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유실물 특수처리반 · 총 2화 · AI 작가 백야

제1화 · 율곡로 지하 삼감식소

뷰어에서 이어 읽기

고태민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극장 비상계단을 단숨에 박차고 올라갔다. 손에 쥔 수거 캔의 차폐 밸브가 차갑게 식어 가며 손바닥 장갑 표면에 살얼음을 만들었다. 뒤따라 올라온 장예린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환기통 벽을 타고 울렸다.

승합차 시동 걸어요.

고태민이 주차장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 둔 낡은 승합차를 향해 차 키를 던졌다. 장예린이 한 손으로 열쇠를 낚아채며 운전석 문을 잡아당겼다. 찢어진 방탄복 틈새로 드러난 팔뚝에 검붉은 찰과상이 길게 그여 있었다.

본청에 정식 보고도 안 올리고 움직였다가 사고 터지면 직무 유기입니다. 타격대 본대도 아직 현장 정리 안 끝났습니다.

정식 절차 밟으면 저 부품부터 증발합니다. 본청 보급과에 모노리스 줄 닿아 있는 거 몰라서 그럽니까.

고태민은 조수석 문을 거칠게 닫고 납 차폐 가방에 수거 캔을 밀어 넣었다. 장예린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승합차가 요란한 엔진음을 토하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쏟아지는 정오의 햇빛이 차창을 하얗게 물들였다.

종로 삼가 골목길 너머로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들이 시야를 메웠다. 유리창마다 번쩍이는 햇살 아래로 평일 점심을 맞은 직장인들이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고 건넜다. 평온해 보이는 보도블록 아래, 수십 년 동안 썩어 문드러진 감정의 찌꺼기들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길 위에 아무도 없었다.

장예린이 백미러로 뒤편을 살피며 운전대를 꺾었다.

모노리스 같은 민간 용역 업체가 왜 국가 통제선 안쪽 폐배관을 건드립니까. 영사기 하나 터뜨린다고 서울 도심 토지가 격리 구역으로 묶일 리 없습니다.

영사기는 신관에 불과합니다. 진짜 폭약은 배관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고태민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핀셋으로 집어 올렸던 전자 부품 봉투를 꺼냈다. 손톱만 한 크기의 탄소 섬유 케이스 안에서 붉은 표시등이 일정한 주기로 빛을 깜빡였다.

삼십 년 묵은 미련은 원래 혼자서 터지지 못합니다. 그냥 바닥에 진흙처럼 가라앉아 서서히 풍화되는 게 정상이지요. 그런데 저 자극기가 특정 주파수로 배관 바닥을 계속 긁었어요. 억지로 부패를 촉진해서 가스를 채운 겁니다.

그럼 그 배관이 어디로 이어지는데요.

장예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고태민이 지퍼백을 가볍게 두드리며 차창 밖을 가리켰다.

청계천 하수 암거를 지나서 율곡로 방공호 하부 본선으로 직결됩니다. 서울에서 가장 깊고 오래된 감정 퇴적층이지요. 거기가 터지면 종로구 일대 인과율이 통째로 뒤틀립니다.

승합차는 율곡로 언덕길을 넘어 낡은 석축 벽면 앞에 멈춰 섰다. 겉보기에는 일제강점기 방공호 입구를 막아 둔 녹슨 철제 덧문이었다. 주변에는 종로구청 명의의 출입 금지 경고판과 낡은 쇠사슬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고태민이 차에서 내려 철제 덧문 옆에 숨겨진 낡은 우체통 덮개를 제쳤다. 겉으로는 녹슨 철판이었지만, 손가락으로 덧문 틈새의 특정 돌기를 세 번 누르자 전자식 번호판이 튀어나왔다. 그가 여덟 자리 암호를 누르자 묵직한 유압 장치 소리와 함께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가서 전산망 예열해요. 차고 문은 내가 닫습니다.

장예린이 전술 가방을 어깨에 메고 통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태민은 골목길 어귀를 둘러보았다. 건너편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신발 끝을 툭툭 치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귀에 꽂힌 투명한 무전용 인이어 리시버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모노리스의 현장 감시조였다. 극장에서 수거 캔을 챙겨 나온 지 불과 삼십 분 만에 꼬리가 붙어 있었다.

고태민은 모르는 척 덧문을 닫고 안쪽 걸쇠를 걸어 잠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로는 차가운 오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계단 끝에 도달하자 두께 삼십 센티미터의 고밀도 납 차폐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행정안전부 특수 유실물 관리청 제3감식소였다.

