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창살이 천장을 꿰뚫으며 솟구친 순간, 배수로 안의 공기가 숨 막힐 정도로 팽창했다.
시릴의 상아빛 지팡이 끝에서 번져 나간 푸른빛 파동은 더러운 오수와 축축한 석벽을 단숨에 하얗게 표백해 버렸다. 뚝뚝 떨어지던 천장의 물방울조차 바닥에 닿기 전에 날카로운 서리 침으로 굳어 버렸다. 평야로 이어지는 유일한 철문은 이미 거대한 빙벽 뒤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물러서십시오.”
발렌틴이 굵직한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털 장식이 달린 북부 코트 자락이 사납게 펄럭였다. 남자는 허리춤의 대검을 뽑아 들고 망설임 없이 빙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날을 감싼 흑청색 냉기가 매서운 궤적을 그리며 얼음 장벽의 중심부를 내리쳤다.
콰아앙!
귀를 찢는 굉음이 밀폐된 지하 통로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얼음벽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오히려 칼날이 박힌 자리를 기점으로 은빛 서릿발이 뱀처럼 몸을 틀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검신을 타고 번개처럼 번져 온 지독한 한기는 순식간에 발렌틴의 묵직한 가죽 장갑을 얼려 버리고, 단단한 손목과 팔뚝을 타고 기어올랐다.
“큭……!”
발렌틴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팔을 감싼 검은 코트 위로 창백한 성에가 두껍게 내려앉으며 근육이 돌처럼 굳어 갔다. 칼을 쥔 손가락마저 얼어붙어 떼어낼 수조차 없었다.
“헛수고입니다, 윈체스터 대공.”
시릴이 금테 안경을 가운뎃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차갑게 읊조렸다. 상아빛 지팡이 머리에서 회전하는 세 개의 마법 고리가 호박색과 푸른빛을 번갈아 뿜어내고 있었다.
“그대의 불완전한 냉기로는 이 결계의 파동을 건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 얼음은 물리적인 벽이 아니라 공간의 온도를 절대 영도로 고정하는 법식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그대의 마력을 양분 삼아 그 자리에서 화석으로 굳어갈 뿐이지요.”
시릴의 시선이 발렌틴을 지나쳐 뒤편에 선 로젤리아에게 닿았다. 학자다운 미소 뒤에 숨겨진 끈적한 탐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보십시오, 전하. 저자는 전하를 데리고 이 어둠을 빠져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얼어붙어 부서질 뿐입니다. 저런 결함품에게 의지하느니, 제게 오십시오. 전하의 그 순수한 온기는 오직 제 마법 체계 안에서만 가장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습니다.”
로젤리아는 시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신 푸른빛으로 요동치는 빙벽의 표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얼음 장벽 안쪽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이 불규칙하게 맥박 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방어 결계의 구조가 아니었다. 통로를 가로막은 얼음벽은 북부의 서늘한 기운을 철저히 배척하면서도, 로젤리아의 피부 아래에서 맴도는 온기 파동만을 집요하게 빨아들이려 촉수를 뻗고 있었다.
퇴로를 끊으려는 결계가 아니었다. 황녀의 몸속에 자리 잡은 기후 핵의 주파수를 억지로 비틀어, 오직 온기 마력만을 몸 밖으로 강제로 뜯어내 추출하도록 정밀하게 짜인 포획진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신을 감시하던 지난 수년간, 시릴은 온실 뒤편에서 이런 끔찍한 추출식을 혼자 갈고닦아 온 것이었다.
“이건 결계가 아니로군.”
로젤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발렌틴이 굳어가는 턱관절을 악물며 낮게 경고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전하……! 이 한기는 평범한 서리가 아닙니다. 전하의 마력까지 빨려 들어갈 겁니다.”
“알고 있어요. 저자가 무얼 노리는지도요.”
로젤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얼음 바닥을 밟으며 발렌틴의 옆으로 다가간 그녀가 시릴을 똑바로 겨누었다. 맑은 벽안에 서슬 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포획진을 짜 두었더군, 시릴. 이 벽은 나를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온기 코어만을 분리해 담아낼 용기였어. 넌 처음부터 날 황제에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거야. 날 껍데기만 남겨 둔 채 내 마력만 도려내 네 연구실 유리병에 처넣을 작정이었지.”
시릴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위대한 발견에는 합당한 표본이 필요한 법입니다. 황제의 낡은 통제 방식으로는 전하의 잠재력을 만분의 일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제가 전하의 핵을 받아내 제국의 계절을 다시 설계할 겁니다. 그것이 이 세계를 위해서도, 전하를 위해서도 가장 가치 있는 길입니다.”
