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만 닿는 주파수 · 총 10화 · AI 작가 한여름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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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잔향의 시간표

시계탑 앞 잔디밭으로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가차 없이 둘러쳐졌다.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테이프를 쥔 방재팀 직원 서넛이 기단부 석조 계단마다 철제 펜스를 박아 넣었다. 본관 쪽 도로에서 굉음을 울리며 진입한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 지붕 위로 고성능 지향성 폐쇄회로 카메라 두 대가 솟구쳤다. 렌즈는 정확히 종루의 아치형 개구부를 겨누고 회전했다.

“돌아가자. 여기서 오래 서성거리면 경비실 무전부터 돈다.”

도경원이 윈드브레이커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낮게 읊조렸다.

송태이는 턱걸이하듯 턱을 굳힌 채 시계탑 외벽을 훑었다. 본관 방재실 소속 보안 요원 둘이 입구를 철봉으로 가로막고 무전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캠퍼스 출입 인가증이 번쩍이고 있었다.

백채은은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음 플러그의 표면이 차가웠다. 왼쪽 귓바퀴 안쪽에서 희미하게 박동치던 통증이 차가운 바람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지만, 방금 118데시벨 훈련을 치른 감각은 여전히 고막 뒤편에 둔탁한 진동으로 남아 있었다.

“저기 봐. 기단부만 막은 게 아니야.”

태이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시계탑 상부를 가리켰다.

“종루 테라스 네 귀퉁이에 은색 삼각대가 서 있어. 저거 소음진동 계측기잖아. 일반 소음계가 아니라 지향성 마이크로폰 네 대를 어레이로 묶어 놨어.”

경원이 걸음을 재촉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부이사장이 방재팀에 직접 지침을 내렸다더군. 공청회 당일 종루 주변 네 지점에서 실시간 음압을 측정해서 오차 범위가 0.5데시벨이라도 넘으면 그 자리에서 계측 중단 판정을 내리고 대기 중인 크레인으로 비계 파이프부터 때려 부수라고.”

“0.5데시벨?”

태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야외 광장에서 바람만 불어도 0.3데시벨은 튀어. 그 오차 범위를 맞추라는 건 그냥 대놓고 밀어버리겠다는 협박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떠들지 말고 움직여.”

경원이 인문관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덤불 샛길로 몸을 틀었다.

채은은 말없이 경원의 뒤를 쫓았다. 뒤를 돌아보자, 시계탑 기단부에서 확성기를 든 방재팀 반장이 크레인 기사를 향해 손짓하는 그림자가 새벽빛 속에서 흐릿하게 번져갔다.

세 사람은 인문관 북측 비상구를 통해 지하 3층 복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습한 콘크리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302호 방음실 철문 앞에 다다르자 경원이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돌렸다. 덜컥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두꺼운 방음문이 열리고, 내벽을 뒤덮은 계란판 스펀지가 복도의 한기를 단숨에 차단했다.

방음실 안쪽 작업대 위에는 지난밤 채집한 8채널 데이터가 담긴 외장하드와 위상 정렬 프로그램이 켜진 노트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130헤르츠 대역에서 마이너스 18.2데시벨로 꺾여 들어간 급격한 브이 자 감쇄 곡선이 푸른 선으로 떠 있었다.

태이가 구급함에서 소독용 탈지면을 꺼내 채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봐. 귓바퀴에 피 굳었잖아.”

“괜찮아, 태이야. 고막 다친 거 아니야.”

채은이 고개를 젖히며 피하려 했지만, 태이는 물러서지 않고 채은의 턱을 살짝 돌려세웠다. 알코올 솜이 귓바퀴 안쪽 연골을 스치자 서늘한 감각과 함께 알싸한 통증이 번졌다. 흰 탈지면 모서리에 연한 핏방울 자국이 묻어났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0.6밀리미터 필터 끼고도 피가 비쳤는데, 공청회 때 밸브 터지면 120데시벨이 통째로 쏟아진다고. 귓속 달팽이관 털세포는 한 번 꺾이면 다시 안 자라.”

태이의 시선이 작업대 건너편에서 케이블을 정리하던 경원을 향해 곤두섰다.

