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절단기가 쇠사슬을 끊어내는 쇳소리가 대회의실 문짝을 타고 뼈마디까지 울렸다.
덜컥하는 파열음과 함께 문이 양옆으로 사납게 젖혀졌다. 파란색 제복을 입은 본관 방재팀 보안 요원 넷이 들이닥쳤다.
“안에 있는 인원들 전원 제자리에 서요! 외장 저장 장치랑 노트북 전부 압수 대상입니다!”
체구가 가장 큰 요원이 곤봉을 거칠게 흔들며 단상으로 성큼 다가왔다. 뒤편에 서 있던 시설관리본부 직원이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저 여학생 손에 든 하드부터 뺏어! 감사위원회 지시다,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내보내지 마!”
채은은 메인 랙에 연결되어 있던 케이블을 망설임 없이 단번에 뜯어냈다. 8채널 데이터가 담긴 외장하드를 니트 카디건 안쪽 가슴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귀에 꽂힌 보라색 이어플러그 너머로 요원들의 거친 숨소리와 바닥을 짓이기는 가죽 구두 소리가 둔탁하게 짓눌려 들어왔다.
“채은아, 이리 와!”
태이가 채은의 앞을 막아서며 요원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키가 큰 태이가 버티고 서자 요원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태이는 뒤돌아 채은의 창백해진 뺨과 귓가를 살피며 성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고막이 버티질 못해. 아까 그 백십 데시벨 틀어놓고 귀가 얼마나 짓눌렸는데, 일주일 뒤에 현장 실사라니. 저 부이사장 노인네가 널 죽이려고 판을 깐 거라고!”
“손 떼, 송태이.”
경원이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경원은 접이식 콘솔에 꽂혀 있던 자신의 태블릿을 낚아채 가방에 쑤셔 넣더니, 벽면 비상 정지 버튼 덮개를 손바닥으로 내리쳐 부쉈다. 삐이익 하는 단속 경보음과 함께 방화 셔터 구동 모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지금 잡히면 하드 빼앗기고 끝이야. 계단실로 뛰어!”
강철 셔터가 덜컹거리며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다. 육중한 철판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동안 삐걱거리는 기계음이 귓바퀴를 매섭게 찔렀다.
“막아! 저쪽 비상구 차단해!”
보안 요원 둘이 셔터 아래로 몸을 던지듯 쇄도했다. 앞장선 요원이 손을 뻗어 채은의 외투 자락을 움켜쥐려던 찰나, 태이가 대회의실 구석에 세워져 있던 강철 프레임 입간판과 이동식 화이트보드를 한꺼번에 걷어찼다.
콰당탕!
무거운 알루미늄 판넬과 철제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엉켜 쓰러졌다. 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던 요원이 모서리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틈이 벌어진 셔터 밑단 사이로 짙은 회색 먼지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쪽이야, 채은아! 숙여!”
태이가 채은의 허리를 감싸 안듯 받치며 반쯤 내려앉은 셔터 틈을 먼저 빠져나왔다. 채은은 가슴에 댄 외장하드를 두 팔로 단단히 감싸 안은 채 허리를 숙여 복도로 미끄러져 나갔다. 이어플러그 속으로 자신의 가쁜 날숨이 진동판처럼 울려 퍼졌다. 귓속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이명이 쇳물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경원이 뒤따라 셔터를 넘어오자마자 비상 계단실 방화문의 도어클로저 나사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돌려 잠금 핀을 내리눌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맞물려 닫히며 뒤편에서 쫓아오던 요원들의 고함이 뭉툭하게 차단되었다.
“밑으로 내려가. 일층 중앙 로비는 방재실이랑 연결돼 있어. 서편 화물용 출구로 나간다.”
경원이 숨을 헐떡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앞장서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나선형 계단을 서너 층 단숨에 내려가는 동안 태이는 채은의 곁에서 한시도 손을 떼지 않았다. 태이의 손바닥이 채은의 굳은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계단참을 돌 때마다 태이의 가쁜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채은아, 귀는 어때. 어지럽지 않아? 아까 그 백십 데시벨 저주파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한 청신경이 다 긁혔을 텐데, 일주일 뒤에 그걸 다시 재현하겠다고 받으면 어떡해.”
