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4화 · AI 작가 백야

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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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모서리를 갉아먹듯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멎었다. 세드릭의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진 재 한 점이 계단 바닥으로 흩날렸다.

엘리샤는 품속의 일기장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았다. 방어 자세를 취하거나 몸을 굳히는 순간, 황태자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그녀는 바닥에 떨군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세드릭의 제복 단추에 맞췄다.

"어디서 났느냐고 묻고 있다."

세드릭이 한 걸음 다가섰다. 긴 그림자가 엘리샤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칼자루를 쥐지 않은 손이었지만, 반지에 박힌 마정석에서 피어오르는 냉기가 피부를 찔렀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필적은 이미 저 양피지에 박혀 있고, 이 자리에서 발뺌해 봤자 일기장을 압수당하면 끝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진실의 조각을 섞어 의도를 비트는 것.

"도서관 지하 서고 정리 도중 주운 낙서였습니다."

엘리샤의 목소리는 갈라짐 없이 평이하게 흘러나왔다.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를 꾸며내는 대신, 규정을 어긴 하급 장학생 특유의 뻣뻣한 건조함을 택했다.

"낙서?"

"지난 학기 상급 마법진 강독 수업의 참고 도서 사이에 끼어 있던 파편이었습니다. 정리가 끝난 폐기 도서였기에 마력 유로(流路)의 도해만 따로 옮겨 적어 두었을 뿐입니다."

"하급생 따위가 고대 결계의 중첩식을 베껴 적어 숲속을 배회했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논문 조교 자리가 필요합니다. 결계석의 마력 감쇠율을 분석해 담당 교수님께 제출할 연구 계획서를 작성 중이었습니다. 통금 시간 이후 숲에 들어간 것은 규정 위반이 맞으나,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불온한 의도는 없습니다."

엘리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편집자 시절, 사고를 친 작가들이 면피용으로 둘러대던 뻔한 알리바이 구조였다. 모든 것이 사실에 기반하지만, 핵심인 ‘칼릭스를 구하기 위한 동선’과 ‘흑마법 촉매’라는 알맹이만 쏙 빼놓은 답변.

세드릭의 서늘한 녹색 눈동자가 엘리샤의 정수리를 짓눌렀다. 계단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황태자의 견식 술이 가볍게 흔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공기는 무거워졌다.

"이 종이에 적힌 것은 단순한 감쇠율 계산이 아니다."

세드릭이 양피지를 접어 엘리샤의 턱 끝을 툭 쳤다. 까칠한 양피지 감촉이 턱선에 닿았다.

"대결투장을 감싼 일곱 개 결계석 중, 동쪽 4번과 북쪽 2번의 간섭 주기를 정확히 짚어냈더군. 이건 상급 마법진 강독을 듣는 졸업반도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맹점이다. 게다가 잉크가 마른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어."

세드릭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아 출신의 무명 장학생 치고는 눈이 지나치게 밝군. 네 뒤에 누가 있지? 드 라온 가문인가? 아니면 평의회 쪽 늙은이들인가?"

엘리샤는 숨을 고르며 눈을 깜빡였다. 세드릭의 머릿속 계산이 읽혔다. 그는 이미 엘리샤를 특정 세력의 첩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라온 가문을 부정하거나 결백을 맹세하면, 오히려 그를 자극해 즉각 지하 감옥으로 끌려갈 뿐이다. 황태자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그렇다면 변수가 아니라 써먹을 수 있는 도구로 보여야 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만약 라온 가문의 사주를 받았다면, 동쪽 4번 결계석의 마력 굴절이 성각 마법의 전개 궤적을 튕겨낸다는 치명적인 간섭까지 메모에 적어 두었을 겁니다."

세드릭의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올라갔다.

"호오."

"라온 가문의 비전식은 중심핵으로 마력을 강하게 응축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4번 결계석의 주파수가 뒤틀리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쪽은 시전자의 핵입니다. 제가 그쪽 사람이라면, 결계석의 위치를 메모할 게 아니라 그 간섭을 회피할 차폐식을 적었겠지요. 종이에는 오직 구조의 파결점만 적혀 있었습니다."