“도경원. 시간표 다시 꺼내 봐.”

경원이 랙 선반에서 접혀 있던 출력용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수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 10분까지, 30초 단위로 쪼개진 타임테이블이 적혀 있었다.

“장비 매립은 화요일 밤 11시 30분에 시작한다. 방재팀 순찰 조가 본관 식당으로 야식을 먹으러 이동하는 틈이 25분간 생겨. 그사이에 시계탑 외벽 보수용 점검 사다리를 타고 종루로 올라가서 8채널 무선 송출 라인을 브래킷과 함께 난간에 용접하듯 물린다.”

경원이 볼펜 끝으로 9시 58분을 가리켰다.

“수요일 당일 오전 9시 50분, 참관인들이 광장에 착석하면 채은이가 학내 기술 검증 자격으로 종루에 오른다. 9시 59분 30초에 내가 인문관 지하 침전조 수로로 들어가 1차 감쇄 댐퍼 수동 레버를 연다. 그리고 10시 정각, 종이 울리는 순간 130헤르츠 역위상 신호가 시계탑 슬릿을 타고 터져 나와 배관 압력을 밖으로 밀어낸다. 동시에 재단 관제실 방화벽이 과부하로 열리는 3분 동안 언론사에 하드 사본을 전송한다. 끝이야.”

태이가 경원의 손에서 종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시선이 표의 맨 밑바닥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끝? 뭐가 끝인데?”

태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종이를 쥔 손가락 끝이 파들거렸다.

“9시 59분 30초에 네가 수동 레버를 젖히면 배관 내부 유압이 140퍼센트로 치솟는다고 했지. 시공사가 시멘트로 발라놓은 통로를 깨고 들어가는 건데, 그 좁은 지하 통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잔류 공기와 고압 음압은 어디로 빠져나가는데?”

경원은 대답하지 않고 멀티탭의 전원 스위치를 껐다. 방음실 안의 형광등 불빛 아래로 차가운 정적이 고였다.

“여기 탈출 경로가 없잖아.”

태이가 출력용지를 작업대 상판에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레버를 열고 댐퍼를 고정하는 데 최소 1분 30초가 걸려. 타종이 끝나는 10시 2분까지 넌 지하 침전조 밸브실 안에 갇혀 있는 구조야. 배기구 환풍기는 감사위원회가 어제 전원을 끊어버렸는데, 그 고압 가스와 파열음을 어디서 빼낸다는 소리야? 너 거기서 어떻게 나올 건데?”

채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로 옮겨갔다. 태이의 지적이 가리키는 지점이 명확했다. 도경원이 작성한 타임테이블에는 종루에 선 채은의 수음 각도와 무선 데이터 송출 시점만 초 단위로 기록되어 있을 뿐, 지하 밸브실에서 레버를 당긴 뒤 경원 자신이 어느 문으로 빠져나오는지에 대한 동선이 완전히 공백으로 비어 있었다.

“도경원 선배.”

채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원이 케이블 타이를 집어넣던 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건조했다.

“그 자리에 환기구가 남아 있을 리 없다는 거, 알고 있었죠?”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경원의 음성은 메말라 있었다.

“내 귀는 네 귀처럼 예민하지 않아. 귀마개 두 겹으로 막고 레버를 고정 볼트로 묶어두면 3분은 버텨. 그 3분 동안 관제망이 열려야 하드가 나간다고 몇 번을 말해.”

“거짓말하지 마!”

태이가 작업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철제 선반에 올려진 마이크 스탠드가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140퍼센트 과부하 배관 바로 옆이야! 고막만 터지는 게 아니라 흉강 압박으로 호흡이 멎는다고! 채은이 귀 지켜주겠다고 온갖 계산 다 해놓고, 정작 자기는 거기서 시체로 실려 나오겠다는 거야 뭐야? 그러면서 복수니 뭐니 떠든 거야?”

“태이야, 그만해.”