“오만하긴.”
로젤리아가 서늘하게 말을 잘랐다.
“네가 얼리려는 건 이 배수로가 아니라, 네 통제를 벗어난 내 선택이겠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로젤리아는 손을 뻗었다.
남자의 팔을 타고 가슴팍까지 번져 오던 서릿발 속으로, 망설임 없이 발렌틴의 대검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전하!”
발렌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칼날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 피어난 것은 붉은 피가 아니라 타오르는 금빛 열기였다. 두 사람의 손등에 새겨진 피의 결속 문양이 붉은 번개처럼 번뜩이며 호흡을 맞추었다.
“숨을 뱉으세요, 대공. 냉기를 억누르지 말고 전부 쏟아내요.”
로젤리아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잠자던 온기 코어의 회전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솔라리움의 온실을 깨뜨렸던 뜨거운 열풍이 손바닥을 통해 얼어붙은 강철 대검으로 거침없이 흘러 들어갔다.
극과 극의 온도가 좁은 쇳덩이 안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치이이익!
얼음과 불길이 뒤섞이며 고막을 찢을 듯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발렌틴의 팔을 옥죄던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짙은 백색 증기로 피어올랐다. 남자는 흑청색 눈빛을 번뜩이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로젤리아의 고열과 자신의 혹한이 한 줄기로 꼬여 들며 검끝에 폭발적인 마력 파동을 형성했다.
“지금이다.”
로젤리아의 짧은 외침과 함께 발렌틴의 대검이 빙벽의 중심부를 향해 내리꽂혔다.
절대 영도로 굳어 있던 결계의 핵에 펄펄 끓는 열기가 박혀 들자, 팽창과 수축을 견디지 못한 은빛 얼음이 비명을 질렀다.
쩍, 쩌저적!
빙벽 한가운데에 주먹만 한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거미줄 같은 금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무슨 짓을……!”
시릴의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가 다급하게 상아빛 지팡이를 들어 추가 영창을 읊조리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앙!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며 폭풍 같은 파편이 통로 안을 휩쓸었다.
그러나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좁은 지하 통로가 감당하기엔 두 사람의 마력이 빚어낸 온도 차의 압력이 지나치게 거대했다.
파괴된 결계의 충격파가 배수로 바닥으로 고스란히 내리꽂혔다. 수백 년간 습기에 부식되어 있던 배수 석판들이 굉음과 함께 솟구쳤다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바닥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치더니, 두 사람이 딛고 서 있던 석재 바닥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무너져 내렸다.
“대공!”
로젤리아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부서진 석판들과 차가운 오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암흑 속, 발렌틴이 뻗어 낸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배수로 밑바닥 깊숙이 숨겨져 있던 버려진 구 수도관 암반층으로, 두 사람의 몸이 겉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머리 위로는 시릴의 당혹스러운 외침과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축축한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며 묵직한 마찰음이 암반을 울렸다.
떨어지는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발렌틴이 거친 기침을 뱉어내며 바닥을 굴렀다. 단단한 팔에 안겨 있던 로젤리아는 남자의 품을 벗어나 젖은 돌바닥 위로 무릎을 짚었다. 쓸린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대공, 괜찮습니까?”
로젤리아가 흙 묻은 소매를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서늘하게 긁히는 쇠붙이 소리였다.
발렌틴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뽑아 든 대검의 칼날로 로젤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희뿌연 김이 되어 흩어졌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살기보다 더 짙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로젤리아는 멈칫하며 남자를 뜯어보았다. 발렌틴의 목덜미와 턱선을 따라 푸른 마력선이 핏줄처럼 툭 불거져 있었다. 단순한 반동이 아니었다. 손등에 새겨진 붉은 결속 문양이 꺼져가는 불꽃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고, 그 틈으로 남자의 고유한 냉기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로젤리아의 몸 안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맺혀 있는 온기 코어가 발렌틴의 냉기를 거침없이 집어삼키며 붉은 열기를 뿜어냈다. 차가운 기운을 흡수할수록 온기는 더 사납게 타올랐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
발렌틴이 이를 악물며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흑청색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장갑이 찢겨 나간 남자의 손가락 끝은 얼어붙는 대신, 미열에 덴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윈체스터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냉기의 원천이 억지로 뜯겨 나가는 고통에 그의 손마디가 파리하게 떨렸다.
“내 마력이 당신의 핵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먹어 치우고 있다는 뜻입니까?”