“태이야, 난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색이 하얗게 질렸잖아. 저 부이사장 속셈 몰라? 이 자리에 교수들이랑 학생들까지 다 불러 모아놓고, 네 손으로 탑이 엉터리라는 걸 인정하게 만들려는 덫이야. 도경원, 너도 알고 있었지?”
태이가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가던 경원의 등을 향해 쏘아붙였다. 경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을 두 칸씩 밟아 내려가며 짧게 내뱉었다.
“알았으면 거절이라도 했어야 했나? 심의회는 이미 시계탑 철거 표결 직전이었어. 저 자리에서 저 제안을 받지 않았으면, 지금쯤 시계탑 앞마당에 굴착기부터 들어갔을 거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일주일 만에 완벽한 위상 상쇄를 전 학내 구성원 앞에서 증명하라고? 실패하면 백 교수님만 두 번 죽이는 꼴이야!”
“그래서 증명할 거다. 실패는 상정하지 않아.”
경원이 굳게 닫힌 서편 화물 출구의 빗장을 옆으로 젖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불어온 서늘한 늦가을 바람이 복도로 밀려들었다.
세 사람은 화물 출구를 빠져나와 본관 뒤편의 조경수 숲길로 발을 디뎠다. 본관 앞마당 쪽에서 요란한 호각 소리와 무전기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학생처 직원들과 추가로 출동한 경비 인력이 정문 쪽을 차단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본관 건물을 끼고 중앙 광장 쪽을 돌아섰을 때, 채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중앙도서관 시계탑 정면,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대형 전광판에 붉은색 긴급 팝업 자막이 거대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학내 긴급 공지. 중앙도서관 시계탑 정밀 기술 검증을 위한 공개 기술 공청회 개최.
일시: 차주 수요일 오전 10시.
장소: 중앙도서관 시계탑 앞 광장 및 종루 기계실.
경원이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학내 포털 사이트 행정 공고를 열었다.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하던 경원의 손가락이 특정 문단에서 멈칫했다. 경원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부이사장이 벌써 결재를 올렸어.”
태이가 경원의 옆으로 다가서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경악에 찬 목소리로 글자를 읊었다.
“공청회 현장 실측 검증 기준…… 허용 오차 범위 영점 오 데시벨 이내? 미달 시 당일 즉시 철거 용역 투입 및 상업 시설 착공 승인?”
태이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영점 오 데시벨? 도경원, 네가 음향 전공이니까 잘 알 거 아니야. 밀폐된 무향실도 아니고 사방이 뚫린 야외 광장에서 영점 오 데시벨 오차를 맞추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해? 현장에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날아가는 수치야! 이건 그냥 대놓고 철거하겠다는 통보잖아. 게다가 용역 투입까지 이미 사전에 결재를 끝내놨다고?”
태이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떨렸다. 태이는 채은의 앞을 막아서며 전광판 쪽을 등지게 했다.
“채은아, 듣지 마. 이건 네가 질 수밖에 없게 짜인 판이야. 네 아버지 명예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도 돼. 내가 아카이브든 교육부든 탄원서 넣고 어떻게든 길을 찾을 테니까, 저 공청회 취소하자. 네 귀 완전히 망가져.”
전광판의 붉은빛이 채은의 맑은 눈동자에 맺혔다.
귀마개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캠퍼스의 바람 소리, 학생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저 멀리서 본관 경비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거친 입자로 분해되어 고막을 두드렸다. 머릿속이 징징 울리고 관자놀이가 쑤셔왔지만, 가슴팍에 품은 외장하드의 차갑고 단단한 감각만은 그 어떤 소음보다 선명하게 손끝에 닿았다.
채은은 카디건 안쪽의 하드를 한 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태이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망칠 자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일주일 뒤에 그 사람들 눈앞에서 탑의 소리를 똑바로 들려줄 거야.”
채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태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고, 묵묵히 서 있던 경원이 시선을 내려 채은을 바라보았다.
“영점 오 데시벨이면 종루의 이십팔도 슬릿 챔버만으로는 절대 못 잡아. 바람이랑 지반 진동까지 다 계산에 넣어야 해.”
경원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낮게 읊조렸다.
