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12화 · AI 작가 백야

제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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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무릎이 닿기도 전에 강한 완력이 엘리샤의 허리를 낚아챘다.

거신의 늑골을 향해 도약하려던 칼릭스가 방향을 꺾어 지면을 박찼다. 귓가를 찢을 듯 울리던 마력의 파동 사이로 억눌린 칼릭스의 숨소리가 짓씹혀 들어왔다.

“정신 차려, 엘리샤!”

엘리샤의 머릿속은 불붙은 납덩이를 들이부은 것처럼 들끓었다. 망막에 달라붙은 붉은 안광이 신경망을 갉아먹으며 시야를 지워 냈다. 관찰자의 눈으로 얽어매던 푸른 궤적들이 거신의 마안에 강제로 빨려 들어가며 두개골 안쪽이 터져 나갈 듯 조여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마비가 전신을 덮쳤다.

그 순간, 머리 위 상층 난간에서 서늘한 폭음과 함께 흑철 와이어들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찰칵, 콰르릉!

난간 모서리에 버티고 선 세드릭이 피 묻은 손가락을 비틀어 바닥 제어반의 룬을 강제로 맞물렸다. 제단 바닥에 음각되어 있던 황실 암살대의 마법진이 핏빛 벼락을 토해 내며 수십 가닥의 흑철 사슬을 쏘아 올렸다. 동시에 암석 틈새에 숨어 있던 벼락 쐐기들이 칼릭스의 무방비한 등을 정조준해 짓쳐 들었다.

“그 눈을 너무 과신했더군, 계집. 네놈이 괴로워할 때 칼릭스가 등을 보일 거라는 건 뻔한 수순이었어!”

난간 위에서 울려 퍼지는 세드릭의 목소리는 오만하면서도 철저하게 계산된 냉혹함을 품고 있었다. 거신의 마안을 깨운 목적은 제단에 머무는 거대한 괴력을 과시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엘리샤의 비정상적인 관찰 능력을 한계치 이상으로 과부하시켜 뇌수를 태워 버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세를 무너뜨릴 칼릭스의 사각을 노리는 잔인한 이중 덫이었다.

칼릭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엘리샤의 머리를 한쪽 가슴에 단단히 끌어안고, 반대편 손으로 들고 있던 검집을 거꾸로 쥐어 바닥 깊숙이 처박았다.

콰지직!

검집 끝에서 뿜어져 나온 시퍼런 서리가 지면을 타고 수직으로 솟구쳤다. 얇은 살얼음이 아닌, 두 뼘 두께의 단단한 빙벽 세 겹이 두 사람의 둘레를 둥글게 감싸며 방어선을 쳤다.

그러나 도약을 포기하고 엘리샤를 낚아채느라 중심이 무너진 상태였다. 완전한 방어 결계를 펼치기에는 시간이 찰나만큼 모자랐다.

투화학!

빙벽의 외벽을 뚫고 들어온 흑철 사슬의 뾰족한 갈고리가 허공을 갈랐다. 벼락 쐐기 파편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튀었고, 칼릭스는 몸을 비틀어 엘리샤를 제 품 안쪽으로 완전히 밀어 넣었다.

푸욱!

살점을 찢고 뼈를 긁는 둔탁한 파열음이 엘리샤의 귓전 바로 위에서 터졌다. 칼릭스의 오른쪽 어깨 뒤편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쳐 엘리샤의 뺨을 적셨다. 사슬 끝에 실린 번개 마력이 그의 견갑골을 훑고 지나가며 옷자락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칼릭스……!”

엘리샤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은 여전히 붉은 피바다였고, 거신의 마안이 뿜어내는 저주 파동은 머릿속 신경선을 바늘로 후벼 파듯 쑤셔 댔다. 구역질과 함께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이 밀려왔다.

칼릭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꿰뚫은 고통을 억누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엘리샤의 목덜미에 걸려 있던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를 쥐었다.

