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좁은 탑 안을 울렸다.
송태이가 케이블 뭉치와 보조 배터리를 쑤셔 넣은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앞장섰다. 도경원은 점퍼 안주머니에 8채널 외장 하드디스크를 넣은 채, 손에는 관제망 단말기를 쥔 채로 계단을 밟았다. 백채은은 목에 건 헤드폰을 손으로 단단히 누르며 나선형 난간을 잡고 내려갔다. 110데시벨의 굉음이 남긴 진동이 여전히 관자놀이 안쪽에서 묵직한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시계탑 1층 육중한 참나무 문을 밀고 나오자 새벽 2시의 서늘한 공기가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식혔다. 도서관 뒤편 숲길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축축한 바닥에 둥글게 번졌다.
“도경원, 잠깐 멈춰 봐.”
태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숲길 한가운데서 태이의 시선이 경원의 손에 들린 단말기 화면에 박혔다. 단말기 상단에서 파란색 로딩 바가 깜빡이며 수십 장의 압축 파일이 풀려나오고 있었다.
“그거 단순한 시계탑 진단서가 아니잖아.”
태이가 손을 뻗어 경원의 팔목을 낚아챘다.
경원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팔을 비틀어 태이의 손아귀를 털어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단말기가 비스듬히 기울었고, 화면에 뜬 문서의 결재선과 붉은색 대외비 직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화학원 재단 감사위원회 기밀 보고서: 중앙도서관 서관 부지 상업화 개발 계획안]
[부제: 백진우 교수의 음향 간섭 제어 특허 무효화 및 시공 결함 처리 방안]
문서 작성 일자는 20년 전이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오늘 새벽 날짜로 찍힌 재단 부이사장의 디지털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태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이는 바닥에 더플백을 내팽개치듯 떨어뜨리며 경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처음부터 시계탑 진동 잡는 게 목적이 아니었지.”
태이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채은이 귀를 테스트하고, 자정 타종에 마이크를 쥐여서 저 위험한 곳으로 밀어 올린 게…… 고작 재단 감사팀 캐비닛 털려고 그런 거였어? 백진우 교수 설계가 맞았다는 걸 입증해서, 20년 전 재단이 특허 짓밟고 땅 팔아먹으려던 비리를 터뜨릴 미끼로 채은이를 쓴 거냐고!”
태이가 주먹을 말아 쥐고 경원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경원은 피하지 않았다. 다만 서늘한 눈빛으로 태이의 손목을 쳐내며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경원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었다.
“말 똑바로 해. 미끼가 아니라 유일한 열쇠였다.”
“뭐?”
“20년 전 백진우 교수가 왜 연구 일지를 덮고 학교를 떠났는지 알아? 저놈들이 시공 결함을 덮어씌워서 특허를 뺏으려 했기 때문이야. 오늘 오전 9시 심의회도 똑같아. 센서 핑계로 시계탑 부수고, 그 자리에 재단 수익 사업 건물 올리려는 마지막 수작이라고.”
경원이 태이를 밀치며 한 걸음 다가섰다.
“채은이가 잡은 8채널 데이터 없이는 저 보고서도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백진우의 도면이 실제로 작동했다는 걸 소리로 증명해야 저 비리 문건 전체가 법적 증거가 된다. 네가 가져온 연구 일지 사본만으로는 시계탑 철거도, 백진우의 불명예도 못 막아.”
“그걸 왜 채은이가 짊어져야 하는데!”
태이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채은이는 지금 청각 과민증 때문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상태야! 그런데 넌 9시에 본관에 쳐들어가서 재단이랑 전면전이라도 벌이겠다고? 백채은을 네 사적 복수의 총알받이로 쓸 작정이었냐고, 이 개자식아!”
태이의 주먹이 경원의 뺨을 향해 날아들기 직전이었다.
탁.
채은이 두 사람의 틈바구니로 끼어들었다. 채은은 태이의 뻗은 팔을 옆으로 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경원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채은의 손끝이 단단한 점퍼 안쪽의 외장 하드디스크 모서리에 닿았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숲길의 정적 속으로 흩어졌다.
“그만해요, 둘 다.”
채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태이가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채은의 얼굴을 살폈다.
“채은아, 넌 저 자식이 무슨 판을 짰는지 모르잖아. 널 이용해서…….”
“들었어요.”
채은이 태이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시선은 태이를 지나쳐 도경원의 굳은 얼굴로 향했다.
“재단 감사위원회가 아버지를 어떻게 몰아세웠는지, 선배가 왜 도면과 전산망에 매달렸는지 다 들었다고요.”
