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속 연가 · 총 2

제1화

뷰어에서 이어 읽기

"리아나, 아직도 자고 있어? 오늘 중요한 실습이 있는 날이라고!"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낯선 이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익숙한 이름. 리아나. 내가 만든 게임 속 수많은 NPC 중 하나에게 붙여준 이름이자, 지금의 나였다. 간밤의 기억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붉은 경고 메시지로 가득했던 모니터, 치명적인 버그, 그리고 ‘별빛 속 연가’의 파멸적인 배드 엔딩.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아니, 이제는 현실이 아닌 게임 속 현실이 되어버렸다.

"리아나? 괜찮아?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문이 빼꼼 열리며 앳된 얼굴의 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 아, 이 아이는… 내 게임 속에서 리아나의 룸메이트로 설정된 ‘셀레나’였다. 평범한 조연 1.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룸메이트라니. 내가 이런 역할로 빙의할 줄이야.

“아, 응. 괜찮아.”

어색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가? 아니, 과로로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만든 게임 속이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경계했던 ‘배드 엔딩’ 직전의 세계.

셀레나는 내 옆으로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어제 밤늦게까지 과제했어? 어쩐지 잠꼬대도 심하더라. ‘버그’니 뭐니 이상한 소리도 하던데.”

‘버그’라는 단어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내 본래의 정체를 드러냈다는 말인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셀레나는 다행히도 그저 잠꼬대로 치부하는 듯했다.

“아니, 그냥… 악몽을 꿨나 봐.”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셀레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개발자로서의 위기관리 능력이 발동했다. 이곳에서 나의 정체를 들키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빨리 준비해야 해. 오늘 ‘마법 이론 실습’ 교수님이 특별히 점검하신다고 했잖아. 늦으면 큰일 나. 어제도 아서 선배가 학생회에서 실습 지각생 명단을 엄중히 관리하겠다고 공지했잖아.”

마법 이론 실습. 세레니티 아카데미의 기초 과목 중 하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리아나라는 NPC의 일과. 아카데미의 커리큘럼. 모든 것이 내가 설계한 그대로였다. 학생회장 아서의 이름까지 언급되니, 이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 있는지 다시금 실감했다.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거울 속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 평균적인 키와 체형.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 내가 설정한 ‘테스트용 NPC’ 리아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개발자 리아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18세 소녀의 얼굴이었다.

세수를 하며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야 했다. 개발자로서의 본능이 깨어났다.

첫째, 나는 내가 만든 게임 ‘별빛 속 연가’ 속으로 빙의했다. 이것은 명백한 시스템 오류였다.

둘째, 나는 원작 여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테스트용 NPC’ 리아나로 빙의했다. 권한도, 특권도 없었다.

셋째, 시스템은 나에게 ‘원작 여주인공 엘리시아의 해피 엔딩을 지원할 것’이라는 미션을 부여했다. 이 미션은 내 생존과 직결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넷째, 빙의 시점은 게임의 초반부. 엘리시아와 남주들의 관계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할 때였다. 아직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드 엔딩’을 막는 것이었다. 내가 이 게임을 개발한 궁극적인 이유였다. 엘리시아는 순수하고 착한 캐릭터였지만, 너무나 연약해서 혼자서는 그 누구와도 이어지기 힘들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조력자가 바로 지금의 나, 리아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만든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내가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개발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시스템 권한도, 버그 수정 능력도 없는, 그저 하나의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만든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존재였다. 내가 만든 세계의 가장 하찮은 부품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젠장, 이건 완벽한 버그잖아.’

나의 존재 자체가 가장 거대한 버그였다. 내가 이곳에 존재함으로써, 스토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시놉시스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의도치 않게 공략 대상 남주들의 시선을 사로잡아버린다.’ 내가 만든 스토리였지만, 막상 그 상황에 놓이니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얼굴. 이 얼굴이 어떻게 황태자 카이덴, 천재 마법사 이안, 학생회장 아서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저 엘리시아를 돕는 그림자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해피 엔딩을 이끌어내야 했다.