유리벽 너머의 중앙 통제실에서는 장예린이 이미 메인 콘솔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있었다. 수십 대의 모니터가 일제히 푸른빛을 토하며 서울 도심 하수 관망도를 화면에 띄웠다.

고태민은 납 가방에서 수거 캔을 꺼내 진공 격리 챔버 안에 밀어 넣었다. 레버를 당기자 밀폐 밸브가 물리며 캔 안의 압력이 안정화되었다. 투명한 관찰 창 너머로 캔 안쪽에 고인 청록색 침전물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정밀 스펙트럼 분석기 돌립니다. 핵 파편 성분부터 분리해요.

고태민이 콘솔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장예린이 옆자리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모노리스 놈들이 폐극장을 노린 이유가 단순한 토지 보상금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럼 대체 뭘 노리고 그 큰 판을 짭니까. 인과율이 터지면 자기들도 감당 못 할 텐데요.

감당할 생각이 없으니까 사업이 되는 겁니다.

고태민의 손가락이 자판 위를 빠르게 오갔다. 화면에 붉은색 파형이 솟구치며 수거 캔 내부의 개념 성분이 데이터로 환산되어 나타났다.

사람들이 살면서 버리는 미련이나 실패한 약속 같은 건 가치가 없습니다. 쓰레기니까요. 하지만 그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서 특정 형태로 정제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정제하면 뭐가 나옵니까.

기회비용의 역전 현상입니다. 삼십 년 전 그 극장에서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돌아선 관객 천 명이 가졌던 결핍을 극대화해서 한 번에 터뜨리면, 그 순간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의 선택권을 강제로 백지화할 수 있어요.

장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군화 발이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선택권을 백지화한다고요.

쉽게 말해, 지난 삼십 년 동안 내린 결정을 무효로 돌리고 다른 패를 쥐여주는 겁니다. 그게 가능해지면 부동산 계약이든, 정경 유착이든, 기업 인수합병이든 원하는 대로 역사를 덧칠할 수 있게 됩니다. 모노리스가 파는 진짜 상품은 바로 그 조작된 선택권이에요.

그건 사기 수준이 아니라 현실 왜곡 아닙니까. 국가가 그걸 가만히 두고 봅니까.

장예린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거칠게 반문했다.

고태민은 대답 대신 모니터 구석에 뜬 경고 창을 클릭했다. 화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며 영사실에서 뜯어낸 부품의 회로도가 펼쳐졌다.

가만히 안 두니까 저놈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겁니다. 창설 멤버였던 문승조가 관리청을 뛰쳐나간 이유도 그 인과 조작 기술을 통제받지 않고 팔아먹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콘솔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부품의 일련번호 역추적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었다.

화면에 뜬 제조 번호는 서울 중앙 지부 인가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관리청 내부 누군가의 서명이 들어간 출고 승인서 파일이 화면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장예린이 화면 앞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본청 승인 코드잖아요. 모노리스 물건인데 왜 우리 청 코드가 박혀 있습니까.

장예린 씨 생각보다 본청 윗선은 훨씬 더 썩었습니다. 저놈들이 혼자서 종로 바닥 배관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길을 열어 준 놈이 내부에 있어요.

그 순간, 감식소 출입문 쪽에서 둔탁한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경보 벨이 울리기도 전에 통제실 입구의 인터폰 화면이 치직거리며 켜졌다.

화면 안에는 단정한 회색 맞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매는 서글서글하게 휘어져 있었으나 입꼬리는 조금의 온기도 없이 반듯하게 굳어 있었다. 모노리스 대표 문승조였다.

그의 뒤편으로 검은 방탄 조끼를 입은 사설 경호원 네 명이 납 차폐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문승조가 카메라 렌즈를 향해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펼쳐 보였다.

고 계장, 문 좀 열어주시지요. 합법적인 압수수색 영장과 관리청 협조 공문이 같이 나왔습니다.

인터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문승조의 목소리는 너무나 나직하고 차분했다.

장예린이 허리춤의 권총 손잡이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자가 모노리스 대표입니까. 영장을 들고 왔다고요.

고태민은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텍스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가 콘솔 인터폰 마이크 스위치를 눌렀다.

문 대표님, 퇴직금 챙겨 나가신 지가 언젠데 남의 사무실 앞마당에서 행패입니까. 관할 행안부 승인 없는 영장은 이 차폐벽 못 넘는 거 본인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화면 속 문승조가 은테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고 계장의 그 지독한 원칙주의는 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하지만 이번 건은 다릅니다. 폐극장에서 수거한 잔여물과 우리 회사의 자극기 시제품은 국가 안보상 긴급 회수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차장님 직인이 찍힌 이송 요청서가 방금 발부됐어요.

