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군요, 전하.”
시릴의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지독한 서늘함이 번졌다. 늘 정중한 궁정 예법의 가면 뒤에 감춰져 있던 대마법사의 서슬 퍼런 오만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은빛 반묶음 머리칼 사이로 흐트러진 은색 마력이 그의 소매 끝을 거칠게 흔들었다.
“이건 황실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자, 전하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자멸입니다.”
시릴이 품속에서 짙은 감청색 금속으로 벼려진 팔찌 한 쌍을 꺼내 들었다. 온실 안의 잔류 마력을 무겁게 빨아들이는 황실의 마력 봉인구였다. 금속 표면에 새겨진 억제 룬 문자가 파랗게 점멸하며 로젤리아의 발치로 뻗어나갔다.
“손을 떼십시오. 지금 당장 코어의 연결을 끊고 봉인구를 차신다면, 폐하께는 북부의 무도한 침입자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시적 교란이었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제가 손을 쓰면 아직 끊어낼 수 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찰나였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발렌틴의 장검이 바닥을 짓이기며 솟구쳤다. 검날을 타고 뿜어져 나온 시퍼런 서리가 시릴의 발끝 바로 앞 타일을 일직선으로 갈라놓았다.
“내 목을 노릴 때보다 혓바닥이 더 길어졌군, 마법사.”
발렌틴이 핏발 선 흑청색 눈동자로 시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로젤리아의 핏자국을 달고 선 남자의 온몸에서 살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 숨통을 건드리는 놈은 황제든 개든 가리지 않고 두 토막을 냈다. 네놈의 봉인구가 먼저 닿을지, 내 칼이 네 목뼈를 부수는 게 빠를지 확인해 볼 테냐.”
시릴의 안경알에 퍼런 검기가 위협적으로 비쳤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은빛 마도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발렌틴의 심장을 향해 궤적을 그렸다.
“발렌틴, 검 거둬요.”
로젤리아의 맑고 단호한 목소리가 두 남자의 숨 막히는 살기를 가르고 끼어들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왼손을 뻗어 발렌틴의 서슬 퍼런 검날을 거침없이 쥐어 잡았다. 서릿발이 맺힌 강철 위로 로젤리아의 붉은 피가 길게 번져 나갔다.
발렌틴의 턱 끝이 굳었다.
“손 치워.”
“내가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로젤리아는 시선을 시릴에게 고정한 채 남자의 검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발렌틴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마지못해 칼끝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로젤리아는 붉게 물든 손을 시릴의 면전에 천천히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금빛 마력이 발렌틴의 가슴팍에 새겨진 피의 인장과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온기 어린 봄바람의 파동과 만년설 같은 혹한의 파동이 기괴할 만큼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온실 바닥을 맴돌았다.
“똑똑히 보세요, 시릴 경. 내 코어가 대공의 빙핵 속으로 파고들었어요. 이제 우리는 하나의 계절입니다.”
시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눈앞의 파동을 계측하듯 입술을 짓씹었다.
“그 억지스러운 결속이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북부의 한기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며칠도 지나지 않아 전하의 혈관부터 얼어 터질 겁니다.”
“그걸 통제하는 건 내 몫입니다.”
로젤리아가 차분한 걸음으로 시릴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실내용 린넨 드레스 자락이 스쳤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죄인이나 유폐자의 기색 따위는 추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도 아주 잘 알고 있잖아요. 지금 이 봉인구로 날 묶거나 대공을 공격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로젤리아는 시릴의 손에 쥐인 감청색 봉인구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내 호흡이 멎으면 대공의 빙핵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납니다. 수도의 절반이 하룻밤 사이에 영하 삼십 도의 눈보라 속에 파묻히겠죠. 반대로 대공의 목을 치면? 내 웨더 코어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 이 솔라리움 탑을 통째로 날려 버릴 겁니다.”
“전하!”
“보고하십시오, 시릴 경.”
로젤리아가 시릴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냈다. 벽안에 서린 결연한 빛이 호박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폐하의 손아귀에 있던 대공의 숨줄을 이제 황녀인 내가 쥐었다고요.”
온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깨진 천장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밤바람만이 세 사람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할 뿐이었다.
시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감청색 봉인구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지닌 뛰어난 지성은 로젤리아의 말이 단 한 글자의 과장도 없는 냉혹한 현실임을 너무나 정확하게 계산해 내고 있었다.
지금 손을 댔다가는 황궁 전체가 재앙의 중심지가 된다.
