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미등록 영혼들이 뿜어내는 냉기가 피부를 찢을 듯 현수를 덮쳤다. 눈앞을 가득 메운 검은 그림자들은 형태 없는 덩어리였으나, 그 존재감은 수많은 손길이 동시에 뻗어오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것들은 현수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며 내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차가운 감각을 선사했다. 폐가 눌리고 숨통이 막히는 듯한 질식감에 현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이게… 대체…!”
그는 망자 안내기를 든 손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그림자들은 물리적으로 막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연기처럼 그의 팔을 통과해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다시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저승관리국의 시스템 오류 때문이라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을 완벽한 죽음이었다. 차가운 그림자들이 그의 눈동자를 집어삼키는 순간, 현수의 뇌리에는 ‘겨우 죽음에서 벗어났는데, 또 다시 죽음의 문턱에 서다니’ 하는 비참한 절망감이 스쳤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자신은 이 초자연적인 위협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임을 다시금 상기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바로 그때, 따뜻한 온기가 그의 팔을 감쌌다. 한유진이 재빨리 현수의 팔을 잡아끌며 그를 거친 그림자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게 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하지만 확고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 나간 푸른빛은 맹렬히 달려들던 미등록 영혼들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빛을 피하듯 뒤로 물러나며, 한순간 골목길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현수 씨! 정신 차려요! 저것들은 영혼을 갉아먹는 위험한 존재예요! 폭주하는 영혼에 이끌려 나타나는… 일종의 포식자들이라고요!”
유진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그녀의 눈동자는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며 다음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수는 그녀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숨을 고르며 흐트러진 시야를 바로잡았다. 심장이 여전히 쿵쾅거렸지만,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냉기가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한유진의 푸른빛이 만들어낸 짧은 평화는 그에게 다시금 사고할 시간을 주었다.
그는 다시 소녀의 영혼을 바라봤다. 검은 안개 속에서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희망 없는 일상에 지쳐있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고단한 업무, 인정받지 못하는 노력, 그리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억울함. 소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절망은 그의 심장을 아프게 울렸다. 그는 소녀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자신이 느꼈던 무력감과 절망을 소녀에게서 발견했다.
‘그래, 나는 이제 무력하지 않아.’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든 손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와 얻게 된 이 능력이 단순히 영혼을 감지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치유하고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쓰여야 한다는 강렬한 책임감이 그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이 막막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와줄게… 내가 널 이해해…!”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폭주하는 소녀의 영혼을 향해 더욱 깊숙이 들이밀었다. 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은 단순한 조명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의 강력한 공감과 결의가 응축된 생명력처럼 느껴졌다. 푸른빛은 소녀를 뒤덮은 검은 안개를 뚫고 그녀의 영혼 핵에 닿으려는 듯 격렬하게 파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망자 안내기는 소녀의 영혼을 향해 맹렬히 끌려가는 듯했다. 그 순간, 그의 귀에 이 대리의 목소리가 원격으로 들려왔다.
“이현수 씨! 당신의 망자 안내기가…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 영혼의 폭주를 역으로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 대리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경이로움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현수는 이 대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망자 안내기가 소녀의 영혼과 강렬하게 연결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소녀의 파편적인 기억들이 단순한 이미지 조각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과 함께 폭포수처럼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강렬한 빛이 현수의 눈앞을 잠시 가리고, 이내 흐릿한 영상들이 펼쳐졌다.
차가운 옥상 바닥.
무언가에 밀려 허공으로 떨어지는 듯한 섬뜩한 감각.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끔찍한 추락의 공포.
그리고, 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
그 애가… 웃었어….
밀었어… 옥상에서….
더욱 선명하고 생생한 기억의 파편들, 그 안에는 소녀의 극한의 공포와 배신감, 그리고 억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충격적인 진실에 경악하며, 망자 안내기를 쥔 손에서 뜨거운 전율을 느꼈다. 그의 몸은 극한의 에너지 소모로 지쳐있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낡은 껍질을 깨고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듯한 각성감을 경험했다. 마치 억압되었던 본능이 깨어나는 것처럼, 망자 안내기가 그의 손아귀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수의 강력한 공감과 망자 안내기의 이례적인 반응에 영향을 받아, 소녀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거짓말처럼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명 소리도 차츰 잦아들며, 불안정했던 영기의 흐름이 미미하게나마 안정되는 것을 현수는 감지할 수 있었다. 골목길 주변을 맴돌던 미등록 영혼들은 여전히 주변을 서성였지만, 소녀의 영혼 폭주가 사그라들면서 그들의 기세도 한풀 꺾이는 듯했다. 맹렬한 공격성은 누그러들고, 마치 불확실한 먹이를 주시하는 포식자들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수와 유진을 응시했다.