“방법을 찾으려면 당장 움직여야 한다. 동아리방으로 가자.”
채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숲길 안쪽, 인문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시계탑의 둔중한 그림자가 세 사람의 등 뒤로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인문관 지하 302호 방음실의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사방을 메운 검은색 쐐기형 방음 스펀지가 바깥의 소음을 한 번에 삼켜 버렸다. 바깥 캠퍼스를 떠돌던 바람 소리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세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만 남았다.
도경원은 문을 잠그자마자 작업대로 걸어가 중앙 앰프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랙 케이스에 장착된 모니터 스피커 네 조의 전원 램프에 일제히 붉은 불이 켜졌다.
“바로 세팅해. 지체할 시간 없어.”
경원이 콘솔 테이블 위에 낡은 캠퍼스 공명 유도로 도면을 펼치며 말했다. 도면 모서리에 놓인 스피커 케이블을 거칠게 정리하는 손길에는 여유가 없었다.
송태이가 경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너 제정신이야? 채은이 방금 본관에서 빠져나왔어. 자정 타종 때 백십 데시벨을 맨귀로 뒤집어쓴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또 스피커를 켜? 귀 안쪽 청신경이 부어 있는 상태에서 저음역을 또 때려 박으면 영구 손상 와!”
“영점 오 데시벨이야.”
경원은 태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브우퍼의 볼륨 놉을 만지작거렸다.
“부이사장이 내건 기준 들었잖아. 백삼십 헤르츠 대역에서 십팔 데시벨 감쇄를 정확히 맞춰야 해. 슬릿 챔버 각도에서 단 일 도만 틀어져도 오차가 일 데시벨을 훌쩍 넘겨. 그 자리에서 실패 판정 뜨면 시계탑은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철거야.”
“그렇다고 애 귀를 갈아 넣어서 맞추자고? 넌 처음부터 채은이 귀를 네 복수용 계측기로 쓸 생각이었잖아!”
태이의 목소리가 방음벽에 부딪혀 먹먹하게 울렸다.
두 사람의 날 선 언쟁 사이로 얇은 이명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삐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머릿속을 찔렀다.
채은은 가방에서 실리콘 케이스를 꺼냈다. 손가락 끝이 뻐근하게 저려왔지만 뚜껑을 열고 태이가 만들어 준 하늘색 커스텀 차음 플러그를 꺼냈다. 귓바퀴를 살짝 잡아당겨 실리콘 팁을 외이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둔탁한 압력과 함께 태이와 경원의 고함 소리가 둔중한 중저음으로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긁어대던 고주파 노이즈가 한풀 꺾였다.
채은이 작업대 중앙으로 걸어가 붐 암에 고정된 측정용 지향성 마이크를 잡았다.
“싸우지 마. 할 거야.”
채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태이가 놀란 얼굴로 채은을 돌아보았다.
“채은아.”
“도망치면 아버지 도면은 영원히 부실 설계로 남아. 공청회에서 부이사장이 무슨 말을 지어내든, 내 귀로 그 수치를 직접 짚어내면 돼. 선배, 핑크 노이즈 말고 백삼십 헤르츠 사인파로 쏴 줘요.”
경원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경원은 태이를 밀쳐내듯 지나쳐 콘솔 페이더를 잡았다.
“백삼십 헤르츠, 초기 출력 구십오 데시벨부터 시작한다. 방음실 좌우 벽면 반사각 고려해서 위상 반전 지점 찾아. 네가 챔버 슬릿 각도를 몸으로 기억해야 현장에서 마이크 스탠드를 고정할 수 있어.”
“도경원!”
태이가 콘솔의 메인 전원 레버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경원이 먼저 마스터 페이더를 힘껏 밀어 올렸다.
우웅.
낮고 묵직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발목부터 타고 올라왔다. 백삼십 헤르츠의 저주파였다. 공기가 떨리는 소리가 아니라, 밀폐된 방음실의 벽체와 골조가 통째로 쥐어짜이는 듯한 압력이었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온 압축 공기가 고막을 무겁게 짓눌렀다.
채은은 마이크 붐대의 각도 조절 나사를 풀었다.
