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이 사라진 비탈길 아래는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아 먹물이라도 엎지른 것처럼 캄캄했다. 빽빽한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를 비집고 내려앉은 밤바람이 마른 흙먼지를 쓸어 올렸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고막을 긁어대자, 채은은 욱신거리는 귓바퀴를 손바닥으로 슬며시 덮었다. 헤드폰에서 터져 나왔던 0데시벨 피크의 파열음 탓에 귓속에서 미세한 이명이 맴돌았다.
태이가 그런 채은의 손을 황급히 가로막으며 손가락 사이를 살폈다.
"괜찮아? 피 안 나? 이비인후과부터 가자. 응급실이라도 가야 해. 응?"
"피 안 나. 잠깐 울린 것뿐이야."
채은은 손을 내리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그러나 태이의 시선은 채은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검은색 플라스틱 덩어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거 당장 버려."
태이의 목소리가 단번에 가팔라졌다.
"3천 헤르츠 노이즈? 그걸 음향 전공도 아닌 건축과 신입생한테 던져주고 내일 정오까지 빼오라고? 넌 그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졸업 영화 믹싱 맡았다고 온 음향관에서 기고만장한 인간이야. 지 마음에 안 들면 녹음 트랙도 가차 없이 갈아엎는 악질이라고. 귀도 성치 않은 애한테 이런 억지 과제를 던지는 게 정상이야?"
"선배 말이 맞아. 내가 마이크 제대로 통제 못 해서 피크 뜬 거야."
"그건 내가 갑자기 뺏으려다가 그런 거잖아!"
태이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낭패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
"내가 네 손목 잡지만 않았어도 그런 소리 안 났어. 그 선배도 알면서 너한테 덮어씌운 거야. 왜 네가 그 책임을 져? 넌 그냥 도망쳐 나온 거잖아. 소음 피해서 조용한 데 찾으려고 인문관 지하로 간 거잖아."
태이는 채은의 손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채은은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바닥을 뒤로 감췄다. 손안에 쥔 플라스틱 USB 모서리가 손바닥 살갗을 꾹 눌러왔다.
"도망친 거 아니야."
채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숲길을 흔드는 바람 소리보다 작았지만, 음절 하나하나가 돌바닥에 박히듯 명확했다.
"나 안 도망쳐, 태이야."
"채은아."
"아프지 않았어."
채은이 고개를 들어 태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밤안개 낀 어둠 속에서도 채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는 모를지 몰라도, 난 그 사람 마이크를 통해서 처음으로 소리가 안 아팠다고."
태이의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 굳었다.
채은은 어릴 적부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날카로운 칼날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지하철이 궤도를 긁는 쇳소리, 형광등 안정기에서 새어 나오는 고주파, 사람들의 말소리에 섞인 거친 마찰음까지. 남들에게는 일상의 배경음인 것들이 채은에게는 고막을 찢는 진동이었다. 늘 귀를 틀어막고 차음재와 흡음재를 공부하며 두꺼운 벽 뒤로 숨기 바빴다.
하지만 조금 전, 숲길 비탈에 서서 경원이 씌워준 헤드폰 너머로 들려온 세상은 전혀 달랐다.
밤공기가 식어가는 결, 나뭇잎이 부딪치며 내는 바스락거림의 거리감, 흙바닥을 스치는 미세한 곤충의 날갯짓까지. 소리들이 제자리를 찾아 겹겹이 분리되어 있었다. 아프게 뭉쳐서 귓속을 때리던 소음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를 재어 주는 선명한 좌표였다. 태이가 뛰어들어 마이크를 흔들기 전까지, 채은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요한 환희를 맛보고 있었다.
"난 늘 소리가 괴물 같았어.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다루고 있었어. 어디를 잘라내고 어디를 남겨야 소리가 다치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고."
채은이 주머니에서 놋쇠로 된 302호 열쇠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열쇠와 USB가 나란히 놓였다.
"이 과제, 해낼 거야. 지워내야 한다면 지워낼 거고, 통과할 거야."
"그게 무슨 고집이야? 음향 시퀀서 켜본 적도 없잖아. 파형 분석하는 게 건축 도면 그리는 거랑 같은 줄 알아? 주파수 하나 깎아내는 데도 필터 잘못 걸면 전체 배음이 다 뭉개진다고!"
