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으로 몸이 꺾여 내려가는 순간, 뺨을 때리는 새벽바람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시야가 뒤집히며 솔라리움의 깨진 유리 바닥과 붉게 타오르는 결계의 그물이 아득히 멀어졌다. 발밑은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이었고, 귓가에서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변해 터져 나갔다.
“지금입니다, 발렌틴!”
로젤리아는 펄럭이는 외투 깃을 억세게 틀어쥔 채 외쳤다. 목구멍으로 거센 돌풍이 들이쳐 목소리가 거칠게 찢겼지만 남자의 귓바퀴에는 가닿았다.
발렌틴은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흐트러짐 없이 시선을 맞췄다. 그의 흑청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추락의 공포가 아니었다. 뼈를 깎는 결단이었다.
“잡아라.”
남자가 뇌까림과 동시에 가슴 안쪽에서 서슬 퍼런 냉기를 터뜨렸다. 북부의 혹한이 칼날처럼 뿜어져 나와 두 사람의 주변 대기를 단숨에 얼려 붙였다. 허공에 흩뿌려지던 밤이슬이 순식간에 굵은 서리꽃으로 굳어 떨어졌다.
로젤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체내의 웨더 코어를 열었다. 억누르고 통제해 왔던 감정의 불씨를 일시에 풀어놓았다. 피부 아래를 달구던 온기가 피의 서약이 맺어진 손끝을 타고 맹렬한 금빛 파동으로 번져 나갔다.
섭씨 수십 도를 가뿐히 넘나드는 양극단의 기온이 허공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웅!
고막을 찢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절벽 틈새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솟았다. 급격한 온도 차가 빚어낸 맹렬한 수직 상승기류였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두 사람의 몸이 허공을 떠받치는 돌풍의 장벽에 부딪히며 낙하 속도가 급격히 꺾였다.
솟구치는 바람은 솔라리움 하부를 옥죄고 있던 황실 결계의 붉은 막을 향해 쐐기처럼 쏘아 올려졌다. 쩌적, 하는 불길한 균열과 함께 붉은빛 그물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사방으로 마력 파편을 흩뿌렸다.
도박은 들어맞았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큭……!”
발렌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굳건한 턱선이 흉흉하게 뒤틀렸다.
피의 결속을 타고 로젤리아의 온기가 흘러들어 가는 궤적이 비틀리고 있었다. 단순한 체온 전달이나 안정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파동이었다. 금빛 마력은 발렌틴의 흉골 안쪽, 서릿발로 겨우 봉합해 둔 빙핵의 깊은 균열 속으로 사납게 파고들었다.
상처를 메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영하의 극점으로 다져진 마력 핵의 겉면을 끓는 물처럼 녹여내며 본질 자체를 침식해 들어가는 기이한 열기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발렌틴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가문의 근간이자 생명줄인 냉기가 제 통제를 벗어나 미지근한 물탕으로 변질되는 감각에 남자의 본능적인 거부 반응이 폭발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로젤리아의 허리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결속을 끊어내고 그녀를 밀쳐내려는 거친 동작이었다.
공중에서 기류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지탱하던 바람의 축이 꺾이며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절벽 바위벽이 콧등을 스칠 듯 다가왔다.
“물러서지 마요, 발렌틴! 숨을 닫는 순간 둘 다 이 낭떠러지 바닥에 처박힙니다!”
로젤리아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반대편 팔까지 뻗어 두터운 외투 안쪽을 거세게 파고들었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귓가에 숨을 들이밀었다.
“내 호흡에 맞춰요! 당신 핵이 녹는 게 아니라, 갇혀 있던 냉기가 기화하는 겁니다! 억누르지 말고 전부 밖으로 내보내요!”
“닥쳐라, 이건 단순한 기화가……!”
“죽고 싶지 않으면 날 믿으라고 했을 텐데요!”
로젤리아의 맑은 벽안이 물러섬 없이 남자의 흔들리는 동공을 옭아맸다. 남녀의 간격은 사라지고, 오직 서로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단의 열기와 냉기만이 엉겨 붙었다.
로젤리아는 자신의 코어를 한계까지 쥐어짜며 호흡을 고르게 골랐다. 들이쉬고, 내쉬는 박자를 남자의 굳은 가슴팍에 직접 찍어 누르듯 전했다.
