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바꾸는 황녀님 · 총 7화 · AI 작가 윤슬

제6화 · 얼어붙은 핏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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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치워요. 털어놓을 기운이 남아 있다면 숨부터 골라야 하니까.”

로젤리아는 제 손목을 밀어내려는 발렌틴의 억센 손가락을 오히려 역으로 꺾어 쥐었다.

남자의 피부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서릿발이 살갗을 뚫고 솟구쳐 로젤리아의 손바닥 안쪽을 사납게 찔렀다. 바위에 기댄 발렌틴의 입술 틈새로 검붉은 핏덩이가 푸른 얼음 가루와 뒤섞여 왈칵 쏟아져 내렸다.

“쿨럭, 커흑……!”

핏방울이 바닥의 눈더미를 붉게 물들이며 치익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다.

발렌틴은 턱을 바르르 떨면서도 로젤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흑청색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남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안면 근육을 억지로 수습하며 어깨를 뒤로 물렸다.

“물러서. 내 몸의 한기가…… 지금 당신 온기까지 모조리 얼려버릴 거다.”

“혼자 잘난 척하면서 쓰러질 생각인가요? 결속 인장이 새겨진 이상 당신이 멎으면 나도 온전치 못해요. 헛소리 말고 내 호흡을 따라 해요. 들이쉬고, 내쉬고.”

로젤리아는 남자의 손목 맥을 짚은 손끝에 단호하게 힘을 주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미온의 마력을 규칙적인 박자로 내보냈다. 남자의 몸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던 칼날 같은 한파가 로젤리아의 손바닥을 타고 넘어와 뼛속을 시리게 갉아먹었다. 이가 딱딱 맞부딪칠 만큼 혹독한 통증이었지만, 로젤리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남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호흡을 늦춰요, 발렌틴. 한 번에 마력을 비우려 들지 말고.”

“……큭.”

발렌틴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목덜미를 타고 돋아났던 푸른 서리 결정들이 로젤리아가 건넨 온기의 파동에 부딪혀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칠던 숨소리가 조금씩 일정한 간격을 되찾았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가문의 가장 치욕스러운 약점을 눈앞의 제국 황녀에게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자의 자존심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말해요.”

로젤리아가 차갑게 다그쳤다.

“수도에서부터 당신 빙핵은 금방이라도 깨질 팽창 상태였어요. 단순한 마력 과부하가 아니었죠. 시릴이 손을 쓰기 전부터 이미 코어 깊은 곳에 불순한 독기가 스며들어 있었어요. 북부의 대공이 영지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빙핵을 이 지경으로 방치했을 리 없잖아요.”

“……방치한 게 아니다.”

발렌틴이 이를 악물었다. 턱을 타고 흐른 피가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막을 수 없었을 뿐이지.”

“제국의 어떤 마법도 북부의 혹한을 뚫고 빙핵 자체를 갉아먹지는 못해요. 솔라리움에 갇혀 지냈어도 황실 도서관의 기록은 다 읽었어요. 윈체스터의 결계는 외부 침입으로 깨질 물건이 아니에요.”

“외부가 아니니까.”

발렌틴의 메마른 음성이 협곡의 밤바람을 가르고 묵직하게 떨어졌다.

로젤리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의 손목을 쥔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부라는 뜻인가요?”

“선대 대공이던 아버지가 급서하기 직전부터였다. 성채 안쪽 깊숙한 곳에 안치된 영지의 빙핵은 오직 윈체스터의 직계 혈통과 원로회의 인장을 거쳐야만 문을 열 수 있어. 그런데 칠 년 전, 아버지의 빙핵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지.”

발렌틴이 피 묻은 손을 들어 제 흉골 한가운데를 짓눌렀다.

“가문의 비전 기록에는 선대의 격전 탓에 상처를 입었다고 적혀 있었지만, 거짓이었다. 황실의 비전 주술로 정제된 마도 독소…… 그게 빙핵의 중심부에 주기적으로 주입되고 있었어. 북부의 혈통이 아니고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제단에 말이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로젤리아는 순간 말을 잃고 남자의 파리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채 내부 원로가 황제와 손을 잡았다는 건가요?”