태이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체온과 섞인 옅은 섬유유연제 향이 훅 끼쳐왔다.
"내가 작곡과잖아. 화성학이랑 사운드 기초는 내가 알아. 넌 그냥 기숙사 들어가서 쉬어. 이거 내가 밤새워서 3천 헤르츠 대역 노치 필터로 깎아놓을 테니까, 내일 아침에 네가 한 걸로……."
"송태이."
채은이 태이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내 귀로 들을 거야."
"채은아."
"네가 대신해 주면, 난 평생 남의 뒤에 숨어야 해. 또 시끄럽다고 귀 막고 도망쳐야 해. 나 그렇게 안 살아.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내 귀가 진짜 망가진 고장 난 기관인지 아니면 다른 걸 들을 수 있는 건지…… 내가 직접 확인할 거야."
채은은 뒤를 돌아 비탈길 아래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흙길이 끝나고 인문관 후문으로 이어지는 보도블록이 발밑에서 딱딱하게 울렸다.
태이는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채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야! 백채은!"
태이의 운동화가 자갈을 차는 소리가 뒤편에서 요란하게 따라붙었다.
"같이 가! 혼자 두는 꼴은 죽어도 못 보니까!"
두 사람은 인문관 후문의 무거운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인문관 복도는 모든 조명이 꺼진 채 비상구 유도등의 초록빛만이 바닥을 희미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낮 동안 학생들의 발소리와 강의 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은 서늘한 냉기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 끝, 낡은 나무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깊은 갱도처럼 어두웠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너 진짜 고집불통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태이가 채은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계단을 밟으며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면서도 태이의 시선은 계속해서 채은의 귀와 손에 닿아 있었다.
"포노그래프 방음실에 작업용 PC는 있어. 프로툴즈랑 로직 둘 다 깔려 있을 테니까 툴 쓰는 법은 내가 가르쳐줄게. 대신 귀 아프면 1초도 참지 말고 바로 헤드폰 벗어. 알겠어?"
채은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의 놋쇠 열쇠를 단단히 쥐었다.
지하 복도 끝, 두꺼운 차음재가 덧대어진 302호의 육중한 철문이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채은은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거친 금속 마찰음과 함께 묵직한 걸쇠가 돌아가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밀자, 문틈 사이에 덧대어진 고무 패킹이 떨어져 나가며 훅 하고 갇혀 있던 공기가 배어 나왔다.
방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복도의 미세한 공기 흐름마저 뚝 끊겼다. 벽면 전체를 빈틈없이 메운 검은색 쐐기형 폴리우레탄 흡음재가 모든 반사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방 특유의 먹먹한 정적이 고막을 가볍게 눌러왔다. 선천적으로 모든 자극에 민감한 채은에게는 오히려 이 압박감이 단단한 차음벽 안으로 숨어든 것 같은안도감을 안겼다.
채은은 벽면의 스위치를 눌렀다. 스튜디오 데스크 위를 비추는 주황빛 작업등이 켜지며 어둠에 잠겨 있던 음향 콘솔과 듀얼 모니터의 윤곽이 드러났다.
태이가 문을 닫고 들어와 두꺼운 방음문의 래치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바깥세상의 모든 진동이 완벽히 차단된 방 안에는 컴퓨터 본체의 미세한 팬 돌아가는 소리만이 아주 낮게 웅웅거렸다.
"여기 앉아."
태이가 의자를 끌어다 채은의 등 뒤로 밀어주었다. 채은은 조용히 데스크 앞 의자에 앉아 주머니에서 검은색 USB를 꺼냈다. 손바닥에 닿는 금속 본체의 차가운 감촉이 아직 남아 있었다.
본체 전면 포트에 USB를 밀어 넣자 화면 오른쪽 아래에 외장 드라이브 인식 창이 떴다. 폴더 안에는 단 하나의 오디오 파일만 들어 있었다. 파일명은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Forest_Night_Field_3000Hz_Raw.wav]
채은이 마우스를 쥐고 편집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모니터 중앙에 짙은 회색의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 화면이 펼쳐졌다. 파일을 빈 트랙 위로 드래그하자, 푸른색의 빽빽한 오디오 파형이 타임라인을 따라 길게 늘어섰다.
"잠깐, 재생 누르지 마."
