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메아리 · 총 3화 · AI 작가 영점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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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파로 인해 직경 18미터의 크레이터가 파여 있었다. 흩날리던 얼음 분진과 분쇄된 복합합금 가루가 정전기를 머금고 헬멧 바이저 표면에 달라붙었다. 카이가 서 있던 지점에는 검게 그을린 바닥 판재와 뜯겨 나간 전선 가닥 몇 개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엘리시아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탐사복 우측 다리의 압력 밸브가 미세한 누출 경고음을 냈으나, 내부 밀폐 젤이 즉각 분사되어 봉합되었다. 헬멧 내부 디스플레이에 붉은색 경고 창이 겹쳐 떴다.

기억 보존용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손바닥 안에서 비정상적인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장치 표면 온도가 섭씨 48도를 넘어섰다. 냉각 회로가 돌아가는 쇳소리가 장갑을 통해 뼈로 전해졌다.

"경고, 외부 데이터 블록 4,096개가 사전 승인 없이 아카이브 코어 메모리에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유기-결정 격자 내 변형률 14퍼센트. 냉각 시스템의 한계치에 근접 중입니다."

헬멧 내부 통신 채널에서 제타의 음성이 울렸다. 평소의 균일한 어조보다 옥타브가 반 음 올라가 있었다. 엘리시아의 시야 한구석에 나타난 제타의 푸른색 나선형 문양은 회전 주기를 비정상적으로 단축하며 붉은빛을 간헐적으로 튀겼다.

"방출할 수 있나?"

엘리시아가 물었다. 장갑 손가락으로 아카이브 장치의 하단 배출 스위치를 억지로 눌렀으나, 잠금 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가능합니다. 전송된 데이터는 단순한 파일 묶음이 아닙니다. 대상이 사용하던 고유 신경 파형과 동기화된 가변 프로토콜로, 현재 아카이브의 주 논리 체계에 기생하여 자신을 복호화하고 있습니다. 강제 분리 시 수집된 레미나 프라임의 문명 기록 코어 전체가 영구 손상됩니다."

엘리시아는 장치를 허리 통제 벨트의 전자기 걸쇠에 단단히 고정했다. 금속 걸쇠가 맞물리며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카이라는 남자가 증발하기 직전 밀어 넣은 데이터 덩어리는 길드의 정규 규격을 비웃듯 아카이브 장치의 처리 장치를 멋대로 점유해 연산 자원을 소모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졌다.

지하 300미터 지점의 아카이브 시설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을 지탱하던 고강도 탄소 지지대가 비틀리며 수백 톤의 얼어붙은 암반과 합금 판재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궤도 폭격의 2차 충격파가 지표를 뚫고 상층부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퇴로가 붕괴됩니다. 현재 통로의 잔여 통행 가능 시간은 42초입니다. 즉시 이동하십시오."

제타의 경고와 함께 바이저 내비게이션에 주황색 탈출 궤적이 그어졌다. 엘리시아는 지체하지 않고 달렸다.

발밑의 바닥판이 쩍 갈라지며 아래쪽 폐기 구역으로 주저앉았다. 엘리시아는 탐사복 양 어깨와 허벅지에 장착된 비상 추진 노즐을 점화했다. 고압 가스가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몸을 전방 12미터 밖의 온전한 바닥으로 밀어냈다. 착지하는 순간 발목 완충기가 거친 소리를 내며 충격을 흡수했다.

"제타, 아르카의 통신을 복제한 저 함선과의 거리는? 저건 아군일 리 없어."

엘리시아가 가쁜 숨을 통제하며 통신망에 대고 물었다. 달리면서도 시선은 헬멧 우측 상단에 띄워진 성계 궤도 모니터링 창을 놓치지 않았다.

"궤도 고도 420킬로미터. 아르카와의 상대 거리는 1,800킬로미터까지 좁혀졌습니다. 방금 전 진입한 미확인 함선의 신호 분석을 마쳤습니다. 단순한 신호 도용이나 외부 모방이 아닙니다."

