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제단 전체를 짓누르던 붉은빛이 암벽을 거칠게 갉아먹었다.
바닥 한가운데 쩍 갈라진 암반 틈새에서 진홍색 마력 줄기들이 살아 있는 덩굴처럼 치솟았다. 깨진 거신의 흑철 파편들이 그 붉은 파동에 닿자마자 삭아 내리며 검붉은 수증기를 뿜어냈다.
“물러서요, 칼릭스! 바닥에 닿으면 안 돼요!”
엘리샤는 부서진 난간 난간살을 짚고 소리쳤다. 눈앞에 떠오른 관찰자의 시야가 격렬하게 점멸하며 온통 핏빛 경고선으로 뒤덮였다. 거신이 틀어막고 있던 구멍은 단순한 지맥 통로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 제국 창건 이전부터 봉인되어 있던 근원적 파멸의 핵이었다.
칼릭스가 즉각 반응했다. 상처 입은 어깨를 움켜쥐면서도 왼손을 뻗어 난간 바닥에 냉기를 내리꽂았다. 살얼음이 순식간에 난간 표면을 덮으며 진홍빛 촉수가 기어오르는 속도를 늦췄다.
“저게 거신의 본체 밑에 깔려 있던 진짜 봉인이었군.”
칼릭스의 서슬 퍼런 시선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세드릭에게 닿았다.
세드릭은 잿빛으로 변한 손을 떨며 뒤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소매 틈으로 드러난 피부는 마력 역류로 인해 핏줄이 터져 흉측하게 부풀어 있었다. 금빛으로 단정했던 머리칼은 피와 그을음에 떡이 졌고, 날카롭던 녹색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사방을 배회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황국의 패자가 되어야 하는데. 고대 병기를 통제하고 역적 드 라온을 베어 넘길 영웅이 될 몸인데!”
세드릭이 목을 긁는 소리로 악을 썼다. 피를 쏟아내면서도 바닥의 돌멩이를 집어 칼릭스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칼릭스의 가슴팍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굳어 툭 떨어졌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로 제어반 잔해와 부서진 석판 조각의 잔여 파장을 훑었다. 붉은 마력 선들이 늑골 부근에서 얽혀 끊어진 형태가 망막 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단순한 통제 불능이 아니었다.
“세드릭, 똑바로 봐요. 당신이 잡고 있던 조작식은 애초에 결절이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었어요.”
엘리샤의 목소리가 붕괴하는 제단의 굉음을 가르고 차갑게 내려앉았다.
세드릭의 시선이 덜덜 떨리며 엘리샤에게로 향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천한 계집이……! 수석 집행관이 직접 내게 넘긴 황실 비전 식이다! 거신의 영혼을 묶는 유일한 정통 열쇠였다고!”
“정통 열쇠요? 그 룬 배열은 지맥을 거신에 동조시키는 식이 아니라, 세 번째 늑골의 결절로 과부하를 몰아넣는 자폭 회로였어요. 당신이 마력을 불어넣는 순간 이미 폭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던 거라고요.”
엘리샤는 바닥에 떨어진 흑철 제어판 파편을 발끝으로 툭 찼다. 파편에 새겨진 황실 룬 안쪽으로 원로원 고유의 삼각 인장이 음각되어 있었다.
“거신은 병기가 아니라 지하의 거대한 재앙을 짓누르던 쐐기였어요. 당신이 거신을 부수든, 칼릭스가 부수든 상관없었던 거예요. 원로원은 처음부터 거신의 핵을 깨뜨려 저 아래의 봉인을 풀 목적으로 당신 손에 기폭 장치를 쥐여준 겁니다.”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입술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거짓말 마라! 원로원은 내 편이다! 내가 황위에 오르면 제국의 모든 권력을 나누기로……!”
“네놈이 영웅이 되는 게 아니었어, 세드릭.”
칼릭스가 성큼 다가가 세드릭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세드릭의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려 난간 벽면에 처박혔다.
“원로원은 처음부터 널 제물로 던져 이 지하에 묻힌 진짜 재앙을 깨울 생각이었던 거다. 황태자가 금기 병기를 건드리다 자폭했고, 그 여파로 재앙이 깨어났다고 발표하면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남겠나?”
칼릭스의 싸늘한 일갈에 세드릭의 호흡이 멎었다.