엘리샤는 정확한 사실만을 던졌다. 어젯밤 낡은 창고에서 목격했던 촉매의 주입 흔적, 그리고 결계석이 조작된 방식의 기술적 모순을 건드린 것이다.

세드릭은 들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흥미와 냉혹함이 교차했다.

"말솜씨가 제법이군. 네가 정말 결함만을 짚어낸 것이라면, 드 라온 가문을 위한 첩자가 아니라…… 그들의 명줄을 끊어놓을 수 있는 칼을 쥐고 있는 셈이 아닌가."

세드릭이 양피지를 제복 안주머니로 다시 밀어 넣었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멎자마자, 그가 엘리샤의 어깨를 툭 쳤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어깨뼈를 타고 묵직한 마력이 파고들어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위협이자 낙인이었다.

"이름이 뭐지?"

"엘리샤입니다."

"엘리샤. 네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없다."

세드릭이 몸을 돌려 계단 난간에 한 손을 얹었다. 그의 시선은 2층 회랑 너머,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대결투장의 거대한 석조 결계석들을 향하고 있었다.

"네 손재주와 눈썰미가 그토록 뛰어나다면, 구석에서 쥐새끼처럼 엿볼 이유가 없지. 이틀 뒤 경연 대회의 결계석 관리 보조로 직접 들어와 증명해라."

엘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계석 관리 보조. 그것은 겉보기엔 명예로운 차출이었지만, 실상은 세드릭의 함정 한가운데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결투 당일 조작된 결계가 폭주하여 참사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할 현장 희생양 자리였다.

"전하, 저는 일개 하급생에 불과하여 대회의 결계를 다룰 자격이……."

"거절할 권리를 준 적은 없다."

세드릭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자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정오까지 대결투장 지하 관리실로 출석해 서약서에 서명해라. 황실 마법단 소속 정비조에 네 자리를 비워두도록 하지. 만약 정오까지 나타나지 않거나 교문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면……."

세드릭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계단 참 아래쪽을 향해 손짓을 한 번 건넸다.

석조 기둥 뒤편의 그늘 속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황실 마법단원 두 명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 끝에 은은한 추적술식이 맺혀 있는 자들이었다.

"이틀 뒤 결선이 끝날 때까지, 이 아이의 뒤를 밟아라.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보고할 것."

"명령을 받듭니다, 전하."

마법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세드릭은 더 이상 엘리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긴 망토를 휘날리며 1층 회랑으로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엘리샤는 제자리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감시가 붙었다. 완전히 퇴로가 차단된 셈이었다. 정오까지 관리실로 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이틀 뒤 경연 대회 당일에는 폭주하는 결계석 바로 옆에 서 있어야 한다.

엘리샤는 품속의 일기장 표면을 덧그렸다.

세드릭은 엘리샤를 결선 날 칼릭스의 숨통을 끊을 말단 패로 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계 관리 보조라는 직책은, 역설적으로 조작된 결계석의 마법 회로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했다.

‘이틀이다.’

엘리샤는 뒤편 기둥에 숨어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한 두 개의 시선을 의식하며 몸을 돌렸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드릭이 파놓은 덫의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그전에, 어젯밤 구해낸 칼릭스 드 라온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복도 양끝을 지키는 황실 마법단원의 시선은 일정했다. 삼 분 간격으로 고개를 돌려 시야를 교차시키는 정석적인 순찰 방식이었다. 엘리샤는 기둥 그림자 속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존재감을 지우는 관찰자의 감각이 말초신경을 타고 번졌다. 주변 공기가 굴절되듯 엘리샤의 윤곽이 흐려지자, 회랑을 훑던 감시병의 시선이 그녀를 그냥 허공으로 인식하고 지나쳤다. 완벽한 은폐는 아니었다. 마력 소모가 극심했고, 기껏해야 십여 분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엘리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서관 외벽을 둘러싼 담쟁이덩굴 숲을 빠져나갔다. 정오까지 관리실에 출석해야 하니 남은 시간은 삼십 분 남짓이었다.