경원은 아무 말 없이 채은을 내려다보았다. 눈 밑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채은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경원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송태이 말이 맞아요. 선배는 처음부터 나한테 시계탑을 고치라고 한 게 아니었죠. 재단이 묻어버린 아버지의 특허를 끄집어내서, 20년 전 감사위원회의 비리 문건을 터뜨릴 증거를 쥐여 달라고 한 거잖아요.”
경원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밤공기가 새어 나왔다.
“그래. 맞다.”
경원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퍼 안주머니에서 8채널 하드디스크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묵직한 금속 케이스에 가로등의 푸른빛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데이터가 없으면 네 아버지는 영원히 부실 설계를 저지르고 도망친 교수로 남아. 저 종루는 오늘 오전 9시가 지나면 포클레인에 찍혀서 고철이 된다. 너도 알고 있잖아. 이건 내 복수이기 이전에, 네 아버지가 20년 동안 홀로 감당해 온 결백의 문제야.”
“그걸 결정하는 건 선배가 아니에요.”
채은이 거침없이 손을 뻗어 경원의 손바닥 위에 놓인 하드디스크를 낚아챘다. 차가운 알루미늄 외장재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내 귀와 아버지가 만든 데이터예요. 두 사람의 거래 도구로 쓰이게 둘 생각 없으니까 서류 치우고 302호로 뛰어요.”
태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채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채은아, 지금 귀 상태로 3차원 렌더링까지 하겠다고? 그건 단순 모니터링이 아니야. 8채널 위상을 하나하나 수동으로 맞추려면 몇 시간 내내 고출력 주파수를 맨귀로 쪼개서 들어야 해. 귀 다 망가져!”
채은은 태이의 손을 조용히 뿌리쳤다. 그리고 가방 끈을 고쳐 매며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지켜져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선배한테 일지 넘겨주고 내 뒤를 봐주면, 내가 고마워하면서 물러설 줄 알았어?”
태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아무런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난 내 귀로 도면의 28도 슬릿을 찾았고, 130헤르츠 저음역이 18데시벨 깎여나가는 걸 직접 수음했어요. 아버지가 남긴 게 부실 덩어리가 아니라 건물을 살리는 댐퍼였다는 걸, 내 손으로 증명할 기회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채은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액정의 숫자가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관 심의회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40분이에요. 재단 감사팀이든 부이사장이든,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려면 3차원 공간 음향 시뮬레이션 파일이 완성되어 있어야 해요. 여기서 네 탓 내 탓 하면서 주먹질할 시간 없어요.”
경원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팽팽하게 굳어 있던 경원의 어깨가 그제야 조금 내려앉았다.
“들었지, 송태이.”
경원이 바닥에 뒹굴던 더플백을 발끝으로 툭 차서 태이의 발치로 밀었다.
“케이블 챙겨. 인문관 302호 메인 콘솔 부팅하는 데만 15분 걸린다.”
태이는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더플백을 어깨에 메어 올렸다. 여전히 채은을 향한 걱정과 경원을 향한 날 선 분노가 뒤섞여 있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발을 뗐다.
세 사람은 축축한 흙길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숲길의 안개가 세 사람의 발목을 휘감았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박힌 인문관 북쪽 계단으로 향하는 동안, 채은의 귓속에서는 110데시벨의 잔류 진동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관자놀이가 쑤셔오는 통증 속에서도 채은의 손가락은 품 안의 하드디스크를 놓지 않았다.
저 쇠 껍데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소리 파형이 아니었다. 20년 동안 덮여 있던 시계탑의 진실이었고, 부실이라는 오명 속에 침묵해야 했던 아버지의 시간이었다.
인문관 지하 통로로 내려서는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지하 복도 끝, 302호 포노그래프 방음실의 붉은색 출입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채은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손잡이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자물쇠가 돌아가는 차가운 쇠마찰음과 함께 방음실의 두꺼운 철제 문이 열리고, 차갑게 식어 있던 대형 음향 워크스테이션의 모니터 세 대가 파란 부팅 화면을 뿜어내며 일제히 깨어났다.
“외장하드 1번 슬롯에 물려.”
도경원이 젖은 겉옷을 의자 등받이에 내던지며 콘솔 앞 메인 시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굵은 손가락이 디지털 오디오 믹서의 페이더 열여섯 개를 한꺼번에 밀어 올렸다.
탁, 탁.
송태이가 메인 인터페이스 후면의 썬더볼트 포트에 은색 케이블을 꽂았다. 8채널 무압축 음원 폴더가 모니터 중앙에 마운트되자마자 파형 분석 소프트웨어가 파란색 파동 열을 쏟아냈다. 자정에 채집한 110데시벨의 파열음 데이터였다.
