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방 문을 닫는 순간, 리아나는 등 뒤에서 거대한 무게가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닫힌 문 너머로 아카데미의 소란스러운 활기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방 안은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했다. 심장이 발작하듯 빠르게 뛰었고, 귓가에는 방금 전 이안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카이덴의 차가운 시선이 맴도는 듯했다.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옷에 달라붙어 불쾌한 감각을 선사했다.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녀의 무게를 받아내며 작게 출렁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자, 차가웠던 손끝이 볼에 닿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마치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큰일 났다.’
이 두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작부터 꼬였다. 아니, 시작부터 ‘버그’가 발생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명의 메인 남주 후보가 그녀에게 반응했다. 그들의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이안의 시선은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이 담겨 있었고, 카이덴의 시선은 마치 이물질을 감지한 듯한 경계심이 역력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만든 게임이, 자신이라는 치명적인 ‘버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리아나는 게임 개발자로서 수많은 버그를 잡고 시스템 오류를 수정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바로 그 가장 거대한 버그라는 사실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과로로 쓰러지기 전, ‘별빛 속 연가’의 배드 엔딩을 막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자신이 만든 게임 속으로 들어와 ‘테스트용 NPC’가 되었다. 미션은 명확했다. 원작 여주인공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지원하라. 하지만 지금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었다.
‘이안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개발자 지식을 썼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몸 자체가 가진 잠재력에 반응한 걸까?’
이안의 말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평범한 학생에게서는 보기 힘든 기운이었어. 마치… 잠재된 힘 같은?" "호기심 많은 눈들이 많거든." 그의 경고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천재 마법사다. 캐릭터 설정상, 비상한 통찰력으로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리아나’라는 평범한 NPC에게서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는 것은, 그녀의 정체가 언제든 탄로 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와 다름없었다.
카이덴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카이덴은 완벽주의자이며, 자신의 영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보낸 탐색적인 시선은, 마치 시스템의 보안 프로토콜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스캔하는 것과 같았다.
리아나는 두려웠다. 자신이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거대해서, 자신이 아는 모든 스토리가 송두리째 뒤틀릴까 봐.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로맨스를 파괴하고, 모든 등장인물들을 혼란에 빠뜨릴까 봐.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신의 과도한 욕심이, 완벽한 게임을 만들고자 했던 집착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인가. 그녀는 개발자로서의 권한도, 버그 수정 능력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저 ‘테스트용 NPC’라는 이름표를 단, 데이터 조각에 불과했다.
차가운 기숙사 바닥에 발을 내렸다.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가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는 듯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리아나의 눈에는 그저 자신이 갇힌 감옥의 창살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녀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방 안을 맴돌았다. 시스템은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지원하라고 했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스템의 오류였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를 품고 있는 컴퓨터 같았다.
그때, 방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아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룸메이트 셀레나였다. 앳된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주근깨가 평화로워 보이는 소녀였다.
"리아나, 너 괜찮아? 아까부터 방에 들어와서 아무 소리도 없길래… 무슨 일 있어?"
셀레나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리아나에게는 마치 현실로 끌어내리는 차가운 물줄기 같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어휴, 또 과로한 거 아니야?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더라. 얼굴도 창백하고."
셀레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아나에게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 작은 접촉이, 리아나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미세하게 녹이는 것 같았다.
"열은 없네. 다행이다. 내일 마법 이론 실습 있잖아. 오늘 일찍 자야 컨디션 조절하지."
마법 이론 실습. 셀레나의 말에 리아나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내일 실습은 엘리시아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터였다. 동시에, 남주들과의 또 다른 접촉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했다.
"응… 알았어."
리아나는 평범한 학생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나 앞에서 자신의 불안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NPC’ 리아나로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규칙이자,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였다.
셀레나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리아나, 또 무슨 생각에 잠겨 있어? 걱정 마, 마법 이론 실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야! 교수님도 좋으시고, 다들 처음 배우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셀레나의 천진난만한 말에 리아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부담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녀는 셀레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렇겠지. 네 말이 맞아."