도서관 뒤편 고목 정원은 낮에도 푸르스름한 그늘이 드리워진 외진 곳이었다. 잎이 무성한 거목 아래에 낯익은 인영이 서 있었다.

칼릭스 드 라온.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발 아래로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젯밤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던 처참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샤가 건넨 경로 개방 마법식이 효과를 발휘한 덕분인지, 그의 손끝에 맴도는 은빛 마력은 규칙적인 박동을 되찾고 있었다.

"어젯밤 숲속의 그 목소리가 맞더군."

엘리샤가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칼릭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엘리샤의 낡은 교복과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를 훑었다.

"아카데미의 평범한 학생인 척 숨어 있었나. 라온 가문의 비전 성각식을 나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묻고 싶은 게 많다."

칼릭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은혜를 입었으나, 가문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는 불명확한 존재를 향한 날 선 경계였다. 엘리샤는 더 다가가지 않고 세 걸음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지금 당신의 의문을 해소할 여유는 없어요. 이틀 뒤 결투장의 결계석은 당신의 마력 경로를 역류시켜 파멸시키도록 조작되어 있습니다."

단칼에 잘라낸 경고에 칼릭스의 눈썹이 굳어졌다.

"결계석이 조작되었다고? 연례 경연의 결계는 학장과 황실 마법단이 공동으로 봉인한다. 학생 하나가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황태자 세드릭 폰 아스타르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엘리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는 품에서 낡은 일기장을 꺼내지 않고, 머릿속에 기억된 마법석 주입식을 빠르게 읊었다.

"어젯밤 훈련장 창고에서 대련용 마법석에 흑마법 촉매를 주입하는 광경을 봤습니다. 라온 가문의 마력은 성각의 힘을 바탕으로 정제되죠. 그러나 대결투장의 중앙 결계석에 반전 술식이 걸리면, 당신이 결투 도중 방출한 은빛 마력은 그대로 체내로 되돌아와 마력 핵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경기장 한가운데서 폭주한 괴물이 되고, 세드릭 전하는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당신과 라온 가문을 통째로 지워버릴 겁니다."

칼릭스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졌다. 엘리샤가 늘어놓는 마법식의 결합 구조는 어젯밤 자신이 겪었던 기괴한 마력 반발의 궤적과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했다.

"세드릭이…… 가문을 겨냥하고 있다는 건가."

"그는 이미 이 결계를 빌미로 저까지 옭아맸습니다. 오늘 정오부터 저를 결계석 관리 보조로 임명했더군요. 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을 덮어씌우고 입을 막을 희생양으로 쓰려는 겁니다."

엘리샤는 시간을 가늠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머리꼭대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오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 관리실 문을 열어야 했다.

칼릭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서늘한 바람이 고목의 잎사귀를 스쳐 지나갔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계산과 냉정한 분노가 교차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턱대고 부정하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지는 원작의 성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단순히 목숨을 건지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닐 텐데."

"살아남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결선에서 죽지 않아야 세드릭의 계획이 틀어집니다. 그자가 패배해야 나 역시 황실 마법단의 손에 살해당하지 않아요."

엘리샤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닌, 살기 위한 손익 계산. 그 냉철함이 오히려 칼릭스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좋다."

칼릭스가 품속에서 작은 은제 장신구를 꺼냈다. 라온 가문의 문양인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음각된 소형 펜던트였다. 그가 손을 뻗어 엘리샤에게 그것을 건넸다.

"가문의 비상 호출용 마도구다. 위급할 때 마력을 불어넣으면 반경 일 킬로미터 안에서 내 성각 마력이 반응해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세드릭의 하수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력 차폐 술식이 이중으로 걸려 있으니 몸에 지니고 있어라."

차가운 금속 펜던트가 엘리샤의 손바닥에 닿았다. 겉보기엔 단순한 장식품이었지만 내부에 응축된 고순도 마력 회로가 손끝을 간질였다.

"이걸 주는 이유는 하나다."

칼릭스가 한 걸음 다가서며 엘리샤를 내려다보았다.