시릴은 천천히 숨을 토해내며 봉인구를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서 학자다운 차분함이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폐하를 기만하시는 겁니다. 대공의 목줄을 쥔 게 아니라, 대공과 함께 황실을 등지겠다는 선언이지요.”
“칙령을 어긴 적은 없습니다.”
로젤리아가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폐하께서는 내게 북부로 가라 명하셨고, 난 그 명을 따르기 위해 가장 확실한 담보를 확보했을 뿐입니다. 내 손으로 이 괴물을 묶어 두겠다는데, 감시관인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가로막습니까?”
시릴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허리춤의 신호용 마도구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날이 밝으면 황제 폐하의 알현실로 불려 가실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당당하게 그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그 걱정은 접어두세요. 폐하를 뵙는 건 온실 밖으로 걸어 나간 뒤의 일이니까.”
로젤리아는 시릴을 지나쳐 온실 출입문 쪽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명백한 퇴거 명령이었다.
시릴은 한동안 굳은 얼굴로 로젤리아를 응시하다가, 그녀의 등 뒤에 버티고 선 발렌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렌틴은 칼자루를 쥔 채 짐승 같은 눈빛으로 시릴의 목덜미를 가늠하고 있었다.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전하.”
시릴이 낮게 읊조렸다.
“저 북부의 괴물은 온기를 탐하는 척하다가 전하의 마지막 체온까지 남김없이 빨아먹을 테니까요.”
그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등을 돌렸다. 하얀 궁정 마법사 로브 자락이 거칠게 휘날리더니, 묵직한 온실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회랑을 따라 멀어지는 시릴의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온실에는 서늘한 긴장만이 맴돌았다.
외부의 위협이 물러나자마자, 공간에 남은 공기의 온도가 급격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발렌틴 드 윈체스터.
시릴을 향해 번뜩이던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이제 오롯이 로젤리아 한 사람만을 집어삼킬 듯 응시하고 있었다.
발렌틴의 억센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서약의 피가 맺혀 있던 로젤리아의 가느다란 손목이 남자의 커다란 손아귀에 단숨에 낚아채였다. 뼈마디가 시큰거릴 만큼 거센 악력이었다. 살갗을 타고 찌르는 듯한 북부의 냉기가 밀려들었으나, 방금 전 맺은 서약의 끈 탓인지 피를 얼려 붙게 만들던 살인적인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피 냄새를 맡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날 구원하려는 성녀 행세는 집어치워.”
발렌틴이 턱관절을 거칠게 악물며 으르렁거렸다. 흑청색 눈동자 밑바닥에서 일렁이는 불신이 로젤리아의 얼굴을 낱낱이 파헤칠 듯 쏘아보았다.
“네 피가 내 심장을 옥죄는 대가로 넌 내게서 뭘 뜯어낼 셈이지?”
온실 중앙의 분수대에서는 미지근한 물줄기가 바닥에 튈 때마다 희뿌연 김을 뿜어냈다. 서약으로 엮인 마력의 여파로 남자의 체온과 그녀의 온기가 부딪쳐 자욱한 물안개가 두 사람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로젤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손목을 부러뜨릴 듯 쥐고 있는 남자의 완력 앞에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손부터 놓으시죠, 윈체스터 대공.”
“질문에 답해. 시릴 드 발루아를 내쫓은 건 그럴듯한 연극에 불과해. 황제의 사냥개와 황녀가 짜고 치는 함정에 내가 순순히 목을 들이밀 줄 알았나?”
“내가 연극을 벌였다면 당신 심장에 굳이 내 숨줄을 묶는 미련한 짓은 안 했습니다.”
로젤리아는 자유로운 다른 한 손을 들어 올려 발렌틴의 손등 위에 얹었다. 그의 손등은 거친 흉터와 서리로 덮여 단단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로젤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억센 손가락을 하나씩 힘주어 떼어내기 시작했다.
남자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버텼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배어 나온 온화한 마력이 살갗에 닿자 굳건하던 손아귀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제어되지 않는 온기에 닿을 때마다 발렌틴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손목을 되찾은 로젤리아는 붉게 자국이 남은 피부를 문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옷소매를 단정하게 내릴 뿐이었다.
“황제가 결계석을 끊어 북부를 고립시킨 진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담담한 물음에 발렌틴의 턱 끝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북부의 혹한을 핑계 삼아 내 영지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지. 결계석 없이는 영하 사십 도의 냉기를 버텨낼 수 없으니까.”
“틀렸어요. 말려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로젤리아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녀의 벽안이 깨진 온실 천장 너머, 어둠 속에 잠긴 황궁 본탑을 향했다.