“8채널 로우 데이터 전부 로드됐어. 샘플링 레이트 192킬로헤르츠, 32비트 플로트.”
태이가 모니터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빠르게 덧붙였다.
“문제는 채널 4번이랑 6번이야. 시공사가 배기구를 석고보드로 틀어막아 버린 바람에 위상 상쇄가 터졌어. 기계실 안쪽 음압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벽면 사이에서 튕겨서, 130헤르츠 진폭이 모니터 안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지고 있어.”
채은은 모니터 화면으로 바짝 다가섰다. 태이의 말대로였다. 서쪽 벽면 슬릿 개구부에 밀착시켰던 마이크의 파형이 100헤르츠에서 150헤르츠 사이 구간에서 아래로 푹 꺼져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반사파와 직접음이 180도 어긋나 서로를 지워버리는 위상 캔슬레이션이었다.
“이 상태로 3차원 공간 렌더링 돌리면 심의위원들은 진동이 흡수된 게 아니라 그냥 마이크 불량이라고 몰아붙일 거야.”
경원이 턱을 굳힌 채 마우스 휠을 거칠게 굴렸다.
“그 사람들은 음향 수치를 볼 줄 몰라. 소리가 울리는 공간 궤적을 눈앞에 3차원으로 시각화해 던져주지 않으면, 벽체가 흔들림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 안 해.”
“내가 이퀄라이징으로 잡을게요.”
채은이 두 사람 사이로 손을 뻗어 외장 패치베이의 노브를 쥐었다. 그 순간 왼쪽 관자놀이 안쪽에서 묵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종루에서 온몸으로 받아냈던 110데시벨의 굉음이 여전히 고막 안쪽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잔류음으로 맴돌고 있었다. 채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채은아, 잠깐만.”
태이가 채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어 멈춰 세웠다. 태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붉은색 알루미늄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 실리콘으로 맞춤 성형된 차음 이어플러그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이거 끼고 해. 200헤르츠 이상 고음역만 25데시벨 깎아내는 필터 달아뒀어. 네 귀가 지금 상태로 모니터 스피커 날것 그대로 들으면 영구 손상 와.”
“귀가 아파도 상관없어. 130헤르츠 대역의 위상이 뒤집히는 순간을 잡아야 저 챔버가 살아 숨 쉬는 걸 증명할 수 있으니까.”
채은은 태이의 손에서 플러그를 낚아채 귓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귀를 가득 채우던 공조기 돌아가는 소음과 모니터 팬의 잡음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그러나 시계탑에서 얻어맞은 이명은 여전히 뇌수를 긁어내렸다.
“도경원 선배, 3차원 공간 잔향 축 렌더링 엔진 띄워요. 태이야, 넌 채널 4번이랑 6번에 32밴드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 걸어. 큐값을 8.5로 좁혀서 130헤르츠만 핀포인트로 올릴 테니까, 위상 반전 버튼 누를 준비 해.”
채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경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더 이상 채은을 만류하거나 떠보지 않았다. 즉각 키보드를 두드려 시계탑 내부의 3차원 와이어프레임 공간 모델을 띄웠다.
“잔향 시간 초기값은 2.8초. 슬릿 챔버 흡음 계수 반영해서 3차원 궤적 축 세팅 끝났다. 들어간다.”
스페이스 바가 눌리자 302호 방음실의 대형 모니터 스피커 네 대에서 자정의 종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웅.
필터를 통과한 묵직한 충격이 방음실 공기를 뒤흔들었다. 채은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시계탑 종루 서쪽 벽면의 28도 틈새가 그대로 그려졌다. 공기가 좁은 틈으로 빨려 들어가며 벽체 속 빈 공간을 맴도는 흐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지금이야. 채널 6번 위상 뒤집어!”
채은이 소리쳤다. 태이가 재빠르게 콘솔의 페이즈 리버스 스위치를 내리찍었다.
탁.
스피커에서 나던 탁한 웅웅거림이 사라지고, 모니터 중앙의 파형이 단숨에 위로 솟구쳤다. 찌그러졌던 130헤르츠 대역이 선명한 파란색 능선을 그리며 본래의 모양을 되찾았다.
“잡았다.”
태이가 탄성을 터뜨렸다.
경원의 손가락이 렌더링 소프트웨어의 파라미터를 미친 듯이 입력했다. 시계탑 3차원 와이어프레임 안에서 붉은색으로 번지던 위험 진동 파형이 28도 슬릿 챔버를 통과하는 순간, 깊고 서늘한 푸른색으로 물들며 정확히 18데시벨 감쇄되는 시뮬레이션 영상이 실시간으로 엮여 나왔다.