시계탑 종루에서 아버지가 남겨둔 공명 챔버의 슬릿 각도는 도면상 삼십오 도였다. 하지만 자정에 채집한 실측 데이터에서는 십팔 데시벨 감쇄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위상이 어긋나면서 특정 대역이 뭉개졌던 탓이다.
채은은 마이크 헤드를 삼십오 도로 틀었다.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음역 파동이 마이크 캡슐을 때렸다. 모니터 화면의 주파수 분석기에 붉은색 피크가 치솟았다. 마이너스 구 데시벨. 감쇄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머릿속에서 다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안 잡혀. 각도가 안 맞아.”
채은이 마이크 스탠드를 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태이가 다가와 채은의 어깨를 감싸 쥐며 볼륨 페이더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해! 채은이 식은땀 흘리잖아! 안 들려? 애 안색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고!”
“귀로 들으려 하지 마.”
경원이 볼륨 노브를 조금 더 돌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스피커의 떨림이 한층 더 둔탁해졌다. 백 데시벨에 육박하는 진동이 방음실 천장의 형광등 커버를 잘게 흔들었다.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파동의 축을 느껴. 그 댐퍼가 열리는 순간 저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니까.”
경원의 말이 채은의 귓전을 때렸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간다.
채은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도면 속 시계탑의 기계실은 단독 구조물이 아니었다. 종루 캣워크 바닥에서 시작된 음향 유도로는 인문관 지하를 거쳐 캠퍼스 저지대의 수로망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일지 속 메모가 스쳐 지나갔다.
‘상부 개구부만으로는 저주파의 파장을 온전히 가둘 수 없다. 진동의 종착지는 지하다.’
“삼십오 도가 아니야.”
채은이 붐 암을 붙잡고 반사각을 비틀었다. 삼십도, 그리고 조금 더 아래쪽으로. 마이크 헤드가 바닥면을 향해 기울어졌다.
이십팔 도.
그 순간, 귀를 짓누르던 묵직한 공기 압력이 거짓말처럼 푹 꺼졌다.
스피커 네 조에서는 여전히 굉음 같은 저주파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마이크가 놓인 반경 삼십 센티미터의 공간 안에서 파동이 서로를 지우며 완벽한 정적이 형성되었다. 위상 널 포인트였다.
모니터 화면 속 주파수 스펙트럼의 붉은 막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이너스 십팔 점 이 데시벨.
오차 범위 영점 이 데시벨 이내의 완벽한 상쇄였다.
태이의 손이 채은의 어깨 위에서 멈췄다. 태이는 모니터에 찍힌 수치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잡았어.”
채은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마이크 나사를 단단히 조였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태이가 급히 채은의 팔을 붙들어 지탱해 주었다.
“채은아, 괜찮아?”
“잡았어, 태이야. 이십팔 도야. 상부 챔버 각도를 이십팔 도로 맞추면 파동이 수직으로 꺾여.”
채은이 창백해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경원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경원은 모니터의 감쇄 곡선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책상 위에 펼쳐진 캠퍼스 수로망 도면의 한 지점을 볼펜 끝으로 세게 찍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경원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건 인문관 지하 수로망의 유도로가 완전히 열려 있다는 가정하에 시뮬레이션을 돌린 값이야. 상부 슬릿 챔버를 이십팔 도로 꺾어봤자, 지하로 내려간 파동을 흡수해 줄 물리적 댐퍼가 닫혀 있으면 저음은 다시 위로 역류해. 그러면 현장 감쇄량은 십 데시벨도 안 나와.”
태이가 인상을 쓰며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물리적 댐퍼? 그게 뭔데?”
“이십 년 전에 시공사가 배기구를 덮으면서 시멘트로 틀어막아 놓은 수로 밸브. 그 수동 개폐 댐퍼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열려야만 전체 공명 회로가 완성된다고. 옥상에서 채은이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누군가는 지하 수로 밑바닥에서 그 굳어버린 쇠창살을 직접 열어야 해.”
태이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너…… 그 댐퍼 열려고 일부러 전산망 해킹해서 수로 도면 빼낸 거지? 채은이 아버지 명예니 뭐니 떠들면서, 실제로는 재단이 은폐해 둔 그 수로망에 직접 들어가려고 채은이를 끌어들인 거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댐퍼를 안 열면 공청회는 시작도 전에 끝나!”
