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서릿발이 차폐벽의 암갈색 돌을 하얗게 짓이기며 뻗어 나갔다. 칼릭스의 검신에서 피어오른 냉기는 정면의 수석 집행관이 아니라, 우측 뒤편에 버티고 선 남동쪽 결계사의 발밑을 먼저 덮쳤다.
엘리샤의 외침을 들은 칼릭스는 단 반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의 궤적을 꺾었다.
“막아라! 결계 중심축을 보호해!”
수석 집행관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단도로 학장의 인장을 짓이기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노인의 손끝에서 찰나의 빈틈이 생겼고, 칼릭스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콰직!
두꺼운 얼음 송곳이 남동쪽 결계사의 무릎과 지팡이를 한꺼번에 꿰뚫었다. 지팡이 끝에 맺혀 있던 은색 결계핵이 급속 동결되며 허연 김을 뿜더니, 이내 유리가 깨지듯 파편을 흩뿌렸다.
“큭, 크아악!”
축을 담당하던 마법사가 바닥에 나뒹굴자, 사각 결계를 유지하던 은빛 장막 네 겹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뒤틀렸다. 균형을 잃은 마력이 거꾸로 결계사들의 호흡줄을 죘다. 나머지 세 명의 결계사 역시 턱을 뒤흔드는 반동에 휘청이며 피를 토해 냈다.
결계의 틈새가 벌어졌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로 그 균열을 똑똑히 보았다. 찢어진 은색 결계선들 사이로 수석 집행관이 쥐고 있는 통제 석판이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다. 학장의 마안 인장이 반쯤 갈려 나가며 내뿜던 보랏빛 불꽃이 사그라지자, 석판 중심부의 오래된 균열이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칼릭스, 지금이에요! 석판 정중앙의 홈!”
칼릭스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오른팔을 동여맨 붕대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마저 날카로운 얼음 가시로 굳어 수석 집행관의 안면을 겨누었다.
“이 불손한 놈이!”
수석 집행관이 비명을 지르며 왼손의 검은 단도를 휘둘렀다. 단도 끝에서 솟구친 흑마법의 촉매가 칼릭스의 가슴을 향해 쐐기 모양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칼릭스는 피하지 않았다. 검자루를 쥔 왼손에 극저온의 마력을 집중해 단도의 궤적을 쳐내고, 파열된 오른팔의 반동을 온몸으로 누르며 서릿발 서린 장검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쩌저적!
명중이었다.
칼릭스의 검날이 통제 석판의 갈라진 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두 뼘 두께의 흑철 석판이 비명을 지르듯 갈라지며 단번에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수석 집행관의 손에서 튕겨 나간 석판 조각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학장의 봉인 인장이 완전히 부서져 흩어지고, 결계사들이 전개했던 결계진도 산산조각 났다.
해냈다. 원로원이 증거를 은멸하기 위해 석판을 독점하려던 기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칼릭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발밑에서 서리가 자욱하게 퍼져 나가며 쓰러진 결계사들의 손발을 단단히 얼려 붙였다.
“끝났다, 집행관.”
칼릭스가 검끝을 수석 집행관의 목덜미에 바짝 들이댔다.
“네놈들이 황궁 지하에 숨겨 둔 것들을 낱낱이 밝혀내겠다. 세드릭의 궤적도 이 자리에서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수석 집행관은 칼날이 목에 닿았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의 주름진 입술이 비틀리며 기괴한 조소가 번졌다.
“끝났다고?”
수석 집행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턱을 적셨다.
“어리석은 것들. 네놈들은 정말 황태자 전하께서 그 조잡한 증거 하나 감추려고 우리를 이곳에 남겨 두셨다고 믿었느냐?”
엘리샤의 등줄기로 차가운 전율이 내달렸다.
그녀는 곧장 바닥에 나뒹구는 두 쪽 난 석판으로 시선을 던졌다. 푸르게 빛나던 관찰자의 시야 안에서, 쪼개진 석판 내부의 구조가 투명하게 벗겨져 드러났다.
그것은 단순한 통제 장치가 아니었다.
학장의 봉인 인장 아래, 그리고 세드릭이 새겨 두었던 황실 비전 룬의 더 깊은 이면에 또 다른 회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석판의 겉면은 증거를 담은 기록판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진짜 구조는 거대한 봉인의 빗장이었다.
외부의 힘으로 강제로 석판을 파괴했을 때에만 터져 나오도록 설계된, 역방향 기폭식.