“황실도, 우리 가문도 한꺼번에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고 쓸려 나간다. 그 뒤에 남는 건 제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원로원뿐이지.”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수석 집행관이 나를 배신할 리가…….”
세드릭이 부러진 손을 허우적거리며 칼릭스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거신의 마력 역류로 신경이 타버린 팔에는 어린아이 수준의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그사이 바닥의 균열은 더욱 넓어졌다.
쿠구구궁!
진홍빛 빛기둥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이 상층 난간의 석조 기둥들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천장에서 주먹만 한 낙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밑바닥의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이미 인간의 마법 체계로 해석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공간 자체가 비틀리며 귀를 찢는 이명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칼릭스, 시간이 없어요! 제단 전체가 가라앉고 있어요!”
엘리샤가 품에서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를 꺼내 쥐며 외쳤다. 펜던트의 표면마저 붉은 독기에 반응해 새까맣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칼릭스는 망설임 없이 왼손의 한기를 터뜨렸다.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세드릭의 두 발목에 두꺼운 얼음 족쇄가 채워졌다.
“크아악!”
냉기가 살갗을 파고들자 세드릭이 비명을 질렀다. 칼릭스는 비명을 무시하고 세드릭의 덜미를 낚아채 어깨에 둘러멨다.
“비상 격벽은 어디지?”
“저쪽이에요. 룬 회로의 배선이 북쪽 암벽으로 이어져 있어요. 황궁 지하 수로와 연결되는 비상 탈출구예요!”
엘리샤가 앞장서서 달렸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윗덩이를 칼릭스가 뻗어낸 얼음 쐐기로 쳐내며 길을 열었다.
무너져 내리는 회랑을 지나자 거대한 철제 격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실 비상 규격으로 제작된 두께 1미터의 아다만티움 합금 문이었다. 평상시라면 황족의 생체 마력이나 제어 인장으로 열려야 할 피난로였다.
“세드릭, 인장을 내놔.”
칼릭스가 세드릭을 격벽 앞 바닥에 내던졌다.
세드릭은 바닥을 구르며 피를 뱉어냈다. 공포와 모멸감에 젖은 눈으로 문을 올려다보던 세드릭이 이내 기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늦었어. 이미 늦었다고…….”
“헛소리 말고 인장이나 꺼내!”
엘리샤가 다가가 세드릭의 제복 안주머니를 뒤지려던 순간이었다.
치이익!
철제 격벽 표면에서 끔찍한 파열음이 울렸다.
문틈을 따라 짙은 남색의 마력 선들이 불길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을 여는 회로가 아니었다.
문틈 전체를 녹여 붙이며 외부에서 걸어 잠그는 원로원 고유의 삼중 봉쇄 결계였다. 룬 문자들이 뱀처럼 얽혀들며 격벽의 기계 장치와 수동 개폐 레버를 완전히 녹여 짓이기고 있었다.
“외부에서 결계를 쳤어요.”
엘리샤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관찰자의 시야에 비친 결계의 배후 흐름은 너무나 명확했다. 밖에서 원로원의 정예 결계사들이 마력을 쏟아부어 문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쇳덩어리로 용접해 버린 상태였다. 내부의 생존자가 누구든, 황태자든 칼릭스든 상관없이 단 한 명도 살려 내보내지 않겠다는 살의였다.
“수석 집행관…… 그 개자식이…….”
세드릭이 굳어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오만하던 황태자의 눈에 마침내 부인할 수 없는 절망이 들어찼다.
등 뒤에서는 심연의 진홍빛 마력이 제단의 마지막 계단마저 집어삼키며, 굶주린 짐승의 숨결처럼 상층 난간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벽에 붙어!”
칼릭스가 검을 빼 들어 등 뒤로 쇄도하는 검붉은 기류를 가로베었다. 칼끝에서 뿜어진 냉기가 붉은 파동과 맞부딪치며 자욱한 서리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틈을 타 엘리샤는 단단히 닫힌 아다만티움 격벽 앞으로 달라붙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시야 위로 얽히고설킨 마력선이 푸른 궤적으로 떠올랐다. 원로원의 인장이 새겨진 세 겹의 차폐식은 격벽의 틈새마다 쇳물을 들이붓듯 달라붙어 있었다.
지잉, 웅.