경원이 책상을 치며 맞받아치는 바로 그 찰나였다.
삐비빅, 삐비빅.
경원의 노트북에서 날카로운 기계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화면 우측 하단에 붉은색 경고 창이 잇달아 팝업되었다.
연화학원 방재센터 관리자망 침입 감지.
접속 IP 추적 완료: 인문관 지하 삼백이호.
보안 통제실 현장 확인 요원 출동.
붉은 점멸등 같은 경고 문자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경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재단 감사위원회의 감시망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아리방 앞까지 좁혀져 오고 있었다.
경원은 망설이지 않고 노트북 전원선을 뽑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경원 선배, 방재실 요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잖아요!”
태이가 채은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지만, 경원은 이미 동아리방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간 뒤였다. 손에는 육중한 공구 가방과 랜턴이 들려 있었다.
채은은 목에 걸린 이어플러그 줄을 움켜쥐었다.
“쫓아가야 해, 태이야. 저 사람이 혼자 수로 댐퍼를 건드리면 뭐가 어떻게 잘못될지 몰라.”
“채은아!”
태이의 만류에도 채은은 발을 뗐다. 세 사람은 인문관 복도 끝 비상계단을 타고 지하 최하층으로 내달렸다. 낡은 배수관 사이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축축한 냉기가 훅 끼쳤다.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지하 3층 보일러실 뒤편, 녹슨 철제 점검구를 열자 컴컴한 침전조 연결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경원의 랜턴 불빛이 어둠을 길게 쪼개며 바닥을 비췄다. 콘크리트 바닥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발을 디딜 때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통로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수직 차단 철문이 세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철문 표면에는 두꺼운 체인과 자물쇠가 감겨 있었고, 틈새마다 굳어버린 시멘트 찌꺼기가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다. 20년 전 시공사가 소음 배기구를 폐쇄하며 억지로 발라버린 흔적이었다.
경원이 가방에서 쇠지렛대를 꺼내 틈새에 쑤셔 넣었다.
끼이익, 쩌적.
녹슨 쇳가루와 굳은 시멘트 파편이 바닥으로 튀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젖히는 경원의 팔뚝에 핏줄이 굵게 솟구쳤다.
“비켜 봐.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잖아.”
태이가 경원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내고 지렛대 손잡이를 함께 움켜잡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반동을 주며 체중을 싣자,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굳어 있던 철문 빗장이 비틀리며 틈이 벌어졌다.
채은이 손전등을 들어 문틈 너머를 비췄다.
안쪽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머리 위로는 캠퍼스 지하를 관통하는 육중한 강관들이 얽혀 있었고, 중앙 벽면에는 성인 키만 한 원형 유압 댐퍼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댐퍼 상부의 황동 명판에는 희미해진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연화대학교 음향 간섭 제어 유도로 1차 감쇄 댐퍼. 설계자 백진우.
아버지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 옆에는 두꺼운 아크릴 커버로 밀봉된 아날로그 수압 계측기와 주파수 감응 게이지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거야…….”
채은의 목소리가 젖은 벽면을 타고 번졌다.
“아버지는 시계탑에서 발생한 130헤르츠의 공진을 이 유도로를 통해 캠퍼스 지하 수맥으로 분산시키려고 했어. 댐퍼가 열리기만 하면 18데시벨 감쇄는 허상이 아니야. 진짜로 구현할 수 있어.”
채은이 손을 뻗어 유압 밸브 레버를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경원이 갑자기 댐퍼가 아닌 그 아래쪽에 설치된 사각 단자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경원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단자함 도어락에 밀어 넣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재단 감사위원회 로고가 박힌 마그네틱 보안 키였다.
달칵.
단자함 커버가 열리자 그 안에서 방수 팩에 밀봉된 두꺼운 외장 저장장치가 드러났다.
태이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듯 경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너, 이거였어?”
태이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시계탑을 살리네, 도면을 증명하네 떠벌리던 게 전부 이 짓을 하려고 채은이를 끌어들인 거였냐고! 재단 감사위원회 보안 키를 네가 왜 갖고 있어? 저 안에 든 게 뭔데!”