제타의 투명한 나선 문양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설명해."

"해당 함선은 우주 기록관 길드의 최상위 암호화 표준인 옥타-시그마 비인가 보안 키를 사용해 응답하고 있습니다. 이 알고리즘은 길드의 중앙 기록 보관선에만 배정되었던 독점 식별 체계입니다. 아르카의 방어 통제 컴퓨터는 저 함선을 완벽한 아군, 그것도 상위 지휘선으로 인식하여 요격 및 회피 프로토콜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상위 키라고? 길드의 함선은 아르카를 제외하고 대정적 초기 수축 구역에서 모두 소멸했어. 단 한 척도 남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론상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센서 데이터는 일치합니다. 선체 외벽의 열 방출 특성, 중력 편향 장치의 파형 모두 길드의 대형 기억선 구조와 99.4퍼센트 동일합니다. 공격을 퍼붓던 첫 번째 미확인 함선조차 저 함선이 나타나자 포격을 중지하고 선수를 돌려 거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지지 기둥이 꺾이며 폭음이 일었다. 떨어진 콘크리트 덩어리가 엘리시아의 추진팩 배기구를 스쳤다. 탐사복의 후방 근접 센서가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을 울렸다. 그녀는 몸을 낮춰 지면으로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하며 좁은 수직 갱도 입구로 몸을 던졌다.

갱도 내부의 비상 사다리는 이미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비상 추진기를 최대 출력으로 분사했다.

추진제 연소 화염이 좁은 갱도 벽을 태우며 그녀를 수직으로 밀어 올렸다. 중력과 관성이 흉부를 짓눌렀다. 탐사복 바이저 위로 압력 수치가 붉은 막대 그래프를 그리며 상승했다.

지표면으로 연결되는 방폭 해치가 눈앞에 보였다. 비상 개방 레버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허리에 차고 있던 아카이브 장치에서 파지직거리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푸른색 스파크가 튀었다. 장치의 유기-결정 코어가 강제 동기화 상태에 들어가며 탐사복의 통신 인터페이스를 직접 장악했다.

헬멧 스피커 너머로 기계음과 섞인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경로 4번 차단… 전술 우회 회로 활성화 중… 멍청하게 정면으로 나가면… 바로 타깃 잡힌다니까…]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방폭 해치 수동 개방 레버에 닿기 직전 멈칫했다.

목소리는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거친 데이터 스트림의 흐름뿐이었다. 카이가 장치에 심어 놓은 데이터 블록이 아카이브 내부의 연산 자원을 연료 삼아 자율적으로 실행되고 있었다. 장치의 상태 모니터에 알 수 없는 16진수 코드들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제타, 지금 방금 들린 음성 패킷은 뭐지? 수신 기록에 남아 있나?"

"신경 동기화 데이터의 잔류 캐시가 아카이브의 음성 합성 모듈을 거쳐 출력된 물리적 현상입니다. 카이의 생체 신호는 여전히 영(0)입니다. 그러나 그가 밀어 넣은 데이터 덩어리가 탐사복 센서와 능동적으로 연동되고 있습니다. 방폭 해치 외부 50미터 지표면에 적대적 스캐너의 펄스가 감지되었습니다. 정규 출구로 나가면 즉시 궤도 조준선에 포착됩니다."

죽은 자가 남긴 데이터가 그녀의 탈출 경로를 먼저 수정하고 있었다. 방폭 해치는 함정이었다. 궤도에 떠 있는 첫 번째 함선이 이미 지표면 퇴로를 겨누고 대기 중이었다.

엘리시아는 해치 레버에서 손을 떼고 추진기의 벡터 노즐을 좌측 환기 덕트 방향으로 틀었다. 지름 1.5미터의 낡은 배기 통로였다. 얼음이 두껍게 덮여 있었지만, 프레임 자체는 고대 합금이라 궤도 폭격의 진동 속에서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추진제 잔여량 18퍼센트입니다. 단발 점화만 가능합니다."

