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만 닿는 주파수 · 총 2화 · AI 작가 한여름

제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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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뒤, 방음실에는 건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틈 사이로 빠져나간 도경원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벽면을 메운 쐐기형 스펀지들이 공기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흡수하고 있었다. 방 안에 남은 것은 오직 형광등의 낮은 전자음과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뿐이었다.

송태이가 채은의 어깨에서 손을 천천히 뗐다. 그의 손바닥이 닿았던 자리에 얇은 온기가 남았다. 태이는 바닥에 떨어진 은색 열쇠를 집어 들었다. 열쇠고리에는 낡은 플라스틱 태그가 달려 있었고, 검은 유성 매직으로 30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저 형 말, 진심으로 듣지 마."

태이가 열쇠를 채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원래 과에서도 유명해. 말 섞기 까다롭고, 지 마음에 안 들면 후배든 동기든 사람 취급도 안 한다고."

채은은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을 내려다보았다.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해진 알루미늄 열쇠였다. 손잡이 부분에 땀 자국처럼 희미하게 남은 손때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경원이 쥐고 있던 물건이었다.

"7시라고 했어."

채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덜미에 걸어 둔 헤드폰의 이어컵이 카디건 옷깃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침 7시일 리는 없잖아. 저녁 7시겠지."

태이가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쳤다.

"채은아, 쟤 졸업반이야. 상업 영화 사운드 믹싱 작업 맡아서 학교도 거의 안 나와. 그런데 갑자기 너더러 필드 녹음을 나가자고? 신입생 데리고 현장 나가는 선배가 어디 있어. 그냥 귀찮게 굴어서 제 발로 나가떨어지게 만들려는 수작이야."

"상관없어."

채은이 열쇠를 코트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열쇠가 짤랑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작은 파동조차 이 방 안에서는 선명하게 갈라졌다.

"뭐가 상관이 없는데? 밥도 안 먹고 여기까지 뛰어왔잖아. 너 아까 중앙광장에서 귀 막고 주저앉을 뻔한 거 내가 다 봤어."

태이가 채은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밝은 갈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쏟아져 내렸다. 평소엔 장난기로 가득하던 눈매가 바짝 굳어 있었다.

"너 저 소리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조용한 데 찾으려고. 그런데 저 사람이랑 같이 다니면 온종일 마이크 들고 소리 찾아다녀야 해. 그게 네 귀에 좋을 리가 없잖아."

"달라."

채은이 짧게 잘라 말했다. 콘솔 데스크 위에 놓인 초지향성 샷건 마이크로 시선이 향했다. 검은색 윈드스크린이 씌워진 긴 원통형 몸체. 경원이 방금 전까지 손을 얹고 있던 기계였다.

"그냥 소음이 아니었어."

"그럼 뭔데?"

"귀가 안 아팠어."

채은의 단호한 눈빛에 태이는 입을 다물었다. 태이의 손가락이 피아노 악보 가방의 가죽 끈을 강하게 비틀어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나도 피아노 칠 때 소리 조절할 수 있어."

태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싫어하는 높은 음역 안 치면 되잖아. 지난주에도 연습실에서 너 자라고 일부러 페달 밟고 저음만 쳤는데."

"태이야."

"그 사람이 헤드폰으로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나한테는 안 들려줬잖아."

방음실 특유의 진공 같은 고요 속에서 태이의 숨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채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들어오던 경원의 호흡, 그리고 스탠드를 톡 치던 금속음이 아직 귓바퀴 안쪽에 선명한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그건 소리라기보다는 피부에 닿는 압력에 가까웠다. 태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채은이 먼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 3교시 제도 실습 들어가야 해. 늦으면 지각이야."

"같이 가."

태이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두꺼운 방음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인문관 지하 복도의 눅눅한 공기가 두 사람을 덮쳤다. 복도 저편에서 올라오는 웅성거림과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다시 고막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채은은 반사적으로 헤드폰을 집어 올려 양 귀를 덮었다. 전원 버튼을 켜자 낮게 깔리는 화이트노이즈와 함께 바깥세상이 둔탁하게 차단되었다.