갑자기 격벽 한가운데에 새겨진 황실 문장이 일그러지더니, 허공에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뭉쳤다. 빛은 이내 은발을 정갈하게 빗어 넘긴 노인의 상반신으로 굳어졌다. 원로원 수석 집행관의 원격 투영 환영이었다.
“살아서 문 앞까지 기어 올라올 줄은 몰랐군.”
투영된 집행관의 잿빛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집행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세드릭이 피 묻은 손을 뻗으며 악을 썼다.
“당장 문을 열어라! 짐이 누구인지 잊었느냐! 황태자의 명령이다!”
환영 속 노인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오만한 황자여, 반역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재앙과 함께 묻히는 것이야말로 네놈이 제국에 바칠 마지막 쓸모다.”
“뭐라고?”
“드 라온의 반역에 휘말려 장렬히 순절한 비운의 황태자. 그대에게는 그럴싸한 영웅의 관이 씌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피를 딛고 원로원은 불온한 황통과 칼을 쥔 반역 가문을 동시에 쓸어낼 것이다.”
집행관은 품에서 붉게 맥동하는 보석을 꺼내 들었다. 지하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 마력의 파동과 똑같이 진동하는 핵이었다.
“거신의 껍데기를 부수고 봉인을 푼 대가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지맥을 쥐게 되었다. 네놈들이 심연 속에서 발버둥 치는 동안 정화의 불길이 이 지하를 통째로 지워 버릴 테지.”
투영체 뒤편의 격벽 표면에서 붉은 마법진 세 개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의 대인 말살 병기인 정화 마법 폭탄의 기폭 신호였다. 십 초도 남지 않은 카운트다운의 불꽃이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이 늙은이가…… 감히 나를!”
세드릭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품 속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금빛 독수리가 음각된 원통형 황실 비상 탈출 인장이었다. 황족 직계만이 지닌 공간 단거리 전이석이었다. 단 한 명만이 빠져나갈 수 있는 일회용 마도구였다.
“나 혼자라도 나갈 거다! 너희 버러지들은 여기서 잿더미가 되어 타 죽어라!”
세드릭이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인장의 안전 핀을 부러뜨리려 했다.
“세드릭, 멈춰!”
엘리샤가 소리쳤다.
“이 공간은 이미 고대 마력으로 뒤틀려 있어요! 좌표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간 마법을 쓰면 공간 틈새로 찢겨 나가요!”
“닥쳐! 네까짓 천한 계집의 말을 믿을 성싶으냐!”
세드릭은 광기에 차서 인장 상단을 엄지로 내리눌렀다.
파앙!
인장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마력이 세드릭의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탈출의 빛은 반 토막도 피어나지 못했다. 발밑의 바닥 균열에서 뻗어 나온 굵직한 진홍빛 마력 촉수가 번개처럼 솟구쳐 올랐다.
촤악!
“크아아악!”
순수한 고대 마력 덩어리가 세드릭의 두 발목을 칭칭 동여맸다. 인장의 황금빛과 진홍빛 고대 마력이 얽히며 불안정한 파열음을 냈다. 인장의 표면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칼릭스! 살려다오! 제발, 나를 끌어올려라!”
세드릭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칼릭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릭스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동정을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네가 자초한 결과다.”
투영체 속 집행관이 서늘하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작별이다, 황자 전하.”
그 순간, 인장이 거대한 진홍빛 마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산산조각 났다. 세드릭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붉은 촉수는 그를 통째로 낚아채 무너져 내리는 심연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던졌다.
쾅!
바닥 밑바닥에서 무거운 추락음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솟구쳐 올라왔다.
동시에 격벽에 새겨진 정화 폭탄의 룬이 번뜩였다. 남은 시간은 삼 초 남짓이었다. 집행관의 환영이 흐려지며 사라졌다.
“칼릭스, 오른쪽 아래!”
엘리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관찰자의 시야로 격벽 우측 하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가느다란 마력 결절선이 시야에 잡혔다.
“세 겹 결계지만 수동 배선과 만나는 접지 룬에 작은 균열이 있어요! 아까 세드릭의 인장이 터지면서 생긴 마력 파동에 원로원의 결계선이 꼬였어요!”
“파쇄 지점은?”
칼릭스가 검을 거꾸로 쥐며 몸을 낮췄다.