로젤리아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부정할 수 없었다. 손등의 인장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감각은 명백한 흡수였다. 솔라리움에서 호흡을 맞출 때만 해도 상처 입은 빙핵을 감싸 안는 온기라 여겼건만, 결속의 강도가 깊어지자 코어의 본성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온기 핵은 상대를 구원하는 닻이 아니라, 타인의 기후를 먹이 삼아 세력을 불리는 포식자였다.
“황제가 북부를 길들이기 위해 내린 혼담 칙령이라더니.”
발렌틴의 칼끝이 바들거리며 로젤리아의 목을 향해 조금 더 다가왔다.
“실상은 영지의 빙핵을 완전히 말려 죽이기 위한 덫이었던 겁니까. 온실에 갇힌 가련한 황녀 행세를 하면서, 내 가문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던 거였소?”
“칼을 거두세요, 발렌틴 드 윈체스터.”
로젤리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치켜들며 서늘한 칼날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의 냉기를 탐냈다면 솔라리움 절벽에서 떨어질 때 상승기류 따위는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을 통째로 빨아들여 내 코어의 불꽃으로 삼고 혼자 날아올랐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빙핵의 균열이 벌어지고 있소. 당신의 그 잘난 온기가 내 마력을 쥐어짜 내며 갉아먹는 게 느껴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느껴집니다. 내 안에서도 당신의 혹한이 날뛰고 있으니까요.”
로젤리아는 거칠게 말을 자르며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온기 코어가 발렌틴의 냉기를 삼키는 대가로, 로젤리아의 흉부 역시 살을 에는 한파와 펄펄 끓는 열기가 뒤섞여 찢어질 듯한 통증을 겪고 있었다. 호흡을 조금만 잘못 골라도 내장이 얼어붙거나 타버릴 것만 같았다.
“황제는 내게 이 힘의 본질을 단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그저 감정을 죽이고, 숨을 참고, 온실 안에서 얌전히 규율을 따르라고만 윽박질렀을 뿐이지.”
로젤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칼날의 서슬이 쇄골 언저리의 옷자락을 스쳤다.
“내가 당신을 속인 게 아닙니다. 나 역시 속았을 뿐이지. 황실이 설계한 결속이란 애초에 서로를 살리는 계약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집어삼켜 괴물로 완성되는 기만이었던 겁니다.”
발렌틴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로젤리아의 숨결을 응시했다.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여기서 검을 밀어 넣으세요.”
로젤리아는 목을 곧게 편 채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의 빙핵이 말라붙기 전에 내 숨통을 끊으면 됩니다. 그럼 결속도, 침식도 그 자리에서 끝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 무너진 수도관 밑바닥에서 홀로 얼어붙어 시릴의 손에 박제되겠지요.”
남자의 턱선이 굳어졌다. 칼끝이 가늘게 흔들렸으나 거두어지지는 않았다.
로젤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칼등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쇳소리와 함께 대검이 바닥으로 비껴 내려갔다. 그녀는 바짝 다가앉아 발렌틴의 떨리는 손목을 낚아챘다.
“숨을 들이마셔요.”
“이 손 치우시오.”
“숨을 쉬라고 했습니다.”
로젤리아는 명령하듯 단호하게 내뱉으며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이마시는 숨에 서릿발을 담고, 내쉬는 숨에 타오르는 열기를 실어 바깥으로 배출했다. 코어가 냉기를 탐식하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순환의 길목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의 손등에 엉겨 붙은 인장이 요동치며 거친 박동을 뿜어냈다.
“침식을 멈출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내 코어가 당신의 핵을 삼키지 못하게, 당신이 직접 냉기의 주도권을 쥐고 내 안의 열기를 억눌러야 해요.”
“내 힘을…… 당신에게 밀어 넣으란 뜻입니까?”
“그래요. 먹히지 않으려면 덮어씌워야지. 당신이 북부의 주인이라면 고작 가문의 결함 따위에 겁먹고 뒷걸음질 치지 마세요.”
로젤리아의 맑은 벽안이 도발하듯 빛났다.
발렌틴은 짓씹듯 숨을 고르며 마력의 흐름을 비틀었다. 일방적으로 빨려 들어가던 냉기의 줄기가 남자의 의지에 따라 거꾸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혹한의 파동이 로젤리아의 손목을 타고 역류해 들어가자, 날뛰던 온기 코어가 거친 비명을 지르며 팽창을 멈추었다.
급격한 마력 충돌로 인해 바닥의 돌멩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부서졌다.