태이가 황급히 손을 뻗어 콘솔 오른쪽에 놓인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메인 볼륨 노브를 왼쪽 끝까지 돌려 영점에 맞췄다.
"3천 헤르츠는 외이도 공진 주파수야. 인간 청각 구조상 고막이 가장 취약하게 반응하고, 제일 찌르듯이 아프게 느끼는 대역이라고. 선배는 지금 네 증상을 알면서 시험하고 있어. 귀에 바로 때려 박았다간 너 진짜 병원 실려 가."
태이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콘솔 선반에 걸려 있던 검은색 플랫 모니터 헤드폰을 집어 들며 채은을 응시했다.
"작곡할 때도 3천에서 4천 대역의 마찰음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 보컬 치찰음이나 현악기 보잉 노이즈가 과하면 곡 전체가 싸구려처럼 날카로워지니까. 보통은 이퀄라이저에서 좁은 밴드로 노치 필터를 걸어서 그 대역만 수직으로 깎아내. 파형을 파내 버리면 그 찌르는 소리는 일단 사라지거든."
"그냥 잘라내면 어떻게 되는데?"
채은이 묻자, 태이가 헤드폰 케이블을 오디오 단자에 꽂으며 답했다.
"그 주파수에 걸쳐 있는 다른 소리의 배음도 같이 죽어. 공간감이 납작해진다고 해야 하나. 먹먹하고 답답한 소리가 돼. 하지만 네 귀를 지키는 게 먼저잖아. 선배가 요구한 것도 3천 헤르츠 노이즈 제거였고."
채은은 태이가 건넨 헤드폰을 받아 들었다. 도경원이 숲길에서 씌워주었던 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가죽 이어패드가 귀를 감싸자 외부의 미세한 공기압마저 차단되었다. 채은은 볼륨 노브를 아주 천천히, 10퍼센트 수준까지만 올렸다.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타임라인의 재생 바가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정적을 찢었다. 아주 낮은 음량이었음에도 3천 헤르츠 특유의 금속성 비명이 고막 안쪽을 뾰족한 바늘처럼 찔렀다. 채은의 목덜미 근육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끄자. 바로 필터 걸게."
태이가 마우스로 손을 뻗으려 했다.
"잠깐만."
채은이 태이의 손목을 가볍게 밀어냈다. 눈을 감은 채 미간을 모으고 소리의 층위를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운 찌름 뒤편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게 만드는 거친 노이즈의 장막 너머로 다른 결의 소리가 숨 쉬고 있었다.
새벽 숲의 축축한 흙이 머금은 습기, 밤바람이 활엽수 잎사귀의 앞뒷면을 스치며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마찰, 그리고 완만한 비탈면을 타고 내려오다 인문관 붉은 벽돌 모퉁이에 부딪혀 흩어지는 공기의 굴절음.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결함으로 발생한 잡음이 아니었다.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야."
채은이 눈을 떴다. 모니터 속 파형 분석기에 주황색 막대로 치솟은 3,000Hz 지점이 번뜩이고 있었다.
"소리를 깎아내면 안 돼. 뒤쪽에 묻혀 있는 숲의 바람길 잔향을 분리해야 해."
"바람길 잔향?"
태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채은을 바라보았다.
"3천 헤르츠를 노치로 통째로 파내면 파열음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 대역에 숲의 공기가 인문관 벽면에 부딪혀 울리는 1차 반사음이 걸려 있어. 도경원 선배는 그 잔향까지 파일에 다 담아뒀어. 그걸 잘라내면 소리의 공간 축이 완전히 무너져. 그냥 진공관 속에 갇힌 소리가 된다고."
채은에게 음향은 소리 이전에 공간이었다. 건축 설계에서 차음재를 덧댈 때 무작정 벽을 두껍게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소리 역시 무작정 도려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특정 주파수가 튀어나오는 것은 그 주파수가 부딪히는 구조적 경계면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건축에서 소음을 잡을 때는 흡음과 차음을 분리해. 차음판으로 소리를 튕겨내고, 그 뒤에 다공질 흡음재를 둬서 남은 에너지를 열로 바꾸는 거야. 음향 프로그램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어."
채은은 마우스를 쥐었다. 이퀄라이저 플러그인을 트랙에 걸었다. 태이가 말한 단순 노치 필터 대신, 입력 신호의 크기에 따라 특정 대역만 선택적으로 감쇠시키는 다이내믹 이퀄라이저를 불러왔다.
