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실의 공기는 훈련장 복도의 눅눅한 땀 냄새와 확연히 달랐다. 차갑게 식은 기계음과 갓 출력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서준은 문턱을 넘어서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책상 앞 두 걸음 거리에 서서, 의자에 앉은 예빈을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예빈은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바인더를 톡톡 두드렸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는 서준의 이름과 학번, 그리고 플뢰레 종목 코드가 하얀 라벨로 붙어 있었다.
"윤서준 선수, 2021년 대통령배 8강전 12대 15 패배. 2022년 대학연맹전 8강전 13대 15 패배. 그리고 지난달 춘계선수권 8강전 11대 15 패배."
예빈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마치 일기예보를 읽는 아나운서처럼 담담했다.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놓인 무선 마우스를 쥐고 벽면의 대형 모니터를 켰다.
화면이 켜지며 세 개의 분할 영상이 동시에 재생되었다.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은 상대들과 맞붙은 서준의 경기 장면이었다.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상대들이 전부 왼손잡이였거나, 리치가 긴 장신이었습니다. 단순한 상성 문제예요."
서준이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단순한 상성이라."
예빈은 짤막하게 대꾸하며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세 화면의 영상이 동시에 멈췄다.
"서준 선수가 11점 혹은 12점을 득점한 직후, 승부처에서 시도한 공격 장면들입니다. 세 경기 모두 똑같아요. 거리는 2.4미터, 서준 선수는 마르셰로 거리를 좁힌 뒤 팡트를 꽂아 넣으려 했습니다."
"플뢰레의 기본입니다. 내 리치와 타이밍을 믿고 들어가는 게 왜 문제죠?"
"기본이 완벽해서 문제입니다."
예빈이 모니터 화면의 특정 구간을 0.1초 단위로 확대했다. 서준의 하체, 특히 앞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과 칼끝의 각도가 붉은색 격자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준 선수의 팡트는 교본 그 자체예요. 준비 자세에서 칼을 뻗는 순간까지 궤적의 오차율이 1퍼센트 미만입니다. 전국 어떤 선수보다 폼이 깨끗해요.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을 보시죠."
예빈이 휠을 굴려 프레임을 하나씩 넘겼다. 화면 속 서준의 오른쪽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뒤로 당겨졌다.
"앞발이 나가기 직전, 검을 쥔 손목에 힘을 주며 어깨를 0.18초 동안 움츠립니다. 본인은 탄력을 모으는 동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완벽한 신호탄이에요. 출발선에서 신호총을 쏘기도 전에 깃발을 흔들어 주는 격입니다."
서준의 턱선이 굳어졌다. 팔짱을 낀 손가락 끝이 도복 소매를 파고들었다.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은 부인할 수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2021년에도, 2022년에도, 지난달에도.
예빈은 서준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공격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상대에게도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궤적입니다. 팡트 직전 0.18초의 예비 동작, 그것이 당신의 3년을 가로막았습니다. 8강에서 만나는 수준의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그 0.18초를 감지해요. 그래서 뒤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당신의 칼을 쳐내고 아타크 콩포제를 성공시키는 겁니다."
"데이터 몇 줄, 영상 몇 프레임 잘라 붙였다고 피스트 위의 감각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
서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무심한 어조가 아닌, 명백한 거부감이 섞인 어투였다.
"피스트 위는 바람도 불고, 바닥의 미끄러움도 다르고, 상대의 숨소리 하나에도 타이밍이 바뀝니다. 그런 변수들을 전부 0.18초라는 숫자에 욱여넣을 수 있다고 봅니까? 모니터 앞에 앉아서 숫자나 두드리는 사람은 절대 모르는 영역입니다."
서준은 책상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 상판에 손바닥의 온기가 번졌다.
"난 지난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천 번씩 찌르기를 연습했습니다. 내 몸에 박힌 감각을, 펜싱 검 한번 제대로 안 잡아 본 매니저가 부정할 자격은 없어요."
그 말에 예빈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감각에만 기대니까 3년 동안 8강 문턱을 넘지 못한 겁니다."