시공사가 불법으로 석고보드를 덧대어 막아버린 배기구 탓에 갇혀 있던 파동이, 백진우 교수가 설계한 헬름홀츠 공명기 속으로 흡수되어 지반의 흔들림을 억제하는 과정이 완벽한 시각 데이터로 구현된 것이다.
“18데시벨 감쇄 입증 시뮬레이션 추출 완료.”
경원이 렌더링 진행 바가 100퍼센트를 가리키는 것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때, 태이가 콘솔 구석에 펼쳐두었던 백진우의 미공개 연구 일지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종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지의 마지막 장, 손으로 직접 그린 연필 도면 하나가 접혀 있었다.
“이것 봐. 시계탑 도면이 아니야.”
태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채은과 경원의 시선이 일지 위로 쏠렸다.
바랜 양피지 스타일의 모눈종이 위에는 중앙도서관 시계탑부터 인문관, 그리고 본관 지하로 이어지는 캠퍼스 전체의 단면도가 그려져 있었다. 시계탑의 28도 슬릿 챔버 바닥은 막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 암반층을 따라 인문관 지하 수로망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공명 유도로가 굵은 잉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 도면 아래, 채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아버지의 단정한 필적이 적혀 있었다.
‘타종의 충격파는 단일 건축물이 감당할 수 없다. 28도 슬릿을 통해 흡수된 130헤르츠의 공명 에너지는 인문관 지하 수로의 수압 댐퍼로 분산되어, 캠퍼스 전체 지반의 고유 진동수를 중화한다. 이 탑은 하나의 건물이기 이전에 대지를 안정시키는 거대한 음향 조율기다.’
채은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버지는 단순히 시계탑 하나의 소음을 줄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20년 전 연화대학교 종합 개발 계획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음향 공간으로 설계했던 것이다. 재단이 부실시공을 덮기 위해 시계탑을 허무는 순간, 지하 수로망의 균형마저 무너져 캠퍼스 전체의 지반이 뒤틀릴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어.”
채은이 일지 모서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콘솔 상단의 디지털시계가 붉은 숫자를 뿜어냈다.
오전 7시 정각.
본관 대회의실에서 철거 직권 심의회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이었다.
“시간 없어. 데이터 팩 외장 SSD로 백업해.”
경원이 가방에서 두꺼운 러기드 외장 드라이브를 꺼내 연결했다. 3차원 음향 시뮬레이션 파일과 8채널 무압축 실측 데이터, 그리고 백진우 교수의 연구 일지 스캔본이 무서운 속도로 복사되었다.
태이가 케이블을 단숨에 뽑아내며 외장 드라이브를 채은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가운 금속 케이스의 감촉이 채은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가자, 백채은. 저들이 지우려 했던 20년의 진실을, 그 회의실 한가운데에 터뜨려 버리러.”
채은은 이어플러그를 귀에 단단히 고정하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지하 302호의 무거운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지상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늘한 아침 공기가 세 사람의 얼굴을 때렸다.
본관 3층 복도 끝, 대회의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 앞에는 이미 세 명의 보안 요원과 시설관리본부 직원 둘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문틈 사이로 마이크를 울리는 건조한 목소리가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
“안건 제4호, 중앙도서관 시계탑 정밀안전진단에 따른 구조적 결함 확정 및 직권 철거 승인의 건. 표결에 들어가겠습니다.”
손목시계는 오전 8시 53분을 가리켰다. 표결이 끝나면 행정 절차는 되돌릴 수 없었다.
“학생들,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야. 당장 내려가.”
시설과 직원이 손을 뻗어 채은의 어깨를 밀쳐내려 했다. 그 순간 송태이가 앞으로 튀어나가 직원의 팔을 옆으로 쳐내며 몸으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세요. 학내 중대 시설물 심의에 직접 당사자인 건축학과 학생과 실측 팀의 의견 진술권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학칙 제24조 확인해 드릴까요?”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보안 요원 두 명이 태이에게 달려들었다. 태이가 멱살을 잡힌 채 요원들을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고함을 질렀다.
“백채은, 지금 들어가!”
동시에 도경원이 품에서 꺼낸 휴대용 콘솔 단말기를 벽면 방재 패널 점검 단자에 꽂아 넣었다. 손가락이 키패드를 거칠게 두드리자 날카로운 신호음과 함께 대회의실의 전자식 도어록 램프가 녹색으로 점멸하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비인가 신호로 도어 릴레이 20초간 강제 개방했다. 들어가.”
