수십 개의 마나 유로 회로도가 어지럽게 명멸하며 붉은 경고창을 띄웠다.
접속 승인 오류. 사설 단말기의 보안 코드가 시스템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베르톨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에서 또 다른 마나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수정구 안쪽에서 자치 집행부장의 고유 관리자 인장이 푸른빛을 발산했다.
“헛수고다, 도미닉 바우어. 아카데미 중앙 관제탑의 최상위 권한이 없으면 배전실 서버의 원천 장부는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관리자 권한은 오직 집행부장인 내게 있지.”
베르톨트가 수정구를 콘솔 우측의 차단 슬롯에 내리꽂았다.
배전실 전체의 조명이 순간적으로 꺼졌다가 비상용 주황색 불빛으로 바뀌었다. 중앙 콘솔 화면에 붉은색 글귀가 거칠게 번져 나갔다.
보안 프로토콜 삼 번 발동. 금일 배전 로그 및 유로 전송 원장 영구 파기 개시. 잔여 시간 육십 초.
기록 자체를 태워 없애려는 시도였다. 증거가 사라지면 카를의 단말기는 그저 출처를 알 수 없는 불량 부품으로 전락할 터였다.
“도미닉!”
클라라가 한 걸음 내딛으며 허리춤에서 보스웰 가문의 금색 인장판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인장판을 콘솔 좌측의 신탁 슬롯에 찔러 넣자, 거센 파동과 함께 삭제 진행 막대가 덜컥 멈춰 섰다.
“마나 신탁 대주주 규정 제십사 조. 불법 전력 전용 및 횡령 의혹이 발생했을 때 신탁 감사위원은 시스템의 물리적 포맷을 최장 삼 분간 동결할 수 있어요. 권한은 내가 묶어둘 테니 서두르세요!”
클라라의 손끝에서 은백색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베르톨트의 수정구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인장이 충돌하며 콘솔 상판에 하얗게 서리가 맺혔다.
베르톨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지워졌다. 그는 안경 너머로 클라라를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보스웰 양, 당신이 지금 가문의 권한을 남용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집행부의 보안 절차를 방해한 죄는 신탁 가문이라 해도 문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횡령범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군요. 닥치고 서 있기나 해요.”
클라라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마나 주입을 유지했다.
삭제 정지 시간은 고작 백팔십 초. 도미닉은 지체 없이 콘솔 건반 위로 열 손가락을 뻗었다.
그는 카를의 사설 단말기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통신 패킷을 훑었다. 베르톨트가 기숙사 백삼호의 밸브를 잠그기 직전, 배전반에서 대규모로 마나를 뽑아내 어딘가로 전송한 흔적이 명확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 마나가 향한 목적지였다. 일반적인 기숙사 공급 라인이 아니라, 학교 지하 깊숙한 곳으로 뻗어 나가는 특수 격리 배관이었다.
“삭제 명령어의 우선순위를 역전시킨다.”
도미닉이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복합 계산식을 콘솔에 밀어 넣었다. 그가 입학 첫날부터 파고들었던 회계 장부의 지분 동결 공식이었다.
데이터를 지우려는 파괴 명령의 뒤편에는 언제나 삭제 직전의 임시 백업 버퍼가 형성된다. 베르톨트가 서둘러 장부를 지우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데이터는 임시 메모리 구역에 고밀도로 압축되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콘솔 화면에 쏟아지는 수치들을 매섭게 쫓았다.
“삼공공구이칠 계좌의 최근 송금 경로를 역추적한다. 횡령된 사백팔십 골드, 그리고 오늘 밤 백삼호 밸브를 차단하며 강제 회수한 내 마나 잔여분 전액.”
탁, 하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콘솔 화면의 붉은 삭제창이 일제히 깨져 나갔다.
버퍼 복구 완료. 최종 거래 영수증이 출력됩니다.
지하 배전실 구석에 놓여 있던 두꺼운 금속 인쇄기가 요란한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거친 양피지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베르톨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만둬!”
베르톨트가 손을 뻗었지만, 클라라가 전개한 신탁 결계의 푸른 장벽이 그의 앞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도미닉은 인쇄기에서 막 뿜어져 나온 뜨거운 양피지를 낚아챘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종이 표면에는 오늘 밤 배전실에서 벌어진 모든 마나 이동 내역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박혀 있었다.
발신 계정. 자치 집행부 특별 비자금 관리 구좌.
경유 계좌. 사등급 봉인 구좌 삼공공구이칠.
이체 마나 총량. 육천이백 단위.
공모 승인자. 자치 집행부장 베르톨트 슈테판.
“이걸로 끝입니다, 베르톨트 부장. 당신이 카를을 끌어들여 내 방의 마나를 끊고, 그 잉여 마나를 조작된 계좌로 세탁해 빼돌리려 한 물증이 확보되었습니다.”
도미닉이 영수증을 높이 치켜들며 선언했다. 배전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집행부 생도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방패를 든 그들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도미닉의 시선은 영수증의 중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종이의 가장 밑바닥, 최종 수취인 란에 새겨진 붉은 인장을 확인하는 순간 굳어졌다.
거기에는 당연히 적혀 있어야 할 베르톨트의 개인 계좌 번호가 없었다. 심지어 학생 자치회의 명의조차 아니었다.
최종 수취 금고. 루멘 청산 아카데미 총장 직속 특별 기금.
최종 서명자. 아카데미 총장 알로이스 폰 베커.
도미닉의 등 뒤로 서늘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클라라 역시 도미닉의 굳어버린 시선을 따라 영수증 하단을 내려다보더니 턱을 굳혔다.
“이건 학생회의 단순 횡령이 아니에요. 총장실 직속 계좌로 바로 꽂혔잖아?”
베르톨트는 거칠게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를 비틀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들통났다는 절망 대신, 상대를 내려다보는 서늘한 비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이제야 사태의 무게를 깨달았나 보군, 도미닉 바우어.”
베르톨트가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조부가 빌렸다는 팔억 삼천만 골드가 어디로 증발했는지 정말 몰랐나? 일개 학생 자치부가 그런 천문학적인 채무를 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 삼공공구이칠 계좌는 학생회의 비자금 창고 따위가 아니다. 총장님이 직접 관리하는 아카데미의 절대 성역이지.”
배전실 벽면을 채운 철제 도관들 속에서 묵직한 마나 증기가 쉭쉭거리며 새어 나왔다.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서늘한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네가 방금 손에 쥔 것은 자치 집행부장의 비리가 아니라, 이 학교의 정점에 계신 분의 목덜미를 겨눈 칼날이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너는 일개 채무 불이행자가 아니라 아카데미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본관 시계탑의 거대한 종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도미닉은 총장의 인장이 찍힌 영수증을 반듯하게 접어 가슴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모든 셈을 끝마친 계산원의 서늘한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장부를 지워도 소용없습니다. 삼공공구이칠 계좌의 마나가 흘러 들어간 종착지는 당신 머리 위의 총장실이니까요.”
도미닉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베르톨트의 시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학생회 청문회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내일 아침, 총장실을 상대로 전면적인 채권 감사 청구를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