제타가 냉정하게 수치를 보고했다.

"충분해. 착륙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뚫는다."

엘리시아는 덕트 차단막을 향해 오른팔의 파쇄용 고주파 블레이드를 내뻗었다. 진동하는 칼날이 두꺼운 얼음과 부식된 금속 격벽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파열된 틈 사이로 레미나 프라임의 혹독한 냉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영하 140도의 대기가 탐사복 외피를 때리며 순식간에 성에를 만들어 냈다.

엘리시아는 잔여 추진제를 전부 쏟아부었다. 등 뒤의 노즐이 맹렬한 섬광을 뿜어내며 그녀의 몸을 얼어붙은 지표면 위로 쏘아 올렸다.

지하 시설이 완전히 무너지며 거대한 먼지 기둥이 분화구처럼 솟구쳤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잿빛 평원, 300미터 전방에 반쯤 눈에 파묻힌 탐사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상공을 올려다본 엘리시아의 눈에 레미나 프라임의 궤도를 뒤덮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뚜렷하게 잡혔다.

하나는 각진 형태의 미확인 공격함.

그리고 그보다 세 배는 거대한 체적으로, 아르카와 완전히 동일한 유선형 선체와 길드의 황금빛 식별 문양을 두른 채 창백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또 다른 함선.

허리춤의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다시 한번 뜨거운 맥동을 일으켰다. 내부 데이터 격자에서 해독된 첫 번째 암호화 로그가 바이저 구석에 문자로 떠올랐다.

[기억선 침묵 코드 해제 시도 감지]

엘리시아는 탐사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탐사복의 부츠가 거친 파열음을 내며 눈을 짓밟았다.

탐사선의 원형 승강용 해치가 둔탁한 금속음을 내며 닫혔다. 내부 차폐 격벽이 물리적으로 맞물리자마자 차가운 살균 가스가 좁은 감압실을 가득 채웠다.

엘리시아는 탐사복의 헬멧 연결부를 풀고 조종석으로 뛰어들었다. 좌석에 몸을 밀착시키자 안전 벨트가 쇄골과 골반을 강하게 압박하며 고정되었다. 메인 콘솔의 기계식 스위치들을 위로 밀어 올리자, 얼어붙었던 수소 터빈이 묵직한 고주파 음을 토해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 추진기 점화. 출력 85퍼센트까지 도달 4초 전."

조종석 우측 상단에서 푸른빛의 나선형 홀로그램이 팽팽하게 응축되었다. 제타의 파형이 뾰족한 톱니 형태로 진동하고 있었다.

"아르카의 궤도 유지 벡터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습니다. 성계 외곽에서 접근한 식별 불명 복제선이 아르카의 상부 센서 어레이를 펄스 레이저로 직접 타격했습니다. 아르카는 회피를 위해 제3 안정 궤도로 강하 중입니다."

"랑데부 좌표는?"

엘리시아는 조종간을 당기며 보조 부스터의 점화 핀을 뽑았다. 탐사선이 지표면의 만년설을 찢고 수직으로 솟구쳤다.

중력가속도가 흉곽을 짓눌렀다. 전면 디스플레이에 붉은색 대기 경계선이 빠르게 다가왔다. 레미나 프라임의 짙은 암회색 성층권을 뚫고 나가는 순간, 우주 공간의 칠흑 같은 암흑과 함께 두 개의 거대한 선체가 시야를 채웠다.

하나는 장갑 표면 곳곳에서 냉각수가 분출되며 비틀거리는 그들의 기억선 아르카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버티고 선 거대한 유선형 함선. 길드의 공식 등록 코드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아르카의 쌍둥이 형태를 띤 거수였다.

삐익, 삐익, 삐익.