찌르르!

펜던트 속에서 응축되어 있던 칼릭스 본연의 얼음 마력이 차갑고 서슬 퍼런 파동이 되어 엘리샤의 쇄골을 타고 척수까지 파고들었다. 불타는 뇌수에 얼음물을 들이붓는 것 같은 서늘한 충격이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감기면 끝이야.’

엘리샤는 이를 악물었다. 혀뿌리를 짓씹자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감각이 마비되어 가던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칼릭스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았다. 은제 펜던트의 냉기를 지지대 삼아, 망막을 짓누르던 붉은 노이즈를 하나씩 걷어 냈다.

시야가 번쩍이며 다시 트였다.

빙벽 너머로, 난간 위에 선 세드릭의 차가운 미소가 보였다.

세드릭은 자신의 황통 마력이 거신의 마안과 공명하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거신의 마안은 단순한 무차별 공격기가 아니었다. 엘리샤처럼 마력의 결을 읽어 내는 자의 신경망을 역추적해 영구히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고대 제어 단말의 보안 장치였다.

“살아남은 건 용하다만, 어깨에 구멍이 난 채로 뭘 할 수 있지? 드 라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 이 더러운 지하에서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숨이 끊어지는 꼴을 제국 백성들이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세드릭이 손목을 털어내자, 바닥 제어반에서 또다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거신의 거대한 흑철 상체가 삐걱거리며 반응했다. 가슴 한가운데의 마안이 피눈물을 흘리듯 붉은 마력을 뿜어내며, 이번에는 완전히 두 사람을 짓이기기 위해 거대한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엘리샤는 칼릭스의 가슴팍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두 눈만큼은 전보다 더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 들려요?”

엘리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칼릭스는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마력으로 얼려 붙여 지혈하며 낮게 답했다.

“듣고 있다.”

“저 눈은 단순한 눈이 아니에요. 세드릭의 뇌파와 거신의 핵을 잇는 중계기예요. 세드릭은 저걸로 내 눈을 부수고 당신을 죽이려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 통로가 열려 있는 한 제어식도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요.”

엘리샤의 손가락이 피로 얼룩진 칼릭스의 빙검 칼날을 스쳤다.

“저 거신을 부수면, 역류하는 반동은 고스란히 저 난간 위로 쏟아져요. 한 번 더 뛸 수 있겠어요?”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에 서릿발 같은 살의가 맺혔다. 그는 검을 고쳐 쥐며 등을 꼿꼿이 폈다.

“네가 길을 가리키는 한, 내 검은 빗나가지 않는다.”

“발악도 그쯤이면 가상하구나, 버러지들아.”

난간 위에 선 세드릭이 비열한 웃음을 터뜨리며 단도로 제 손바닥을 깊게 그었다.

흠뻑 배어 나온 붉은 피가 제어반 표면의 음각을 타고 흘러내리자, 바닥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거신의 흉곽 깊은 곳에서 쇠가 갈리는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산더미만 한 흑철 오른팔이 머리 위로 치솟았다.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 거신의 손바닥에 엉겨 붙은 검붉은 마력이 공기를 압축하며 지하 제단 바닥을 통째로 짓뭉갤 기세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공간이 뒤흔들리며 발밑의 화강암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충격파와 함께 솟구친 집채만 한 암석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천장을 받치던 석조 기둥 하나가 하단부부터 부서지며 굉음과 함께 쓰러졌다. 발을 디딜 자리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세드릭은 난간에 서서 피 묻은 손을 털며 싸늘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태자 특유의 오만한 눈빛 속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버티는 것도 여기까지다. 드 라온 가문의 역적과 그에 부역한 이름 없는 엑스트라에게 어울리는 무덤이지.”

거신의 흉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엘리샤의 신경계를 쥐어짜듯 짓눌렀다. 귓가에서 이명이 찢어지게 울렸다. 머리뼈가 깨져 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엘리샤는 눈을 감지 않았다. 손끝을 파고드는 칼릭스의 차가운 얼음 기운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시야에 푸른 격자선이 겹쳐졌다.