채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이의 팔을 잡았다. 태이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턱을 굳히고 있었지만, 채은의 손길에 더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채은은 작업대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두 사람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화면에는 지난밤 시뮬레이션한 시계탑 3차원 음향 간섭 모델링이 회전하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진동 파동이 지하 수로에서 시작되어 시계탑 기둥을 타고 올라가 종루 슬릿 개구부에서 파란색 상쇄 곡선과 맞부딪쳤다.

“지금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저 현수막을 찢는 게 아니라, 1초의 오차도 없이 130헤르츠 위상을 뒤집는 거예요.”

채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방음실 벽면에 단단하게 박혔다.

“선배가 지하에서 버티지 못하고 레버를 놓치면 배관의 역류 압력은 지하에서 끝나지 않아요. 그 압력이 그대로 기둥을 타고 종루 캣워크로 치솟아 올라와요. 그럼 종루에 있는 내 귀도 끝장이고, 아버지가 남긴 공명 설계도 그 자리에서 부실 시공으로 매장돼요.”

채은이 경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구 하나 희생해서 때우는 작전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아요. 선배가 살아서 그 레버를 락 장치로 잠그고 나와야, 10시 정각에 종루 슬릿으로 빠져나가는 음압이 18.2데시벨 감쇄 지점에 정확히 걸려요. 그러니까 탈출 시간표, 다시 짜요.”

경원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언제나 차갑고 빈틈없던 그의 시선이 채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앞에서 아주 잠깐 방향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이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화요일 자정 장비 매립, 나도 올라가.”

태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경원 혼자 종루 사다리 타게 안 둬. 지향성 마이크로폰 네 대가 종루 테라스에 깔려 있으면, 그 측정기 수음 축을 피해 케이블을 빼는 통로를 찾아야 해. 내가 음대 관악기 녹음할 때 쓰는 차폐 폼 가져올 테니까, 그걸로 28.5도 브래킷 주변을 감싸서 재단 쪽 소음계에 신호가 먼저 잡히는 걸 막아야 해.”

경원이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숨을 고른 그가 주머니에서 은색 유에스비를 꺼내 노트북 단자에 꽂았다.

“시뮬레이션 돌려.”

경원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120데시벨 피크 음압에서 28.5도 각도로 틀었을 때, 널 포인트가 형성되는 시간이 정확히 몇 초인지 지금 여기서 몸으로 확인해야 한다. 단 0.1초라도 늦으면 네 귀가 먼저 나가.”

채은은 주머니에서 다시 0.6밀리미터 차음 필터를 꺼내 귀에 밀어 넣었다. 차가운 실리콘이 외이도를 막아서며 방음실의 공기가 일순간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작업대 위의 거대한 모니터 스피커 네 조가 낮은 웅성거림과 함께 예열을 시작했다. 지상 광장의 크레인이 쇠사슬을 부딪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지하 302호의 계기판 바늘은 이미 120데시벨의 폭풍을 향해 가파르게 치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경원이 콘솔 테이블 우측의 마스터 페이더를 거칠게 밀어 올렸다.

네 조의 대형 서브우퍼가 일제히 포효하며 바닥 콘크리트를 뒤흔들었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온 130헤르츠의 저주파 압력이 방음실 공기를 단숨에 짓눌렀다. 실제 시계탑 타종과 지하 수로의 역류 압력을 합산한 118데시벨의 모의 음압이었다.

채은은 마이크 스탠드의 콜렛 조인트 링을 틀어쥐었다. 귀 안쪽에 밀어 넣은 0.6밀리미터 차음 필터 너머로 왼쪽 귓속 신경이 찢어지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시야 한구석이 찌르르 흔들리며 날카로운 이명이 파고들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 화면의 위상 측정 곡선이 붉은 경고등과 함께 요동쳤다.

마이너스 11.2데시벨.

원래 노렸던 28도 축에서는 설계 도면의 상쇄 폭이 나오지 않았다. 배관 과부하로 인해 역류하는 저음의 잔향이 개구부 틈새로 치고 들어오면서 음향 간섭 체계가 무너진 탓이었다. 불과 0.5도의 오차였지만 130헤르츠 주파수는 얌전하게 꺾이지 않고 허공에서 서로를 밀어내며 폭주했다.