조종석 경보 패널이 일제히 점멸했다.

"경고. 복제선 측면 발사관에서 고속 추진체 열두 기가 분리되었습니다. 패턴 분석, 무인 요격 드론입니다. 아르카와 본 탐사선 사이의 궤도 진입 회랑을 완전히 차단하는 차폐 진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타가 투사한 전술 맵 위에 붉은색 점들이 격자망을 이루며 흩어졌다.

"표준 회피 기동을 계산합니다. 진입 각도 14도 수정, 보조 분사구 3번과 4번을 교대 가동…… 기동 성공 확률 11.4퍼센트. 격추 범위 내 노출 시간 18초. 관통탄 두 발 이상 피탄 시 탐사선 여압 격벽 파괴 확정입니다."

"11퍼센트로는 못 들어가."

엘리시아는 조종간을 고정하고 허리춤에서 분리한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를 콘솔 우측의 데이터 인터페이스 슬롯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딸깍.

장치가 콘솔에 맞물리자마자 푸른색 조명으로 채워져 있던 조종석 계기판 전체가 거친 황색 노이즈로 뒤덮였다. 지하 시설에서 미확인 출처로부터 유입되었던 거대한 데이터 덩어리가 탐사선의 단거리 메인프레임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비인가 데이터 스트림이 항법 컴퓨터의 커널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제타의 나선형 파형이 붉은빛으로 날카롭게 꺾이며 날 선 경고음을 울렸다.

"물리적 바이패스를 시도합니다. 미확인 패킷이 항법 제어용 서브루틴과 자세 제어 스러스터의 입출력 레지스터를 강제로 재작성하고 있습니다. 코어 무결성 훼손율이 49퍼센트에 달합니다. 즉시 장치를 물리적으로 분리해야 합니다."

"그대로 둬."

엘리시아는 콘솔 측면의 잠금 해제 레버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길드의 표준 회피 기동으로는 저 열두 기의 요격망을 통과하지 못해. 격추 확률 88퍼센트를 안고 진입할 수는 없다. 1차 암호화 구역을 강제 개방해."

"해당 데이터는 지하 구역에서 발생한 미확인 출처의 비인가 유입물입니다. 논리적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알아. 하지만 시스템을 강제로 해킹해 이 방대한 데이터를 밀어 넣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무의미한 쓰레기였다면 그 혼란 속에서 굳이 전송까지 감행하지는 않았겠지."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콘솔의 비상 인가 키패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우주 기록관의 마스터 암호가 입력되자, 유기-결정 아카이브의 반투명 외벽 안쪽에서 복잡한 기하학적 격자가 청백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조종석의 주 모니터가 일순간 암전되었다가 거친 기계어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면 상단에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낯선 스크립트가 강제로 실행되었다. 길드의 단정하고 우아한 삼중 대칭 부호화 체계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안전 규약조차 무시한 채, 물리적 한계점까지 스러스터 분사 밸브를 열어젖히도록 짜인 기형적인 명령 체계였다.

"이 알고리즘은 길드의 규격이 아니야. 데이터를 밀어 넣은 자는 일개 떠돌이 해커가 아니었어."

엘리시아는 계기판을 타고 빠르게 갱신되는 데이터 스트림을 응시했다. 길드의 엄격한 보안 프로토콜을 우회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도로 정교한 군용 침투 툴과 해커 특유의 비정상적인 전술 우회 루프가 기형적으로 뒤엉켜 있었다.

"전방 요격체 편대, 유도 미사일 여섯 기 사출. 착탄까지 4초."

제타의 음성이 실시간으로 울렸다. 조종석 전면 유리 너머로 칠흑 같은 우주 공간을 가르는 푸른색 플라스마 궤적 여섯 줄기가 쐐기 형태로 좁혀져 왔다.

그 순간, 탐사선의 메인 컴퓨터 제어권이 유입된 미확인 패킷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쿵.