“우측 경첩 바로 밑, 마력 궤적이 십자로 교차하는 곳이에요! 거기를 부수면 문 뒤쪽 황궁 지하 수로의 수압 밸브가 함께 열려요!”
칼릭스의 오른팔에서 흑철 쐐기가 파열음을 내며 푸른 서리를 뿜어냈다.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꽉 잡아.”
칼릭스가 단 한마디를 뱉고 지면을 박찼다.
쐐기 끝에 응축된 한기가 송곳처럼 뾰족하게 뻗어 나가 격벽의 우측 접지 룬을 정확히 꿰뚫었다.
콰아아앙!
얼어붙은 아다만티움 금속판이 버티지 못하고 유리창처럼 금이 가며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벽 너머에 차올라 있던 거대한 지하 수로의 물줄기가 굉음을 내며 부서진 틈새로 쏟아져 들어왔다.
뒤편 제단 중심부에서는 마침내 정화 폭탄과 봉인진의 고대 마력이 한데 뒤엉켜 거대한 불기둥을 뿜어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쏟아지는 거센 물살 속에서 엘리샤의 허리를 낚아채며 부서진 틈새 너머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살이 머리끝까지 덮쳐들었다.
폐 속의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순간, 등 뒤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제단 지하에 갇혀 있던 정화 폭탄의 화염과 봉인진의 붉은 마력이 배수로 입구를 집어삼킨 탓이었다.
밀려드는 폭풍에 수로 전체가 요동쳤다. 머리 위의 거대한 화강암 천장에 쩍쩍 금이 가며 아이 머리만 한 암석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칼릭스는 거센 탁류 속에서도 엘리샤를 쥔 팔을 결코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배수로 벽을 짚은 그의 손가락 끝은 이미 굳어 있었고, 거칠게 내쉬는 숨결 사이로 시커먼 핏덩이가 섞여 터져 나왔다.
“칼릭스!”
엘리샤는 물살을 헤치며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칼릭스의 오른팔은 금기 마력의 반동으로 검붉은 서리가 혈관을 타고 어깨뼈까지 치고 올라온 상태였다. 그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려 가고 있었다. 수명을 깎아내는 마력을 한계 너머까지 쥐어짜 낸 대가였다.
“벽을…… 놓지 마라.”
칼릭스가 피를 토해 내듯 짧게 짓씹었다. 그의 목소리는 수압에 짓눌려 쇳소리가 났다.
“천장이 무너진다. 여기서…… 멈추면 그대로 수몰이다.”
“말하지 마요! 기운 아껴요!”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를 바짝 끌어올렸다. 흐린 물속에서도 배수로를 가로지르는 수류의 방향과 천장 균열선의 역학 구조가 청록색 선으로 또렷하게 엮였다.
뒤편에서 쫓아오는 검붉은 충격파의 유속은 초당 수십 보. 앞으로 이백 보 남짓 남은 외곽 수문까지 도달하기 전에 천장이 먼저 붕괴하여 두 사람을 흙탕물과 함께 생매장할 형국이었다. 게다가 칼릭스의 체내 마력로는 이미 산산이 부서져 추가적인 결빙 마법을 버텨낼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엘리샤는 품속에서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를 낚아챘다. 칼릭스의 피와 마력이 스며들어 있던 펜던트의 핵이 날카로운 한기를 품은 채 떨리고 있었다.
“칼릭스, 펜던트의 핵 제어권을 내게 넘겨요!”
칼릭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걸 네 마력선으로 억지로 틀어쥐면…… 신경계가 타 버린다.”
“지금 안 쓰면 둘 다 여기서 뼈도 못 추려요!”
엘리샤는 주저 없이 펜던트 뒷면의 보조 각인을 손톱으로 후벼 팠다. 뾰족한 은제 모서리가 살갗을 찢으며 피가 흘러나왔다. 엘리샤의 피가 닿자마자 펜던트 내부에 잠들어 있던 칼릭스 가문의 한기가 폭주하듯 솟구쳤다.
손바닥 전체가 얼어붙어 감각이 사라지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관을 찔렀다. 엘리샤는 이를 악물고 펜던트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한가운데로 내던지며 관찰자의 시야로 계산한 수류의 중심축에 때려 박았다.
“얼어붙어라!”