셀레나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리아나, 아까 복도에서 이안 선배님이랑 카이덴 선배님이랑 마주쳤지? 이안 선배님이 너한테 무슨 말 하는 것 같던데… 혹시 너한테 관심 있는 건가? 어쩐지 너 보면서 계속 웃는 것 같았어."
셀레나의 말에 리아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셀레나까지 눈치챈 건가?’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그냥 길을 물어보시더라. 내가 아카데미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데 말이야."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이안 선배님은 워낙 장난기가 많으시니까. 그래도 카이덴 선배님은 너한테 눈길도 안 주셨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엘리시아 선배님 외에는 아무한테도 관심 없으시잖아. 다행이다."
셀레나의 말은 리아나의 굳은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다행이라고? 아니, 셀레나는 모르는 거야. 카이덴 선배는 나를 봤어. 분명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억지로 미소만 지었다.
셀레나가 잠시 후 침대에서 일어섰다.
"난 이제 샤워하러 갈게. 너도 너무 늦게 자지 마. 내일 실습 때 보자!"
셀레나가 욕실로 들어간 후, 리아나는 다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는 평범한 NPC 리아나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남주들의 시선을 피하고, 엘리시아의 로맨스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조력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에 완벽하게 녹아들어야 했다.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처럼 행동하며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특히 엘리시아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엘리시아는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그녀의 첫 학기 스케줄은 리아나가 개발할 때 설정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내일의 마법 이론 실습은 엘리시아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불안감을 억누르고, 실습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아나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서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과 평범한 이목구비, 그리고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이것이 지금의 ‘리아나’였다. 개발자 ‘리아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완벽하게 녹아들어야 해. 평범한 리아나로서.’
그녀는 거울 속 자신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개발자로서의 본능과 ‘버그’에 대한 경계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세계는 자신이 만든 것이지만, 이제는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 게임을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존재라는 희미한 희망도 품었다. 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리아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다짐했다.
‘그래, 일단 살아남자. 그리고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내가 버그라면, 이 버그를 가장 완벽하게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내면 돼.’
내일의 마법 이론 실습. 그곳에서 그녀는 ‘리아나’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딜 터였다.
리아나는 셀레나와 함께 마법 이론 실습실로 향했다. 어제 밤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복도를 가득 메운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그녀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인 척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실습실 문을 열자, 후끈한 마나의 기운과 함께 온갖 약초와 시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실습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리아나는 더욱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애썼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셀레나의 뒤를 따랐다.
“리아나, 저기 빈자리 있어! 빨리 앉자.”
셀레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실습실 중앙에서 살짝 벗어난 자리였다.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으로 향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실습실 안을 훑었다. 그녀의 눈은 본능적으로 원작 여주인공 엘리시아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다.
실습실 한쪽 창가에 빛나는 금발이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리아나가 설정했던 그대로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청초한 얼굴과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존재감은 리아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엘리시아… 원작 여주인공. 역시 내 설정대로 사랑스럽고 빛나는 존재였어.’
리아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개발자로서 그녀가 불어넣었던 생명력이, 이 세계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어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 웃음소리, 심지어 친구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리아나는 엘리시아의 모든 것을 주시하며 그녀의 성격과 행동 패턴을 분석했다.
‘그래, 이 아이를 돕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야. 내가 버그가 되지 않기 위해, 직접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조력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녀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행위였다.
“리아나, 저기 봐, 엘리시아 공주님도 오셨네! 정말 예쁘다, 그치?”
셀레나가 팔꿈치로 리아나를 툭 치며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이미 엘리시아에게서 헤어 나올 줄 몰랐다. 리아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속은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척해야 했다.
그때, 실습실 문이 다시 열리며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섰다. 리아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메인 남주 후보들이었다.
강의실 한쪽에는 카이덴이 근위 기사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은발은 햇빛 아래서 서늘하게 빛났고, 푸른 눈은 차분하게 실습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위엄 있는 분위기는 주변 학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앉은 자리 주변으로는 마치 투명한 막이라도 쳐진 듯,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리아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어제의 그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향할까 봐 두려웠다.