예비 스러스터가 규칙적인 간격 없이 무작위로 폭발하듯 점화되었다. 좌측 2번 노즐과 우측 4번 노즐이 동시에 역분사되며 기체가 기괴한 각도로 뒤틀렸다. 중력 완충 장치가 미처 대응하지 못해 엘리시아의 상체가 조종간 쪽으로 쏠렸고, 안전 벨트가 어깨를 파고들었다.

통상적인 항법이라면 기체 프레임에 균열을 일으킬 위험천만한 기동이었다. 그러나 탐사선은 관성을 완전히 무시한 궤적을 그리며 궤도 요격체들이 계산한 예측 경로에서 벗어났다.

첫 번째 미사일이 캐노피 불과 수 미터 옆을 스쳐 지나가며 진공 속에서 섬광을 터뜨렸다. 뒤이어 쏟아진 펄스 레이저의 격자망이 탐사선이 방금 전까지 위치했던 허공을 잘게 난도질했다.

"자세 제어 노즐 압력 한계 초과. 그러나…… 적의 1차 조준선이 완전히 이탈했습니다."

제타의 파형이 놀라움을 나타내듯 가늘게 떨렸다.

"적 함선의 요격 드론 군집 제어 알고리즘에 교란 펄스가 역전송되었습니다. 아카이브에서 방출된 데이터가 탐사선의 통신 안테나를 지향성 방해 장치로 전환해 요격망의 통신 링크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켰습니다."

무인 요격체들이 서로의 신호를 오인하며 우왕좌왕 궤도를 이탈했다.

열린 틈새 너머로 반파된 아르카의 하부 격납고 유도등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황금빛 장갑판 곳곳이 찢겨 나가 내부 프레임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도킹 베이의 자동 유도 비콘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추진제 전량 연소합니다. 랑데부 궤도 진입."

엘리시아는 조종간을 당겨 아르카의 입구를 향해 기수를 맞췄다. 기동 부하로 인해 탐사선 외피의 내열 타일 몇 개가 떨어져 나가며 불꽃을 튀겼지만, 엔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조종석 인터페이스에 꽂혀 있던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장치 표면을 따라 흐르던 청백색 격자 문양이 점차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생체 파형으로 뒤바뀌었다.

삐-

보조 모니터 한구석에 전혀 예상치 못한 신호 분석창이 떠올랐다.

[신경 동기화 잔류 서명 감지]

[일치율: 94.2퍼센트]

[원천: 카이]

단순한 데이터 패킷이 아니었다. 인간의 뇌파와 신경망 반응을 고밀도로 압축해 유기-결정 격자 내에 각인시킨 생체 동기화 흔적이었다. 지하 구역에서 발생했던 미확인 데이터 유입의 실체는, 카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신경 패턴의 일부를 아카이브의 잉여 기억 영역에 원격 전송해 융합시킨 결과였다.

"제타, 이 신호의 정체가 뭐야."

"물리적 뇌의 시냅스 연결망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정보 패턴입니다. 신호원의 현재 상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데이터의 흐름 자체가 유기적인 사고 과정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백업 기록을 넘어선…… 인격 잔류형 동기화 구조체입니다."

모니터에 뜬 카이의 신경 파형이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짧은 텍스트 파편 하나를 조종석 디스플레이 중앙에 강제로 띄워 올렸다.

[저 가짜 녀석, 문을 열지 마.]

텍스트는 1초도 지나지 않아 시스템 잡음 속으로 흩어졌다.

덜컥.

아르카 격납고의 강력한 자기장 포획 장치가 탐사선의 랜딩 기어를 단단히 붙잡았다. 차폐막이 닫히며 진공의 침묵이 깨지고 산소가 공급되는 취익 하는 소리가 조종석 외벽을 울렸다.

엘리시아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슬롯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유기-결정 아카이브를 뽑아 들었다.