예빈의 말 한마디가 매니저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노력의 양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윤서준 선수가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했는지는 이 데이터가 가장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천 번을 찔렀기 때문에 저 나쁜 버릇이 골수에 박혀버린 거예요. 수정되지 않은 성실함은 그냥 독입니다. 자기만족일 뿐이에요."
"뭐라고?"
"피스트 위의 감각이 그렇게 절대적이라면, 왜 지난달 경기에서 11대 11 동점 상황일 때 콩트르 아타크를 맞았습니까? 상대가 칼을 피할 거라는 걸 감각으로 느끼지 못했습니까?"
서준의 숨이 일순 멎었다. 지난달 대회의 마지막 순간, 상대의 칼끝이 자신의 가슴에 닿았을 때의 섬뜩한 촉감이 다시 떠올랐다. 분명히 들어갔다고 확신했던 공격이었다. 자신의 칼은 허공을 갈랐고, 불빛은 상대편 램프에서만 켜졌다.
예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쇄된 서류 한 장을 서준의 손가락 옆에 내려놓았다.
"이건 윤서준 선수의 팡트 반응 속도와 회수 시간을 0.05초 단위로 쪼갠 수정 훈련표입니다. 어깨의 긴장을 풀고, 손목 스냅 대신 팔꿈치 관절의 탄성을 이용해 0.18초의 예비 동작을 지우는 과정이에요. 이 루틴대로 2주만 훈련하면, 당신이 그토록 자랑하는 피스트 위의 감각도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서준은 책상 위의 종이를 노려보았다.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표, 분초 단위로 나뉜 동작 지침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종이를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뒤로 물러섰다.
"탁상공론입니다. 숫자로 사람을 기계처럼 깎아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이 우습군요."
"오만함인지 현실 직시인지는 피스트 위에서 확인하면 됩니다."
예빈이 물러서지 않고 서준의 말을 받아쳤다.
"증명해 드릴까요? 지금 훈련장으로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이 데이터를 적용해 보죠. 상대가 당신의 0.18초를 노리고 들어오면, 당신의 그 완벽한 팡트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직접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서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승부욕을 넘어선 오기가 그의 전신을 타고 올랐다.
"좋습니다. 내 감각이 틀렸는지, 당신의 그 잘난 데이터가 헛소리인지, 피스트 위에서 결판내죠."
서준이 몸을 돌려 매니저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서준의 긴 보폭을 따라 매니저실 문이 덜컹거리며 닫혔다. 예빈은 한 박자 늦지 않게 책상 위의 클립보드를 집어 들고 그의 뒤를 쫓았다.
오전 7시 30분의 훈련장은 차가운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낡은 마루 바닥은 서준의 거친 발걸음에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고, 높은 천장 아래로는 먼지 냄새와 오래된 방청유 냄새가 섞여 맴돌았다. 한때 전국대회를 휩쓸었던 트로피들은 구석진 진열장 안에서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한가운데에 놓인 메탈 피스트만이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서준은 벽면에 기대어 있던 자신의 장비 가방 앞으로 가 멈춰 섰다. 지퍼를 거칠게 내리고 흰색 펜싱 재킷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누굴 부를 겁니까? 이 시간에 나온 부원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준이 차가운 눈길로 예빈을 돌아보았다.
"혼자 벽이라도 찌르며 허공에 0.18초를 세어 보라는 건 아니겠지요."
"부원이 없다면 제가 직접 상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예빈이 안경테를 살짝 밀어 올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 칼을 받으실 생각입니까?"
"선수 시절의 감각이 다 죽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윤서준 선수가 납득하려면 현역 선수의 칼끝이 더 확실하겠죠."
그때 훈련장 출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라? 불이 켜져 있네. 서준이 너 또 밤새 칼 휘둘렀냐?"
길쭉한 스포츠 백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남자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걸어 들어왔다. 정하윤이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트레이닝복 상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라, 매니저 누나도 계셨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부터 둘이 훈련장에서 뭐 해요? 서준아, 아침부터 매니저 누나랑 무슨 데이트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서준이 플뢰레를 꺼내 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가느다란 파열음을 냈다.