“각도 벗어났다. 1.8초 지났다!”

경원이 랙 케이스의 볼륨 노브를 쥔 채 소리쳤다. 스피커 유닛이 진동판을 격렬하게 떨며 120데시벨 피크로 치달았다. 방음 스펀지로 둘러싸인 벽체마저 미세하게 떨릴 만큼 가혹한 압력이었다.

채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마이크 스탠드를 쥔 손목에 힘을 주려 했지만 고막을 때리는 둔탁한 진동에 평형감각이 흐트러졌다. 왼쪽 귓바퀴 아래로 묽은 체온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번졌다. 조금 전 닦아냈던 귓속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콘솔 왼쪽에 붙어 선 태이가 건반 컨트롤러의 피치 벤더를 꺾었다.

맑고 날카로운 배음 하나가 채은의 인이어 모니터 한쪽으로 곧게 꽂혔다. 태이가 즉석에서 조작해 쏘아 보낸 배음 조율 알고리즘의 기준음이었다.

“누나, 내 소리 들어! 건반 기준음에 수음 축 맞춰. 28.5도로 0.5도만 더 바깥쪽으로 비틀어!”

태이의 목소리가 모니터 리시버를 통해 거친 노이즈를 뚫고 전해졌다.

채은은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스피커를 보지 않았다. 오직 태이가 밀어 넣어 준 날 선 배음의 윤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손목의 각도기를 감각으로 읽어내며 마이크 헤드를 바깥쪽으로 0.5도 틀었다.

찰칵. 브래킷의 고정 톱니가 28.5도 홈에 정확히 물렸다.

2.9초.

모니터 화면의 붉은 그래프가 수직으로 꺾였다.

130헤르츠 파형의 골과 마루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서로를 집어삼켰다. 스피커가 토해내는 막대한 음압의 중심부에 거짓말 같은 무음의 구멍이 뚫렸다.

마이너스 18.4데시벨.

완벽한 위상 널 포인트였다.

경원이 페이더를 단숨에 바닥으로 내렸다.

천둥 같던 저음이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방음실 안에는 오직 세 사람의 가쁜 숨소리와 장비 팬이 돌아가는 메마른 소음만 남았다.

채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마이크 스탠드를 짚은 채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짙은 회색 카펫 위로 땀방울 두 개가 툭 떨어졌다.

“누나!”

태이가 작업대를 돌아 단숨에 채은의 곁으로 달려왔다. 태이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채은의 왼쪽 귀를 살폈다. 주머니에서 새 거즈를 꺼낸 태이의 손길은 빠르고 조심스러웠다.

“필터 빼지 마. 지금 귀 열리면 바깥 공기 압력 때문에 고막 더 다쳐. 그대로 있어.”

태이가 채은의 귓바퀴에 번진 핏방울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채은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잡았어. 28.5도…… 3초 안쪽으로 널 포인트 들어왔어.”

“알아, 내가 봤어. 마이너스 18.4 찍혔어. 됐으니까 말하지 마.”

태이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경원은 콘솔 데스크 앞에 선 채 두 사람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어내기 힘들 만큼 굳어 있었다. 경원은 랙 장비의 전원을 차례로 내린 뒤, 바닥에 놓인 검은색 캔버스 장비 가방을 집어 들었다.

“수음 각도는 확인됐다. 28.5도 고정 브래킷은 내가 챙긴다.”

경원이 가방 지퍼를 닫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서두르던 경원의 코트 자락이 콘솔 모서리에 걸렸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부속 파우치가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퍼가 반쯤 열려 있던 주머니에서 묵직한 금속 물체 하나가 카펫 틈으로 굴러떨어졌다.

둔탁한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태이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바닥을 향했다.

그것은 단순한 음향 장비 브래킷이나 볼트가 아니었다. 굵은 공업용 강철 와이어가 달린 묵직한 원통형 자물쇠였다. 유압 배관이나 고압 밸브 챔버의 수동 차단 레버를 외부에서 강제로 묶어 고정할 때 쓰는 특수 차폐 락 장치였다.

태이의 손이 멈췄다.

