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를 돌리는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엘리샤는 소리 없이 문틀을 밀고 복도로 나섰다. 심야의 기숙사 복도는 정적에 잠겨 있었으나, 창밖 너머 훈련장 쪽에서 번지는 푸른빛의 잔흔은 여전히 대기를 미세하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엘리샤는 잔디를 밟는 대신 훈련장 외곽을 둘러싼 석조 회랑의 그늘을 골라 밟았다. 신발 바닥이 흙과 스치는 소리조차 지우는 것은 그녀가 지닌 관찰자 능력 덕분이었다. 시야 사각을 파고들 때, 주변의 시선과 인지가 자연스럽게 비껴가는 감각. 원작 소설에서 엑스트라였던 엘리샤의 존재감이 일종의 은폐 수단으로 치환된 결과였다.
낡은 창고는 훈련장 서쪽, 잡목림과 맞닿은 음지에 버려지듯 서 있었다. 부서진 목재와 결계용 차폐석 찌꺼기가 널브러진 건물 외벽에 이르렀을 때, 틈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누르스름한 불빛이 보였다.
창고 판자벽의 벌어진 틈새에 한쪽 눈을 가져다 댔다.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아카데미 하급 관리인 복장을 걸치고 있었으나 허리춤의 거친 태도로 보아 본래 직책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을 깊숙이 가린 칠흑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고 중앙의 탁자 위에는 사흘 뒤 열릴 아카데미 연례 마법 경연 대회의 표식이 새겨진 붉은 목각 상자가 열려 있었다. 상자 안쪽 벨벳 천 위에는 대회 결선에 쓰일 공인 마법석 세 덩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로브를 쓴 자가 품 안에서 가느다란 유리관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관 속에는 검푸른 빛을 띠며 끈적하게 요동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결계 점검은 확실히 돌려놓았겠지?"
로브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긁히는 듯했다. 관리인 복장의 남자가 창고 문 쪽을 흘깃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의 측근들이 오늘 밤 서고 쪽 기록을 확인하느라 경비 동선이 비었습니다. 사흘 뒤 본선 직전까지 이 창고는 아무도 봉인을 풀지 않습니다."
"좋아. 흠집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다."
로브를 쓴 자가 유리관의 마개를 비틀어 뽑았다. 찰나, 역한 유황 냄새와 함께 바닥에 깔린 먼지가 둥글게 밀려났다. 금지된 흑마법 촉매였다. 마력을 강제로 증폭시키되, 소유자의 마력 핵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고대 주술의 파편. 원작 텍스트에서 묘사되었던 재앙의 도화선이 지금 눈앞의 마법석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검푸른 액체가 붉은빛의 마법석 표면에 닿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마법석 내부의 마나 결이 비틀리는 파동이 목재 벽 너머 엘리샤의 피부까지 따갑게 찔러왔다.
로브를 쓴 자가 유리관을 거두며 비열한 어조로 뇌까렸다.
"이걸 쓰면 사흘 뒤 무대에서 드 라온의 피가 알아서 폭주하겠지. 계획대로 흔적 하나 남기지 마라."
"그 천재 나으리가 제 손으로 무대를 박살 내고 피를 토할 때쯤이면, 아스타르 가문이 원하던 명분도 완성될 겁니다."
"말이 많다. 상자 닫고 봉인 인장을 원래대로 찍어 둬."
엘리샤는 숨결을 멈추고 관찰자의 인지 영역을 최대로 좁혔다. 심장이 거칠게 바닥을 쳤으나 발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계산은 명확했다. 지금 뛰어들어 고발해 봐야 아카데미 내에서 엑스트라인 고아 학생의 말 따위는 아무런 증거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현장에서 제거당하거나 세드릭의 세력에게 입막음당할 뿐이었다.
기록해야 했다. 침입자의 손목 안쪽에 새겨진 독특한 삼각형의 마력 낙인, 주입된 촉매의 양, 그리고 마법석 상자에 다시 찍히는 위조된 인장 형태까지.
엘리샤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낡은 일기장을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모서리를 매만졌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암투가 아니었다. 칼릭스를 파멸시키고, 나아가 아카데미를 고대 마법 재앙의 시험장으로 밀어 넣으려는 세밀한 톱니바퀴였다.
탁, 소리와 함께 목각 상자의 뚜껑이 닫혔다. 관리인 복장의 사내가 품에서 녹인 붉은 밀랍을 붓고 도장을 찍어 눌렀다. 감쪽같이 원래의 보관 상태로 돌아간 상자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서늘하게 빛났다.