“폐하께서는 당신이 혹한의 마법에 완전히 먹혀 폭주하기를 기다린 겁니다. 윈체스터의 가주가 미쳐 날뛰어 제 손으로 영지를 얼려 버리고, 그 재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황실 근위대를 북부에 들이밀 생각이었던 거죠. 그렇게 되면 북부의 자치권은 영원히 박탈당하고 온전히 황제의 발밑에 떨어지니까요.”
발렌틴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싸한 통찰이군. 그렇다면 그 거창한 음모 한가운데에 네 자리는 어디지? 넌 황제가 하사한 미끼에 불과해.”
“그래요. 통제 불능이라 솔라리움에 버려진 황녀와, 폭주 직전의 대공을 한 구덩이에 처넣어 둘 다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려던 미끼였죠.”
로젤리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발렌틴이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 발을 멈췄다.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버티고 선 남자의 눈앞까지 다가간 로젤리아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하지만 난 미끼로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목숨도, 황실의 영광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뭘 원하지?”
“자유.”
단 한마디였으나 그 울림은 온실을 뒤덮은 안개마저 밀어낼 만큼 뚜렷했다.
“난 이 빌어먹을 유리 감옥을 부수고 나갈 겁니다. 황제의 명령에 휘둘리지 않고, 내 호흡과 내 날씨를 온전히 내 의지로 다스릴 땅이 필요해요. 그 대가로 당신에게 북부의 파멸을 멎게 할 온기를 주겠다는 겁니다.”
발렌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짙은 눈썹 아래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남자는 상대를 다시 저울질하고 있었다. 눈앞의 황녀는 시릴 앞에서 내세웠던 연약한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황실의 가장 추악한 권모술수를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자신의 피를 담보로 판을 뒤엎을 만큼 독기를 품은 지배자였다.
“내 목줄을 쥔 대가 치고는 제법 당돌하군.”
발렌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줄이 아니라 생존 패입니다. 당신이 얼어 죽으면 나도 죽고, 내가 숨을 멈추면 당신 심장도 굳어버려요. 우린 이제 한쪽이 무너지면 둘 다 끝장나는 배에 탄 겁니다.”
로젤리아는 피 묻은 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상처 틈새로 은은한 금빛 마력이 맥동하고 있었다.
“날 북부로 데려가세요, 대공. 황제의 족쇄를 끊어내고 윈체스터의 영지를 지키고 싶다면.”
발렌틴의 시선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다시 눈동자로 올라왔다. 흑청색 눈동자에 서려 있던 날 선 의심이 서서히 걷히고, 그 자리에 서늘한 호승심이 차올랐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허리춤의 검대를 고쳐 맸다.
“거래는 성립됐다, 전하.”
남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빈정거림이 아닌 무게가 실린 호칭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이 새로운 궤도로 맞춰지는 찰나였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온실 외벽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일순간 비틀리며, 솔라리움 바닥 전체가 기괴한 진동과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깨진 천장 틈으로 황궁 경비대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발렌틴의 칼집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반 뼘쯤 밀려 나왔다.
“시릴 놈이 혀를 놀렸군.”
“아니요. 온실 외곽 결계망이 이 정도로 빠르게 닫히는 건 황제의 직속 근위대뿐입니다.”
로젤리아는 흔들리는 바닥을 딛고 서서 깨진 천장 너머를 응시했다.
솔라리움 상공을 가르는 밤하늘에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기동 마법진이 층층이 겹쳐지며 펼쳐지고 있었다. 황실의 최상급 포위 결계였다. 조금 전 시릴이 물러난 것은 패배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황제에게 상황을 고하고 온실 통째로 두 사람을 가두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기가 차올랐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손등에 핏줄을 세운 채 로젤리아를 쏘아보았다.
“날 온실에 묶어 두고 퇴로를 끊으려는 속셈이었나? 결속 서약이니 뭐니 떠들며 시간을 끈 게 네 덫이었어?”
“말조심해요. 내 목숨줄까지 걸고 서약한 판에, 당신을 황제에게 넘겨서 내가 얻을 게 뭡니까?”
로젤리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다.
“황제는 날 미끼로 던졌고, 당신은 그 미끼를 물었어요. 지금 근위대가 온실을 포위한 건 당신과 나를 둘 다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황제가 원하는 건 서약을 맺은 황녀가 아니라, 통제 가능한 시체니까요.”
발렌틴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저깟 결계 따위 부수고 나가면 그만이다. 내 한기라면 황실 결계든 뭐든 흔적도 없이 얼려 터뜨릴 수 있어.”
