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의 훈련장은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메탈 피스트의 알루미늄 판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삐걱거리는 마루 냄새와 오래된 방청유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윤서준은 이미 플뢰레 도복 상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상태였다. 그는 가볍게 발목을 돌리며 벽면에 부착된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전 시합의 잔상이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팔을 뻗는 예비 동작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훈련장 철문이 열렸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검은색 트레이닝 재킷을 입은 강예빈이 들어섰다. 그녀의 한 손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태블릿 피시가, 다른 한 손에는 가로세로 40센티미터 남짓한 검은색 강화 플라스틱 하드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라커룸에서 샤워를 마치고 갈색 머리를 털며 나오던 정하윤이 스포츠음료 캔을 든 채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예빈은 피스트 옆 보조 벤치 위에 하드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잠금장치 두 개가 경쾌한 금속음을 내며 풀렸다. 케이스 뚜껑이 열리자 안쪽에 정교하게 완충재로 감싸인 기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준의 시선이 그곳에 멎었다.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평범한 펜싱 장비가 아니었다. 굵기가 다른 서너 가닥의 검은색 고탄성 우레탄 저항 밴드, 그리고 벨크로 스트랩마다 단단히 고정된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소형 자이로 센서 모듈 세 개였다. 센서 표면에는 미세한 LED 표시등과 소형 압전 부저가 부착되어 있었다.
서준의 턱선이 굳어졌다.
"이게 뭡니까?"
예빈은 장비를 꺼내 바닥에 펼쳐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전에 말씀드린 프레임 교정 훈련용 보조 기구입니다. 상체 저항 밴드와 3축 모션 센서예요."
서준이 기구와 예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거부감이 실려 있었다.
"이런 구속복 같은 걸 몸에 감고 칼을 쥐라는 겁니까?"
"구속복이 아니라 피드백 장치입니다."
예빈은 태블릿 피시 화면을 켜서 센서와 블루투스로 연동시켰다. 화면 상단에 파란색 연결 표시등 세 개가 차례로 깜빡이며 켜졌다.
"서준 씨가 팡트를 시작할 때 오른쪽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각도는 14도, 지속 시간은 0.18초입니다. 인간의 뇌는 익숙한 동작을 편안하다고 착각해요. 10년 동안 몸에 밴 잘못된 근육 기억을 끊어내려면 물리적인 제동과 오차 측정 센서가 유일한 해법입니다."
"펜싱은 기계 체조가 아닙니다. 호흡과 리듬, 그리고 찰나의 감각으로 찔러 넣는 겁니다. 이렇게 관절을 강제로 묶어놓으면 하체에서 올라오는 회전력이 검 끝까지 온전히 전달되지 않아요. 오히려 내 밸런스만 망가집니다."
서준이 팔짱을 끼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자신의 기술과 감각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선수의 본능적인 반발이었다. 그 어떤 지도자도 그의 팡트를 두고 관절을 묶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적은 없었다.
벤치 모서리에 걸터앉아 음료수를 마시던 하윤이 센서 모듈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키득거렸다.
"와, 매니저님. 이거 비주얼이 거의 사이보그 개조 장치 같은데요? 서준이 진짜 터미네이터 만들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평소에 말수도 없어서 로봇 소리 듣는 놈인데."
"농담할 상황 아닙니다, 정하윤 선수."
예빈은 하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태블릿에 뜬 그래프를 서준 쪽으로 돌려 보였다.
"감각이라는 말 뒤에 숨지 마세요. 서준 씨의 그 위대한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가 지난 3년간 춘계대회와 대학선수권 8강 탈락이었습니다. 8강에서 패배한 네 경기 중 세 경기에서 결승점을 내준 기술이 전부 상대의 콩트르 아타크였어요. 상대 선수들은 당신의 어깨가 떨어지는 타이밍을 정확히 보고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예빈의 어조는 감정의 기복 없이 평온했으나, 담겨 있는 숫자는 칼끝보다 날카로웠다.
"저항 밴드는 승모근과 견갑골을 뒤에서 강하게 잡아당겨 팡트 시 어깨가 내려앉는 하향 벡터를 강제로 상쇄합니다. 그리고 센서는 어깨 축이 기준선보다 1센티미터 이상 내려가거나 2도 이상 기울어지는 순간 비프음을 울릴 겁니다. 소리가 울리면 그 즉시 동작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동작을 멈추라고요?"