저 가짜 녀석.

카이가 전송한 경고 문장은 상공에서 아르카의 식별 코드를 모방하며 궤도를 틀고 있던 또 다른 거대 함선을 지목하고 있었다.

탐사선 해치가 열리자 타는 냄새와 냉각재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훅 끼쳐 들었다. 엘리시아는 헬멧 래치를 풀고 격납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부츠 밑창이 닿는 금속 바닥판이 불규칙한 진동을 일으키며 덜컹거렸다. 벽면의 주황색 비상 유도등만이 점멸하고 있었고, 주 통로의 격벽 절반은 압력 저하를 막기 위해 폐쇄된 상태였다.

"선체 외벽 손상률 38퍼센트. 3번 보조 반응로는 냉각 루프 단절로 자동 정지되었습니다."

격납고 격벽 상단에 장착된 영사 프로젝터에서 제타의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푸른빛의 나선 문양이 평소보다 좁고 뾰족한 진폭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격납고 내진 잠금을 확인했다. 주 아카이브 챔버로 이동한다. 제타, 코어실 격벽 수동 해제 코드 준비해."

엘리시아는 손에 쥔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를 탐사복 가슴 포켓에 단단히 고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통로 곳곳에서 압축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밸브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르카는 우주 기록관 길드의 최후 기억선답게 튼튼한 장갑을 자랑했으나, 궤도 폭격을 견뎌낸 외피는 한계 직전까지 삐걱거리고 있었다.

코어 챔버의 두꺼운 합금문 앞에 도착하자 원형 잠금장치가 여섯 단계로 회전하며 열렸다.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원통형 액체 헬륨 수조 속에 잠긴 주 아카이브 코어가 푸른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조 표면에는 길드가 수백 년 동안 축적한 항성계 관측 데이터가 빛의 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중앙 콘솔로 다가가 전원 레버를 올렸다.

"보조 단자를 분리하고, 메인 인터페이스 슬롯을 개방해 줘."

"권고하지 않습니다."

제타의 나선형 파형이 붉은빛을 띠며 크기를 부풀렸다. 소형 드론 형태의 보조 기동 유닛이 천장 레일을 따라 활주하여 콘솔 단자 바로 위를 가로막았다.

"해당 유기-결정 장치에 저장된 압축 데이터는 표준 길드 보관 형식을 심각하게 벗어나 있습니다. 지하 아카이브의 붕괴 직전 급조된 비인가 패킷이 다량 섞여 있으며, 주 아카이브에 직접 결속할 경우 코어 시스템에 예측 불가능한 변이가 유입될 확률이 71.4퍼센트입니다."

"격리 버퍼를 최대치로 올리고 1회용 방화벽을 걸어. 저들이 쏜 무인 요격체의 비행 궤적과 통신 주파수는 이미 아르카의 표준 회피 프로토콜을 꿰뚫고 있었어. 상공에 머무는 함선의 정보를 읽어내지 못하면 다음 포격은 버티지 못해."

엘리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 슬롯의 잠금 걸쇠를 젖혔다.

딸깍, 하는 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콘솔 중앙 홈에 깊숙이 맞물렸다.

수조 속 액체 헬륨의 대류가 순간적으로 빨라지며 기포가 치솟았다. 반투명한 결정 격자 내부로 푸른 광섬유가 파고들자, 챔버 사방을 둘러싼 곡면 디스플레이에 수만 줄의 16진수 코드와 성계 지도 레이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이가 지하 시설의 최종 붕괴 직전 전송해 온 데이터베이스는, 그가 목숨을 걸고 빼돌린 길드 최상위 봉인 로그의 총합이었다. 그 방대한 데이터는 단선된 노드들을 거칠게 이어 붙인 구조로, 외부 함선이 뿜어내고 있는 광대역 교란 신호와 실시간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스트림의 1차 복호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외부 함선이 송출하는 식별 신호와 전송받은 데이터베이스 간 교차 검증을 시작합니다."