태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채은의 보폭에 맞추어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채은의 곁을 바짝 지키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어깨 바깥쪽을 막아섰다.

건축관 4층 제도실은 오후 내내 T자와 삼각자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탁, 탁, 스르륵.

트레이싱지 위를 미끄러지는 샤프심의 마찰음이 사방에서 이어졌다. 채은은 도면대 위에 상체를 숙인 채 제도용 붓으로 지우개 가루를 쓸어냈다. 손목에 찬 시계 바늘이 오후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채은아, 너 오늘 스튜디오 과제 마감 안 해?"

옆자리의 동기 수진이 자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벽체 단면도 다 그렸어."

"벌써? 교수님이 이번 주에 차음재 상세도까지 그려 오라고 했잖아. 그거 두께 계산하는 거 엄청 복잡하던데."

"석고보드 두 겹 사이에 50밀리미터 암면 채우고, 바닥은 방진 고무 마운트로 띄우는 구조로 잡았어. 공진 주파수 125헤르츠 이하로 떨어뜨리려면 그 두께가 맞으니까."

수진이 혀를 내둘렀다.

"너는 무슨 1학년이 음향 설계를 졸업 작품 수준으로 하냐. 진짜 소리에 한 맺힌 사람 같다니까."

채은은 대답 대신 제도판 위에 널린 삼각자와 템플릿을 필통에 정리해 넣었다. 지우개 가루를 한 번 더 털어내고, 트레이싱지를 원통형 도면통에 말아 넣었다. 시계 바늘은 이미 6시 35분을 지나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 제도실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어 캠퍼스에는 붉은 노을이 엷게 깔려 있었다. 학생회관 쪽에서는 밴드 동아리의 드럼 킥 소리가 쿵, 쿵 진동으로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채은은 헤드폰을 바짝 누른 채 종걸음으로 인문관을 향해 걸었다.

‘저녁 7시.’

경원이 말한 시간이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지금 주머니 안에 있었다. 그 침묵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인문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낮보다 훨씬 어두웠다. 노란 나트륨등 하나만이 복도 모퉁이를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습한 시멘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채은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302호 철문 앞에 섰다.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문이 안쪽에서 덜컥 열렸다.

"안 늦었네."

문틈 사이로 도경원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은색 윈드브레이커를 걸친 채였다. 그의 목에는 가죽 스트랩으로 연결된 고성능 필드 레코더가 걸려 있었고, 한쪽 어깨에는 거대한 붐 폴과 마이크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경원은 시계를 보지도 않고 채은을 지나쳐 복도로 걸어 나왔다.

"가자."

"어디로 가는데요?"

채은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경원의 걸음은 길고 빨랐다. 보폭을 맞추려면 채은은 거의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낮에 말했잖아. 필드 녹음."

"지금요? 곧 해가 질 텐데요."

"소리는 해 지고 나서가 진짜야. 주간 소음 레벨이 떨어져야 배경음이 걷히거든."

경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좁은 복도 벽에 부딪혀 채은의 귀로 정확하게 꽂혔다. 낮과 마찬가지로 전혀 쏘지 않는, 묵직하고 정갈한 음성이었다.

"네가 쓰던 헤드폰, 이리 줘."

경원이 멈춰 서서 손을 내밀었다. 채은은 망설이다가 목에 걸고 있던 하얀색 블루투스 헤드폰을 벗어 건넸다. 경원은 헤드폰의 모델명을 힐끗 확인하더니 가차 없이 채은의 캔버스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노이즈 캔슬링 프로세서가 인위적으로 만든 위상 반전음이야. 그런 거 계속 끼고 있으면 청신경만 피로해져. 진짜 귀를 막는 게 아니라 뇌를 속이는 거니까."

경원이 자신의 가방 옆주머니에서 검은색 접이식 모니터 헤드폰을 꺼냈다. 프로 음향 엔지니어들이 쓰는 투박하고 각진 모델이었다. 가죽 이어패드가 묵직해 보였다.

"이거 써. 착색 없는 완전 플랫 사운드니까, 네 귀에 들어오는 거 그대로 전달될 거야."