거신의 거대한 몸체 곳곳을 타고 흐르는 핏빛 마력 선들이 3차원 입체 도면처럼 뇌리에 펼쳐졌다. 그 선들의 종착점은 가슴팍에 박힌 붉은 마안이었고, 마안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마력 파동 하나가 허공을 가로질러 난간 위의 세드릭에게 닿아 있었다.

단순한 관측창이 아니었다. 마안은 세드릭의 마력 신호를 거신의 내부 중추로 전달하는 지맥 동조 단말기였다.

“칼릭스, 발밑을 봐요!”

엘리샤가 외쳤다. 거신의 왼손이 이번에는 반원형을 그리며 쇄도하고 있었다. 흑철 장갑이 허공을 가르며 일으킨 돌풍만으로도 살갗이 찢길 듯했다.

칼릭스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검을 쥔 손목을 비틀며 바닥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섰다.

“어디로 뛰어야 하지?”

“오른쪽으로 세 보, 그다음 무너지는 기둥 파편으로 도약해요! 저 마안이 내 신경계를 노리고 붉은빛을 집중할 때 세드릭과의 동조율이 최고조에 달해요. 반대로 말하면, 그 순간에는 거신 본체의 방어 회로가 비어요!”

엘리샤는 숨을 몰아쉬며 품에서 은제 펜던트를 쥐어짰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은빛 늑대 문양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펜던트의 잔류 마력이 칼릭스의 냉기와 맞물리며 고유 주파수를 발생시켰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그 파동을 거신의 마안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건 나 하나로 족해요. 저 눈이 날 완전히 조준하도록 유도할게요.”

“엘리샤, 그건 위험하다.”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상처 입은 어깨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의 검날에 서린 냉기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피하지 마요, 칼릭스! 마안의 시선이 흔들리는 그 0.5초 사이에 세 번째 늑골 뒤쪽 혈맥을 얼려요!”

엘리샤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펜던트의 마력 핵을 맨손으로 짓눌렀다.

파지직!

은빛 스파크가 튀며 엘리샤의 동공이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거신의 거대한 붉은 마안이 즉각 반응했다. 세드릭의 의지가 담긴 마안의 시선이 허공의 궤적을 꺾으며 오직 엘리샤 한 사람을 향해 붉은 광선을 모아들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릴 것 같은 충격이 다시 밀려왔다. 엘리샤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피가 맺히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 찰나, 마안의 시선이 엘리샤에게 고정되며 거신의 전신을 방어하던 검붉은 보호막이 좌측 흉부에서 엷어졌다. 0.5초의 빈틈이었다.

“지금이에요!”

칼릭스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콰각!

칼릭스는 무너져 내리는 화강암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신의 거대한 팔이 그의 궤적을 가로막으려 휘둘러졌지만, 칼릭스는 공중에서 검을 휘둘러 허공에 뜬 낙석들을 단숨에 얼려 붙였다.

얼어붙은 암석들이 허공에 떠 있는 계단이 되었다. 칼릭스는 그 얼음 디딤돌을 밟고 번개처럼 허공을 질주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움직임이었다.

난간 위의 세드릭이 뒤늦게 이상을 감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저 미친놈이 어디를 노리는 거냐! 막아라!”

세드릭이 제어반을 세게 내리쳤지만, 마안의 통제선은 이미 엘리샤의 반발 마력과 엉켜 즉각적인 명령 전환을 거부하고 있었다. 거신의 반응이 반 박자 늦어졌다.

칼릭스는 거신의 거대한 흉곽 바로 앞까지 도약했다. 흑철로 뒤덮인 거신의 흉부, 엘리샤가 일러준 좌측 세 번째 늑골 뒤편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지맥의 마력과 세드릭의 황통 피가 미처 결합하지 못해 겉돌고 있는 치명적인 제어 결절이었다.