옷을 갈아입었다. 세레니티 아카데미의 교복.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교복이었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교복의 부드러운 감촉, 섬세한 자수. 이 모든 디테일이 내가 밤새워 구현한 결과물이었다.

"리아나! 빨리 안 나와? 늦겠어!"

셀레나의 재촉에 서둘러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이미 몇몇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모두 내가 만든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 움직였다. 그들의 표정, 걸음걸이, 속삭이는 대화. 모든 것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완벽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세계를 이렇게나 완벽하게 만들었구나. 그런데 왜 나는….’

개발자로서의 자부심이 잠시 솟아올랐지만, 이내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완벽하게 만든 이 세계에서, 나는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감정은 단순한 좌절을 넘어선, 존재론적인 혼란에 가까웠다.

셀레나와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아카데미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웅장한 중앙 홀, 마법적인 힘으로 떠 있는 분수, 그리고 멀리 보이는 광활한 숲과 호수. 모든 것이 내가 디자인한 그대로였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마법의 기운과 풀 내음이 섞여 있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은 마법 실습이나 시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나는 엘리시아를 찾았다. 그녀는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설정되어 있었다. 항상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존재.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는 메인 캐릭터였고, 나는 한낱 엑스트라 NPC였으니, 동선이 겹칠 리 만무했다.

‘어떻게 엘리시아에게 접근해야 하지?’

평범한 NPC가 메인 여주인공에게 아무 이유 없이 다가가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칫하면 시스템 오류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워야 했다. 일단은 주변을 탐색하며 엘리시아의 위치와 그녀의 현재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개발자로서의 지식은 있었지만, NPC로서의 행동 제약이 발목을 잡았다.

마법 이론 실습실로 향하는 길. 아카데미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잘 가꿔진 잔디밭 위로 학생들이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정원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발에 잿빛 눈동자. 차분하고 지적인 인상. 늘 책을 들고 다니거나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는 인물.

아서. 학생회장이자, 메인 남주 후보 3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첫 번째 남주와의 조우. 그것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늘 도서관이나 학생회실에 박혀 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었다. 정원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고요한 기운이 감돌았다.

‘버그인가?’

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내가 이곳에 존재함으로써, 캐릭터들의 동선이나 행동 패턴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는 걸까? 아서는 고개를 살짝 들어 햇살을 받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시선이 내가 있는 방향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셀레나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괜히 그의 시선에 걸렸다가는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아직은 그 누구와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엘리시아를 돕는 조력자일 뿐이었다. 나의 존재가 스토리를 뒤틀지 않도록 최대한 숨죽여야 했다.

실습실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득했다. 셀레나는 자기 자리로 향했고, 나 역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무 책상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교수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반에는 엘리시아가 없었다. 그럼 그녀는 다른 반인가? 아니면 오늘 실습이 없는 건가? 정보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엘리시아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때, 실습실 문이 다시 열리고 한 남학생이 들어섰다. 붉은색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항상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으며, 유려한 움직임과 능글맞은 표정이 매력적인 남자.

이안. 천재 마법사이자, 메인 남주 후보 2번.

그는 지각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빈자리를 찾아 걸어왔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듯 나를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스쳐 지나감이 아니었다.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미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젠장, 또 버그인가? 왜 나를 보는 거지?’

이안은 늘 수업에 늦는 자유분방한 캐릭터였지만, 그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것은 원작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책상만 바라보았다. 그의 능글맞은 미소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로 나의 존재가 이 게임의 흐름을 뒤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모두 조용히 해라. 오늘 실습은 특별하다. 마력 흐름 제어 실습이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실습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안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그에게 쏠려 있었다.