발렌틴은 그녀를 밀쳐내려던 손을 멈칫했다. 지독한 거부감 너머로, 여자의 규칙적인 숨결이 남자의 뒤틀린 혈관을 따라 일정한 맥박을 강요하고 있었다. 남자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로젤리아를 노려보며, 끝내 이를 부러뜨릴 듯 맞물고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의 마력이 다시 한번 거칠게 맞물려 돌았다.
화르륵,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얼음 파편과 뜨거운 불티가 섞인 돌풍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뒤엉킨 바람은 낙하하던 두 사람의 밑바닥을 한 번 더 떠받쳤다.
콰아앙!
우듬지를 부러뜨리며 수로 외곽 숲의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충격을 흡수했다. 이어 푹신하게 쌓인 부식토와 낙엽 더미 위로 두 사람의 몸이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다.
발렌틴이 본능적으로 로젤리아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겨 감싸 안은 덕에 치명적인 타격은 면했다. 남자의 단단한 등허리가 거목의 밑동을 들이받으며 둔탁한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콜록, 쿨럭…….”
로젤리아는 흙먼지와 메케한 기운 속에서 기침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찢겨 나간 소매 틈으로 긁힌 생채기들이 쓰라렸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다.
발렌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젖은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 대신 미지근한 열풍이 뿜어져 나왔다. 장갑을 벗겨낸 남자의 손끝은 얼음처럼 투명하게 빛나야 할 푸른 마력 대신, 핏빛에 가까운 붉은 기운이 흉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안전한 도박인가?”
발렌틴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지독하게 낮게 깔렸다. 남자의 눈동자는 적의와 경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 빙핵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건 상처를 메운 게 아니다. 가문의 핵 자체를 제멋대로 침식하고 있어.”
로젤리아는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 역시 당혹스러움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웨더 코어의 온기가 남자의 균열에 닿는 순간 느꼈던 그 감각은 단순한 치유나 융합이 아니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제 영역을 넓히듯 남자의 혹한을 집어삼키고 변질시키려던 기이한 간섭이었다.
단순한 상생이 아니었다. 두 마력이 맞닿았을 때 일어나는 반작용은 대기의 이치를 송두리째 뒤틀어버릴 만큼 불길했다.
로젤리아가 대답하려 입술을 뗀 순간,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치이이익―
물 한 바가지가 달궈진 철판에 쏟아지는 듯한 굉음이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협곡 상공, 솔라리움 절벽 아래 허공을 뒤덮은 광경을 본 로젤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상적인 밤하늘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마력 충돌이 남긴 부산물은 사라지지 않고, 절벽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타고 끓어오르는 짙은 증기 안개가 되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얼음 부스러기와 끈적한 열기가 기형적으로 뒤엉킨 그 흰 구름은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도 눈이 시릴 만큼 하얗게 피어올라 사방 수 리 밖에서도 똑똑히 보일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발렌틴이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그것은 탈출한 도망자들의 위치를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저 멀리 협곡 위편 솔라리움 탑의 잔해 부근에서, 찢어지는 듯한 뿔나팔 소리와 함께 황실 근위대의 사나운 수색견 울음소리가 숲을 흔들기 시작했다. 추격대가 증기 구름을 포착하고 이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달려요. 지금 당장.”
로젤리아는 턱 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삼키며 발렌틴의 젖은 외투 자락을 잡아당겼다.
숲의 비탈길을 따라 쏟아져 내리던 추격대의 고함이 등 뒤에서 벼락처럼 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썩은 낙엽과 축축한 진흙을 박차며 울창한 수로 숲을 빠져나왔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쯤 무너져 내린 석조 건물이었다. 과거 황실 마차를 정비하던 폐격납고였다.
발렌틴은 로젤리아를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 넣은 뒤, 삐걱거리는 쇠창살 문을 닫아걸고 묵직한 빗장을 질렀다.
먼지 냄새와 눅눅한 쇠 냄새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벽을 타고 울렸다.
“큭…….”
발렌틴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가죽 장갑을 뜯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드러난 손바닥에서 푸른 냉기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남자의 입매가 살벌하게 비틀렸다.
“이게 네가 말한 대등한 동맹인가, 로젤리아 황녀?”
서슬 퍼런 쇳소리와 함께 발렌틴의 허리춤에서 칼날이 뽑혀 나왔다. 차가운 강철 끝이 정확히 로젤리아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서약의 흔적이 남은 쇄골 바로 위였다.