펜던트에서 터져 나온 냉기가 쏟아지는 물살과 부딪치며 거대한 쐐기 형태로 응고되었다. 칼릭스의 잔여 마력과 배수로의 엄청난 수압이 결합하자, 얼음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수류를 수직으로 치받는 거대한 빙벽 방파제로 솟구쳤다.
콰아아앙!
등 뒤를 덮치던 검붉은 폭발 화염이 거대한 얼음 방파제에 가로막혀 굉음을 냈다. 밀폐된 수로 안에서 갈 곳을 잃은 거센 수압이 얼음 경사면을 타고 위쪽으로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두 사람은 수직 환기구의 철창을 뚫고 솟구치는 물기둥과 함께 지상으로 튕겨져 나갔다.
쿵!
질척한 흙바닥 위로 굴러떨어진 엘리샤는 폐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 공기에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흙탕물과 핏물을 게워 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은 황궁 외곽의 폐허 정원이었다. 버려진 분수대와 말라비틀어진 정원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등 뒤에서는 두 사람이 빠져나온 지하 수로 환기구가 우르릉거리는 굉음과 함께 통째로 함몰되고 있었다. 황궁 지하 제단 전체가 무너지며 땅 밑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소리였다.
“칼릭스!”
엘리샤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칼릭스에게 기어가듯 다가갔다.
칼릭스는 검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오른팔은 흑철 쐐기의 잔여 서리에 덮여 감각을 잃은 채 늘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칼릭스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엘리샤의 팔을 낚아채듯 부축했다.
“다친 곳은.”
“내 걱정 할 때가 아니잖아요. 팔이…….”
“뼈는 붙어 있다.”
칼릭스는 거칠게 말을 자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고통을 억누르느라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푸른 눈동자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정원 너머, 밤하늘을 올려다본 엘리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궁 본성과 에테르나 아카데미 상공을 완전히 뒤덮은 것은 짙은 어둠이 아니었다. 핏빛으로 물든 거대한 삼중 원형 결계가 제국 수도의 하늘 전체를 돔 형태로 가두고 있었다. 황실 원로원이 국가 비상사태에만 발동하는 최고 등급의 단죄 결계, 피의 계엄령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결계 장막 너머로, 증폭석을 통과한 굵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도 전역에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원로원 수석 집행관의 목소리였다.
황태자 세드릭 폰 아스타르 전하께서 서거하셨다.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단호한 선언이었다.
반역자 칼릭스 드 라온과 정체불명의 공모자 엘리샤는 결투장 지하 유적을 파괴하고 황궁 지하 제단에 침입하여 고대 재앙의 봉인을 해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려던 황태자 전하를 잔혹하게 살해한 뒤 도주했다.
“……뭐라고?”
엘리샤의 입술 사이로 헛숨이 새어 나왔다.
수석 집행관은 제 손으로 세드릭을 미끼로 던져 죽게 만들고 봉인을 깨뜨려 놓고는, 그 모든 죄과를 칼릭스와 자신에게 고스란히 덮어씌운 채 이미 지상을 장악해 버린 것이었다. 황실과 드 라온 가문을 동시에 반역자로 몰아 숙청하겠다던 그의 음모는 지하에서 두 사람이 빠져나오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황실 최고 재판소와 원로원의 이름으로 제국 전역에 1급 즉결 처형령을 선포한다. 두 반역자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라. 숨겨주거나 방조하는 자는 가문 전체를 멸문할 것이다.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하늘에서 번쩍이는 마력의 파문이 일었다.
결계의 결절마다 박혀 있던 수백 개의 진홍빛 감시 마안이 일제히 눈을 뜨며, 지상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거대한 붉은 빛줄기들이 수도의 거리와 건물들을 차례로 비추며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우리가 빠져나온 곳은 출구가 아니에요…….”
엘리샤는 피로 물든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 전체가 이미 원로원의 거대한 사냥터로 바뀌어 버렸어요.”
칼릭스는 말없이 성치 않은 왼손으로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부러진 칼날 위로 밤하늘의 붉은빛이 섬뜩하게 반사되었다.
그 순간, 폐허 정원 상공을 맴돌던 거대한 감시 마안 세 개가 방향을 꺾었다.
피할 틈도 없이, 서늘한 진홍색 탐색 광선이 엘리샤와 칼릭스가 서 있는 바닥을 정면으로 내리꽂았다.
결계 경보음이 귀청이 찢어져라 황궁 외곽 전체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