하윤은 서준의 험악한 태도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가방을 벤치 위에 툭 던졌다. 그러고는 서준의 굳은 얼굴과 예빈이 들고 있는 서류철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 안쪽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기민한 빛이 스쳤다.
"분위기 살벌하네. 우리 에이스 님이 또 자존심 긁히셨나 보네. 매니저 누나가 뭐라고 했길래 그래? 팡트 자세가 엉망이래?"
"정하윤 선수."
예빈이 하윤을 부르며 다가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흐트러짐 없이 명확했다.
"플뢰레 다룰 줄 알죠?"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사브르인데요? 베고 찌르는 칼 쓰지, 찌르기만 하는 얌전한 칼은 재미없어서 안 잡은 지 꽤 됐는데."
"기본적인 찌르기 메커니즘과 프라이오리티 룰은 알 것 아닙니까."
"당연히 알죠. 체대생이 그것도 모르면 자퇴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플뢰레는 왜요?"
예빈은 클립보드에서 노란색 메모지 한 장을 뜯어냈다. 그 위에는 단정한 필체로 몇 가지 수치와 화살표가 적혀 있었다.
"윤서준 선수와 3점 내기 연습 경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플뢰레로요."
하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 플뢰레로 윤서준을? 누나, 쟤 지금 랭킹 떨어졌다고 해도 플뢰레로는 전국구예요. 사브르 선수가 주 종목도 아닌 칼 들고 들어가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텐데요."
"이 메모에 적힌 대로만 움직이면 하윤 선수가 이깁니다."
예빈의 단호한 선언에 훈련장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준이 들고 있던 플뢰레의 칼끝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강예빈 씨."
서준이 다가왔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위압감이 예빈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적당히 하십시오. 사브르 선수에게 플뢰레를 들려 나를 상대하게 하겠다고요? 장난치는 겁니까?"
"장난 아닙니다. 서준 선수가 말한 탁상공론의 결과물을 증명하려는 겁니다."
예빈은 서준의 날 선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하윤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하윤 선수, 거절할 이유가 있나요? 팀의 플뢰레 에이스를 공식적으로 찔러볼 기회인데."
하윤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그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서준의 반응을 살피더니, 망설임 없이 예빈의 손에서 노란 종이를 낚아챘다.
"오호, 솔깃한 제안이네. 서준아, 어떻게 생각해? 그 분석이 진짜인지 내가 플뢰레 잡고 확인해 줄까?"
"정하윤, 너까지 나서서 유치하게 굴지 마라."
"유치한 건 너지. 왜, 사브르 잡는 놈한테 플뢰레로 한 점이라도 뺏길까 봐 겁나냐?"
하윤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내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종이에는 복잡한 전술 대신 단순한 지시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첫째, 거리를 1.8미터로 유지하며 서준의 검을 먼저 치지 말 것.
둘째, 서준이 오른쪽 어깨를 2센티미터 내리는 순간, 방어하지 말고 칼을 앞으로 뻗으며 반박자 빠르게 파라드를 생략할 것.
셋째, 공격 타이밍은 서준의 앞발이 완전히 지면에 닿기 직전, 0.18초의 공백이다.
하윤의 입술 사이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는 사브르 특유의 동물적인 육감을 지닌 선수였다. 메모에 적힌 타이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준이 공격할 때 어떤 예비 신호를 보내는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누나, 이거 진짜 서준이 버릇이에요?"
"영상 300개를 프레임 단위로 돌려 확인한 결과값입니다."
하윤이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벽장에 걸려 있던 여분의 플뢰레 검을 집어 들었다. 검신의 탄성을 확인하듯 바닥에 대고 꾹 눌러보더니, 가볍게 손목을 털어 칼끝을 흔들었다.
"좋아. 해보자. 3점 내기."
"하윤아."
서준의 목소리에 명백한 경고의 빛이 실렸다. 칼을 쥐고 있는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다치게 해도 난 책임 안 진다."
"어련하시겠어요, 도련님."