남자가 당장이라도 온실 외벽을 향해 마력을 뿜어낼 기세로 검을 완전히 뽑으려 했다. 로젤리아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남자의 검대를 내리눌렀다.
“할 수 있다면 진작 했겠죠. 왜 망설입니까?”
“손 치워.”
“마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당신 손끝에 서리는 그 지독한 냉기, 단순한 폭주가 아니죠?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억누르면서 왜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겁니까?”
로젤리아의 서늘한 벽안이 발렌틴의 흉골을 꿰뚫듯 응시했다.
“북부의 대공이 제 영지 하나 지키지 못해 황제의 결계석에 목을 매고, 수도 한복판에서 죽음을 자초할 만큼 힘을 아끼는 이유가 뭡니까. 진짜 사정을 말해요. 숨기는 패가 있다면 우린 이 문을 나서기도 전에 둘 다 끝장납니다.”
남자의 눈빛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수치와 분노, 그리고 지독한 불신이 남자의 얼굴 위로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발렌틴은 이를 악물며 로젤리아의 손을 쳐내려다, 제 검대를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온기에 멈칫했다.
피의 서약으로 연결된 마력의 끈이 남자의 굳은 가슴 안쪽을 묵직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발렌틴이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윈체스터의 빙핵에 금이 갔다.”
그것은 제국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북부 가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지의 마법 핵이 혹한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져 가고 있어. 내가 여기서 전력을 다해 한기를 터뜨리면, 그 파동이 북부의 핵으로 전이되어 결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난다. 영지민 수십만이 하룻밤 사이에 얼어 죽는다는 뜻이다.”
발렌틴의 목소리에는 영지를 짊어진 자의 짓눌린 고뇌가 묻어 있었다. 로젤리아는 비로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황제가 결계석 공급을 끊은 거군요. 당신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제 힘을 쓰지도 못하고 스스로 말라 죽기를 기다린 겁니다.”
로젤리아의 말에는 값싼 동정이 없었다. 상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해체해 낸 차가운 통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발렌틴은 그런 로젤리아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연약한 허수아비로 위장한 채 탑에 갇혀 있던 황녀의 눈빛은, 자신이 전장에서 마주했던 그 어떤 군주보다도 결연하고 단단했다.
남자가 칼을 완전히 칼집에 밀어 넣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제 알았겠지. 내가 왜 네 온기를 원했는지.”
발렌틴이 천천히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더는 상대를 옭아매거나 짓누르려는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전하가 아니라, 로젤리아.”
마침내 궁정의 가식적인 칭호를 벗어던진 남자의 진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 손을 잡아라. 날 살려낸다면, 네가 원하는 자유를 북부에서 주마.”
그때 솔라리움의 유리벽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붉은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결계의 쐐기들이 온실 천장과 벽면을 짓이기며 내려앉고 있었다. 탑 아래에서는 황궁 근위병들이 철갑을 부딪치며 나선형 계단을 치고 올라오는 소리가 맹렬하게 메아리쳤다.
정문은 이미 차단되었다.
발렌틴이 허리춤의 단검을 쥐며 주변을 살폈다.
“나갈 길목이 막혔군.”
“아니요, 길은 있습니다.”
로젤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가리킨 곳은 황궁 절벽 아래로 까마득하게 이어지는 외곽 테라스 난간이었다. 붉은빛 경보 마법진이 허공을 촘촘하게 메우고 있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저 아래로 뛰겠다는 건가? 제정신이 아니군. 낙하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결계의 파편에 찢겨 나갈 거다.”
“당신의 혹한과 내 온기를 동시에 부딪치면, 급격한 온도 차로 수직 상승기류가 발생합니다. 그 돌풍으로 결계망을 찢고 떨어지는 속도를 줄일 수 있어요.”
“도박이군.”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패는 던져야죠.”
로젤리아는 거침없이 테라스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새벽의 날선 바람이 여자의 흐트러진 금발을 사납게 휘감았다. 발밑으로는 아득한 어둠과 날카로운 바위 절벽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로젤리아가 돌아보며 한 손으로 발렌틴의 두터운 흑색 깃을 낚아챘다. 단단하게 끌어당겨진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푸른 눈동자와 지척에서 맞부딪쳤다.
“이제 날 황녀라 부르지 마요. 난 당신의 혹한을 끝장낼 유일한 파트너니까.”
로젤리아는 망설임 없이 몸을 뒤로 젖히며 허공으로 몸을 내던졌다.
발렌틴의 입매에 희열 섞인 미소가 번지며, 커다란 손이 로젤리아의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 쥐고 함께 암흑 속으로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