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 감별사 · 총 2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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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수천 년간 세상의 근간이었던 마법의 흐름은 이제 고통스럽게 뒤틀리고 있었다. 한때는 생명의 근원이었던 정령들은 병들어 소멸해갔고, 고대 마법진의 찬란했던 문양들은 빛을 잃은 채 무의미한 돌덩이로 변해버렸다. 한때 마법으로 번성했던 문명은 혼란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마법은 더 이상 신비로운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목을 죄어오는 차가운 족쇄였다.

“흐름이… 너무 불안정해요.”

아르카나 학원의 최상층, 별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마나 증폭 장치 앞에서 엘리시아 벨르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금발의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학원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에는 깊은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학원의 수석이자, 유서 깊은 마법 명문가의 후계자였다. 누구보다 마법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한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나 증폭 장치의 표면에는 불길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파동은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주변의 마법 장치들을 비틀었다. 작은 불꽃들이 튀어 오르고, 공중을 부유하던 마법서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나의 중심지이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집결된 아르카나 학원, 그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심장마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엘리시아, 진정해. 고대 마법진의 힘으로 어떻게든 흐름을 붙잡고 있어. 연구팀이 원인을 분석 중이다.”

카이 렌 교수가 나른한 듯 반쯤 감긴 눈으로 증폭 장치를 응시하며 말했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고풍스러운 로브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늘 낡은 고서가 들려 있었다. 학원 내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고대 마법 연구회’의 유일한 교수인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는 누구보다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 이건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에요. 마나의 흐름 자체가… 마치 썩어가는 것처럼 느껴져요. 기존의 마법으로는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묻어났다. 그녀의 주변에서 푸른빛 정령들이 희미하게 빛나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정령들은 마나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동요하는 것은, 마나의 병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때, 증폭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나의 파동이 갑자기 격렬해졌다. ‘쿠구구궁!’ 거대한 진동이 학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장의 마법 조명들이 파직거리며 꺼졌고, 비상등이 붉은빛을 깜빡였다.

“젠장! 마나 폭주가 임박했어! 모든 마법사들은 즉시 방어막을 구축하고 학원생들을 대피시켜라!”

학원장의 다급한 외침이 마법 통신망을 통해 울려 퍼졌다. 아르카나 학원은 순식간에 혼돈에 휩싸였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쳤지만, 불안정한 마나의 흐름은 그들의 마법을 뒤틀고 무력화시켰다.

그 시각, 학원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낡은 기숙사에서 한 소년이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 류진이었다. 그는 마른 체형이었지만 묘하게 다부진 인상을 주었다. 어깨에 멘 작은 가방 속에는 고서와 필기 도구가 들어 있었다.

류진의 눈에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마나 증폭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안정한 마나의 흐름이, 그의 눈에는 마치 흐릿하고 탁한 물줄기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수많은 마나의 실타래들이 뒤엉키고 찢어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른 마법사들이 ‘마나 폭주’라고 부르는 현상은, 류진의 눈에는 마치 거대한 존재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경련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어릴 적, 마법 쇠락으로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들이 보지 못하는 마나의 ‘진실’을 보는 능력을 각성했다.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존재로 취급했고,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의문의 추천서를 통해 인류의 마지막 보루인 아르카나 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마법 한 줄기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비마법사로서.

학원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그는 다른 학생들의 조롱과 불신의 대상이었다. 특히 엘리시아 벨르는 그를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며 대놓고 경계했다. 그녀에게 마법은 가문의 명예이자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었고, 마법을 쓰지 못하는 류진은 이해할 수 없는 이물질이었다.

“저게… 마나의 병증이구나.”

류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비친 마나 증폭 장치는, 단순히 오작동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병들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무언가’가 장치 내부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마나의 표면적인 증상만을 치료하려 애썼지만, 류진의 눈에는 그들이 근본적인 원인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가방에서 낡은 필기 도구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이 본 마나의 뒤틀린 흐름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기괴한 형태의 마나 흐름이 그의 손끝에서 종이 위에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해부도 같았다.

그 순간, 학원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발생했다. 이번에는 기숙사 건물의 벽에까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류진의 방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마나 증폭 장치 주변에 모인 수많은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마법 방어막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방어막을 찢고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엘리시아가 필사적으로 정령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 마나가 정령들과 함께 거대한 방패를 형성하려 했지만, 불안정한 마나의 흐름은 그녀의 의지를 거스르고 마법진을 붕괴시켰다. 정령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젠장! 막을 수 없어!”

한 마법사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마나 증폭 장치의 균열은 더욱 커지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빛은 불길한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폭주 직전의 거대한 에너지가 학원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르카나 학원뿐만 아니라, ‘별의 심장’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이 사라질 터였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지금 이 순간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다.

류진은 자신이 그린 마나 흐름도를 든 채, 찢어진 유리잔 파편들을 무심하게 밟으며 방문을 열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마법을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법의 ‘진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진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쇠락하는 마법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 마나 감별사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절망이 가득한 아르카나 학원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