하윤은 능청스럽게 마스크를 집어 들고 피스트 위에 올라섰다. 사브르 선수 특유의 탄력 있는 스텝으로 가볍게 몸을 풀며 피스트 끝자리로 걸어갔다.
"누나, 심판 봐줘요. 플뢰레 규칙은 공격 우선권 판정이 까다로우니까."
"제가 보겠습니다."
예빈이 피스트 중앙 옆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스톱워치를 목에 걸고 차분하게 두 선수를 응시했다.
서준은 턱을 바짝 당긴 채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검은 철망 너머로 보이는 그의 두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단단한 보폭으로 피스트 반대편에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정확히 4미터.
서준이 오른팔을 들어 올려 정중하게 검을 내리며 샬뤼를 표했다. 하윤 역시 건들거리던 태도를 지우고 마스크를 쓴 채 예의를 갖추었다.
삐걱거리던 마루 소리가 멎고, 훈련장에는 오직 세 사람의 호흡 소리만이 남았다.
예빈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앙 가르드."
두 선수가 무릎을 굽히고 칼끝을 맞대었다. 서준의 검 끝은 미동도 없이 하윤의 흉골을 향했고, 하윤은 평소 사브르 자세보다 칼을 조금 더 안쪽으로 당겨 쥔 채 낮게 웅크렸다.
"프레."
서준의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는 것이 보였다.
"알레!"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서준의 발이 바닥을 굴렀다.
탁,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서준의 플뢰레가 곧게 뻗어나갔다. 플뢰레의 기본은 철저한 거리 감각과 간결한 팡트다. 그의 검 끝은 불필요한 흔들림 없이 하윤의 오른쪽 가슴을 겨냥했다.
하윤은 사브르 특유의 빠른 발을 살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나는 속도보다 서준의 진격이 반 뼘 더 빨랐다.
챙!
하윤이 급히 검을 세워 서준의 칼을 쳐내려 했으나, 서준의 칼끝은 뱀처럼 하윤의 가드를 피해 에둘러 들어갔다.
투셰.
스코어보드 서준의 자리에 녹색 불이 켜졌다.
"1 대 0."
예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스톱워치를 쥔 손가락만 가볍게 꺾여 있었을 뿐,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하윤은 턱 끝을 긁적이며 시작 선으로 돌아갔다.
"역시 플뢰레 정통파는 찌르는 각도가 다르네. 사브르 칼 쥐던 버릇 때문에 손목이 자꾸 들려."
"장난칠 생각이면 지금 내려가라."
서준이 검 끝을 바닥으로 떨구며 차갑게 내뱉었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음성이었다.
"누가 장난친대? 이제 몸 풀린 건데."
하윤이 씩 웃으며 다시 마스크를 고쳐 썼다. 두 번째 승부는 서준이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하윤의 도발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예빈이 피스트 옆에서 자신을 관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신경을 긁었다. 보란 듯이 완벽한 기술로 끝내겠다는 고집이 그의 움직임에 실렸다.
"앙 가르드. 프레. 알레!"
서준이 짧게 전진 스텝을 밟으며 페인트를 섞었다. 하윤이 칼을 안쪽으로 당기는 것을 확인한 서준은 즉시 방향을 틀어 상대의 겨드랑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윤이 황급히 몸을 비틀었으나 서준의 칼끝이 먼저 재킷에 닿았다.
삐익, 전자 판정기의 신호음과 함께 다시 녹색 불이 번쩍였다.
"2 대 0."
예빈이 점수를 선언했다.
서준은 칼을 거두며 하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피스트 바깥의 예빈을 똑바로 응시했다. 철망 너머로 드러난 서준의 눈빛은 명백한 조소를 띠고 있었다.
데이터 따위로 펜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 낡은 체육관에 발을 디딘 첫날부터 가르쳐 주겠다는 무언의 과시였다.
"매니저님. 다음 1점이면 끝납니다."
서준이 마스크 안에서 낮게 읊조렸다.
"계속하십시오."
예빈은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을 뿐, 어떤 변명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하윤을 향해 짧게 눈짓을 보냈다.