현수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맑고 생생했다. 그는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이 단순한 미해결 사건 해결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변화의 서막임을 직감했다. ‘불완전한 죽음’이 자신에게 부여한 운명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한유진은 그런 현수를 놀라움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빛은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에 불과했지만, 현수의 망자 안내기는 영혼의 폭주를 흡수하고 과거의 기억까지 읽어내는 강력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현수가 자신과는 다른, 훨씬 강력한 잠재력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조우를 넘어선, 미지의 협력 관계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걷던 존재가 아니라, 소녀의 억울함을 함께 풀어야 할 공동의 운명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걷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축축한 골목길을 비췄다. 현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온몸의 근육은 방금 전까지 전력 질주라도 한 듯 쑤셨고,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선명하게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망자 안내기를 통해 흘러들어 온 소녀의 파편적인 기억들이었다.
‘옥상… 밀었어… 그 애가… 웃었어….’
선명한 기억의 조각들은 그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쓰디쓴 절망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범한 중소기업 직원이었다. 팍팍한 월급으팍한 월급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상사의 잔소리와 거래처의 불합리한 요구에 고개 숙이던 그저 그런 직장인. 그런 자신이 이제 살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할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그것도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니.’
두려움이 온몸을 옥죄어왔다. 손안에 들린 망자 안내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능력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 동시에,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안겨준 셈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망자의 잔류 사념, 특히 소녀의 깊은 억울함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소녀의 슬픔과 분노가 담긴 잔상은 거울처럼 자신의 과거를 비추는 듯했다. 희망 없는 일상에 지쳐있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억울함에 몸부림치던 소녀. 그 깊은 공감은 그의 두려움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의 마음속에서 연민과 책임감이 서서히 두려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한유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배어 있었지만, 걱정스러운 기색과 함께 미지의 현상에 대한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현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망자 안내기를 든 손에 아직도 미세한 떨림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밀쳐졌어요.” 현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옥상에서… 누군가… 그녀를 죽였어요.”
유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에는 충격이, 이내 가늘게 떨리는 입술에는 분노가 서렸다. 그녀는 현수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하다가, 턱을 굳게 다물었다.
“역시… 단순한 자살이 아니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쉽게… 쉽게 영혼들의 절규를 외면하죠. 아니, 보지 못하는 건가. 보려고 하지 않는 건가.”
유진은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쥐었다 하며 희미하게 푸른빛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영혼을 보는 능력 때문에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무력감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망자들의 억울함을 마주해야 하는 좌절감. 현수는 그녀의 고통이 자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때, 현수의 망자 안내기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더니, 이 대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리적인 홀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명하고 엄중했다.
“이현수 씨, 제 말이 들립니까?” 이 대리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냉정함 속에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당신의 능력은… 관리국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망자 안내기의 잠재력을 당신의 불완전한 죽음을 통해 얻은 공감 능력으로 극대화시킨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더욱 꽉 쥐었다. 기계의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바닥에 땀으로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미등록 영혼들은… 시스템 붕괴의 부산물입니다.” 이 대리는 설명을 이어갔다. “폭주하는 영혼의 잔류 사념이 강해질수록, 그들은 더욱 증식하고 난폭해집니다. 이번처럼, 물리적인 피해를 유발하고 주변의 영기를 흡수하며 무차별적으로 날뛰죠. 소녀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한, 이 혼란은 계속될 겁니다. 시스템은 붕괴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이현수 씨, 소녀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관리국의 시스템을 지키고… 당신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이 대리의 말은 현수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너무나도 달콤했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책임감은 거대하고 막중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현수는 유진을 바라봤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진실을 밝히는 것뿐인가요?”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망설임 대신, 미약하지만 단단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도 한층 진지해져 있었다. “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죽은 자의 진실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눈에는 영혼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그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할 테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서 같은 종류의 결의를 읽었다. 고독하게 영혼과 마주했던 두 존재가, 이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를 찾은 듯했다. 현수는 자신의 망자 안내기가 단순히 영혼을 감지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녀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시작해야죠.” 현수가 말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골목길 저편의 높은 담장을 올려다봤다. 담장 너머로 흐릿한 학교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우선… 소녀의 신원부터 파악해야겠죠. 그리고 그녀가 죽은 곳의 주변부터 다시 조사하는 거예요.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른 단서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골목길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소녀의 영혼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듯 희미하게 빛나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슬픔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격렬했던 분노의 검은 안개는 한결 차분해진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처럼. 소녀의 영혼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현수는 가슴 한편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온기는 그에게 임무 완수의 강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두 사람은 함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을 파악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골목길을 벗어나 익숙한 도시의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도로는 활기찬 소음으로 가득했다. 이현수는 말쑥한 회사원 복장 그대로였고, 한유진은 밝은색 캐주얼 재킷과 청바지로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는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자신인데, 이제는 영혼의 비명과 숨겨진 진실을 쫓는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영혼을 쫓아다니는 탐정이 된 건가?’