태이가 놀란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너 이거 다룰 줄 알아?"
"공조실 덕트 소음 시뮬레이션 돌릴 때 쓰던 건축 음향 소프트웨어랑 주파수 밴드 제어 방식이 비슷해. 수치만 맞추면 돼."
채은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우스 휠을 굴렸다.
3,000Hz 중심 주파수를 잡고, 큐(Q) 팩터를 조절해 감쇠 폭을 종이 한 장 두께만큼 극도로 좁혔다. 고정된 차단이 아니라, 날카로운 파열음이 튀어 오르는 순간에만 작동하도록 스레숄드 값을 정밀하게 설정했다. 소리가 거칠게 찌를 때만 장벽이 세워지고, 숲의 잔향이 흐르는 평상시에는 문이 열려 원래의 음향 축이 유지되도록 설계하는 작업이었다.
루프 구간을 5초 단위로 쪼갰다. 재생과 정지를 수백 번 반복했다.
치익거리는 쇳소리가 조금씩 깎여 나가면서, 그 그늘에 숨어 있던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림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리의 윤곽이 다듬어질 때마다 귀를 찌르던 통증은 차분한 울림으로 변해갔다. 고통의 원인이었던 주파수를 이해하고 제어하자, 그것은 더 이상 채은을 위협하는 소음이 아니었다.
태이는 더 이상 채은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채은이 건네는 메모에 따라 단축키를 눌러주고, 이따금 볼륨 레벨이 위험 수치로 올라가지 않도록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미터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벽면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의 바늘이 3시를 지나, 4시를 넘어섰다.
인문관 환기창 틈새로 서서히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채은은 마지막으로 전체 트랙을 재생했다.
숲길의 어둠 속을 헤치던 바람 소리가 모니터 헤드폰 너머로 완벽한 입체감을 그리며 흘러나왔다. 3천 헤르츠의 날카로운 비명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새벽 숲의 깊은 공간감이 서늘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채은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최종 결과물을 [Export] 버튼을 눌러 USB에 저장했다. 시계는 오전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음문 틈새의 고무 패킹이 짓눌리는 마찰음과 함께 묵직한 철문이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동아리방 벽면의 아날로그 시계 바늘은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된 정오에서 정확히 10분 모자란 시간이었다.
문간에 선 도경원은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콘솔 데스크 앞까지 걸어왔다. 검은색 윈드브레이커 지퍼를 턱 밑까지 단단히 채운 그는 밤을 새운 기색 하나 없이 서늘한 얼굴이었다. 젖은 흙냄새가 밴 숲길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쪽잠을 자다 깬 송태이가 날카롭게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태이가 경원의 앞을 가로막듯 데스크 옆에 섰다.
"딱 맞춰 오셨네요."
경원은 태이의 목소리를 공기 중의 잡음처럼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콘솔 데스크 중앙에 놓인 알루미늄 외장 하드와 채은의 오른손 곁에 놓인 검은색 USB로 곧장 향했다.
"파일은."
채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느라 눈 밑이 뻐근했지만, 머릿속 감각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또렷했다. 채은은 데스크 위에 꽂혀 있던 USB를 뽑지 않고 마우스 포인터로 DAW 타임라인 중앙을 가리켰다.
"트랙 익스포트 끝냈고, 프로젝트 파일도 그대로 열어뒀습니다. 3천 헤르츠 노이즈를 걷어낸 최종 마스터 음원입니다."
경원은 대답 대신 데스크 위에 놓여 있던 밀폐형 플랫 모니터 헤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가 헤드폰 밴드를 한 손으로 벌려 귀에 얹는 동안, 동아리방 안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전원 램프가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건조한 정적이 감돌았다.
스페이스 바가 눌렸다.
재생 헤드가 타임라인을 따라 매끄럽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화면 속 스테레오 미터의 녹색 레벨 게이지가 일정한 리듬으로 튀어 올랐다.
-24dB, -18dB, 그리고 문제의 클리핑이 발생했던 구간인 47초 지점으로 진입했다.
태이가 팔짱을 낀 채 경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노치 필터로 깎아낸 거 아닙니다. 채은이가 밤새 위상 정리까지 다 마쳤어요. 억지로 대역 자르면 소리 깡통 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런 과제 던진 거죠?"