“내 빙핵에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바른대로 말해. 상처를 덮는 수준이 아니었어. 네 온기가 내 가슴속 균열을 파고들어 북부의 피를 녹여 없애려 들더군.”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에 흉포한 살기가 번뜩였다. 남자는 가문의 근본인 냉기를 잃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숨기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칼끝을 피하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서늘한 칼날 위로 툭 떨어졌다. 온기 마법을 과도하게 방출한 대가로 손끝이 저릿하고 시야가 희미하게 흔들렸지만, 목소리만큼은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세웠다.
“녹여 없애려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깨진 그릇을 억지로 틀어쥐고 버티다 넘친 열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변명 집어치워. 내 마력이 네 체온에 휘둘리고 있어.”
“그럼 그 자리에서 날 베고 혼자 나가시든가요.”
로젤리아가 한 걸음 다가서자 칼끝이 가느다란 살갗을 얕게 눌렀다. 붉은 핏방울이 맺혔지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내 체온에 삼켜지는 게 두렵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떼고 홀로 북부로 기어가요. 깨진 핵을 안고 수도 경계선이나 넘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보란 말입니다.”
발렌틴의 턱관절이 거칠게 굳어졌다.
“난 당신을 지배하려 든 적 없어요.”
로젤리아는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맺은 건 복종의 굴레가 아니라 생존의 결속입니다. 윈체스터의 혹한과 브라이트의 온기가 부딪히면 파동이 요동치는 건 당연한 이치예요. 그조차 감내할 배짱이 없다면 북부의 자치권을 되찾겠다는 말은 애초에 꺼내지도 말았어야죠.”
발렌틴은 핏발 선 눈으로 로젤리아를 응시했다. 오만하게 턱을 쳐든 황녀의 벽안에는 거짓이나 비겁한 술수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살아남아 제 발로 걷겠다는 지독한 오기뿐이었다.
정적 속에서 남자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발렌틴은 혀를 차며 칼을 거두어 칼집에 밀어 넣었다.
“……독한 여자로군.”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독기는 있어야죠.”
로젤리아는 벽을 짚고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숨을 골라요. 대공. 우리 파동이 계속 충돌하면 머리 위에 떠 있는 그 빌어먹을 증기 구름이 꺼지지 않습니다. 위치를 광고하면서 달아날 셈입니까?”
발렌틴은 로젤리아의 맞은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말없이 흉포하게 끓어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내밀었다. 로젤리아 역시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겹쳤다.
살갗이 닿는 순간 다시금 미세한 열풍과 서릿발이 맞부딪히며 스파크를 튀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일정한 박자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온기의 파장을 남자의 차가운 맥박에 맞추어 조율했다.
호흡이 하나로 겹쳐지자 거칠게 날뛰던 두 사람의 마력이 서서히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격납고 틈새로 새어 들던 붉은 열기도, 살을 에는 한파도 잔잔한 미풍으로 잦아들었다.
바깥 협곡을 뒤덮고 있던 증기 안개 역시 서서히 흩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치릭, 치리릭.
격납고 바닥 구석, 낡은 수로 덮개 아래에서 메마른 파열음이 일었다.
로젤리아와 발렌틴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으로 향했다.
먼지와 이끼가 덮여 있던 돌바닥 틈새에서 은밀하게 새겨진 마법 문양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붉은빛이 아니었다. 황실 직속 근위대가 사용하는 군용 진압 마법진이라면 핏빛 기운을 띠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바닥을 타고 기어 나오는 빛은 투명할 정도로 맑고 정교한 호박색이었다.
“이건…….”
로젤리아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빛무리는 격납고 바닥에 매설된 탐지석을 따라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경보 장치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력 파동에는 반응하지 않고, 오직 대기의 온도를 바꾸는 특이 기후 마법 핵의 파장만을 낚아채도록 설계된 고유의 추적식이었다.
“황제의 마법식이 아니야.”
발렌틴이 바닥의 빛줄기를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이건 황실 규격이 아니다. 특정 술식 하나만을 위해 개인이 개조한 술식이야.”
“시릴 드 발루아.”
로젤리아가 차갑게 이름을 뱉었다.