실습은 이론과 실제 마법 사용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 기본적인 마법진 그리기부터 간단한 속성 마법 발현까지. 나는 개발자로서 이 모든 마법 시스템을 설계했기에, 이론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의 원리, 마력의 흐름, 속성 간의 상성까지.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하지만 막상 내 손으로 마법을 발현하려니 쉽지 않았다.

‘이건… 그냥 NPC의 몸이잖아.’

내가 아는 지식과 이 몸이 가진 능력 사이의 괴리감에 답답함을 느꼈다. 마법진을 그리다가도 손이 미끄러지고, 마력을 집중하려 해도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내가 가장 무력하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내 손끝에서 튀어나오는 마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리아나, 마법진이 너무 삐뚤어졌군. 다시 그려봐라. 마력 집중도도 형편없다.”

교수님의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 리아나는 평균적인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역시 버그로 의심받을 만했다. 이대로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아카데미의 이목을 끌게 될 터였다.

나는 애써 다시 마법진을 그렸다. 하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힘줄 필요 없어. 마력은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다뤄야지.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이안의 목소리였다. 그는 나에게 조용히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릴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왜 나한테? 이안은 엘리시아에게만 관심을 보이던 캐릭터인데.’

이안은 원작에서 엘리시아에게만 관심을 보이던 캐릭터였다. 다른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버그’였다. 내 존재가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의 조언대로 손에 힘을 빼고 마법진을 다시 그렸다. 신기하게도,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선이 이어졌다. 마력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미약하지만, 손끝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오, 조금 나아졌군. 하지만 아직 멀었어. 꾸준히 연습해라.”

교수님의 목소리였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펜을 움직였다. 나는 그의 조언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실습에 임할 뿐이었다.

실습이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섰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실습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안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기심이 나에게 향하는 것은 위험했다.

“리아나.”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이안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법진 그리는 솜씨가 영 꽝이던데. 혹시 마법에 소질이 없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묘한 호기심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흐음, 컨디션 문제라. 그런데 아까 네가 그린 마법진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특별한 기운이 있던데. 평범한 학생에게서는 보기 힘든 기운이었어. 마치… 잠재된 힘 같은?”

그의 말이 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내가 마법진을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개발자로서의 지식을 활용한 걸까? 아니면 이 몸 자체가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안은 천재 마법사였다. 그의 통찰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나의 ‘버그’를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그의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내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글쎄.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평범한 학생에게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아카데미에는 호기심 많은 눈들이 많거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안은 보통의 NPC가 아니었다. 그는 최첨단 AI 기술로 구현된, 자율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캐릭터였다. 그가 나의 ‘버그’를 눈치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의 존재가 게임의 스토리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다음에 또 보게 될 거야, 리아나. 그때는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알게 될지도 모르지.”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실습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큰일 났다.’

시작부터 꼬이고 있었다. 나는 엘리시아를 돕기는커녕, 나 자신 때문에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안은 이미 나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것은 명백한 ‘버그’였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버그.

나는 서둘러 실습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데, 이번에는 저 멀리서 익숙한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카이덴. 황태자이자, 메인 남주 후보 1번.

그는 몇 명의 근위 기사들과 함께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위엄 있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학생들은 그를 보며 웅성거렸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의 푸른 제복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그의 시선에 닿지 않기 위해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나를 발견한 듯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나를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은 날카롭게 내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혹은 탐색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설마… 카이덴까지? 왜 나를 보는 거지?’

황태자 카이덴은 차갑고 도도한 성격으로, 엘리시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았다. 그것도 단순한 스쳐 지나감이 아닌,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쳤지만,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두 명의 남주가 벌써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관심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감지하고 경계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든 게임이, 나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엘리시아를 찾아야 했다. 그녀를 돕고, 이 모든 버그를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존재 자체가 이 게임의 가장 큰 ‘버그’인데? 메인 남주들이 나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놉시스에 적힌 ‘예측 불가능한 버그 투성이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설계한 완벽한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버그와 오류로 점철된, 미완성 게임의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현실 속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로 던져졌다.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