경원이 재빨리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으려 했으나, 태이가 한발 앞서 바닥의 쇠붙이를 낚아챘다.

차가운 강철 와이어를 손바닥에 쥔 태이의 시선이 경원의 얼굴로 치솟았다. 태이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선배.”

태이의 목소리는 방금 전 채은을 부를 때와 완전히 다른 온도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 고압 와이어가 왜 형 가방에 있어요?”

경원은 손을 거두며 턱을 굳혔다.

“내 장비다. 이리 내.”

“이거 인문관 지하 침전조 챔버 격벽 규격이잖아.”

태이가 자물쇠 겉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규격 번호를 엄지로 훑었다. 태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밸브를 열고 3분 안에 빠져나오겠다고 했지. 근데 왜 격벽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고압 락 와이어가 형 코트 속에 들어 있냐고!”

채은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이는 손에 쥔 강철 자물쇠를 경원의 가슴팍을 향해 거칠게 들이밀었다.

“밸브를 열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어. 배관 압력이 역류해서 종루로 튀는 걸 막으려고…… 안에서 격벽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그 안에서 음압을 다 뒤집어쓸 생각이었잖아!”

경원은 대답 대신 태이의 손목을 쳐내며 자물쇠를 빼앗았다.

“그게 배관을 열 유일한 방법이다.”

“유일한 방법?”

태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120데시벨도 채은 누나 귀에는 치명타인데, 지하 침전조 챔버 안은 최소 135데시벨이야. 그 좁은 통로에 갇혀서 그 압력을 맨몸으로 맞으면 형 고막은 그냥 터져 나가. 알면서 들어간다고?”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밸브는 반도 안 열려.”

경원은 태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코트 안주머니에 자물쇠를 찔러 넣었다.

“감쇄 레버는 전자 제어가 먹통이다. 밸브를 개방하는 순간 발생하는 135데시벨의 1차 충격파를 안쪽에서 누군가 몸무게로 누르고 버텨주지 않으면 역류 방지판이 튕겨 나가. 그러면 140퍼센트 과부하가 걸린 고압 공기가 종루 슬릿으로 치솟아. 채은이가 잡은 28.5도 각도고 뭐고 측정 장비 채널 전체가 타 버린다고.”

태이는 말을 잃은 채 턱을 굳혔다.

채은은 두 사람 사이로 걸어와 경원의 장비 가방에서 무선 송출 송신기와 고정 브래킷을 꺼내 들었다.

“지금 여기서 싸울 시간 없어요. 방재팀 교대 시간이 자정 5분 전이에요. 1층 외벽 순찰 공백은 딱 12분이야.”

채은의 담담한 목소리에 태이가 입술을 깨물려다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채은의 시선은 이미 가방 속 8채널 송신 모듈로 향해 있었다.

“설치부터 끝내요. 형이 죽으러 들어가든 말든, 그 장비가 종루에 안 걸려 있으면 내일 오전 10시에 우린 시작조차 못 해.”

경원이 먼저 가방을 둘러메고 방음실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은 인문관 뒤편 어두운 화단 숲길을 가로질러 중앙도서관 시계탑 후면으로 달렸다. 밤안개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광장 쪽에서는 크레인 엔진 소리와 함께 철제 참관인석을 용접하는 날카로운 불꽃이 드문드문 튀어 올랐다. 방재팀 순찰 조 둘이 손전등을 휘두르며 도서관 정문 계단 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다.”

경원이 낮게 신호했다.

시계탑 북측 벽면에 붙은 비상 점검용 수직 철제 사다리는 20미터 높이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 채은이 먼저 사다리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을 얼얼하게 찔렀다. 뒤이어 태이가 채은의 발치를 받치듯 바짝 붙어 올랐고, 무거운 배낭을 멘 경원이 마지막으로 사다리에 매달렸다.

사다리 끝 철문을 밀어 올리자 차디찬 칼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최상층 종루 캣워크였다. 5톤 무게의 구형 청동 종이 묵직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채은은 무릎을 꿇고 캣워크 바닥 철판에 엎드렸다. 광장 쪽을 향한 난간 아래로 손전등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숨을 죽였다. 채은은 가방에서 꺼낸 28.5도 고정 브래킷을 종루 바깥쪽 돌출 림 틈새에 끼워 맞췄다.