"먼저 나간다. 뒤처리는 네 몫이다."
로브를 두른 자가 창고 뒷벽에 설치된 환기용 쪽창을 능숙하게 걷어찼다. 마법으로 잠금장치를 해제한 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뒤이어 관리인 사내도 호롱불을 끄고 정문을 통해 훈련장 외곽으로 사라졌다.
사방에 다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엘리샤는 창고 문턱 옆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잠시 머물며 훈련장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관리인은 기숙사 뒤편 관리동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고, 로브를 쓴 자의 마력 흔적은 훈련장 반대편의 공터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발소리를 죽인 채 낡은 창고를 벗어났다. 흙먼지 묻은 교복 자락을 여미며 그림자가 향했던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잡목림 너머 공터에서 억눌린 파열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제어되지 못한 채 날카롭게 갈라진 마력이 허공을 찢는 파열음.
엘리샤의 고개가 즉각 그쪽으로 돌아갔다. 로브를 쓴 자의 자취가 아니라, 푸른빛의 은은한 마력이 요동치다 꺾이는 지점이었다. 훈련장 한구석,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 은발의 인영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칼릭스 드 라온이었다.
칼릭스의 입술 틈으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짚은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은빛 불꽃이 제어 없이 튀어 올랐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른 풀잎들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억지로 틀어막은 마력이 몸 안의 혈로를 거꾸로 치받는 소리가 공터를 가득 채웠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짧은 지문 몇 줄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가문의 비전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홀로 밤마다 수련을 거듭하다가 마력 역류를 겪는 천재의 고독한 일화.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현실은 서늘했다. 그것은 고독 따위의 낭만적인 문장으로 포장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칼릭스의 마력 경로는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활시위와 같았다. 조금만 더 압력을 가하면 핵 자체가 파열되어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엘리샤는 나무 등걸 뒤에 붙어 서서 계산을 굴렸다.
관찰자의 영역에 머무른다면 여기서 물러서는 것이 맞았다. 원작의 주연에게 말을 섞는 순간, 배경의 일부로 묻혀 있던 엘리샤라는 인물은 서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세드릭의 정보망이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훑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용히 생존하겠다는 목표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칼릭스가 여기서 무너지면 이야기는 완전히 탈선한다.
사흘 뒤 마법 경연 대회에서 칼릭스는 아스타르 가문의 함정을 정면으로 받아쳐야 하는 핵심 축이었다. 그가 제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창고에서 목격했던 흑마법 촉매는 칼릭스를 거치지 않고 아카데미 전체를 집어삼키는 재앙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방관은 곧 파멸이었다.
결단은 길지 않았다. 엘리샤는 품에 안고 있던 낡은 일기장을 쥐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낙엽 밟는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요. 더 마력을 끌어올렸다간 사흘 뒤 경연 대회는커녕 마력 핵이 먼저 터져나갈 테니까요."
정적을 가르는 목소리에 칼릭스의 고개가 홱 꺾였다. 푸른 눈동자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엘리샤를 향했다. 은발 사이로 굳은 피를 묻힌 그가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너는 누구지? 내 마력 상태를 어떻게 아는 거냐."
낮게 긁히는 음성이었다. 엑스트라의 낡은 교복을 입은 평범한 여학생을 향해, 그는 즉시 살기를 세웠다. 몰락한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뼈에 새겨진 방어기제였다. 한 발짝만 더 다가가면 마력 칼날이 목을 벨 기세였다.
엘리샤는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편집 시절 수십 번도 더 퇴고했던 원작 설정집의 문장을 머릿속에서 꺼냈다.
"라온 가문의 성각 마법식은 3서클 순환로를 강제로 좁혀서 출력 속도를 올리죠. 하지만 당신의 마력 핵은 이미 과열 상태예요. 좁아진 관으로 억지로 마력을 밀어 넣으니까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다. 가슴 쪽 혈로를 닫고, 양쪽 손목의 배출구부터 여세요."
칼릭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문 내에서도 직계에게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호흡법의 구조였다. 외부인은커녕 아카데미의 어떤 원로 교수도 지적하지 못했던 결함을, 눈앞의 이름 모를 학생이 너무나 담담하게 읊고 있었다.
"헛소리 마라. 흐름을 역전시키면 그 자리에서 마력이 폭주한다."