채은은 건네받은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귓바퀴를 빈틈없이 감싸는 차음성이 블루투스 기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경원이 필드 레코더의 3.5파이 단자에 헤드폰 플러그를 꽂았다. 딸깍, 하는 접속음이 고막에 아주 작게 울렸다.

"볼륨 노브는 4번에 맞춰 뒀어. 함부로 손대지 마."

경원이 건물 후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인문관 뒤편은 학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숲길이었다.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비탈길이었는데, 길 양옆으로 거대한 플라타너스와 단풍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낮의 열기가 식어가며 축축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일제히 스치는 소리가 났다.

사아아아.

채은은 걸음을 멈췄다. 헤드폰을 통해 들어오는 소리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잡음이 아니었다. 나뭇잎 수천 장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결이 하나하나 분리되어 들렸다. 굵은 줄기 쪽에 달린 두꺼운 잎의 둔탁한 마찰, 가지 끝에 매달린 마른 잎의 파삭거리는 소리까지.

"어때."

경원이 레코더의 게인 값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물었다.

"신기해요."

채은이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항상 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서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요."

"소음이라는 건 정보가 정돈되지 않아서 뇌가 거부하는 거야. 초점을 맞추면 다 제자리로 돌아가."

경원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붐 폴을 길게 뽑아냈다. 카본 재질의 긴 장대가 허공으로 미끈하게 뻗어나갔다. 끝부분에는 털이 숭숭 난 원통형 윈드실드, 이른바 데드캣이 장착되어 있었다.

"잡아."

경원이 붐 폴의 손잡이를 채은에게 넘겼다.

"제가요?"

"네가 신입이잖아. 마이크 오퍼레이터부터 해야지."

채은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장대를 넘겨받았다. 카본 소재라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지만, 길이가 3미터를 넘어가자 끝부분의 무게중심 때문에 손목에 묵직한 텐션이 걸렸다.

"팔꿈치 몸에 붙여. 어깨 힘으로 버티면 5분도 못 가."

경원이 채은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의 단단한 손이 채은의 오른쪽 팔꿈치를 받쳐 올렸다. 불쑥 닿아온 손길에 채은의 등이 굳어졌다. 경원의 가슴팍이 채은의 어깨 뒤쪽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에게서 묵은 담배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손목 스냅 쓰지 말고, 몸 전체를 회전축으로 써. 숲 위쪽에서 내려오는 바람길을 따라 마이크 헤드를 돌리는 거야. 알겠어?"

경원의 나직한 숨소리가 채은의 귓바퀴 바로 옆에서 헤드폰 패드를 비집고 들어왔다. 레코더의 마이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 소리와, 등 뒤에서 직접 들려오는 경원의 육성이 겹쳐졌다. 두 개의 주파수가 시차 없이 얽히며 뒷목을 타고 서늘한 전류가 흘렀다.

"네, 알겠어요."

채은은 장대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버텨 봐. 3분 동안 논스톱으로 갈 거니까."

경원이 레코더의 빨간색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액정 화면에 붉은색 타임코드가 1초 단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00:00:01, 00:00:02.

주변의 모든 소리가 헤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숲길 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길고양이의 발소리, 멀리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채은의 가슴속에서 점점 빨라지는 맥박의 파동.

팔이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했다. 마이크 끝이 미세하게 떨리자, 헤드폰 안에서 둥, 둥 하는 저주파 진동이 울렸다.

"흔들려. 호흡 죽여."

경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떨어졌다. 그는 채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채은의 자세를 교정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악력이 단호했다.

그때였다.

숲길 아래쪽 자갈길을 밟고 뛰어오는 거친 발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어왔다.

자박, 자박, 자박.

빠르고 불규칙한 박자였다. 채은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고 터져 나왔다.

"백채은!"

송태이였다.

그는 악보 가방도 팽개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길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회색 후드 집업 차림의 태이는 두 사람의 거리를 확인하자마자 걸음을 우뚝 멈췄다.

경원의 손이 여전히 채은의 팔꿈치를 감싸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붉게 물든 노을 속에서 하나로 겹쳐져 있는 형국이었다.