서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팡트는 한 번 도약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공격입니다. 중간에 끊어버리면 무릎과 아킬레스건에 부하가 얼마나 걸리는지 알기나 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표 횟수를 무제한이 아니라 '무결점 팡트 50회 성공'으로 설정했습니다. 실패하면 카운트는 리셋입니다."
예빈은 밴드 세트를 들고 서준 앞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금테 안경 너머의 단단한 시선이 서준의 가슴팍에 가닿았다. 그녀의 정수리가 서준의 턱 끝에도 닿지 않을 만큼 체구 차이가 났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전에 합의하셨을 텐데요. 한 달 동안 제 지시에 따르겠다고. 벌써 약속을 뒤집으실 겁니까, 청운대 에이스 윤서준 씨?"
서준의 턱관절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자존심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옆에서 하윤이 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서준아, 매니저님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오전에 나한테 찔렸을 때 기분 어땠냐? 솔직히 끔찍했잖아. 사브르 칼잡이한테 플뢰레로 따였는데 체면이 서냐? 딱 눈감고 차라. 저거 찬다고 네 팔이 부러지기야 하겠냐."
서준은 하윤을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그러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윤의 가벼운 농담 속에 담긴 뼈아픈 진실을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하윤의 칼끝이 자신의 도복 재킷을 찌르던 그 순간의 무력감은 서준의 뇌리에 선명한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서준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예빈의 손에 들린 우레탄 밴드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입히세요."
서준이 양팔을 벌리며 굳은 표정으로 섰다.
예빈은 지체하지 않고 서준의 등 뒤로 돌아섰다. 그녀의 작고 다부진 손길이 서준의 등판과 어깨 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꺼운 저항 밴드가 서준의 가슴을 가로지르고, 등 뒤의 견갑골을 엑스 자 형태로 강하게 옥죄었다. 탄성이 강한 고무가 도복 위를 짓누르며 서준의 양어깨를 강제로 뒤로 당겨 폈다.
쇄골 아래와 오른쪽 어깨 관절 부근, 그리고 척추 라인을 따라 세 개의 센서 모듈이 벨크로 테이프로 단단히 밀착되었다. 예빈의 손가락이 서준의 쇄골뼈 부근을 눌러 센서의 위치를 바로잡는 순간, 서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가만히 계세요. 접촉 단자가 피부에 가깝게 고정되어야 오차가 줄어듭니다."
예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손가락의 압력은 불필요한 떨림 없이 정확하고 건조했다.
"연동 완료. 기준 각도 제로 세팅 끝났습니다."
예빈이 한 걸음 물러서며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서준의 어깨에 부착된 센서 모듈에서 삑, 하는 짧은 전자음과 함께 초록색 불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상체가 뒤로 억지로 당겨지는 이질감에 서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치 몸 전체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칭칭 감긴 채 관절이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평소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했다.
서준은 벤치에 놓여 있던 자신의 플뢰레를 쥐었다. 그립을 쥔 손가락 끝에 밴드의 저항력이 팽팽하게 전달되었다.
"피스트 중앙으로 가세요."
예빈의 지시가 떨어졌다.
서준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 피스트 중앙의 시작선 위에 섰다. 알루미늄 판을 밟는 펜싱화 밑창의 마찰음이 서늘하게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앙 가르드."
예빈의 단호한 신호가 빈 체육관에 울렸다.
서준은 양발을 직각으로 벌리고 무릎을 낮추었다. 상체를 단단히 조여오는 탄성 밴드 탓에 평소보다重心을 잡는 것조차 버거웠다. 가슴 앞쪽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놓은 것 같았다. 그는 전방 삼 미터 거리에 설치된 붉은색 타깃 패드를 응시했다.
"팡트."
예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준의 앞발이 바닥을 차고 나갔다. 동시에 오른팔을 앞으로 뻗으며 검끝을 패드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삐-익!
어깨에 부착된 센서가 찢어지는 듯한 고음을 뿜어냈다.
"승모근 수축. 오른쪽 어깨 2.4센티미터 하강. 0.19초 지체되었습니다."
태블릿을 든 예빈이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기계적인 어조로 읊었다.
"다시. 앙 가르드."
서준은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낼 틈도 없이 다시 뒷발을 끌어당겨 자세를 잡았다. 밴드의 장력이 어깨관절을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저항을 억지로 이겨내며 팔을 뻗으려니 오히려 불필요한 힘이 더 들어갔다.
"팡트."
탁!