“사라져라.”

칼릭스의 서늘한 읊조림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검 끝에서 흑철 얼음 쐐기가 형성되었다. 가문의 수명을 갉아먹는 금기 마력이 칼날 전체를 시퍼런 냉기로 뒤덮었다.

푸쉬이익!

칼릭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세 번째 늑골의 틈새로 깊숙이 쑤셔 박았다.

얼음 쐐기가 결절의 중심핵을 관통했다.

순간, 거신의 몸체 내부에서 흐르던 붉은 마력 선들이 푸른 서리로 뒤덮이며 급격하게 팽창했다. 쇠가 부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지하 제단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거신의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던 거대한 마안통의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결절이 얼어붙으며 차단된 고대 지맥의 에너지가 본래의 순환로를 잃고, 마안과 연결되어 있던 세드릭의 동조선을 타고 고스란히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쿨럭!”

난간 위에 서 있던 세드릭의 입에서 거친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제어반을 짚고 있던 그의 양손에서 검붉은 스파크가 튀며 피부가 검게 그을렸다.

세드릭은 뒤로 휘청거리며 난간을 붙잡았다. 차갑고 침착하던 그의 녹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노골적인 경악이 들어찼다.

“마력이…… 역류한다고? 대체 무슨 짓을……!”

엘리샤는 비틀거리면서도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예상대로였다. 거신의 마안은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조종자의 신호를 주고받는 통로였다. 그 통로의 뿌리가 얼어붙었으니, 갈 곳을 잃은 거신의 파괴적인 마력은 가장 가까운 제어 단말인 세드릭의 신경계를 향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거신의 거대한 몸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좌측 흉부에서 시작된 균열이 흑철 장갑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칼릭스! 핵을 쪼개요! 충격파가 역류할 때 한 번 더!”

엘리샤가 찢어지는 굉음 너머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결절에서 터져 나온 냉기 폭풍이 거신의 흉곽 안쪽에서 불길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거신의 세 번째 늑골에 깊숙이 검을 꽂아 넣은 칼릭스는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상처 입은 어깨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칼릭스의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박살 나라.”

칼릭스가 검을 비틀며 가문의 결빙 마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흑철 얼음 쐐기가 사방으로 잔가지를 뻗으며 거신의 흉부 동력핵을 통째로 옭아맸다.

쩍, 쩌저적!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가는 소리가 제단 전체를 강타했다.

결절을 타고 거꾸로 치솟은 지맥의 마력이 얼어붙은 쐐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융합되지 못한 황실의 혈통 선이 불꽃을 튀기며 끊어졌다. 그 순간, 거신의 흉곽 내부에서 푸른 냉기와 검붉은 번개가 뒤엉킨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가장 먼저 터져 나간 것은 상층 제어반이었다.

“크아아악!”

난간을 붙잡고 버티던 세드릭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거신과 연결되어 있던 제어 석판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며 세드릭의 온몸을 덮쳤다.

동조선을 타고 역류한 마력 폭풍이 제어실 바닥을 뜯어내고, 세드릭의 양팔을 검게 태우며 그를 뒤편 화강암 벽체로 매섭게 내동댕이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드릭이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말끔하던 금발은 재투성이가 되었고, 화려한 황실 제복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핏물로 젖어 들었다.

그러나 재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통제선을 영구히 상실한 고대 거신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 거대한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피눈물을 흘리던 흉부의 붉은 마안이 완전히 부서지며 사방으로 핏빛 광선을 뿜어냈다. 쾅, 쾅! 허공을 가른 강철 주먹이 제단을 떠받치던 웅장한 기둥들을 차례로 박살 냈다.

천장이 통째로 쪼개지며 집채만 한 바윗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엘리샤!”

칼릭스가 폭발의 반동을 이용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얼음 파편들을 디딤돌 삼아 벼락처럼 강하한 칼릭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엘리샤의 허리를 단단히 낚아챘다.