석판 중심에 박혀 있던 마력 핵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며 맹렬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파괴된 단면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소멸하지 않고, 회랑 바닥을 뚫고 지하 깊숙한 지맥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안 돼……!”
엘리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칼릭스, 물러서요! 그 석판, 통제 장치가 아니에요! 파괴되는 순간 작동하는 최종 해제 장치였어요!”
원작의 미완성 설정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맞춰졌다. 세드릭은 석판을 지키려던 것이 아니었다. 황궁 지하 제단에 묻힌 고대 병기는 황실의 핏줄만으로는 완전히 깨울 수 없었다. 고대 제단의 본체와 연결된 외부 안전장치를 물리적으로 파괴해야만 심장의 봉인이 풀리는 구조였다.
세드릭은 원로원 집행관을 미끼로 던져, 칼릭스와 엘리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안전장치를 부수게 만든 것이다.
“크하하하!”
수석 집행관이 목덜미를 겨눈 서릿발 검날을 비웃으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것들, 전하께선 처음부터 너희가 그 석판을 부수길 기다리고 계셨다! 네년의 잘난 눈깔도, 드 라온 가문의 칼도, 황국의 거신을 깨우는 제물이 되었을 뿐이야!”
콰아아앙!
두 조각 난 석판의 핵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
파열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는 것과 동시에, 차폐 회랑의 바닥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지하 수백 척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숨을 들이켜듯, 거대한 마력의 공백이 지반 전체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충격파였다.
쿠구구구궁!
화강암으로 다져진 회랑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틈새 사이로 짙붉은 고대 지맥의 불길이 치솟더니, 칼릭스와 엘리샤가 서 있던 바닥 전체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엘리샤!”
칼릭스가 검을 거두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무너져 내리는 지반의 붕괴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지반 전체가 거대한 함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두 사람의 발밑에는 오직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심연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낙하하는 순간 허공이 찢겼다.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십 톤의 화강암 덩어리 사이로 칼릭스가 손을 뻗어 엘리샤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살을 에는 한기가 등 뒤를 덮쳤다.
“꽉 잡아.”
칼릭스의 쉰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새하얀 냉기의 궤적이 나선형으로 휘몰아쳤다. 부서진 천장과 바닥 파편들이 두 사람을 짓누르기 직전, 칼릭스가 휘두른 검 끝에서 솟구친 얼음 기둥들이 계단형 경사로를 만들어 냈다.
콰각! 콰지지직!
육중한 암석들이 빙벽에 부딪혀 산산이 튕겨 나갔다. 칼릭스는 빗발치는 낙석을 얼음 경사면으로 미끄러뜨리며 속도를 줄였고, 거대한 충격과 함께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구른 자리는 무너진 회랑 아래편, 지하 제단으로 이어지는 외곽 석조 통로였다.
“큭……!”
착지와 동시에 칼릭스가 무릎을 꺾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가 바닥을 짚은 오른팔에서 끔찍한 파열음이 울렸다. 붕대를 감아 두었던 소매가 터져 나가며, 살갗 아래 굵은 핏줄들이 거무죽죽하게 뒤틀려 부풀어 올랐다.
단순한 근육 손상이 아니었다. 파괴된 석판에서 터져 나온 고대 마력이 칼릭스의 결빙 마력과 뒤섞이며 역류하고 있었다. 검붉은 서리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를 타고 무서운 기세로 번져 올라갔다.
“칼릭스!”
엘리샤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칼릭스의 팔을 살폈다. 관찰자의 푸른 시야가 칼릭스의 상처로 파고들었다. 마력선 서른두 개가 완전히 꼬여 짓무른 채 폭주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심장까지 냉기가 번져 신경계가 모조리 얼어붙어 죽는다.
“손대지 마…… 역류한다.”
칼릭스가 이를 악물며 엘리샤를 밀어내려 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술마저 파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의 차가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가만히 있어요.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엘리샤.”
“말하지 마요. 호흡 흐트러지면 마력선이 통째로 끊어져요.”
엘리샤는 품속에서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를 꺼냈다. 대결투장 지하에서부터 간직해 온 물건이었다. 펜던트 중앙에 박힌 마력석은 칼릭스의 본래 마력과 공명하도록 새겨진 가문의 물건이었다.
엘리샤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튄 날카로운 석판 파편을 집어 들어 왼손 손바닥을 그었다.
“무슨 짓을……!”
“접지선이 필요해요.”