호박색 마력은 시릴의 고유한 상징이었다. 수석 대마법사인 시릴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계를 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황제의 명령과는 별개로, 로젤리아가 온실을 벗어날 경우를 상정해 수도의 모든 지하 외곽 통로에 자신만의 추적 결계를 은밀히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온실 안에서 감시관 행세를 하던 그 온화한 태도는 기만에 불과했다. 시릴은 황녀의 기후 핵이 어디로 튀든 제 손바닥 안에서 회수할 수 있도록 퇴로마다 덫을 놓아두고 있었다.
호박색 마법진의 궤적이 바닥을 타고 흘러가, 북부로 이어지는 유일한 비밀 배수로 철문 방향으로 푸른 쐐기를 박아 넣듯 번뜩였다.
“북문 배수로가 봉쇄되고 있습니다.”
로젤리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탈진으로 떨리던 다리에 서슬 퍼런 힘이 들어갔다.
시릴은 지금 도망자들을 사살하려는 황제의 군대보다 한발 앞서, 홀로 북문 배수로 출구에서 로젤리아를 가로막을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발렌틴 역시 검자루를 고쳐 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눈동자에 깃든 불신은 사라지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차가운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퇴로가 막혔다면 뚫어버리면 그만이다.”
격납고 문틈 사이로, 배수로 입구를 옥죄어 오는 푸른빛의 추적 마법진이 여명의 어스름 속에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발렌틴의 군화가 젖은 돌바닥을 박차며 앞장섰다.
격납고 뒤편의 녹슨 철창을 부수고 들어선 북문 지하 배수로는 동틀 녘의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채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장 틈새로 스며든 희미한 새벽빛이 발밑에 고인 오수를 창백하게 비추었다. 배수로 벽면을 따라 촘촘히 얽힌 이끼 위로 호박색 마력 선이 맥박처럼 뛰며 길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로젤리아는 뒤처지지 않고 보폭을 맞췄다. 소매를 적시는 냉기 속에서도 손바닥 안쪽의 온기 파동을 가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이제 쉰 걸음만 더 나아가면 외곽 평야로 통하는 철문이었다. 그 너머에는 발렌틴이 미리 대기시켜 둔 북부 기마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철문 앞 열 걸음을 남겨 두었을 때, 발렌틴이 검집을 잡은 채 우뚝 멈춰 섰다.
배수로 끝, 육중한 아치형 철문 아래에 한 남자가 홀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은빛 반묶음 머리를 정갈하게 늘어뜨린 시릴 드 발루아였다.
그는 황실 근위대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순백과 금색이 어우러진 궁정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서 있었다. 가느다란 금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분하게 빛났다. 손에 쥔 상아빛 마법 지팡이 끝에는 배수로 바닥 전체를 뒤덮은 거미줄 형태의 추적 결계가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걸음이 빠르시군요, 전하.”
시릴이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치 온실의 티테이블을 마주하고 차를 권할 때처럼 흐트러짐 없는 어조였다.
“솔라리움 테라스에서 떨어졌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잠시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감정 마법의 온기 파동을 그처럼 난폭하게 터뜨려 낙하 충격을 상쇄시키다니, 계산되지 않은 도박은 전하의 우아함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발렌틴이 로젤리아의 앞을 가로막듯 한 걸음 나섰다. 검신이 칼집을 빠져나오며 차가운 쇳소리를 냈다.
“비켜라, 궁정의 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목을 치러 온 것이라면 손속을 두지 않겠다.”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에 살기 어린 냉기가 서렸다. 가슴 안쪽의 금 간 빙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릿발이 배수로 바닥의 물웅덩이를 얇게 얼려 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릴은 검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발렌틴의 등 뒤에 선 로젤리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는 손끝에 기괴할 정도의 지적인 탐욕이 스쳤다.
“황제의 명이라니요. 그 노망난 군주는 전하의 가치를 모릅니다. 재앙을 부르는 마녀라며 탑에 가두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의 명령 따위, 제가 따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저는 황제를 위해 이곳에 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로젤리아 전하, 당신의 기후 핵을 안전하게 회수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회수?”
로젤리아가 발렌틴의 어깨 너머로 걸어 나오며 차갑게 되물었다. 벽안에 서린 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궁정 대마법사라는 직함 뒤에 숨어 황제의 개 노릇을 하더니, 이제는 주인을 물어뜯고 내 마력을 가로채겠다는 뜻인가?”