경원의 낮은 지시와 함께 채은은 망설임 없이 육중한 문을 밀어젖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단숨에 입구로 쏠렸다. ㄷ자 형태로 길게 배치된 회의 탁자에는 시설위원들과 교수 열두 명이 앉아 있었고, 중앙 상석에는 은테 안경을 쓴 사내, 연화학원 재단 부이사장이 마이크를 쥔 채 서늘한 눈으로 채은을 내려다보았다. 20년 전 백진우 교수의 공명 차음 특허를 부실로 몰아 폐기하고 상업 재개발을 주도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떤 놈들이 보안을 뚫고 들어온 거야? 경비 불러서 당장 끌어내!”
단상 아래에 서 있던 행정팀장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등 뒤에서 보안 요원들이 따라붙으려 하자, 문턱을 넘어선 경원이 문손잡이 사이에 굵은 스틸 와이어를 걸어 바깥 난간과 단단히 결속해 버렸다.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도 쪽에서 메아리쳤다.
채은은 요원들의 고함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상 중앙의 메인 AV 랙으로 성큼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3.5파이 밸런스드 케이블을 앰프 메인 입력 단자에 망설임 없이 쑤셔 넣었다.
“외부인 난입입니다! 전원 내려!”
부이사장의 서슬 퍼런 명령에 직원이 배전반으로 달려갔지만, 채은이 외장 SSD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이 더 빨랐다.
공간을 찢는 듯한 육중한 저음이 대회의실 천장의 실링 스피커 여덟 개를 통해 일제히 폭발했다.
우웅- 쿵!
110데시벨의 자정 타종 원음이 벽체를 타고 회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탁자 위의 유리잔들이 요란하게 떨렸고, 서류 뭉치가 진동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원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끄지 못해?”
“귀를 막지 말고 똑바로 들으세요.”
채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저주파의 파동 사이로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이어플러그를 손으로 단단히 눌러 귀를 보호하며, 빔프로젝터 전환 스위치를 눌렀다.
전면 대형 스크린에 조금 전 302호에서 완성한 3차원 공간 음향 주파수 분석 그래프가 거대하게 투사되었다. 붉은색 파열음 파형 한가운데, 130헤르츠 저음역 구간이 깊은 협곡처럼 파여 내려가 있었다.
“지금 들으신 건 어젯밤 자정, 시계탑 기계실 상부 28도 슬릿 챔버에서 직접 수음한 8채널 무압축 실측 데이터입니다. 보시다시피 타종 순간 건물을 뒤흔드는 130헤르츠의 공진 주파수가 벽면 슬릿을 통과하는 순간 정확히 18데시벨 감쇄되었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공과대학 교수 두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스크린의 수치로 시선을 고정했다.
“말도 안 돼. 슬릿 챔버가 진동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마이너스 18데시벨이라고?”
“부실했던 건 아버지의 도면이 아니라, 당신들이 20년 동안 틀어막아 놓은 거짓말입니다.”
채은은 백진우의 연구 일지 마지막 장을 고해상도로 띄웠다. 시계탑 바닥에서 시작해 인문관 지하 수로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명 유도로 도면이었다.
“시공사는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챔버 바닥의 배기 댐퍼를 시멘트로 틀어막았고, 재단 감사팀은 이를 은폐한 채 백진우 교수에게 부실 설계의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 탑은 무너져가는 흉물이 아닙니다. 캠퍼스 전체 지반의 진동을 상쇄하기 위해 계산된 유기적 댐퍼입니다.”
회의실 안이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몇몇 위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부이사장의 얼굴을 살폈다.
상석에 선 부이사장의 미간에 깊은 경련이 일었다. 그는 천천히 마이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학생 신분으로 무단 침입해 검증되지 않은 조작 데이터를 들이미는군. 백진우의 딸이라고 했나?”
부이사장이 서류철을 덮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좋다. 실측치에 결함이 없다는 그 궤변, 전 학내 구성원 앞에서 직접 증명해 봐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은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정확히 일주일 뒤, 다음 주 수요일 오전 10시. 시계탑 현장에서 공개 기술 공청회를 열겠다. 재단 감사위원회와 공과대학 전 교수진, 학생회가 참관하는 공개 현장 실사다.”
부이사장이 단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 1데시벨이라도 공명 흡수 오차가 발생하거나 재현에 실패한다면, 그 즉시 포클레인을 밀어 넣고 시계탑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문밖에서 보안 요원들이 쇠사슬을 절단하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채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부이사장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회의실 전면 스크린에는 푸른색 18데시벨 감쇄 곡선이 선명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