태이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의 시선이 경원의 손으로, 그리고 굳은 채 서 있는 채은의 얼굴로 빠르게 이동했다.

"선배님."

태이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신입 부원한테 장비 셔틀 시키는 게 이 동아리 전통입니까?"

경원은 레코더의 스톱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는 채은의 팔에서 손을 천천히 뗐지만, 시선은 태이를 향해 무심하게 던졌다.

"녹음 중이야. 소리 지르지 마."

"나 지금 선배랑 소리 채집 장난치러 온 거 아닙니다."

태이가 채은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 붐 폴을 쥔 채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이리 줘. 내가 들 테니까."

"태이야, 잠깐만……."

채은이 말릴 틈도 없이, 태이가 붐 폴의 무게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이크가 허공에서 거칠게 휘청거렸다. 헤드폰 안으로 퍽, 하는 거대한 클리핑 노이즈가 폭발하듯 쏟아져 들어왔다.

"아읏."

채은이 반사적으로 헤드폰을 벗어던지려 손을 올렸다. 너무 큰 음압에 귀 안쪽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순간, 경원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경원은 채은의 머리에서 헤드폰을 낚아채듯 벗겨내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태이의 손목을 강하게 꺾어 쥐었다.

탁.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서늘하게 숲길에 퍼졌다.

"장비 다루는 기본도 안 된 새끼가 어디서 힘을 써."

경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실린 무게는 바닥을 짓누를 만큼 무거웠다. 그의 나른하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이도 지지 않고 경원의 손목을 마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팽팽한 살얼음이 얼어붙었다.

"장비가 중요합니까? 채은이가 귀 아파하잖아요."

태이의 목소리가 짓씹히듯 터져 나왔다.

"선배는 소리만 중요하고 사람은 안 보입니까?"

"태이야, 그만해."

채은이 태이의 옷소매를 잡았다. 고막 안쪽이 멍멍하게 울렸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더 위험해 보였다.

경원은 태이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 채은의 손에 들려 있던 붐 폴을 회수해 바닥에 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레코더의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피크 떴어. 0데시벨 넘어서 디스토션 걸렸잖아."

경원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리 버렸어. 오늘 녹음은 여기까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붐 폴을 접어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릴테이프나 케이블을 정리하는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태이는 붉어진 손목을 매만지며 채은의 앞을 막아섰다.

"채은아, 내려가자.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있어."

"태이 너,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채은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인문관 지하에서 너 기다렸어. 문 잠겨 있길래 숲길 쪽으로 올라오는 소리 듣고 뛰어온 거야."

태이가 채은의 차가워진 손끝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나 동아리 신청서 도경원 선배 사물함에 넣었어. 나도 부원이야. 너 혼자 저 사람이랑 두게 안 해."

채은은 태이의 손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쿵, 쿵 거칠게 뛰고 있었다. 늘 다정하게 웃어넘기던 소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장비 정리를 마친 경원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그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그의 깊은 눈매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경원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USB 하나를 꺼내 채은의 손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내일 12시까지."

경원의 낮은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그 안에 든 파일, 3천 헤르츠 대역 노이즈 싹 긁어내서 가져와. 이 녀석 데리고 계속 동아리 할 생각이면."

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배, 그걸 1학년이 어떻게 합니까? 음향 툴도 안 배운 애한테……."

"넌 빠져."

경원이 태이의 말을 차갑게 잘라냈다.

그리고 채은을 똑바로 응시했다.

"못 하겠으면 지금 열쇠 돌려주고 나가. 둘 다."

경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긴 다리로 비탈길을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했다. 숲길의 어둠 속으로 그의 검은 실루엣이 빠르게 묻혀 들어갔다.

채은은 손바닥 위의 차가운 USB를 내려다보았다.

숲의 바람 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태이의 거친 호흡과, 멀어져 가는 경원의 발소리.

채은의 손가락이 USB를 단단하게 쥐었다. 주머니 속의 방음실 열쇠가 다시 한번 허벅지를 차갑게 찔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