이안은 카이덴과는 대조적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학생들과 어울리며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유려한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실습실 안에 울려 퍼졌지만, 리아나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여전히 날카롭게 주변을 탐색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스치는 듯한 착각에, 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어제 그가 했던 ‘잠재된 힘’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강의실 한구석에서는 아서가 늘 그랬듯이 책을 읽고 있었다. 흑발에 잿빛 눈동자. 그의 차분하고 지적인 인상은 주위의 소란스러움과 동떨어져 고독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아직 리아나를 보지 못한 듯했지만, 그의 신비로운 존재감은 쉬이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젠장, 다 모였잖아.’
리아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이 세 명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법 이론 실습 내용을 따라가면서도, 끊임없이 남주들의 동선을 살피고 그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애썼다. 펜을 든 손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실습이 시작되고,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법진을 그리는 실습이었다. 리아나는 익숙한 마법진의 형태를 보며 과거 게임 개발자로서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완벽하게 마법진을 그려 내려갔다. 그러나 그때, 실습실 저편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엘리시아였다. 그녀가 마법진을 그리는 도중, 실수로 시약병을 엎지른 모양이었다. 투명한 시약이 바닥에 쏟아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엘리시아는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리아나는 무심코 그녀를 도우려 손을 뻗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녀의 손끝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안 돼, 내가 나서는 순간 모든 게 꼬일 거야.’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상기했다. 자신은 ‘그림자 조력자’였다. 엘리시아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다른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도와주도록 내버려 둬야 했다. 그녀의 개입은 ‘버그’를 유발할 뿐이었다.
다행히 엘리시아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서둘러 걸레를 가져와 시약을 닦아주었다. 엘리시아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엘리시아의 시선이 리아나에게로 향했다.
리아나는 당황했지만,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엘리시아는 리아나를 향해 짧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한, 혹은 자신을 걱정해준 것에 대한 작은 감사였다.
리아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살짝 숙여 화답했다.
‘이게 첫 번째 상호작용인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이 세계의 흐름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엘리시아의 미소는 따뜻했지만, 리아나에게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작은 접촉 하나하나가 스토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실습이 진행되는 동안, 리아나는 이안이 자신을 힐끗거리는 것을 여러 번 눈치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마치 레이저처럼 그녀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듯했다. 그녀는 더욱 긴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이덴의 시선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리아나에게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아서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생각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리아나는 실습 내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테스트용 NPC’라는 가면을 완벽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내면은 끊임없이 ‘버그’와 ‘스토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요동쳤다. 평범한 학생인 척, 그저 실습에 집중하는 척,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숨겼다.
마침내 실습이 끝나고, 교수님의 종강 선언과 함께 실습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실습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리아나는 서둘러 자신의 짐을 챙겼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엘리시아에게로 향했다. 엘리시아의 주변에는 어느새 메인 남주 후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있었다. 카이덴은 엘리시아에게 무언가 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었고, 이안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엘리시아의 말을 받아치고 있었다. 아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분명 엘리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역시, 엘리시아는 주인공이야. 내가 없어도 스토리는 잘 흘러갈 거야.’
리아나는 안도와 동시에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없어도, 이 세계는 그녀가 만든 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흔들리게 한다면, 모든 것이 뒤틀릴 것이라는 위기감.
리아나는 자신의 역할이 ‘그림자 조력자’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엘리시아를 돕기 위한 다음 계획을 조용히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엘리시아의 행복을 위한 간절함과, 자신의 존재가 이 게임을 망치지 않기를 바라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그녀는 서둘러 셀레나의 팔을 잡아끌며 실습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실습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만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남이 그녀의 ‘버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라는 것을.
리아나는 서둘러 셀레나의 팔을 잡아끌며 실습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실습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만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남이 그녀의 ‘버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라는 것을.