"핵으로 되돌리려 하니까 터지는 거예요. 어깨를 거쳐 견갑골 쪽 보조 경로로 마력을 흘려보내요. 찌꺼기 마력을 밖으로 태워 버리란 뜻입니다. 죽고 싶다면 계속 고집을 부려도 상관없지만."
엘리샤는 냉랭하게 말을 맺으며 반 걸음 물러섰다. 더는 설득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온몸을 휘감던 은빛 마력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몸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같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가 엘리샤가 말한 대로 손목의 마력 경로를 개방했다. 동시에 견갑골 쪽의 막힌 통로를 억지로 뚫어 역류하던 기운을 비껴가게 만들었다.
콰아앙!
공터의 허공으로 은빛 열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거세게 흔들리며 잔불이 흩어졌다. 칼릭스는 바닥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짓누르던 파괴적인 압박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엉켜 있던 마력의 매듭이 제자리를 찾아 흘러가기 시작했다.
극심했던 고통이 가라앉자, 칼릭스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엘리샤가 서 있던 자리를 쏘아보았다.
"대체… 정체가 뭐냐."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숲 저편에서 규칙적인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카데미 외곽을 도는 순찰대였다. 로브를 두른 사내의 침입 흔적을 쫓아온 황실 마법단의 순찰조일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샤는 이미 몸을 돌려 잡목림 속으로 발을 디딘 뒤였다.
"기다려!"
칼릭스가 휘청거리며 손을 뻗었지만, 엘리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관찰자의 은신 감각을 극대화하며 순찰대의 시야 사각을 파고들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빠져나오는 순간, 품에 안고 있던 낡은 일기장의 모서리가 거친 나뭇가지에 걸려 덜컹 흔들렸다. 갈피 사이에 끼워두었던 얇은 양피지 조각 하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원작의 경연 대회 진행 순서와 결계석의 배치도가 깨알같이 적힌 메모지였다.
엘리샤는 손을 뻗으려 했으나, 바로 지척에서 횃불의 불빛이 숲길을 비추었다. 주워 담을 시간이 없었다. 발각되는 즉시 황실의 심문을 받게 된다.
결국 엘리샤는 낙엽 위로 떨어진 양피지를 남겨둔 채 어둠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겼다. 등 뒤에서 순찰대의 차가운 목소리와 칼릭스의 날 선 기운이 충돌하는 소리가 서늘하게 메아리쳤다.
본관 훈련장 회랑은 서늘한 아침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대결투장 외곽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원형 결계석 일곱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아카데미 연례 마법 경연 대회를 사흘 앞두고 진행되는 결계석 사전 점검 현장이었다.
엘리샤는 본관 2층으로 이어지는 석조 기둥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관찰자’의 감각을 곤두세우자 주변 사람들의 시야에서 엘리샤의 윤곽이 흐릿하게 지워졌다. 눈에 띄지 않는 갈색 머리와 평범한 교복 차림은 회랑의 짙은 그림자 속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아래쪽 결계석 주변에는 황실 문양이 새겨진 정복을 입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찬란한 금발을 단정하게 넘긴 사내, 황태자 세드릭 폰 아스타르가 서 있었다.
세드릭은 화려한 금실 자수가 놓인 순백의 제복을 걸친 채, 결계석 상단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연 대회의 안전을 직접 챙기는 자애롭고 유능한 차기 황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곁으로 다가선 황실 마법단장의 태도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전하, 요청하신 대로 결계의 술식을 재조정해 두었습니다."
마법단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두루마리 하나를 세드릭에게 건넸다. 세드릭은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결투장 중앙을 내려다보았다.
"대결투장의 방어 결계는 경연 당일 손쉽게 해제되도록 사전 조치될 것이다. 오차는 없겠지?"
세드릭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기둥 뒤에 숨은 엘리샤의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예, 전하. 겉보기에는 4중 방어막이 완벽하게 가동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 파장의 신호탄이 터지는 순간 동쪽과 북쪽의 보조 결계석이 즉각 과부하를 일으키며 붕괴합니다. 결계 내부의 충격파는 고스란히 경기장 중앙으로 집중될 것입니다."
"칼릭스 드 라온의 마력 제어가 불안정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녀석은 이번 대회에서 가문의 명예를 걸고 금기시된 술식을 꺼내 들 가능성이 높아."