삐-익!
"또 어깨가 먼저 반응했습니다. 0.17초."
"팡트."
삐-익!
"팔꿈치가 바깥으로 샙니다. 0.18초."
비프음이 피스트 위를 난도질했다. 스무 번, 서른 번, 횟수가 오십 번을 넘어가자 서준의 오른쪽 허벅지 근육이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도복 상의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살갗에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를 옥죄는 고무 밴드가 폐를 압박했다.
자신의 몸인데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십수 년 동안 몸에 새겨 넣었던 감각이 오히려 독이 되어 관절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팔을 뻗으려 할 때마다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깨가 먼저 움츠러들었다.
"잠깐 멈추세요."
예빈이 태블릿을 벤치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피스트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녀의 운동화 바닥이 알루미늄 판을 밟으며 규칙적인 마찰음을 냈다. 서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스트 바닥에 플뢰레 끝을 짚고 버텼다. 어깨관절 안쪽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내려놓으라고 한 적 없습니다. 검끝 올리세요."
예빈이 서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녀의 안경 렌즈 너머로 차분한 눈동자가 서준의 흔들리는 호흡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
"이 장비는 당신을 괴롭히려고 채운 게 아닙니다. 어깨로 검을 밀어내려는 습관을 강제로 차단하고, 등 뒤의 회전근개와 견갑골의 탄성만으로 칼을 뻗게 만들기 위한 도구입니다."
"말이…… 쉽지."
서준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지도 못한 채 턱을 치켜들었다.
"몸이 굳어 있는데 어떻게 힘을 빼라는 겁니까."
"그걸 통제하는 게 선수의 능력입니다."
예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준의 오른쪽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반 걸음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간격이었다. 서준의 등 뒤로 서늘한 향과 함께 예빈의 규칙적인 호흡이 닿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낮고 단단한 목소리와 함께, 예빈의 손바닥이 서준의 오른쪽 견갑골 하단에 닿았다.
도복 천 너머로도 예빈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지닌 압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준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굳어졌다.
"힘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빈의 다른 한 손이 서준의 오른쪽 쇄골 아래와 어깨 관절 앞부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앞뒤에서 단단히 맞물린 두 손이 서준의 어깨를 붙잡아 원래 있어야 할 궤도로 비틀어 올렸다.
"승모근에 힘을 빼세요. 제 손바닥이 닿아 있는 견갑골 하단 근육의 궤적만 느끼면서 앞으로 뻗는 겁니다."
예빈이 서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더운 숨결이 서준의 젖은 목덜미를 스쳤다. 서준은 턱을 바짝 굳혔다. 칼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엉뚱한 열감이 번져나갔다.
"…가깝습니다. 칼끝보다 당신 숨소리가 더 신경 쓰입니다."
서준이 이를 악물며 낮게 읊조렸다.
예빈은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견갑골을 누르는 손바닥에 무게를 더 실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신경 쓰이라고 가까이 있는 겁니다. 불필요한 감각에 정신 팔리지 말고, 지금 제 손이 유도하는 궤적에만 집중하세요. 팔을 뻗는 게 아니라, 등이 칼을 밀어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빈의 손가락이 서준의 등 근육을 따라 아래쪽으로 지그시 선을 그었다. 근육의 결을 짚어내는 섬세하고도 단호한 압력이었다. 서준은 시선을 정면의 표적으로 돌렸다. 온몸의 신경이 예빈의 손바닥이 닿아 있는 그 한 뼘의 면적으로 쏠려 들어갔다.
"호흡 들이마시고."
서준이 숨을 들이켰다.
"내쉬면서, 바로 나갑니다."
예빈의 손이 서준의 견갑골을 부드럽게 앞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어깨를 짓누르던 앞쪽 손을 번개처럼 거두었다.
"팡트!"
서준의 뇌관이 터지듯 오른발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깨를 움츠릴 틈이 없었다. 등 뒤에서 밀어주던 예빈의 손길이 남긴 잔상이 그대로 근육의 길잡이가 되었다. 오른쪽 팔꿈치가 흔들림 없이 가슴 정중앙을 지나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우레탄 밴드의 팽팽한 탄성이 오히려 지렛대처럼 서준의 팔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탕!
경쾌하고 묵직한 타격음이 체육관 천장을 때렸다. 서준의 플뢰레 칼끝이 타깃 패드의 정중앙, 지름 5센티미터짜리 흰색 표적판을 완벽하게 꿰뚫었다.