하윤은 그 눈짓을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을 쥔 손을 가볍게 풀었다 쥐기를 반복했다. 이전 두 번의 실점과는 완전히 다른 자세였다. 하윤은 피스트의 흰 선 위에서 앞뒤로 통통 튀듯 스텝을 밟았다. 사브르 선수가 거리를 잴 때 쓰는 독특하고 탄력 있는 박자였다.
"앙 가르드."
두 사람의 칼끝이 공중에서 가볍게 스쳤다.
"프레."
서준은 이번 공격으로 승부를 완전히 끝낼 작정이었다. 그는 무릎을 조금 더 깊게 낮추며 공격 개시의 순간을 계산했다. 하윤과의 거리는 약 1.8미터. 서준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팡트의 유효 사거리였다.
"알레!"
서준이 가볍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 척하며 상대의 반응을 떠보았다. 하윤은 칼을 앞으로 내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서준의 상체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반응이 없다면 뚫어낼 뿐이다.
서준이 온몸의 체중을 뒤쪽 다리에 실었다가 앞쪽으로 폭발시키려던 찰나였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습관처럼 아래로 2센티미터쯤 처졌다. 강한 팡트를 뻗기 직전, 검을 쥔 손목에 힘을 모으기 위해 서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고질적인 예비 신호였다.
그 순간, 가만히 서 있던 하윤의 플뢰레가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서준의 앞발이 아직 공중에 떠 있던, 바닥에 닿기까지 찰나의 시간이었다. 서준은 자신의 칼을 뻗기도 전에 흉골 한가운데에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챙,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체육관 천장을 울렸다.
서준의 시야 한구석, 판정기에서 하윤 쪽의 붉은 불빛이 선명하게 번쩍였다. 서준의 칼끝은 허공을 가른 채 멈춰 섰고, 하윤의 플뢰레는 서준의 흰색 재킷 정중앙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삐익.
긴 신호음이 끊어지자 체육관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낡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덜컹거리며 귓전을 맴돌았다.
서준은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고 있는 은빛 도신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칼끝에 눌린 재킷 천이 움푹 패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플뢰레를 주 종목으로 하지도 않는 사브르 선수에게, 그것도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자신의 주무기인 팡트 타이밍을 정면에서 찔려 당했다는 사실이.
하윤이 마스크를 벗어 옆구리에 끼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와, 진짜네. 소름 돋는다."
하윤은 자신의 손에 쥐인 플뢰레를 신기하다는 듯 돌려보았다.
"사브르 칼보다 가벼워서 찌르는 맛이 덜할 줄 알았는데, 어깨 떨어지는 거 보고 그냥 냅다 찔렀더니 정확히 들어가네. 서준아, 너 진짜 그 타이밍에 앞발이 붕 뜨더라. 알고 보니까 너무 잘 보여."
서준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스크를 벗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굳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동자는 피스트 바닥의 한 점에 고정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하윤은 사브르 특유의 거친 공격성을 버리지 못한 채 플뢰레를 쥐고 있었다. 플뢰레의 엄격한 규율과 폼을 무시한 거친 찌르기였음에도, 정확히 그 0.18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예빈이 종이에 적어 준 단 세 줄의 지시 그대로.
"2 대 1."
예빈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는 천천히 피스트 위로 걸어 올라왔다. 손에 들린 태블릿 피시의 화면에는 방금 하윤의 기습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스코어는 여전히 윤서준 선수의 우세입니다. 1점만 더 내면 시합은 당신의 승리로 끝나겠죠."
예빈은 서준의 한 걸음 앞에 멈춰 섰다.
금테 안경 너머의 담담한 두 눈이 서준의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붙들었다.
"하지만 서준 씨도 알고 계실 겁니다. 하윤 선수는 사브르의 베기 동작에 익숙한 선수입니다. 찌르기 궤적이 플뢰레 선수들에 비해 훨씬 크고 거칠었죠. 만약 방금 피스트 맞은편에 서 있던 상대가 전국 랭킹 5위권의 플뢰레 전문 선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준의 손가락이 마스크 테두리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피가 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 3년간 중요 대회 8강전에서 마주쳤던 패배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믿었던 경기들, 공격이 성공했다고 확신했던 순간에 어김없이 상대의 램프에 불이 들어왔던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자신은 완벽하다고 믿었던 동작 하나가, 실은 상대에게 언제든 등을 내어주는 치명적인 신호였던 것이다.