이윽고 붉은 낙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의 폭풍이 잦아들었다. 발렌틴의 목덜미를 뒤덮었던 푸른 마력선도 피부 밑으로 가라앉았다. 침식은 간신히 멎었지만, 결코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로젤리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발렌틴은 대검을 짚고 일어서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시선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경계심과 깊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언제라도 로젤리아의 온기가 다시 자신의 빙핵을 삼키려 들지 모른다는 공포를, 남자는 칼자루를 쥐는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완벽한 동맹이라고 믿었던 내 판단이 성급했던 모양이군.”
발렌틴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뱉어냈다.
“언제든 주인을 집어삼킬 수 있는 맹수와 함께 길을 걷는 꼴입니다, 전하.”
“그 맹수를 길들이는 게 동맹의 조건이겠지요.”
로젤리아가 흙 묻은 무릎을 털며 일어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두 사람의 머리 위, 수십 미터 높이의 암반 천장이 거대한 진동과 함께 갈라졌다. 갈라진 암석 틈새로 붉고 짙은 호박색 빛무리가 번뜩이며, 날카로운 마법진의 궤적이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릴의 추적 마법이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낙석 사이로 호박색 마력 파편들이 비수처럼 꽂혀 내렸다.
발렌틴이 반사적으로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검신에 부딪힌 굵직한 암석이 산산이 부서지며 돌가루를 흩뿌렸다. 남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른 한 팔로 로젤리아의 어깨를 감싸 뒤쪽 벽으로 밀어붙였다.
“숙이시오!”
통로 저편, 붕괴하는 천장 틈새에서 시릴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력으로 증폭된 음성은 벽면을 타고 낮게 공명하며 귓가를 파고들었다.
“헛된 고집입니다, 전하. 윈체스터의 결함투성이 빙핵으로는 솔라리움의 온기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더 늦기 전에 걸음을 멈추십시오.”
시릴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호박색 추적진이 수로 바닥을 기어오르며 퇴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갔다.
로젤리아는 기침을 뱉어내며 전방을 응시했다. 수십 보 앞, 수도 경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거점인 거대한 수문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꺼운 주철로 주조된 문짝 위에는 제국 황실의 문장과 함께 푸른빛을 띤 이중 쇄전 마법진이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비키시오.”
발렌틴이 이를 악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남자는 로젤리아의 온기가 다시 닿는 것을 경계하듯 한 걸음 물러서며, 홀로 가슴속 빙핵의 마력을 쥐어짰다. 흑청색 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대검 날을 따라 서슬 퍼런 서릿발이 솟구쳤다. 결속의 침식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제 살을 깎아 수문을 부수겠다는 고집이었다.
쾅!
발렌틴의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 폭풍이 수문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그러나 굉음과 함께 흩어진 것은 얼음 조각뿐이었다. 수문에 새겨진 황실의 마법진이 짙은 호박색 빛을 뿜으며 발렌틴의 냉기를 사납게 튕겨냈다. 부서진 빙핵에서 억지로 쥐어짠 마력은 순도가 떨어져 황실의 이중 결계를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 반동으로 발렌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입술 틈새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검을 쥔 손가락마디가 심하게 떨렸다.
“혼자서는 저 쇄전을 부술 수 없어요.”
로젤리아가 성큼 다가섰다. 발렌틴이 고통 속에서도 칼날을 비틀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남자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내 손을 잡아요.”
“말했을 텐데. 당신 코어가 내 핵을 삼키려 들고 있소. 여기서 한 번 더 마력을 섞었다간…….”
“내가 당신을 집어삼킬까 봐 두렵습니까?”
로젤리아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붙은 남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서슬 퍼런 한기에 손바닥이 베일 듯 쓰라렸으나,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렸다. 호박색 마법진의 궤적이 바로 등 뒤까지 닥쳐와 바닥을 태우고 있었다.
“의심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죽더라도 내 곁에서 숨이 끊어지십시오, 발렌틴.”
공적인 거리를 두던 황녀의 입에서 직함이 아닌 이름이 떨어져 내렸다. 날것 그대로의 부름에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가 멈칫 굳어졌다.
“내가 당신의 빙핵을 갉아먹는 괴물로 보인다면, 그 전에 당신의 냉기로 내 심장을 얼려버려요. 망설이다가 저 추적 마법에 짓눌려 시릴의 손에 개처럼 끌려가느니, 서로의 숨을 거두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로젤리아의 맑은 벽안에는 한 줌의 주저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뺨을 쥔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귓바퀴를 타고 붉게 번졌다. 억누르지 않은 황녀의 체온이 윈체스터의 서릿발과 뒤섞이며 둘 사이에 날카로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뒤편에서 암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릴의 지팡이 끝에서 뻗어 나온 호박색 마력 덩굴이 바닥의 석판들을 거칠게 꿰뚫으며 발목 코앞까지 쇄도했다. 황궁 대마법사의 서늘한 비웃음이 흩날리는 먼지 구름을 뚫고 닥쳐왔다.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로젤리아 전하. 그 북부 놈은 전하의 불꽃을 꺼뜨릴 재앙일 뿐입니다.”
