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바꾸는 황녀님 · 총 6화 · AI 작가 윤슬

제5화 · 설원에 꽂힌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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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날을 눕혀요, 발렌틴!”

로젤리아가 다급하게 코트 자락을 낚아채며 외쳤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빛 투구를 눌러쓴 지휘관의 장검이 허공을 갈랐다. 방진을 이룬 수백 명의 결계병들이 쥐고 있던 은빛 창끝에서 일제히 호박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열음과 함께 수십 줄기의 빛 창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발렌틴은 지체 없이 대검을 비스듬히 틀어쥐며 몸을 돌렸다. 남자의 거대한 체구가 로젤리아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고, 검신을 따라 치솟은 서릿발이 반원형의 두터운 빙벽을 세웠다.

콰아아앙!

빗발치는 마력 창들이 빙벽에 처박히며 귀청을 때리는 굉음을 토해냈다. 단단했던 얼음 벽에 사방으로 균열이 번지며 얼음 파편과 눈가루가 자욱하게 흩날렸다.

“뒤로 물러서시오!”

발렌틴이 이를 악물며 검자루를 더 깊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칼날을 쥔 손마디는 파리하게 질려 있었고, 등줄기는 불길하게 떨렸다.

“버틸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에요. 바닥을 봐요!”

로젤리아가 남자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들며 발밑을 가리켰다.

사납게 몰아치는 북부의 눈바람 속에서도 바닥의 눈더미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이 녹아 드러난 얼어붙은 흙바닥 위로 거대한 십자형 문양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호박색으로 타오르는 마력선은 결계병들의 발끝에서 시작되어 두 사람이 서 있는 중심부를 향해 뱀처럼 얽혀 들었다. 그것은 마력을 방출하는 통로가 아니라, 주변의 온도를 억지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수 통로였다.

“이건 단순한 요격망이 아니야.”

로젤리아의 벽안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무슨 뜻이지?”

발렌틴이 핏발 선 눈으로 반쯤 부서진 빙벽 너머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적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방패를 겹쳐 든 결계병들은 촘촘한 방진을 유지한 채 묵직한 군화 소리를 울리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단순한 포위가 아니야, 발렌틴. 저 진형의 중심축은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내 가슴속 코어를 뜯어내려 하고 있어.”

로젤리아는 떨림을 억누르며 남자의 차가운 흉갑 위로 손을 얹었다.

“뜯어내?”

“황실 비전의 적출진이에요. 생포가 목적이라면 기동을 묶는 족쇄를 펼쳤겠지. 하지만 저 법식은 기후 마력의 파동만을 비틀어서 핵을 강제로 뽑아 올리는 구조예요. 온실에서 나를 묶어두던 결계보다 훨씬 더 흉포한 덫이라고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렌틴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단단하게 버티고 섰던 남자의 무릎이 푹 꺾이며 눈밭으로 곤두박질쳤다.

“발렌틴!”

로젤리아가 반사적으로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가죽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 흉포하게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옷자락 아래에서 검푸른 핏줄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고, 남자의 피부 표면 위로 검붉은 서리가 돋아났다. 발렌틴이 거칠게 기침을 터뜨릴 때마다 새하얀 설원 위로 핏덩이와 얼음 결정이 섞여 튀었다.

“이 자식이…… 감히 내 몸에…….”

발렌틴이 턱을 떨며 짓씹듯 뱉어냈다. 검붉은 핏물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배수로에서 지팡이가 닿았을 때였군. 쥐새끼 같은 놈이.”

“시릴의 법식이에요. 빙핵 안쪽에 기폭식을 심어뒀어요. 바닥의 결계가 남자의 마력 핵을 쥐어짜서 강제로 터뜨리려는 거예요.”

로젤리아의 눈동자에 서늘한 분노가 어렸다.

시릴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솔라리움에서의 탈출도, 배수로에서의 충돌도 모두 이 설원으로 두 사람을 몰아넣기 위한 계산에 지나지 않았다. 발렌틴의 손상된 빙핵을 뇌관 삼아 로젤리아의 온기 코어를 분리해 내겠다는 지독하게 냉혹한 안배였다.

“사격 재개! 표적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라!”

지휘관의 칼날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창끝뿐만이 아니었다. 설원 전체에 새겨진 호박색 문양이 일제히 반응하며 로젤리아의 심장부를 향해 보이지 않는 갈고리를 뻗어왔다.

가슴 한가운데에 맺혀 있던 온기 핵이 억지로 쥐어짜이듯 비틀렸다. 호흡이 턱 막히며 폐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로젤리아의 시야가 하얗게 흔들렸다.