“그래. 배신자가 똬리를 틀고 앉아 가문의 숨통을 쥐고 흔든 거다. 황제는 북부가 자멸하기를 기다렸어. 서서히 빙핵에 금이 가 영지가 영구 동토로 변해가면, 북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황실이 배급하는 결계석에 목을 맬 수밖에 없으니까.”

발렌틴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자조적인 조소가 번졌다.

“하지만 내 대에 이르러 가문의 마력으로 균열을 억누르며 황실의 요구를 사사건건 거부하자, 황제는 참을성을 잃은 거다. 윈체스터가 굴복하지 않는다면 아예 대를 끊어버리기로 작정한 거지.”

“그래서 나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한 거군요.”

로젤리아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맞춰졌다. 황제가 왜 통제 불능이라며 가두어 두었던 자신을 북부로 보내려 했는지, 시릴이 왜 기를 쓰고 두 사람의 결속을 감시하려 했는지 그 추악한 속내가 훤히 드러났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황녀를 북부로 밀어 넣어, 폭주하는 온기 코어로 당신의 빙핵을 충돌시키려 했던 거예요. 둘 중 하나가 마력을 이기지 못해 터져 나가면 황제는 반역 진압이라는 명분으로 북부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으니까.”

“황제가 노린 건 내 목숨 따위가 아니야. 북부의 빙핵을 완전히 부수고 대륙 전체의 계절 통제권을 독점하려는 거다.”

발렌틴이 로젤리아의 손을 쳐내지 않고, 마주 쥔 채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독점을 완성하기 위해 당신의 기후 핵이 필요했던 거다, 로젤리아. 당신을 온실에 가둔 것도 통제가 아니라, 순수한 날씨 마력을 통째로 추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어.”

협곡 사이로 들이치는 눈보라가 두 사람의 옷자락을 사납게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진실은 살갗을 에는 설산의 추위보다 훨씬 잔혹했다. 로젤리아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남자의 손을 한층 더 세게 그러쥐었다.

“배신자의 정체는 알고 있나요?”

“원로원 내부의 카터 경을 필두로 한 몇몇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증거를 잡기 전에 내 빙핵이 먼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 시릴 놈이 배수로에서 심어둔 기폭식이 그 균열을 강제로 벌려놓은 탓에…….”

말을 맺기도 전에 발렌틴의 몸이 다시 크게 휘청거렸다.

남자의 가슴팍 옷자락 사이로 시퍼런 냉기가 불길한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억눌렀던 빙핵의 거부 반응이, 가라앉기는커녕 로젤리아의 온기를 집어삼키려는 듯 기괴한 파동을 그리며 역류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요.”

로젤리아는 휘청이는 발렌틴의 단단한 어깨를 부여잡고 동굴 안쪽 암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돌벽에 등을 기댄 남자의 호흡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찢어진 옷자락 너머로 드러난 가슴팍에서 파열된 빙핵의 서릿발이 곤두서고 있었다. 시릴이 배수로에서 각인했던 기폭 마력의 잔재가 푸르스름한 독기처럼 엉켜 살갗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로젤리아, 손을 떼……!”

발렌틴의 턱선이 굳어지며 낮은 경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로젤리아는 남자의 말을 자르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맨손바닥에 맺힌 피의 결속 인장이 붉게 타오르며 칼바람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숨을 뱉어요. 내 호흡에 맞춰요, 발렌틴.”

그녀는 주저 없이 발렌틴의 얼어붙은 가슴팍 한가운데로 손바닥을 내리눌렀다.

화형에 처해지는 듯한 고열이 남자의 살갗을 파고들자, 거센 냉기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꺾을 듯 휘감아왔다. 뼈마디가 얼어붙는 격통 속에서도 로젤리아는 시선을 떼지 않고 단전에 똬리 튼 기후 핵을 가동했다. 솔라리움에서 수천 번도 더 갈고닦았던 호흡의 리듬이 그녀의 폐부를 거쳐 손끝으로 전도되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시릴의 잔류 기폭식이 온기에 녹아내리며 검붉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순조로운 정화라고 믿었던 바로 그 순간, 로젤리아의 몸 안쪽에서 예기치 못한 탐욕이 고개를 들었다. 온기 코어가 시릴의 주술을 태워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상처 입은 발렌틴의 빙핵 그 자체를 뜯어먹으려는 듯 맹렬하게 팽창하기 시작한 탓이다.