“잡아!”

칼릭스의 거친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엘리샤는 칼릭스의 옷깃을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칼릭스는 거신의 거대한 팔이 바닥을 짓이기기 직전, 솟구치는 냉기 기류를 타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거신의 주먹이 엘리샤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거대한 분화구 같은 구덩이를 파냈다.

파쇄된 암석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사이로, 칼릭스는 무너져 내리는 난간 상층부를 향해 빙판을 경사로처럼 길게 깔아 올렸다. 마찰열로 피어오르는 냉기 연기 속을 뚫고, 두 사람은 마침내 안전한 상층 탈출 통로 난간에 거칠게 착지했다.

쿠웅!

밑바닥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좌측 흉부에서부터 허리까지 완전히 두 동강 난 거신이 균형을 잃고 머리부터 깊은 제단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거대한 강철 체구가 제단 바닥을 짓이기며 박살 나자, 자욱한 석분과 마력 연기가 홀 전체를 뒤덮었다.

마침내 거신의 푸른 안광도, 붉은빛도 모두 꺼졌다. 완전한 기동 중지였다.

엘리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세드릭을 내려다보았다.

세드릭은 부러진 팔을 감싸 쥔 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오만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이제 처절한 패배감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검 끝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검날에 맺힌 서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네놈의 오만한 연극은 여기서 끝이다, 세드릭.”

칼릭스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낮고 무거웠다.

세드릭이 피 묻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칼릭스를 노려보았다.

“칼릭스 드 라온……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제국의 황통을……!”

“황통의 피를 팔아 제국을 불태우려던 반역자가 지껄일 말은 아니지.”

칼릭스가 검을 겨누자 세드릭의 턱밑에 시퍼런 한기가 맺혔다. 황실 암살대도, 비호하던 원로원의 수석 집행관도 이미 사라진 지하 제단에서 세드릭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스스로 자초한 함정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은 꼴이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바닥을 뒤흔드는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거신이 쓰러지며 멈춘 줄 알았던 진동이 아니었다. 칼릭스의 발밑은 물론, 수십 미터 위의 황궁 본성 전체를 뒤흔드는 불길한 맥동이었다.

엘리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관찰자의 시야가 요동치며 시야 가장자리에 붉은 경고선들이 사납게 얽혀들었다.

“칼릭스, 비켜서요! 거신이 아니에요!”

엘리샤의 외침에 칼릭스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박살 난 거신의 거대한 흉곽 밑바닥, 산산이 조각난 마력 핵이 파고든 제단 바닥의 암반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거신의 심장이 부서져 나간 자리 밑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세드릭이 새겨 넣은 조잡한 황실의 제어 룬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핏빛보다 짙은 진홍색의 거대한 봉인진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엘리샤는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원작 소설 ‘별을 쫓는 마법사’의 미완성 설정집, 작가가 결말을 내지 못하고 잠적하기 직전 남겨두었던 단 하나의 미회수 떡밥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궁 지하에 묻힌 것은 고대 거신 하나가 아니었다.

거신은 재앙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 흑철의 껍데기는 제단 아래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를 짓누르고 가두기 위한 거대한 쐐기, 즉 봉인 장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드릭이 거신을 억지로 깨우고, 칼릭스가 그 심장 핵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쐐기 자체가 부러져 버렸다.

파지지직!

진홍빛 봉인진에 깊은 균열이 생기며, 그 틈새에서 차원이 뒤틀리는 듯한 검붉은 빛기둥이 황궁 상공을 향해 수직으로 뿜어져 나왔다. 지하 제단의 공기마저 타들어 가듯 붉게 물들었다.

세드릭조차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붉은빛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대체 무엇을 건드린 거지?”

무너진 심연의 바닥에서 지상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원초적인 포효가 울려 퍼졌다. 진짜 고대 재앙의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