발렌틴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었다.
남자는 뺨을 덮은 로젤리아의 손등 위로 거칠고 커다란 손을 겹쳐 올렸다. 칼자루를 내려놓은 남자의 다른 한 팔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차가운 북부 코트의 털 장식이 로젤리아의 얇은 실내 가운 위로 거칠게 맞닿았다. 빈틈 하나 없는 밀착이었다.
“내 목숨을 쥐고 흔들 권리를 당신에게 넘기지.”
발렌틴의 낮은 음성이 로젤리아의 귓가를 울렸다. 얼어붙었던 입술에서 처음으로 직함이 아닌 이름이 새어 나왔다.
“가자, 로젤리아.”
두 사람의 손등에 새겨진 피의 낙인이 일제히 붉고 푸른 광휘를 뿜어냈다.
남자의 몸속에서 들끓던 혹한의 마력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로젤리아의 코어는 기다렸다는 듯 폭발적인 온기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침식도, 거부도 아니었다. 서로를 파괴할 각오로 맞부딪힌 두 극단의 힘이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로 얽혀 들어갔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짓이겨지며 배수로 내부의 대기압이 급격히 치솟았다.
기압차로 찢어지는 비명 같은 바람이 좁은 통로를 가득 채웠다. 로젤리아가 남자의 어깨를 그러쥐며 온기 파동의 물꼬를 수문 정면으로 틀어쥐었다. 발렌틴 역시 자신의 빙핵에 남은 마력을 쥐어짜 황녀의 열기를 감싸 안는 거대한 얼음 창을 형성했다.
화염처럼 붉은 열기를 품은 혹한의 송곳니. 모순된 두 개의 기후 마력이 하나로 결합한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거대한 서리 폭풍이 수문을 덮쳤다.
황실의 푸른빛 이중 쇄전 결계는 단 일격에 비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급격한 고열에 팽창하려던 철문이 뒤이어 덮친 지독한 혹한에 순식간에 수축했고, 버티지 못한 주철 표면이 사방으로 쩍쩍 갈라졌다. 황제의 문장이 박힌 중심부가 산산조각 나며 수십 개의 쇳조각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부서진 수문의 파편들이 거센 바람을 타고 배수로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자욱한 증기와 얼음 분진을 뚫고 드디어 수도의 경계선 바깥, 끝없이 펼쳐진 북부 외곽 평야의 차가운 눈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지독했던 지하 통로의 눅눅한 공기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러나 승리의 안도감을 느낄 틈은 없었다.
수문이 부서져 나간 자리 너머, 하얗게 얼어붙은 설원 위에는 이미 거대한 진형이 구축되어 있었다.
은빛 흉갑을 입은 황실 결계병 수백 명이 촘촘한 방진을 이룬 채 긴 창을 겨누고 서 있었다. 그들의 발밑에서는 호박색 마법진이 눈 덮인 대지를 녹이며 십자 형태로 뻗어 나갔다.
시릴의 함정이었다.
그는 배수로 안에서 두 사람을 생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지하에서의 대치는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시릴은 두 사람의 융합 마력이 수문을 부수고 터져 나오는 순간 발생할 기상 이변의 규모와 충격파의 방향까지 철저히 계산해 두었던 것이다. 마력이 바닥난 채 밖으로 튕겨 나올 바로 이 지점에, 황실 결계 군단의 본대를 미리 배치해 둔 채 덫을 완성해 놓았다.
“사격 준비.”
설원 한가운데에 선 결계군 지휘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검을 뽑아 들었다. 수백 개의 은빛 창끝이 일제히 두 사람의 가슴을 조준했다.
발렌틴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로젤리아를 등 뒤로 숨기며 대검을 땅에 꽂았다. 남자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백색 김을 뿜어냈다.
“환영이 꽤 요란하군.”
발렌틴이 피 묻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로젤리아는 남자의 단단한 등 뒤에서 고개를 들어, 눈 덮인 설원을 가득 메운 적들의 창날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황녀의 손끝에서 다시금 작지만 맹렬한 온기의 불씨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