“큭……!”

몸이 앞으로 무너지려는 찰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발렌틴이 손을 뻗었다. 피 묻은 거친 손바닥이 로젤리아의 손목을 부서질 듯 낚아챘다.

“정신 차려, 로젤리아.”

피를 토해내면서도 남자의 흑청색 눈동자만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내 목숨줄을 쥐겠다고 큰소리친 건 당신이다. 겨우 이따위 잔재주에 코어를 내줄 셈인가?”

“누가 내준다고 했어요?”

로젤리아는 이를 악물며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남자의 손목을 맞잡은 손끝에서 가늘지만 단단한 온기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빙벽이 산산조각 나며 수십 개의 마력 창이 두 사람의 머리통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발렌틴이 남은 마력을 쥐어짜 대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검날에서 터져 나온 둔탁한 파동이 쏟아지는 빛 창을 쳐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남자의 입에서 다시 한번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가 설원에 닿는 순간, 바닥의 마법진이 굶주린 짐승처럼 핏방울을 집어삼키며 더욱 짙은 호박색으로 타올랐다.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결계병들이 은빛 방패를 탕탕 치며 걸음을 멈추었다. 촘촘했던 방진의 한가운데가 천천히 갈라지더니, 그 틈 사이로 익숙한 은빛 장발의 인영이 지팡이를 짚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금테 안경 너머의 호박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시릴 드 발루아는 결계병들의 방진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묵직한 마도 지팡이 끝을 설원 바닥에 짓찍었다.

맑은 타격음과 함께 대지에 깔려 있던 호박색 마법진이 뱀처럼 비틀거리며 요동쳤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로젤리아 전하.”

시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살을 에는 칼바람을 뚫고 또렷하게 울렸다. 지팡이 머리에 박힌 마정석이 붉은빛을 띠며 회전하자, 발렌틴의 가슴 한가운데서 끔찍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큭…… 아윽!”

발렌틴이 흉골을 움켜쥐며 눈밭 위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남자의 찢어진 외투 틈새로 검붉은 마력선이 핏줄처럼 돋아나며 쇄골과 목덜미를 타고 무섭게 뻗어 올랐다. 배수로에서 시릴이 스쳐 지나가며 심어둔 잠복 기폭식이 설원의 적출진과 맞물려 폭주하고 있었다.

“발렌틴!”

로젤리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닿은 손바닥을 통해 얼음송곳 같은 냉기와 불길한 마력 파동이 사납게 찔러왔다. 살갗이 찢겨 나갈 듯한 고통에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시릴은 한 걸음 다가서며 안경다리를 검지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윈체스터의 빙핵은 이미 한계를 넘었습니다. 황실의 정화식을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기후 코어는 시한폭탄에 불과하지요. 전하께서 온기를 쏟아부을수록 저 자의 붕괴는 더 빨라질 뿐입니다.”

“네놈이…… 감히……!”

발렌틴이 피를 한 줌 토해내며 눈밭에 박힌 대검 손잡이를 틀어쥐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끝마디가 뻣뻣하게 얼어붙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흑청색 눈동자가 핏발로 붉게 물들었다.

시릴은 고통스러워하는 대공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직 로젤리아만을 응시했다.

“그 결함투성이 북부 괴물을 버리십시오, 전하. 윈체스터 가문이 짊어진 저주는 황실의 온실 안에서만 통제될 수 있습니다. 순순히 온기 코어를 넘기고 솔라리움으로 돌아오신다면, 폐하께 청하여 윈체스터 가문의 명맥만은 끊지 않도록 청원서를 올리겠습니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발렌틴이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가슴에서 튀어 오른 호박색 불꽃이 빙핵의 균열을 사정없이 후벼 파자, 억눌린 신음과 함께 다시 눈밭으로 고꾸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뺨이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을 뻗어 로젤리아의 옷자락을 밀어냈다.

“도망쳐라…… 로젤리아.”

거칠게 갈라진 음성이었다.

“내 빙핵이 터지면…… 이 일대가 통째로 날아간다. 날 방패 삼아서라도…… 북부 산맥으로 빠져나가…….”