"단 한 점이었습니다."
예빈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높낮이 없는 그 목소리가 체육관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서준의 귓전에 박혔다.
"하지만 전국 대회 결승이었다면 그 한 점으로 당신의 선수 생명은 끝났습니다. 이제 제 분석을 따르시겠습니까?"
피스트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윤은 장난기를 지우고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늘 도도하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의 펜싱에 확신을 가졌던 서준이 이토록 무력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서준의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오르내렸다.
"겨우…… 한 번입니다."
서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노인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거부인지 모를 떨림이 배어 있었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을 뿐입니다. 단 한 번의 합으로 내 지난 10년의 검을 부정할 수는 없어."
"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적인 결과값입니다."
예빈은 망설임 없이 태블릿 피시의 화면을 터치했다.
화면에는 서준이 지난 1년간 치른 공식 경기 스물네 편의 팡트 장면이 격자 형태로 나열되었다. 서준이 발을 내딛기 직전, 스물네 번의 공격 모두에서 그의 오른쪽 어깨가 정확히 2센티미터 아래로 처지는 순간이 붉은색 격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데이터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 선수들이 당신의 버릇을 못 본 척 넘어가 주지도 않고요."
예빈은 태블릿을 거두고 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종이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청운대학교 펜싱부 경기력 개선 및 폐부 철회 전략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는 선수 시절, 부상으로 피스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예빈의 담담한 고백에 서준의 시선이 비로소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검을 쥐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코트 밖에서 피스트 전체가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피스트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칼끝의 각도, 발의 궤적, 그리고 선수 본인조차 모르는 사소한 불안감이 전부 숫자로 드러났습니다. 서준 씨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짊어지려는 그 완벽주의가 오히려 당신의 시야를 가두고 있어요."
예빈은 서류철을 서준의 가슴 쪽으로 내밀었다.
"주 4회 프레임 교정 훈련. 팡트 개시 전 어깨 하강을 억제하는 상체 밸런스 재설계. 그리고 상대에 따른 맞춤형 거리 데이터베이스 구축. 제 방식을 따른다면, 다음 달 춘계대학연맹전에서 당신을 반드시 시상대 맨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서준은 내밀어진 서류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종이 한 장 한 장에 얼마나 많은 밤샘 분석과 노력이 들어갔을지, 표지에 빼곡하게 적힌 훈련 타임테이블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매니저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책상물림이나 할 줄 알았던 이 작은 여자가, 실은 누구보다 지독하게 자신을 파헤치고 있었다.
"서준아."
하윤이 플뢰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밑져야 본전 아니냐? 어차피 이대로 가면 우리 펜싱부 다음 학기에 공중분해 돼. 네 자존심 지키자고 팀을 버릴 놈은 아니잖아, 넌."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마스크를 벤치 쪽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스크가 굴렀다.
서준의 시선이 예빈의 얼굴을 거쳐 그녀의 단단한 손으로 내려앉았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눈빛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자신을 에이스로 대우하며 비위를 맞추려던 이전의 어떤 지도자들과도 달랐다. 철저하게 결과만을 요구하는 냉혹한 분석가의 눈이었다.
서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장갑을 낀 서준의 단단한 손가락이 서류철을 낚아채듯 거칠게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훈련장에 울렸다.
"한 달입니다."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예빈의 귓전을 때렸다.
"춘계연맹전 개인전에서 내가 입상하지 못한다면, 매니저님은 그 잘난 분석인지 뭔지 전부 들고 이 체육관에서 나가십시오."
예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당겨졌다.
"좋습니다. 하지만 입상한다면, 앞으로 제 모든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셔야 합니다."
서준은 서류철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당장 오늘 오후 훈련 일정부터 가져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