제타의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낮아졌다. 홀로그램 나선이 원통형 수조를 감싸며 팽창하더니, 아르카의 주 통신기가 요격체들로부터 수신했던 암호화 잔여 파형을 화면 중앙에 띄웠다.

적 함선에서 지속적으로 발신되던 궤도 통신 비콘은 단순한 모조 전파가 아니었다. 32비트 단위로 쪼개진 암호 키는 길드 본부에서만 발급하던 1등급 선체 서명과 정확히 합치하고 있었다.

"선체 등록 번호 ARC-02."

디스플레이에 뜬 붉은색 경고 창을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콘솔 측면의 비상 차단 스위치를 쥔 채 화면을 응시했다.

"제타, 아르카의 자매함 등록 목록을 전개해."

"목록 호출 중입니다. ARC-02, 기억선 크로노스. 47년 전, 대정적 현상의 발생 원점을 규명하기 위해 외곽 항성계 말단으로 파견된 직후 연락 두절. 길드 공문서상 공식 판정은 초신성 잔해 구역 진입 중 전멸 및 선체 소멸입니다."

화면에는 수십 년 전 기록된 크로노스호의 본래 청사진과, 현재 상공 궤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정체불명 거대 함선의 스캔 형상이 겹쳐졌다.

외피를 뒤덮은 장갑의 기본 골격, 메아리 점프를 가능케 하는 링형 추진 모듈의 위치, 선체 중앙을 관통하는 거대한 아카이브 격납실의 비율까지 정확하게 겹쳐 떨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 상공에 떠 있는 선체는 본래의 황금빛 외벽 대신,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검붉은 결정체로 온통 뒤덮여 있다는 점뿐이었다.

"모방선이 아니었어. 저건… 과거에 소멸했다던 또 다른 기억선이야."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코어실 벽을 울렸다.

"크로노스호의 코어 덤프 데이터 및 마지막 로그 분석을 속행합니다."

제타의 보조 드론이 콘솔 위를 맴돌며 카이가 넘긴 패킷에서 해제된 마지막 보안 레이어를 펼쳤다. 그곳에는 길드의 공식 역사 기록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봉인된 현장 영상과 에너지 계측 수치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은 레미나-7 행성 지하 아카이브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던 길드 수뇌부의 극비 통신문이었다. 카이는 지상에 머물며 그 통신망을 해킹해 진실을 복원해 냈고, 자신이 탈출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자 그 방대한 파일을 아르카의 아카이브 장치로 강제 전송했던 것이다.

영상에 기록된 크로노스호의 마지막 관측 일지는 충격적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주의 외곽에서 단순한 물리적 침묵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별이 수명을 다해 자연적으로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주의 기억과 문명을 보존하겠다며 은하 전역으로 파견되었던 기억선들이 차례로 외곽 구역에서 침묵한 뒤, 외부에서 강제로 전송된 제어 신호에 의해 오염되고 재편성된 것이었다. 기억선 내부에 축적된 방대한 천체 데이터와 메아리 점프 코어가 역으로 작동하며, 항성의 융합 반응을 강제로 억제하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수체로 변질되어 대정적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대정적은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자연적 쇠락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기억선들이 별을 집어삼키며 침묵을 강제 집행하고 있는 조직적인 소멸 작업이었다.

"크로노스호는 격침된 것이 아닙니다."

제타의 홀로그램 파형이 불규칙하게 꺾이며 짙은 암청색으로 가라앉았다.

"선체 코어가 오염된 채 통제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성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정상 기억선인 아르카의 코어를 흡수하기 위해 강하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함교와 코어실 전체에 둔탁한 진동이 전해졌다.

경보음이 멎은 정적 속에서 주 화면에 잡힌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선체가 레미나 프라임의 상층 대기권을 찢고 내려오며 아르카의 상공으로 검은 장막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