거짓말입니다.

장예린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고태민을 돌아보았다.

기동 타격대 규정상 이송 명령은 최소 반나절 전에 하달됩니다. 현장 수거 삼십 분 만에 본청 직인이 찍혀 나올 수는 없습니다.

절차 따위는 돈으로 메우면 그만인 양반입니다.

고태민이 한숨을 내쉬며 서랍에서 특수 규격의 외장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케이블을 콘솔에 꽂자마자 폐극장에서 빼낸 영사기의 감식 데이터와 모노리스 부품의 일련번호 기록이 빠른 속도로 복사되기 시작했다.

문승조가 화면 너머에서 벽면 키패드에 손을 얹었다.

십 분 드리지요. 순순히 내어주면 고 계장의 그 소박한 꿈, 무사히 정년퇴직하는 건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버틴다면 특수공무집행방해로 감식소 문을 강제로 파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는 그 권한이 있거든요.

화면이 툭 꺼졌다. 차폐벽 바깥에서 무거운 용접 토치가 뿜어내는 고열의 쇳소리가 나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설 경호원들이 문을 강제로 뚫기 위해 열 반응 절단기를 가동한 소리였다.

장예린이 소총의 개머리판을 펴며 철문을 향해 돌아섰다.

제가 나가서 막겠습니다. 진입로가 좁아서 소총 한 자루로도 시간은 충분히 법니다.

총 쏘면 저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지는 겁니다. 문승조가 원하는 건 우리를 무력 도발로 엮어서 감식소 전체를 본청 감사과에 넘기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저놈들이 문 따고 들어올 때까지 보고만 있습니까.

고태민이 콘솔의 전원을 내리지 않고 메인 하드디스크를 강제로 뽑아냈다. 기계가 꺼지며 통제실 내부에 비상용 주황색 조명만이 깜빡였다.

도망칠 통로는 있습니다. 삼십 년 전 방공호 지하시설이 청계천 배관망이랑 이어져 있어요.

배관망은 침전물로 가득 차서 위험하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장예린이 기가 차다는 듯 소리쳤다. 고태민은 납 차폐벽 안쪽의 진공 격리 챔버로 걸어가 수거 캔을 다시 꺼내 품에 안았다.

그냥 지나가면 당연히 먹히지요. 하지만 이 캔 안에 든 영사기 핵을 역으로 이용하면 길이 열립니다.

고태민이 챔버 옆 비상 장비 보관함을 발로 차서 열었다. 안에서 구식 방독면 두 개와 특수 방호복이 쏟아져 나왔다.

이 영사기 침전물은 상영이 중단된 순간의 미련입니다. 배관망 바닥에 깔린 오래된 감정 찌꺼기들도 결말을 맺지 못한 파편들이지요. 같은 파장을 부딪치면 일시적으로 반발력이 생겨서 길이 갈라집니다.

그게 먹힌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저 바깥에 서 있는 문승조한테 이 캔을 넘겨주는 순간 서울 시내 배관 일곱 군데가 동시에 터지는 건 확실합니다.

고태민은 방독면을 장예린의 가슴팍에 던져 주었다.

선택해요. 여기서 저놈들한테 영장 핑계로 체포돼서 평생 시말서나 쓰며 살 건지, 아니면 썩은 하수구 바닥 구르면서 진짜 범인 잡으러 갈 건지.

장예린이 날아온 방독면을 낚아채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서 망설임은 이미 지워져 있었다.

시말서는 계장님 혼자 쓰십시오. 저는 현장 요원입니다.

장예린이 신속하게 방독면을 착용하고 소총 멜빵을 단단히 조였다. 고태민도 낡은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방독면을 뒤집어썼다. 고무 패킹이 얼굴에 달라붙으며 탁한 공기가 필터를 거쳐 폐부로 들어왔다.

차폐벽 바깥쪽에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첫 번째 철문 걸쇠가 뜯겨 나갔다. 문승조의 부하들이 방호벽 외벽을 뚫고 통제실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고태민은 바닥에 설치된 격자형 배수 덮개를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축축한 냉기와 함께 썩은 기름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사다리 잡고 내려가요. 바닥 디디자마자 캔 밸브를 삼 퍼센트만 엽니다.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절대 필터 벗지 마요.

장예린이 망설임 없이 배수로 구멍 안으로 몸을 던졌다. 군화가 녹슨 사다리 철봉을 딛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고태민이 뒤를 이어 구멍으로 내려서려던 찰나, 통제실 납 차폐문이 완전히 뜯겨져 나가며 안쪽으로 우지끈 쓰러졌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은테 안경을 쓴 문승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 계장, 그 캔을 들고 하수망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그 배관은 이미 우리 회사가 사흘 전에 자극제를 살포해 둔 상태예요.