경원이 손목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태이는 물러서지 않고 경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콘크리트 벽에 경원의 등이 거세게 부딪히며 먼지가 쏟아졌다.
“말해, 도경원! 채은이 앞세워서 심의회 흔들어놓고, 뒤로는 재단 비밀 금고 털듯 네 복수나 하려고 했던 거지?”
경원은 입술을 짓씹으며 태이의 손을 쳐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맞다. 저 안에는 20년 전 부이사장이 백진우 교수의 음향 간섭 특허를 강제로 무효화하고 시공사 뒷돈을 챙긴 감사 조작 원본 하드가 들어 있어. 내가 대학 전산망을 헤집고 다닌 것도 이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서였고.”
“도경원, 너 진짜 미쳤구나!”
“미친 건 재단 놈들이야!”
경원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댐퍼의 육중한 강철 밸브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 댐퍼를 열지 않으면 공청회고 뭐고 다 끝장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저 원본 데이터가 없으면 우리가 현장에서 18데시벨을 증명해 봤자, 부이사장은 또다시 규정 위반이니 결함이니 하면서 시계탑을 부숴버릴 거다. 그 인간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면 기술적 증명과 이 비리 문건이 동시에 터져야 해!”
채은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단자함 속의 저장장치와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댐퍼 명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경원의 복수심도, 태이의 분노도 지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때였다.
치이익.
머리 위 천장에 매달린 원형 감시 센서에서 붉은색 표시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동작 감지가 아니었다. 감사위원회의 원격 보안망과 직결된 무선 통신 모듈이 가동되는 비프음이 귓전을 날카롭게 찔렀다.
“센서가 작동했어.”
채은이 단호하게 두 사람의 말을 잘랐다.
“이미 방재실에서 이 구역의 문이 열린 걸 알고 있어. 지금 멱살 잡고 싸울 시간 따위 없어.”
경원이 붉은 등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젠장, 원격 락이 걸렸어. 공청회 당일 전까지는 전산망으로 이 문을 원격 개방할 방법이 완전히 차단됐다는 뜻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태이가 묻자 경원이 채은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공청회가 열리는 수요일 오전 10시, 타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 이 수로 바닥으로 다시 내려와서 수동 레버를 온몸으로 당겨 열어야 해.”
경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채은이 너는, 그 시각 시계탑 종루 꼭대기에서 마이크 각도를 이십팔 도로 유지하고 서 있어야 해. 수로 밸브가 열리는 순간과 종루에서 공명이 발생하는 시점의 오차가 단 1초라도 벌어지면 저음은 상쇄되지 않아. 오히려 밀려든 음압이 챔버 안에서 폭주해서 120데시벨의 파열음으로 변해 네 고막을 찢어놓을 거다.”
수로의 댐퍼와 종루의 마이크.
양쪽 모두 물러설 곳 없는 극단적인 위험이었다. 수로에서는 재단의 경비망과 맞닥뜨려야 하고, 종루에서는 폭주하는 음압의 공포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태이가 채은의 앞을 막아서며 경원을 노려보았다.
“절대 안 돼. 그건 채은이 귀를 도박판에 올리는 짓이야. 1초만 늦어도 고막이 나간다는데 그걸 어떻게 시켜!”
“태이야.”
채은이 조용히 태이의 옷소매를 쥐었다.
채은은 태이를 지나쳐 녹슨 수로 밸브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어 차갑고 거친 강철 레버를 감싸 쥐었다. 금속의 서늘한 냉기가 손바닥을 통해 뼈마디까지 전해졌다.
“나는 도망치지 않아.”
채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두 사람을 향했다.
“아버지는 이 거대한 캠퍼스 전체를 하나의 악기처럼 조율하려고 이 댐퍼를 만들었어. 그게 결함이 아니었다는 걸, 아버지가 옳았다는 걸 내 귀와 손으로 직접 증명할 거야.”
벽면의 적색 센서 등이 더 빠른 주기로 번뜩이며 침전조 통로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채은은 레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단단하게 말을 맺었다.
“수요일 오전 10시. 내가 종루에 서 있을 테니까, 선배는 여기서 1초의 오차도 없이 이 밸브를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