피가 배어 나온 손바닥으로 은제 펜던트를 움켜쥐자, 늑대 문양의 눈 부분에서 맑은 푸른빛이 번쩍였다. 엘리샤는 자신의 피와 체내 잔류 마력을 펜던트의 외부 회로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펜던트의 구조를 관찰자의 눈으로 해체해 재배열하는 작업이었다.
원작에서 드 라온 가문의 마력 폭주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혈통 마력과 같은 파장의 도체로 과부하를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엘리샤는 핏빛으로 물든 펜던트를 칼릭스의 부풀어 오른 손목 혈맥 위에 그대로 내리찍듯 눌렀다.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전신이 덜컥 튀어 올랐다. 검붉게 번져 가던 서리가 펜던트의 은빛 사슬을 타고 빠르게 빨려 들어왔다. 엘리샤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살인적인 냉기에 뼛속까지 시려 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을 떼지 않았다.
“통로 바깥쪽 암벽으로 마력을 버려요! 제 손을 타고 흐르는 회로를 따라요!”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엘리샤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펜던트와 자신의 손목을 붉게 적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칼릭스가 남은 왼손으로 바닥의 석조 바닥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쩌저적!
펜던트를 거쳐 정제된 잉여 마력이 바닥 균열을 타고 칠흑 같은 암반 속으로 빠져나갔다. 통로 벽면을 따라 서리꽃이 길게 피어나더니, 칼릭스의 팔에 돋아났던 검붉은 핏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어붙었던 피부 위로 더운 숨이 돌아왔다.
칼릭스가 펜던트를 쥔 엘리샤의 피투성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깊은 자책과 부채감이 묻어났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날 살리려다 당신 마력 통로까지 망가질 뻔했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요.”
엘리샤는 숨을 몰아쉬며 손을 거두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지만 감각을 다잡았다. 찢어진 옷자락을 뜯어 상처 난 손바닥을 질끈 동여매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세드릭의 목적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에요. 석판을 부수게 만든 것부터 회랑을 무너뜨린 것까지 전부 계획된 수순이었어요. 고대 제단의 거신을 깨우고, 그 재앙을 드 라온 가문의 반역으로 덮어씌워 황실 원로원과 제국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겁니다.”
칼릭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의 감각은 아직 온전치 않았으나, 검을 쥐는 손아귀에는 다시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부서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수십 길 위의 진입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거대한 바위더미로 막혀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은 사라졌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쿵. 쿵. 쿵.
통로 깊은 곳, 지하 제단 중심부에서부터 지맥을 타고 무겁고 거대한 고동이 전해져 왔다. 쇠붙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석벽을 뒤흔들었다.
“퇴로는 막혔군.”
칼릭스가 검을 고쳐 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여기서 도망쳐 봤자 끝은 멸망뿐이에요.”
엘리샤가 통로 안쪽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관찰자의 눈에 비친 어둠 저편은 온통 붉은 마력 선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재앙이 눈을 뜨고 있었다.
“내가 길을 볼 테니, 당신이 베어 넘겨요.”
칼릭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약하게 올라갔다.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에 망설임은 없었다.
“좋다. 네 눈을 믿지.”
두 사람은 붉은 맥동이 진동하는 지하 통로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석조 통로의 끝자락을 벗어나자마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바닥을 딛는 장화 밑창 너머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시야가 한순간에 트였다. 수십 길 높이의 천장을 떠받친 여덟 개의 석조 원기둥 너머로, 황궁 지하 깊숙이 묻혀 있던 거대한 원형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그것이 서 있었다.
거대한 흑철로 주조된 흉곽. 어지간한 성채의 망루를 통째로 깎아 넣은 듯한 고대의 거신이 쇠사슬에 얽힌 채 허공에 떠 있었다. 흉부 한가운데에 박힌 거대한 마력 핵은 핏빛으로 번뜩였고, 그 주위로 굵은 강철 도관들이 핏줄처럼 얽혀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방대한 마법진을 따라 검붉은 피가 흘러들고 있었다. 그 피는 호송 1호차를 깨부수고 빠져나왔던 제1황위 계승자의 것이었다.
제단 상층부, 십여 장 높이의 석조 난간 위에 세드릭 폰 아스타르가 서 있었다.
단단히 죄여 있던 푸른 마력 봉인구는 이미 바닥에 산산조각 난 채 뒹굴고 있었다. 상처 난 손바닥을 쥐어짜 피를 거신의 제어반으로 흘려보내던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에 비틀린 희열이 번득였다.
“끝까지 기어 올라왔구나, 버러지 같은 것들.”