경원의 눈동자가 천천히 트랙 위의 플러그인 체인 창으로 내려앉았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노치 필터가 아닌, 다이내믹 이퀄라이저와 멀티밴드 컴프레서의 복합 라우팅 그래프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3,000Hz 중심 주파수를 기준으로, 파열음이 튀는 순간에만 작동하도록 좁게 설정된 감쇠 곡선이 재생 헤드의 움직임에 맞춰 유기적으로 출렁였다.
헤드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고요했다. 귀청을 찢어발기던 쇳소리의 파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야간 숲길의 낮은 대기압과 떡갈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스치는 미세한 음영이었다. 잘려 나간 흔적 없이, 공간의 부피감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경원은 헤드폰을 벗지 않은 채 볼륨 노브를 시계 방향으로 두 칸 더 돌렸다. 앰프의 출력이 올라가며 미세한 기계 잡음이 실릴 법도 했지만, 채은이 설계한 차음 장벽은 기준치를 넘어서는 고주파만을 정확히 눌러 앉히고 있었다.
1분 20초의 음원이 모두 끝났다. 재생 헤드가 멈추자 모니터 미터의 바늘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경원이 천천히 헤드폰을 벗어 데스크 위에 내려놓았다. 가죽 이어패드가 콘솔 목재 상판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단순히 대역을 도려낸 게 아니군."
경원의 낮은 음성이 방음벽 사이로 울렸다.
"주파수를 깎으면 공간이 죽는데, 입력 신호의 위상을 계산해서 잔향 축을 살렸어. 건축 음향에서 경계면 다루는 방식을 썼나."
"특정 주파수가 반사되는 벽면을 가상으로 세우고, 그 뒤에 감쇠 조건을 걸었습니다. 노이즈를 없애려 하기보다 소리가 흡수되는 통로를 만들었어요."
채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의 귀를 찌르던 통증의 근원을 구조물로 환산해 풀어낸 과정이었다. 경원은 채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경원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5분. 통과다."
태이가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경원의 앞을 막아섰다.
"통과했으면 됐죠? 애 밤새워서 몰골이 이런데, 당장 집으로 보내요. 이딴 억지 테스트는 한 번으로 끝냅시다."
경원은 태이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내며 걸음을 옮겼다. 태이의 존재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 경원은 동아리방 구석의 장비 랙으로 다가가 펠리칸 하드 케이스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버클이 풀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과제는 끝났지만 작업은 이제 시작이야."
경원이 케이스 안에서 검은색 윈드실드가 씌워진 스테레오 페어 마이크와 8채널 필드 레코더를 꺼내 들었다.
"오늘 저녁 8시 정각, 중앙도서관 시계탑 꼭대기 기계실로 와."
채은의 시선이 경원의 손끝에 들린 육중한 장비로 향했다.
"중앙도서관 시계탑이요?"
"자정에 단 한 번 치는 구형 타종 기구의 저주파 충격음을 딴다. 기계실 내부 소음 레벨은 110데시벨을 넘어. 일반적인 귀로는 10초도 버티기 힘든 공간이야."
경원이 레코더의 다이얼을 능숙하게 잠그며 채은을 응시했다.
"네 귀가 소음을 구조로 읽어낸다면 거기서도 버틸 수 있겠지. 마이크 오퍼레이터는 너 하나다."
"도경원 씨!"
태이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채은이 청각 과민증 있는 거 알면서 거길 데려가겠다고요? 110데시벨이면 고막 터져요. 상업 영화 믹싱 소스 따는 데 신입 부원 귀를 갈아 넣을 셈입니까?"
경원은 레코더 케이스를 닫았다. 래치가 단단히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선택은 본인이 해. 올 거면 7시 40분까지 인문관 지하로 와서 이 장비들 메고 올라가. 1초라도 늦으면 동아리방 열쇠는 즉시 회수하고 퇴출이다."
경원은 채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무거운 철문이 다시 열렸다가, 유압 클로저의 저항을 받으며 천천히 닫혔다. 쾅, 하는 묵직한 밀폐음과 함께 동아리방에는 다시 완벽한 무음의 세계가 내려앉았다.
데스크 위에는 합격 판정을 받은 USB와, 저녁 8시를 예고하는 레코더 케이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