세드릭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춰진 서늘한 냉혹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폭주가 일어나면 즉시 황실 기사단이 칼릭스를 반역 혐의로 체포할 것이다. 드 라온 가문이 숨겨온 고대 마법 재앙의 잔재를 확인하고,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싹을 잘라내야지. 아카데미의 안전을 위협한 죄목이라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단 매복조는 이미 동쪽 회랑 지하에 배치를 완료했습니다."
엘리샤는 기둥을 짚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세드릭의 계획은 치밀했다. 어젯밤 창고에서 목격했던 검은 그림자의 마법석 조작, 그리고 칼릭스의 마력 폭주 유도까지. 모든 퍼즐이 세드릭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세드릭은 단순한 라이벌 의식으로 칼릭스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드 라온 가문의 힘을 완전히 해체하고 황권을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이번 대회를 통째로 기획한 것이었다.
원작 소설의 미완성 파편 속에서 독자들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경연 대회 참극’의 전말이 눈앞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작의 칼릭스는 영문도 모른 채 폭주 누명을 쓰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황실의 철저한 사전 공작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칼릭스가 마력을 다잡지 못하고 결투장에 오르는 순간, 세드릭의 덫에 그대로 걸려든다.’
엘리샤는 품속의 낡은 일기장을 더듬었다.
어젯밤 칼릭스에게 마력 경로를 바로잡는 방법을 일러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계석 자체가 조작되어 있다면 칼릭스가 제아무리 마력을 억눌러도 강제적인 외부 파동에 의해 폭주를 일으키게 된다. 사흘 안에 조작된 결계석의 마법식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거나, 세드릭의 계획을 무력화할 증거를 찾아야 했다.
손익 계산은 명확했다. 칼릭스가 무너지면 아카데미 전체가 황실의 계엄하에 놓이고, 관찰자인 엘리샤 역시 신분 검증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세드릭의 독주를 막아야 했다.
엘리샤는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황실 마법단원들이 점검 장비를 챙겨 회랑 반대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금이 자리를 벗어날 최적의 기회였다. 엘리샤는 몸을 돌려 나선형 계단 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계단참 아래쪽에서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벅, 벅.
차분하지만 바닥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한 보폭이었다.
엘리샤는 멈춰 섰다. 나선 계단 모퉁이를 돌아서 올라온 인물은 세드릭 폰 아스타르였다.
방금 전까지 대결투장 결계석 앞에 서 있던 그가 어느 틈에 본관 2층 계단으로 올라와 있었다. 거리를 가늠해 보면 결계석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직후 곧바로 계단실 통로를 이용해 올라온 셈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엘리샤는 표정을 지우고 벽 쪽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평범한 아카데미 하급생처럼 고개를 숙이며 황태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척했다. 관찰자의 특성이 아직 작동하고 있다면, 지나가는 수많은 무명 학생 중 하나로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엘리샤를 지나치지 않았다.
세드릭의 걸음이 엘리샤의 바로 두 걸음 앞에서 멎었다. 서늘한 금속제 견장과 황금빛 견사가 엘리샤의 시야에 가득 찼다.
"지나가던 학생인 척하기에는 서 있는 위치가 묘하군."
세드릭의 나직한 목소리가 복도의 적막을 갈랐다. 엘리샤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 자습실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전하의 통행을 방해할 뜻은 없었습니다."
"자습실이라. 교재도 없이 낡은 일기장 하나만 품에 안고 2층 외곽 회랑을 서성인다라……."
세드릭이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복 안주머니로 향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드릭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네 귀퉁이가 거칠게 뜯겨 나간 얇은 양피지 조각이었다. 어젯밤, 숲속에서 칼릭스와 마주친 뒤 순찰대를 피해 달아나다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뜨렸던 바로 그 메모지였다.
세드릭은 엘리샤가 흘린 종이 조각을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아카데미 결계석 일곱 개의 위치와 마력 파동의 사각지대, 그리고 경연 대회 진행 순서가 펜으로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새벽 순찰대가 숲 가장자리에서 재미있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주웠거든. 아카데미 결계석의 약점과 마력 경로가 전문가 수준으로 분석되어 있더군. 이걸 흘린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세드릭의 녹색 눈동자가 서늘한 칼날처럼 번뜩이며 엘리샤의 얼굴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바로 너였나?"
회랑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세드릭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찌릿하게 일며 양피지 조각을 태울 듯이 감쌌다. 도망칠 곳 없는 좁은 계단 참에서, 황태자의 시선이 엘리샤의 숨통을 정조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