혼란스러운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에서 돌아와 얻은 두 번째 기회는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또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책임감과 맞서야 하는 거대한 숙명에 가까웠다. 그의 발걸음 옆으로 여고생의 희미한 영혼이 그림자처럼 맴도는 것을 감지하며, 현수는 책임감을 다잡았다. 뼛속까지 스며들던 소녀의 억울함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두 사람은 골목길을 벗어나 소녀의 모교인 듯한 고등학교 근처로 향했다. 한유진은 익숙하게 주변을 스캔하며 눈을 빛냈다. 염색한 밝은 갈색 머리가 한낮의 햇살 아래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마치 오랜 기간 이 세상에 숨겨진 진실을 쫓아온 베테랑 탐정 같았다.
“이 학교 학생이었을 거예요. 이 근처에서 자주 보였거든요.” 유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혹시…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손에 쥐고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 교문 앞, 왁자지껄한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학생들,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상인들. 모두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 사이에서 읽히는 미묘한 피로감, 오가는 대화 속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무관심과 냉소의 잔재들. 그의 귀에는 살아있는 자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대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영혼들의 속삭임이 불협화음처럼 울렸다.
유진은 능숙하게 학교 앞 문방구 할머니에게 다가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혹시… 얼마 전에 이 근처에서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기억하세요?”
“안 좋은 일이라니? 에구, 요즘 세상에 안 좋은 일이 어디 한둘이니. 그냥저냥 다들 살고 있는 거지.” 할머니는 돋보기를 고쳐 쓰고 신문을 넘기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 예쁜 여고생 아이 말인가? 불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현수는 할머니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소녀의 영혼은 분명 ‘밀쳐졌다’고 했다. 망자 안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기에서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이 깜빡였다. 주변의 영적인 잔재들을 포착하려는 듯했다.
유진은 몇몇 학생들에게도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안타까운 자살 사건.’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려는 듯한 미묘한 침묵을 유지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보다는, 어딘가 냉담하고 회피하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켠 채 주변을 스캔했다. 망자 안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그의 시야를 통해 주변의 영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눈에는 학교 교문 앞 벤치에 앉아있던 학생들 주변에서 희미한 불안감과 함께 ‘무관심’이라는 감정의 파편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소녀의 영혼이 떠돌았던 골목길과 가장 가까운 학교 건물 옥상 부근에서, 현수는 격렬한 절망감과 함께 ‘거짓말’이라는 선명한 감정의 파편을 감지했다. 마치 누군가 진실을 덮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처럼, 영적인 파동이 뒤틀려 있었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 한 학생의 손이 다른 학생의 등을 밀치는 잔혹한 장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공식 기록은 자살이지만… 영혼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현수는 굳은 목소리로 유진에게 말했다. 그의 손에 쥔 망자 안내기가 더욱 선명한 푸른빛을 발산하며 특정 지점을 가리켰다. 학교 건물 옥상이었다.
“나도 느꼈어요. 사람들이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고.” 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직접 학교에 들어갈 수는 없을 텐데…”
그들은 학교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수집했다.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통해 주변에 남아있는 미약한 영적 잔재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하며 퍼즐을 맞춰갔다. 망자 안내기는 특정한 이름이나 사물을 인지할 때 미약하게 진동하며 반응했다. 한 골목길 벽보에 붙어있던 낡은 전단지, 그리고 현수가 감지한 주변 학생들의 어렴풋한 생각 속에서 그는 소녀의 이름과 그녀가 다니던 반, 그리고 몇몇 친구들의 이름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김지은.” 현수가 망자 안내기에 그 이름을 입력하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옆을 맴돌던 소녀의 영혼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그 이름에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미약한 울림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아주 잠깐이나마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들은 김지은이 다녔던 학원 주변, 그리고 그녀가 살았을 법한 동네를 배회했다. 골목길 곳곳에 지은의 영혼이 남긴 슬픔과 공포의 잔재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통해 지은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거나, 특정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음을 포착했다. 파편적인 이미지 속에서 교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지은의 모습, 그리고 그녀를 비웃는 듯한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괴롭힘… 왕따…” 현수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이 죄어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은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그들은 지은의 온라인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SNS 계정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 기록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너무나도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말끔하게 사라진 데이터는 현수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자살한 학생의 기록을 이렇게까지 지울 필요가 있을까? 누가 이런 짓을…?’
현수는 문득, 자신들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낯선 시선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분.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차가워진 듯했다. 그는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현수 씨… 왠지… 누가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아요.”
한유진 역시 주변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영혼을 보는 능력 외에도, 예민한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감지하는 듯했다. 그녀의 말에 현수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영혼 사건을 넘어, 인간의 악의와 맞서야 하는 더 큰 위험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깨달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고등학교 운동장. 인기척 없는 그곳을 가로지르는 순간, 현수와 유진의 뒤편, 낡은 건물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검은 형체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현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금속성의 기운이 그의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것은 그림자도, 착각도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진실에 다가설수록, 그 진실을 감추려는 어둠 또한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현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