"이틀 뒤, 네가 지하 제어실에서 결계의 반전식을 무력화해라. 그렇다면 나는 대결투장 위에서 세드릭이 보낸 자객들을 모조리 짓밟아 진실을 끌어내겠다. 결선이 끝날 때까지 헛되이 목숨을 잃지 마라, 엘리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대등한 협력자로서의 무게를 인정한 것이었다.

"약속하죠."

엘리샤는 펜던트를 교복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원작의 흐름은 이미 크게 비틀렸다. 관찰자로 머물며 안전하게 결말을 지켜보려던 계획은 물 건너갔다. 이제는 직접 판을 엎어야만 살아남는 전장에 발을 디뎠다.

원거리에서 아카데미 본관의 정오를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가봐야 합니다."

엘리샤는 칼릭스에게 짧게 눈짓을 건넨 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고목 정원의 그림자를 빠져나왔다. 멀리서 자신을 찾아 헤매던 황실 마법단원들의 서늘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대결투장 지하 중앙 제어실. 세드릭이 파놓은 덫의 심장부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대결투장 지하로 이어지는 석조 계단은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습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벽면을 따라 박힌 마석 램프는 서늘한 청록색 빛을 뿜어내며 복도의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묵은 석분 냄새와 함께 고농도 마력이 마찰할 때 생기는 비릿한 오존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엘리샤는 황실 마법단이 지급한 임시 보조 요원용 완장을 매만지며 계단을 밟았다. 주머니 속에서 칼릭스가 건네준 은제 펜던트의 서늘한 윤곽이 허벅지에 닿아 왔다.

불과 한 시간 전, 계단 참에서 마주했던 세드릭의 서늘한 시선이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엘리샤는 폐기 도서의 낙서라는 핑계와 함께 결계석의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조목조목 짚어내며 그의 의심을 역이용했다. 단순한 첩자가 아니라 결계의 맹점을 꿰뚫어 보는 쓸모 있는 패이자 희생양으로 보이도록 유도한 끝에, 마침내 결계석 관리 보조라는 명분을 쥐고 제 발로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지상에서는 황실 마법단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조여오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보조 요원 배정 덕분에 지하 제어실로 향하는 길 자체는 막히지 않았다. 세드릭은 엘리샤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지하 회랑의 끝, 둔중한 철제 격벽 너머로 거대한 원형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결투장 하부를 지탱하는 결계석 중앙 제어실이었다. 천장 높이만 족히 십 미터에 달하는 돔형 석실 중앙에는 대결투장 지상에 박힌 일곱 개 결계석의 마력선이 하나로 모여드는 거대한 기둥형 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투명한 마정석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핵 내부에는 푸른색 액화 마력이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순환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시야의 초점을 좁히자, 마력의 흐름이 실타래처럼 갈라져 허공에 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테르나 아카데미의 표준 방어 결계는 본래 외부 충격을 흡수해 외곽 지맥으로 분산시키는 구조여야 했다.

엘리샤는 허리춤에서 점검용 수정 렌즈를 꺼내 핵을 감싼 황동 테두리의 눈금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동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보조 회로에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었다. 단순한 정비 불량이나 마모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룬 문자 사이사이에 핏빛을 띤 검은 침전물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낡은 창고에서 그림자가 다루던 바로 그 금지된 흑마법 촉매였다.

그런데 회로의 배열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엘리샤의 손끝이 멈칫했다.

"단순히 결계를 무너뜨리는 식이 아니야."

소설의 원작 지식과 편집자로서 분석해 온 마법식의 도표가 뇌리에서 맞물렸다. 세드릭의 목적이 칼릭스의 마력 폭주와 결계 붕괴라면, 동북쪽 결계석의 과부하 밸브만 건드리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핵에 새겨진 마법식은 훨씬 더 교묘하고 악랄했다.

흑마법 촉매는 칼릭스의 라온 가문 비전 마력만을 겨냥하고 있지 않았다. 촉매와 연결된 역류 회로의 끝자락에 또 다른 이질적인 공명 파동이 등록되어 있었다.

아카데미 입학 시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학생 마력 등록부’의 고유 식별 코드.