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가문의 파멸과 파트너의 안위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 고결함이었다. 그 처절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로젤리아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망설임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밀어내려는 발렌틴의 손목을 단호하게 낚아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남자의 피 묻은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어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입 다무세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서릿발보다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날 방패 삼아 혼자 빠져나가라고 권하지 마십시오, 윈체스터. 당신을 두고 살아남는 자유 따위는 처음부터 내 선택지에 없었으니까.”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통으로 허덕이던 숨결 사이로 당혹감이 스쳤다. 로젤리아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쥐고 있던 단검을 들어 올려 자신의 왼손 손바닥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선혈이 붉은 꽃잎처럼 눈밭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전하, 무슨 무모한 짓을……!”

시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서늘한 균열이 일었다. 침착하던 수석 대마법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로젤리아는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제 손바닥을 그대로 발렌틴의 가슴 한가운데, 호박색 마력선이 핏줄처럼 돋아난 흉골 위에 힘껏 내리눌렀다.

“크윽……!”

발렌틴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뜨거운 피와 날 선 온기가 상처를 뚫고 파고들자, 얼어붙었던 남자의 피부가 하얗게 질리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로젤리아의 기후 핵이 내뿜는 온기는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남자의 빙핵을 갉아먹는 포식의 칼날도 아니었다.

그것은 남의 몸에 기생하며 빙핵을 갉아먹던 타인의 마도 구속을 남김없이 불살라 정화하는 순수한 불꽃이었다.

“더는 당신의 마력을 억누르지 마요. 내 온기를 먹고, 그 쥐새끼 같은 주술을 당신의 서리로 짓이겨 버려요!”

로젤리아는 이를 악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속 기후 핵이 비명을 지르듯 뛰었지만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피의 결속을 타고 로젤리아의 온기가 발렌틴의 손상된 빙핵 속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그 찰나, 발렌틴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시릴의 호박색 마법식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며 재가 되어 날리기 시작했다.

“어리석군요. 그렇게 온기 핵을 낭비하면 당신의 생명력마저……!”

시릴이 다급하게 지팡이를 들어 올려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쩌정!

맑고 서늘한 파열음과 함께 발렌틴의 흉골을 옭아매던 호박색 기폭식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검붉은 마력선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발렌틴이 크게 들이쉰 숨 속에서 서릿발이 뿜어져 나왔다. 잿빛으로 가라앉았던 남자의 흑청색 눈동자에 지독하게 푸른 광채가 다시금 타올랐다. 남자는 로젤리아의 피투성이가 된 손을 덮어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두 사람의 결속이 임계점을 넘어서며 주변의 대기가 사납게 뒤틀렸다.

따스한 봄날의 기운과 영구 동토의 혹한이 한데 엉켜 설원 위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얼어붙은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기괴하고도 압도적인 기후 이변이 결계병들의 방진을 뒤흔들었다.

발렌틴이 눈밭에 박혀 있던 대검을 거칠게 뽑아 올렸다. 검날에 맺힌 푸른 냉기 위에 로젤리아의 금빛 온기가 휘감기며 맹렬한 파동을 뿜어냈다.

“시릴 드 발루아.”

발렌틴의 목소리가 폭풍우의 중심에서 낮게 울렸다.

“네놈이 심어둔 장난질은 끝났다.”

“끝났다고 단언하기엔 이릅니다, 대공.”

시릴의 차가운 음성과 함께 상아빛 지팡이가 설원 바닥을 찍어 눌렀다.

쿠웅,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수백 명의 결계병들이 들고 있던 은빛 방패를 일제히 맞부딪쳤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굉음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오며 방진의 중심부로 눈부신 백색 마력이 집결했다. 방패 표면에 음각된 황실 문양이 일제히 호박색으로 타오르더니, 거대한 포구 형태의 마력 수렴포가 두 사람을 정조준했다.

동시에 시릴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굵직한 호박색 사슬 수십 가닥이 눈밭을 찢고 솟구쳤다.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사슬의 끝은 오직 로젤리아의 심장만을 겨누고 있었다. 인간을 결박하기 위한 주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기후 핵만을 통째로 뜯어내려는 적출의 쐐기였다.

“황녀 전하의 코어만을 온전히 회수하면 그뿐입니다. 숨통이 끊어진 북부의 시체 따위는 알 바 아니지요.”

시릴의 입매가 비틀렸다.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의 압력에 휘몰아치던 눈보라조차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발렌틴이 즉각 대검을 가로막아 서며 앞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억센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억제식을 태워 없앴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 빙핵을 갉아먹던 반동까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검을 쥔 남자의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로젤리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남자의 떨리는 손목을 제 피 묻은 손으로 단단히 덮어쥐었다.

“발렌틴, 더는 뒤돌아보지 마. 당신의 혹한도, 내 온기도 이제 저들의 것이 아니야.”