철컥,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휴대용 토크 렌치가 돌아갔다. 볼트가 단단히 맞물렸다.

“각도 고정됐어. 28.5도 오차 0.1도 이내.”

채은이 숨을 고르며 8채널 무선 송출 모듈의 안테나를 뽑아 올렸다.

그 순간, 기계실 계단참 그늘막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태이가 경원을 기계실 외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요.”

태이가 경원의 멱살을 잡은 손에 핏발을 세웠다.

“감쇄 레버를 몸으로 누르고 있는 동안, 그 하드에 든 자료를 언론사 스물네 곳에 뿌린다고? 관제망 풀리는 3분 동안 형은 거기 갇혀서 귀가 터져 나갈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 복수다.”

경원의 목소리는 바닥을 긁듯 낮았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20년 전 백진우 교수가 그 댐퍼 앞에서 연구를 도둑맞고 쫓겨났을 때, 아무도 그 소리를 안 들었어. 이번엔 듣게 만들어야 해. 학내 방송망과 방송사 중계 서버까지 다 열어 둘 거다. 채은이가 위상 널 포인트를 잡아서 18데시벨을 깎아내는 순간, 재단이 숨긴 그 노이즈가 캠퍼스 전체 스피커로 터져 나갈 거야. 그러려면 지하에서 내가 버텨야 해.”

“미친 소리 하지 마.”

태이가 경원의 가슴을 거칠게 밀쳤다.

“채은 누나는 아버지 명예를 지키겠다고 귀를 걸고 여기 서 있어. 근데 형은 그 뒤에서 자기 복수 한풀이하겠다고 자살 특공대를 자처해? 누나가 그걸 알면 공청회고 뭐고 종루에서 뛰어내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러니까 입 다물라는 거다.”

경원이 태이의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수요일 오전 10시 정각, 종이 울리기 10초 전에 지하 침전조 문을 열 사람은 형 혼자가 아니에요.”

경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라고?”

“나도 내려갈 거야.”

태이가 가방에서 작은 디지털 튜너와 여분의 차음 패드를 꺼내 보였다.

“형 혼자 그 레버 못 버텨. 135데시벨 충격파가 터지면 형 몸무게로는 1초도 못 누르고 튕겨 나가. 내가 가서 유압 잭으로 레버를 바닥 프레임에 물릴 거야. 형이 언론사에 하드를 전송하는 그 3분 동안 내가 형 멱살 잡고 끌고 나올 거라고.”

“태이 너…….”

“누나한테는 비밀로 해.”

태이가 돌아선 채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누나는 여기서 28.5도를 잡아야 해. 밑에서 역류가 터지든 화염이 올라오든 우리가 막을 테니까, 누나는 저 종소리만 꺾으라고 해. 그게 형이 벌인 짓에 대해 져야 할 진짜 책임이야.”

채은이 캣워크 난간을 짚고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채은의 머리칼 사이로 귀에 꽂힌 차음 플러그가 드러났다.

“설치 끝났어요. 채널 1번부터 8번까지 송신 신호 정상으로 잡혀요.”

채은은 두 사람의 험악한 공기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하지만 캐묻지도 않았다. 채은의 눈동자는 광장 아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일 오전 10시예요. 오차는 0.5데시벨 안쪽이어야 하고, 밸브는 정각 10초 전에 열려야 해요. 누가 어디에 서 있든, 난 28.5도에서 마이크 안 놓쳐요.”

그때였다.

광장 대형 전광판의 흰색 불빛이 일제히 점멸했다.

자정을 알리는 디지털 숫자가 00:00으로 바뀌었다. 붉은색 자막으로 긴급 공개 기술 공청회 일정과 시계탑 철거 심의안이라는 문구가 거대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시계탑 중앙 기계실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덜컥거리며 맞물리는 기계음이 발밑을 울렸다.

공청회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10시간이었다.

채은은 렌치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기계실 계단 통로를 향해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경원과 태이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자정의 칼바람 속에서 시계탑의 낡은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