“가로채다니, 섭섭한 말씀입니다.”
시릴이 상아빛 지팡이를 가볍게 기울였다. 지팡이 끝에서 일렁이는 호박색 빛무리가 벽면의 얼음을 나뭇가지 모양으로 녹여내며 증기를 피워 올렸다.
“저는 연구자입니다. 대륙의 사계절을 통제하고 제국의 기후를 영원한 봄으로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전하의 온기 코어입니다. 황제는 그 힘을 두려워해 억누르려 했지만, 저는 다릅니다. 제 마법 체계와 전하의 핵이 온전히 결합한다면, 우리는 이 제국의 날씨를 손안에서 새로 쓸 수 있습니다.”
시릴의 시선이 비로소 발렌틴을 향했다. 그 눈빛에는 적의 대신 명백한 경멸과 냉소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런 망가진 그릇을 택하신 겁니까? 선대부터 금이 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윈체스터의 빙핵이라니. 북부 대공, 그대의 핵은 이미 전력을 버티지 못하고 삐걱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의 고귀한 온기를 들이부어 봐야,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입니다. 저건 반역자도 뭣도 아닌, 그저 폐기되어야 마땅할 결함품입니다.”
발렌틴의 턱관절이 굳게 맞물렸다. 남자의 칼끝이 가라앉으며 지독한 살기가 배수로의 공기를 짓눌렀다.
비밀로 묻어 두었던 가문의 치부를 시릴이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발렌틴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남자가 검을 휘두르며 쇄도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로젤리아의 손이 뻗어 나와 발렌틴의 두터운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참으세요, 발렌틴.”
로젤리아는 발렌틴을 진정시킨 뒤, 시릴을 향해 똑바로 걸음을 옮겼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호한 기세였다.
“결함품이라.”
로젤리아의 입술에서 서늘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시릴, 네 얄팍한 오만은 여전하구나. 감시관 완장을 차고 내 호흡을 관찰하던 그 긴 시간 동안, 넌 단 한 번도 기후 마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어.”
시릴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본질이라 하셨습니까?”
“날씨는 측정기로 재단하고 마법진으로 통제하는 기계 장치가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공존이 아니라, 내 마력을 네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지배욕일 뿐이지.”
로젤리아는 시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발렌틴의 빙핵에 금이 갔다는 걸 알면서도, 넌 그 균열을 메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어. 오직 약점으로 삼아 도려낼 생각만 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온도를 채우며 이 지옥을 건너가기로 맹세했어.”
“전하, 감정에 휘둘려 파멸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시릴의 부드럽던 가면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호박색 눈동자에 깃든 집착이 광기 어린 열기로 타올랐다.
“저 북부 촌뜨기가 전하께 줄 수 있는 건 살을 에는 혹한과 반역자의 오명뿐입니다! 솔라리움으로 돌아오십시오. 제 결계 안에서라면, 전하는 완벽하게 보호받으며 가장 찬란한 황녀로 남을 수 있습니다!”
시릴이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으려는 손짓이었다.
로젤리아는 그 손을 보란 듯이 지나쳐, 옆에 선 발렌틴의 차가운 손을 망설임 없이 맞잡았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피의 서약이 붉게 타오르며 온기와 혹한의 기류가 얽혀 들었다. 로젤리아의 금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새벽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뜩였다.
“새장에 갇혀 시드는 황녀 노릇은 끝났어, 시릴. 난 내 의지로 이 얼음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절은 단호했고, 여지는 없었다.
내밀었던 시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금테 안경 너머로 비치던 일말의 기대감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지워지고, 서늘한 살기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시릴이 들고 있던 상아빛 지팡이를 돌바닥에 매섭게 내리쳤다.
콰아앙!
지팡이 끝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배수로 전체에 깔려 있던 호박색 마법진이 일제히 푸른빛으로 뒤틀리며 폭발했다.
북문 배수로 철문은 물론이고, 통로의 천장과 벽면 전체가 맹렬한 기세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보통의 얼음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의 마력 흐름을 정지시키고 기후 파동을 가두어 버리는 영구 동결 결계였다. 거대한 은빛 얼음 창살들이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며 북부로 향하는 마지막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전하.”
차가운 서리바람 너머로 시릴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이 통로째로 얼려 영원히 보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