로젤리아의 맑은 벽안에 서린 결기가 한낮의 태양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기후 핵의 수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가슴속에서 솟구친 온기가 남자의 검자루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것은 상대를 삼키려는 탐욕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남자의 숨결에 봄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지극한 조율이었다.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가 커졌다. 남자는 로젤리아가 내어준 열기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혹한 속에 녹여냈다.

파지직!

대검의 검신 전체가 백은빛 광휘로 뒤덮였다. 푸른 서릿발과 황금빛 온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검날을 타고 거대하게 소용돌이쳤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물린 자리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눈 덮인 황무지 바닥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메마른 흙탕물 틈새로 파릇한 풀잎들이 싹을 틔우듯 솟아오른 것이었다.

단순한 파괴의 충돌이 아니었다. 죽어 있던 겨울의 대지를 깨우고 새로운 계절의 순환을 여는, 태초의 전설 속에나 존재하던 원초적 기후 마법의 편린이었다.

“말도 안 돼…… 저런 조화가 실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결계병들의 대열에서 동요가 터져 나왔다. 은빛 방진을 유지하던 병사들의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시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망설이지 마라! 수렴포 발사! 코어를 도려내서라도 멈춰 세워라!”

콰아아앙!

결계병들의 방패에서 집약된 호박색 마력포가 대지를 가르며 뿜어져 나왔다. 맹렬한 빛의 기둥이 모든 것을 지워버릴 기세로 두 사람을 덮쳐왔다.

그와 동시에 발렌틴이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남자의 입술 틈으로 거친 호흡과 함께 벼락같은 기합이 터졌다.

“부서져라!”

백은빛 폭풍검이 허공을 갈랐다.

따스한 봄바람의 충격파를 품은 혹한의 눈보라가 부채꼴 형태로 폭발하며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쾅!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평야를 뒤흔들었다. 마력 수렴포의 호박색 광선이 나선형 기후 폭풍과 정면으로 충돌한 순간, 허망할 정도로 맥없이 반으로 쪼개졌다.

뒤이어 밀어닥친 폭풍은 결계병들이 자랑하던 은빛 방패 진형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수백 명의 결계병들이 갑옷째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대지를 뒤덮고 있던 호박색 마법식들이 모조리 타버린 나뭇잎처럼 바스러져 흩날렸다.

시릴이 휘두른 사슬들 역시 폭풍의 중심에 휘말려 찰나에 가루가 되었다.

“큭……!”

시릴이 지팡이로 방어막을 쳤으나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안경 한쪽 렌즈에 금이 가며 남자의 몸이 눈밭 위로 사납게 미끄러졌다.

거센 폭풍이 결계군 본대를 쓸어버린 자리에는 거대한 부채꼴 통로가 뚫려 있었다. 은빛 방패의 파편과 흩날리는 눈가루 너머로, 험준하게 솟아오른 북부 설산의 능선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의 숨 막히는 감시망이 마침내 완전히 깨어진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가요!”

로젤리아가 외쳤다.

그러나 발렌틴은 대검을 땅에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극한의 융합 마력을 뿜어낸 반동으로 남자의 입술 끝에서 다시금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다리가 꺾이며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로젤리아가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히 어깨를 받쳤다.

“정신 차려요, 발렌틴!”

남자의 묵직한 체중이 실려왔지만 로젤리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발렌틴은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와 눈먼지에 엉망이 된 채로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더는 온실에 갇힌 가련한 황녀의 나약함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내달렸다.

뒤편에서 시릴이 피 묻은 안경을 벗어 던지며 일어서려 했으나, 짓이겨진 결계병들과 뒤엉킨 눈더미 탓에 즉각적인 추격은 불가능했다.

눈보라가 사납게 들이치는 경계비석을 넘어서는 순간, 몸을 옥죄던 황실 결계 특유의 묵직한 마력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수도의 관할권이 완전히 끝나는 북부 자치령의 경계선 안쪽으로 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험준한 협곡 입구에 다다르자 발렌틴의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바위에 등을 기댄 남자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로젤리아의 찢어진 옷소매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움켜쥐었다.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칼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살아남았군…… 당신 덕에.”

“말하지 마요. 호흡을 골라야 해요. 빙핵이 완전히 안정된 게 아니잖아요.”

로젤리아가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으려 하자, 발렌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어 내렸다. 흑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들어야 해. 황제가 왜 내 목숨을 노렸는지, 그리고 윈체스터의 빙핵에 왜 금이 갈 수밖에 없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