세드릭의 목소리가 돔 형태의 천장을 울리며 낮게 내리꽂혔다.
“결계석을 손대던 그 밤부터였지. 네 그 기괴한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는 걸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지. 이제 그 눈으로 제국의 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을 똑똑히 지켜보아라.”
세드릭이 피 묻은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황통의 마력이 제단 바닥에 박힌 흑철 파이프를 타고 거신의 심장부로 빨려 들어갔다. 조금 전 회랑에서 부서진 통제 석판의 잔여 지맥이 세드릭의 피와 섞여 핵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우웅!
지하 암반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정지해 있던 거신의 흉곽이 거친 숨을 내쉬듯 부풀어 올랐다.
끼기긱, 쾅!
녹슨 톱니바퀴가 억지로 맞물리는 굉음과 함께 흑철로 된 거대한 어깨 관절이 움직였다. 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차례로 끊어져 나가며 바닥을 강타했다. 한 번 요동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편들이 벽면을 잘라냈다.
칼릭스가 엘리샤의 앞을 막아서며 빙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그의 도포 자락이 살벌한 마력풍에 거칠게 펄럭였다.
“세드릭. 고대 제단의 지맥을 건드린 자는 황족이라 해도 살아남지 못한다. 저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병기가 아니다.”
“통제? 크하하!”
세드릭이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통제할 필요 따윈 없다, 칼릭스. 네놈 가문의 반역으로 이 녀석이 풀려나 황궁을 짓밟고, 내가 이것을 베어 넘기는 영웅이 되면 그만이니까! 그러기 위해 네 손으로 그 석판을 부수게 만든 거다. 멍청한 것들!”
칼릭스의 턱선이 굳어졌다.
그러나 엘리샤는 동요하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선동에 휘말릴 시간 따윈 없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관찰자의 시야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수만 개의 푸른 선으로 해체되었다.
거신의 흑철 장갑판 아래, 핏빛으로 맥동하는 거대한 마력 핵의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복잡하게 얽힌 고대어 룬들 사이로 치명적인 빈틈이 보였다.
‘미완성이야.’
김수현 시절, 원작자가 연재를 중단하기 직전에 묘사했던 미회수 떡밥의 파편이 뇌리를 스쳤다. 고대 병기의 제어식은 완벽하지 않았다. 지맥을 받아들이는 흉곽 좌측 세 번째 늑골 뒤편, 제어선 세 개가 교차하는 부위에 마력이 융합되지 못한 채 하얗게 겉돌고 있었다.
세드릭의 황통 피조차 저 결함을 메우지 못해 불완전한 폭주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였다.
“칼릭스.”
엘리샤가 낮고 단호하게 불렀다.
“좌측 세 번째 늑골 안쪽이에요. 지맥 공급선과 황실 혈통 선이 맞물리지 못하고 튕겨 나가고 있어요. 핵을 직접 칠 필요 없어요. 저 결절 하나만 동결시켜 끊어내면 병기 자체가 제어 불능으로 자폭해요.”
칼릭스의 시선이 엘리샤가 가리킨 거신의 왼쪽 흉부를 날카롭게 훑었다.
“접근 경로는.”
“바닥에서 솟구치는 지맥 분출구를 딛고 도약해요. 사각지대는 우측 팔관절 아래 삼 척. 2초 뒤에 틈이 열려요.”
“알겠다.”
칼릭스의 발밑에서 짙푸른 서리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의 전신을 감싼 냉기가 바닥의 마력 역류를 얼려 붙이며 도약대를 형성했다.
칼릭스가 검을 거꾸로 쥐고 지면을 박차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거신의 거대한 흉곽 중앙에서 기괴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단순한 마력의 빛이 아니었다. 거신의 심장부에 박혀 있던 봉인석이 반으로 갈라지며,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거대한 고대의 마안이 똑바로 엘리샤를 응시했다.
쿵!
엘리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관찰자의 시야로 펼쳐져 있던 푸른 궤적들이 순식간에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거신의 마안에서 뿜어져 나온 정체불명의 고대 파동이 엘리샤의 망막을 타고 신경계 깊숙한 곳으로 강제로 쳐들어왔다.
“커억……!”
엘리샤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꺾었다.
눈앞이 붉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허공에 떠 있던 거신의 핵이 마치 살아 있는 괴물의 아가리처럼 엘리샤의 의식을 통째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엘리샤!”
도약하려던 칼릭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붉은 안광에 묶인 엘리샤의 몸은 싸늘하게 굳은 채, 깊은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