체육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삐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센서는 완벽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준은 피스트 바닥에 깊게 낮춘 팡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앞무릎은 정확히 구십 도로 꺾여 있었고, 뻗어나간 오른팔은 지면과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어깨의 처짐도, 팔꿈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0.18초의 예비 동작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직선의 찌르기였다.
서준은 천천히 칼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차오르는 숨 사이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뚫리는 기묘한 감각이 번졌다.
뒤를 돌아보자, 피스트 끝에 서 있던 예빈이 손에 든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0.00이라는 오차 수치와 함께 녹색 파형 그래프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예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서준만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올라갔다.
"거보세요. 되잖습니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평소의 건조함을 벗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땀방울이 서준의 턱 끝에서 떨어져 피스트 위로 흩어졌다. 서준은 멍하니 자신의 검끝과 예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밴드가 짓누르는 어깨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쾅!
그때, 훈련장의 육중한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윤서준! 강예빈 매니저님!"
숨을 턱까지 헐떡이며 피스트 쪽으로 뛰어 들어온 정하윤의 손에는 방금 출력한 듯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하윤의 손에 들린 A4 용지 끄트머리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윤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피스트 안쪽으로 성큼 들어섰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연맹 홈페이지 봤어?"
서준은 칼끝을 바닥으로 내린 채 턱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대진표 나왔어?"
"방금 떴어. 내가 행정실 복사기에서 바로 뽑아왔다고."
하윤이 종이를 펄럭이자 예빈이 걸음을 옮겨 서류를 받아 들었다. 예빈의 시선이 출력물 상단에 인쇄된 제목을 빠르게 훑었다. 2024 전국춘계대학펜싱연맹전 남대부 플뢰레 개인전 본선 토너먼트. 대회 개막일은 정확히 2주 뒤인 4월 14일이었다.
예빈의 눈동자가 대진표의 32강 대진 첫 번째 블록에서 멈췄다.
"윤서준 선수."
예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볼 게 아닙니다. 매니저실로 가죠. 경기 영상 서버 열어야 합니다."
예빈은 하윤에게 받은 서류를 반으로 접어 손에 쥐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훈련장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였다. 서준은 땀에 젖은 장갑을 벗어 펜싱 가방 위에 던져두고는 도복 상의 지퍼를 목 밑까지 내렸다. 하윤이 혀를 차며 서준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야, 윤서준. 마음 단단히 먹어라. 진짜 이번 대진 짠 사람 누구냐? 청운대랑 원수졌나 봐."
"누군데 그래."
"가서 직접 봐. 입이 안 떨어진다, 진짜."
세 사람은 복도를 지나 매니저실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형광등 불빛 아래로 짙은 인쇄용지 냄새와 컴퓨터 본체의 냉각 팬 돌아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 예빈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연맹 공식 경기 분석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푸른색 대진표가 화면 전체를 채웠다. 1번 시드 바로 밑, 32강 4조 1경기에 두 선수의 이름이 선명하게 나란히 박혀 있었다.
윤서준, 청운대학교.
기현우, 한국체육대학교.
서준의 턱선이 굳어졌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현우. 현재 대학부 랭킹 3위이자 전년도 국가대표 상비군. 무엇보다 지난 2년간 서준이 출전했던 세 번의 전국대회 8강 문턱에서 서준을 번번이 탈락시켰던 상대였다. 작년 추계대회 16강에서도 서준은 기현우를 상대로 8대 15라는 참담한 점수 차로 무릎을 꿇었다.
"하필 32강 첫판부터 기현우냐고."
하윤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현우 그 자식, 발 빠르기로는 대학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잖아. 게다가 너랑 붙을 때마다 귀신같이 카운터만 노리는 거, 펜싱부 애들은 다 알아. 첫 경기부터 이런 놈을 만나면 몸 풀 시간도 없다고."
예빈은 대진표 창을 옆으로 밀어두고, 저장장치에서 영상 파일 하나를 불러왔다. 화면에 재생된 것은 작년 10월, 추계대학연맹전 16강전 2세트 경기 영상이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쓴 기현우가 피스트 끝에서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서준의 공격을 유도하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펼쳐졌다.
"기현우 선수가 서준 씨를 이긴 방식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예빈이 레이저 포인터를 들어 화면 속 기현우의 칼끝을 가리켰다.