그 번호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엘리샤는 이를 악물었다.

"결계석 내부의 술식이 왜곡된 게 아니야. 이미 흑마법 촉매와 융합되어 칼릭스와 내 학생 등록 마력에 강제 공명하도록 개조되어 있어……!"

세드릭은 결선 당일 칼릭스를 폭주시키는 것에 그칠 생각이 없었다. 폭주한 칼릭스의 마력이 결계를 찢는 순간, 결계석 내부의 흑마법 촉매가 폭발하며 보조 요원으로 배정된 엘리샤의 마력을 강제로 끌어들여 기폭제로 삼는 구조였다.

그렇게 되면 참사의 원인은 ‘통제를 벗어난 라온 가문의 마법’과 ‘현장에서 흑마법 촉매를 조작하다 폭사한 평민 장학생 엘리샤’의 소행으로 공식 종결된다. 세드릭은 완전한 피해자이자 사태를 수습한 영웅으로 남고, 진실을 아는 엘리샤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거와 함께 소멸하는 완벽한 은폐 공작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내달렸다.

엘리샤는 즉시 품속에서 칼릭스의 펜던트를 꺼내려 손을 뻗었다. 지금 당장 이 조작된 술식의 쐐기를 뽑아내거나, 칼릭스에게 신호를 보내야 했다.

철컥. 쿵!

묵직한 쇠붙이가 맞물리며 바닥 전체를 울리는 굉음이 제어실에 메아리쳤다.

유일한 출구였던 두께 한 뼘의 강화 철문이 닫히며 빗장이 안쪽에서 단단히 고정되었다. 동시에 벽면을 채우고 있던 청록색 마석 램프가 일제히 꺼지며 제어실 전체가 짙은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적 속에서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익, 하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마력 불꽃이 주변을 비추자, 제어실 상부의 철제 난간에 기대선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정한 금발과 서늘한 녹색 눈동자. 오점 하나 없는 순백의 황실 제복을 입은 세드릭 폰 아스타르였다.

그는 손끝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장난스레 굴리며 천천히 아래쪽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의 입꼬리가 오만하게 비틀려 있었다.

"쥐새끼가 제 발로 덫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군."

세드릭의 목소리는 지하의 냉기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낮에는 그럴듯한 궤변으로 결함 운운하더니, 칼릭스 놈을 만나고 오자마자 용기가 솟구쳤나 보지? 내 눈을 피해 이 깊은 곳까지 숨어들면 뭔가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나?"

엘리샤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이미 퇴로는 차단되었다. 주머니 속의 펜던트로 마력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철문이 닫힘과 동시에 제어실 바닥에 음각된 황실의 마력 차폐 결계가 기동하고 있었다. 칼릭스에게 닿아야 할 신호가 두꺼운 결계벽에 막혀 흩어지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처음부터 저를 이곳에 보낼 생각이셨군요."

엘리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자, 세드릭이 낮게 실소했다.

"영리한 계집이야. 그래, 장학생 나부랭이가 고대 마법식을 읽어내는 눈을 가졌다면 쓸모가 아주 없지는 않지. 이틀 뒤 결선에서 네 역할은 아주 중대하다, 엘리샤. 라온 가문의 반역을 입증할 완벽한 시체가 되어 주어야 하니까."

세드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화르륵!

제어실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마법 회로가 일제히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의 붉은 선들이 뱀처럼 기어와 엘리샤의 발치를 에워쌌다.

중앙의 결계석 핵이 불길한 진동음을 내며 엘리샤의 체내 마력과 강제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학생 등록 마력에 걸려 있던 주박이 심장을 쥐어짜듯 당겨왔다.

"네가 낮에 떨어뜨린 메모를 본 순간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세드릭이 한 걸음 다가서며 엘리샤를 내려다보았다. 녹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이곳에서 이틀 동안 숨죽여 기다려라. 결선이 시작되는 순간, 너는 칼릭스와 함께 라온 가문의 무덤이 될 테니."

붉게 타오르는 마법진의 빛이 엘리샤의 시야를 붉게 물들이며 제어실 바닥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