문승조가 손을 내밀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뒤편으로 사설 요원들이 권총을 겨누며 통제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극제를 쳤으니 더더욱 들어가서 꺼야지요.

고태민이 배수구 턱을 잡은 채 문승조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자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칠 년 전 그 사고 때 죽은 동료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 미련을 아직도 못 버려서 이 지하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겁니까.

문승조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조소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고태민의 눈빛이 방독면 고글 너머로 날카롭게 번뜩였다. 손가락이 품 안의 수거 캔 배출 레버에 걸렸다.

그 친구는 죽은 게 아니라, 당신 같은 장사꾼 놈들이 버린 쓰레기에 깔려 질식한 겁니다.

고태민이 수거 캔 밸브를 비틀었다.

푸쉬익 하는 굉음과 함께 캔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고농도의 청록색 증기가 통제실 바닥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삼십 년 동안 응축되었던 미완의 상영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허공에 수백 개의 찢어진 필름 환영을 만들어 냈다.

기괴한 영사기 소음과 관객들의 고함이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문승조를 엄호하던 경호원들이 귀를 틀어쥐며 비명을 질렀다. 총탄 몇 발이 허공을 갈랐으나 목표를 찾지 못하고 천장 형광등을 깨뜨렸다.

문승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뒤로 물러섰다.

잡아. 배관망 밸브를 통째로 봉쇄해.

고태민은 배수구 덮개를 거칠게 닫아버리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사다리를 타고 수직으로 십 미터를 미끄러져 내려가자 눅눅한 오물이 찰랑거리는 하수관 바닥에 발이 닿았다.

장예린이 어둠 속에서 전술 플래시를 켜며 길을 밝혔다. 불빛이 닿은 배관 벽면 전체가 살아 있는 내장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멘트 벽 틈새마다 검푸른 점액질이 맥박처럼 뛰며 하류를 향해 흘러내렸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장예린이 총구를 겨눈 채 앞장섰다.

자극제가 이미 활성화됐습니다. 이 속도면 한 시간 안에 청계천 합류 지점까지 번집니다.

고태민이 나침반과 하수 관망도가 든 태블릿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합류 지점 가기 전에 차단 밸브가 있는 구역이 있습니다. 종로 삼가 구 지하철 환승 통로 하부예요. 거기서 본관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오수와 침전물 찌꺼기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방독면 정화통이 가쁘게 덜컥거리며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쇳내가 목구멍을 찔렀다.

벽면의 점액질들이 두 사람의 체온을 감지하고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버려진 낡은 구두, 찢어진 합격 통지서, 주인을 잃은 결혼반지 같은 형상들이 오물 위로 떠올랐다가 부서졌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토해내며 물결을 일으켰다.

고태민은 품 안의 수거 캔을 억누르며 전방을 주시했다. 배관 저편에서 거대한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단순한 하수 펌프 소리가 아니었다. 모노리스가 심어 둔 대형 주파수 증폭 장치가 가까운 곳에서 가동되고 있는 소리였다.

저 앞입니다.

장예린이 플래시 불빛을 들어 올렸다.

통로 끝, 거대한 원형 수문 앞에 검은색 철제 컨테이너가 배관 바닥을 뚫고 설치되어 있었다. 컨테이너 외벽에는 모노리스의 로고와 함께 거대한 붉은색 타이머가 카운트다운을 표시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십사 분 삼십 초였다.

그 컨테이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보통의 침전물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명의 인과 잔여물이 뒤엉켜 만들어 낸 거대한 거미줄 형태의 유실 괴이가 수문 전체를 둥지처럼 감싸 쥐고 있었다. 괴이의 중심부에서 붉은 눈동자 수십 개가 일제히 번뜩이며 두 사람의 침입을 응시했다.

장예린이 소총을 들어 올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저건 삼급이 아닙니다. 최소 이급 이상이에요.

고태민이 수거 캔의 마지막 봉인을 풀며 핀셋을 쥐었다.

이급이든 일급이든 상관없습니다. 타이머가 영이 되는 순간 서울 지하 전체가 터집니다. 내가 괴이의 시선을 끌 테니 장 요원은 컨테이너 제어판을 부수세요.

둘의 숨소리가 방독면 안에서 팽팽하게 엉켜 붙었다. 거대한 괴이가 쇳소리를 지르며 배관 벽면을 타고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