"기현우 선수는 서준 씨가 공격권을 쥐고 전진할 때 절대 먼저 칼을 맞대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나며 피스트 공간을 넓게 쓰죠. 그러다 서준 씨가 팡트를 시도하기 직전, 손목에 힘이 들어가며 어깨가 2센티미터 처지는 바로 그 0.18초의 예비 동작을 확인하는 순간 파라드 리포스트를 겁니다. 정확히 서준 씨의 4번 자세 안쪽을 파고들어요."
화면 속 서준이 발을 구르는 찰나, 기현우의 검이 서준의 칼을 가볍게 쳐내며 가슴 패드를 찔렀다. 득점을 알리는 녹색 불이 켜지고, 화면 속 서준은 허탈하게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설계된 패턴입니다. 기현우 선수의 전력 분석관 역시 서준 씨의 습관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죠."
예빈은 영상을 정지시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경 렌즈 너머의 단단한 시선이 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2주 뒤 4월 14일, 32강전입니다. 그 선수는 서준 씨의 0.18초를 가장 잔인하게 공략했던 상대죠. 피할 곳은 없습니다."
"피할 생각 따위 없어."
서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매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어차피 입상이 목표라면 누구를 만나든 이겨야 해. 첫 상대가 기현우라면 오히려 잘됐어."
"말로만 잘됐다고 할 게 아니야, 서준아."
하윤이 팔짱을 끼며 진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현우는 네가 습관을 고치려고 한다는 것조차 모를 텐데, 방심하지도 않을 놈이야. 점수 차 벌어지면 아예 피스트 끝까지 도망 다니면서 시간 끄는 영악한 플레이도 서슴지 않는다고."
"그래서 데이터가 필요한 겁니다."
예빈이 모니터 화면을 터치해 새로운 창을 띄웠다. 화면에는 기현우의 최근 1년간 공식 경기 실점 분포도와 스텝 이동 반경이 붉은색 히트맵으로 전환되어 나타났다.
"기현우 선수는 상대의 공격을 쳐내는 파라드 동작에서 성공률 78퍼센트를 자랑하지만, 상대가 팡트 궤적을 직선에서 앙가르망으로 꺾어 들어올 때의 대처율은 34퍼센트까지 떨어집니다. 즉, 어깨 처짐 없는 완벽한 직선 찌르기로 기현우의 반응 타이밍을 0.1초 이상 늦추고, 그가 칼을 쳐내려 팔을 뻗는 찰나에 칼끝을 돌려 측면을 찌르면 반격 권한은 완전히 서준 씨에게 넘어옵니다."
예빈이 책상 위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 서준의 가슴팍으로 내밀었다. 표지에는 ‘D-14 기현우전 맞춤형 집중 훈련 계획서’라는 글자가 정갈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오늘 첫 팡트 교정에 성공하셨죠. 하지만 정적인 타깃을 상대로 한 번 성공한 것과, 기현우처럼 움직이는 표적을 상대로 실전 피스트에서 성공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입니다."
서준은 예빈이 내민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14일간의 일정이 분 단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새벽 인터벌 러닝부터 센서 보조 장비를 착용한 실전 반사 훈련, 그리고 기현우의 템포를 가상으로 재현한 모의 대련까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정표였다.
"하루 500번의 무결점 팡트입니다. 센서 오차가 0.05초라도 발생하면 그 세트는 카운트하지 않습니다."
예빈의 어조는 평온했으나 타협의 여지는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2주 동안 서준 씨의 몸이 생각하기 전에 근육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들 겁니다. 이 일정을 버텨내지 못하면 춘계대회 입상도, 청운대 펜싱부의 폐부 철회도 불가능합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매니저실 안에는 오직 컴퓨터 본체의 규칙적인 구동음만이 맴돌았다. 하윤은 숨을 죽인 채 서준의 표정을 살폈다.
서준은 일정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종이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패배의 기억이 담긴 모니터 속 붉은 히트맵을 한 번, 그리고 눈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예빈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망칠 구멍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내일 새벽 몇 시부터지?"
서준의 짤막한 되물음에 예빈의 입가에 엷은 긴장감이 스쳤다.
"오전 5시 30분입니다. 피스트에 먼저 나와 계세요."
"늦지 않게 나와."
서준은 서류철을 덮어 겨드랑이에 끼워 넣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매니저실 문을 열었다. 낡은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들었지만, 피스트를 향해 내딛는 서준의 등 뒤로는 묵직한 침묵 대신 결전을 향한 팽팽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