실습실 문을 나서자, 복도는 온갖 소음과 활기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마법 이론 실습에 몰두했던 학생들은 해방감에 젖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웃고 떠들었다. 리아나는 그 인파 속에서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 애썼다.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 발소리, 마법 도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귀를 울렸지만, 그녀의 신경은 오직 자신의 은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리아나, 잠깐만! 나 저기서 친구들이랑 인사 좀 하고 갈게!”
셀레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보이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리아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셀레나의 밝은 표정을 보니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 혼자 있는 게 더 눈에 띄지 않을 거야.’ 리아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갈게. 기숙사에서 봐.”
“응! 금방 갈게!”
셀레나가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리아나는 더욱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처럼 복도를 가로질러 중앙 도서관 앞 복도에 다다랐다. 아카데미의 중앙 도서관은 고풍스러운 아치형 입구와 거대한 나무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앞 복도는 늘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리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빠르게 지나치려 했다. 그녀의 심장은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극도로 긴장했다. 그때였다. 시야 한구석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흑발에 잿빛 눈동자, 늘 책을 손에 들고 사색에 잠긴 듯한 모습. 학생회장 아서였다.
그는 도서관 입구 옆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과 완벽하게 분리된 듯한 고독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리아나는 그를 피하기 위해 벽 쪽으로 바싹 붙어 거의 스치듯이 지나가려 했다. 숨을 멈추고, 마치 공기처럼 투명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려 애썼다. 그녀의 발소리마저 최대한 죽였다.
하지만 아서는 마치 그녀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가 지나치려는 순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아나 양.”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지만, 리아나의 귓가에는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심장이 쿵 하고 발끝까지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굳어버린 몸을 겨우 돌려세우자, 아서의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의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롭고 깊었다.
그는 들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 이론 실습, 잘 마쳤나요? 평소에는 아카데미 실습에서 볼 수 없던 학생이라 궁금했습니다.”
그의 말에 리아나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졌다. ‘평소에 볼 수 없던 학생이라니… 내가 이렇게나 눈에 띄는 존재였나?’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평범한 NPC’로 위장하려 했지만, 아서의 말은 그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했다. 이안이 감지한 ‘특별한 기운’에 이어, 아서마저 그녀의 ‘비범함’을 눈치챈 것인가.
리아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목소리도 예상보다 더 떨려 나왔다.
“네, 선배님. 그저… 평범한 실습이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아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었다. 그의 시선이 오롯이 리아나에게 향했다. 그 눈빛에 담긴 깊이를 알 수 없어 리아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비범함은 더욱 눈에 띄는 법이죠. 특히 당신처럼… 무언가를 애써 감추려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의 말은 리아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온몸의 털끝이 쭈뼛 서는 소름이 돋았다. 이안이 ‘잠재된 힘’을 언급했던 것처럼, 아서 역시 그녀의 ‘특별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가 만든 캐릭터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이건 버그야. 명백한 버그!’
리아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녀가 만든 캐릭터들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녀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원작 스토리를 완전히 뒤흔들 가장 위험한 요소였다. 그녀는 그저 엘리시아를 돕는 그림자 조력자로 남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모든 것이 꼬여가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혔다. 개발자로서의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몸 자체가 가진 특성 때문일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균형을 깨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나! 여기서 뭐 해? 아서 선배님과 이야기 중이었어?”
셀레나가 친구들과 헤어져 리아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셀레나의 등장으로 아서의 시선은 잠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짧은 찰나, 리아나는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서의 시선은 이내 다시 리아나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탐색으로 가득했다.
아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리아나 양. 그때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은 리아나에게 경고이자 예고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의 비밀을 알려고 할 것이고,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NPC로 위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아서의 뒷모습이 도서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리아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메인 남주 후보 중 이안과 카이덴, 그리고 이제는 아서까지. 세 명의 핵심 캐릭터들이 이미 그녀의 존재를 감지했고,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엘리시아를 돕기는커녕, 자신이 게임의 가장 큰 버그가 되어버렸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로맨스 판타지의 서막이었다. 그녀의 질문은 이제 ‘어떻게 살아남을까?’로 바뀌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거대한 폭풍의 전조였다. 리아나는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설계한 세계에 갇힌 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