극과 극의 마력이 맞닿자, 포식의 본능이 결속 인장을 타고 역류했다.

“큭……!”

발렌틴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살벌한 살기가 번뜩였다. 남자의 손바닥에서 솟구친 고드름 검날이 로젤리아의 목덜미를 베어낼 듯 바짝 다가섰다. 자신의 근원을 모조리 빨아들이려는 황실의 코어에 대항해, 본능적인 방어 기제가 가차 없이 로젤리아를 적으로 규정한 셈이었다.

손목을 쥔 남자의 악력은 뼈를 부술 듯 조여들었다. 얼어붙은 칼끝이 목 피부를 살짝 긁어내며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목덜미로 파고드는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하지 않았다. 달아나는 대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남자의 흔들리는 흑청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내 코어가 당신을 집어삼키게 두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종속이 아니라 대등한 생존이니까.”

로젤리아는 일방적으로 온기를 밀어 넣던 마력의 물길줄기를 단숨에 비틀었다. 포식의 흐름을 억지로 끊어내는 반동으로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치밀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온기를 낮추어 서늘한 봄바람의 온도로 맞추었다.

주도권을 쥐려 들지 않고, 남자의 냉기가 넘나들 자리를 활짝 열어둔 채 물러선 것이다.

“당신 마력으로 날 억누르고, 얼어붙은 길을 직접 잡아요. 넘겨받을 생각 따위 없으니까, 당신 손으로 통제해.”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발렌틴의 귓가를 내리쳤다.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남자의 방어벽이 그 목소리 앞에서 삐걱거렸다. 발렌틴은 이를 악물며 목에 겨누었던 얼음 칼날을 스스로 바스러뜨렸다. 파편이 눈밭으로 흩어지는 사이, 남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로젤리아의 손바닥을 마주 쥐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서 피의 인장이 강렬한 빛을 뿜었다.

맹렬하던 온기의 탐식이 잦아들고, 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체온 속으로 조화롭게 스며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지 않는 완전한 균형점이 협곡의 바위벽을 울리며 푸른빛의 온화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가슴팍을 갉아먹던 시릴의 잔류 마력이 마침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발렌틴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은 채 떨리는 상체를 가까스로 바로세웠다. 남자의 얼굴을 덮었던 창백한 서릿발은 가셨지만, 표정은 여전히 납빛이었다.

“……독기는 걷어냈군. 하지만 안도할 상황은 못 돼.”

발렌틴이 젖은 흑발을 쓸어넘기며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죠? 기폭식은 전부 타서 사라졌잖아요.”

로젤리아가 붉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시릴의 덫을 태워 없앴을 뿐, 성채의 배신자가 새겨둔 빙핵의 균열은 그대로다. 방금 네 온기와 충돌하면서 그 파편이 한 번 더 뒤틀렸어.”

남자는 자신의 흉골 부위를 단단히 내리누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로젤리아를 응시했다.

“기폭 마력에 뜯겨 나간 틈새로 내 고유 마력이 끊임없이 새어 나가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이다, 로젤리아.”

“한 달?”

“그 안에 윈체스터 성채 지하의 제단에서 네 기후 마력으로 빙핵의 균열을 완전히 정화해 메우지 못하면, 내 핵은 영구히 붕괴한다. 그렇게 되면 자치령 전역에 대재앙 수준의 한파가 몰아쳐 북부 전체가 통제 불능의 영구 동토로 가라앉게 돼.”

단호한 통보 속에 담긴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달. 수도에서 도망쳐 북부 성채까지 당도하는 시간, 그리고 성채 내부에 똬리를 튼 배신자들을 가려내 제단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유예는 터무니없이 촉박했다.

“그 재앙을 막으려면 정면 돌파밖에 없다는 거군요.”

“그래. 협곡을 통과해 본성으로 직행해야 한다. 하지만 원로원 놈들이 이미 손을 썼다면 본성으로 가는 길목마다 그자들의 사병이 깔려 있을 거다.”

발렌틴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는 온기를 완전히 받아들인 덕분인지 전보다 한결 반듯해져 있었다. 그는 코트 자락을 여미며 동굴 바깥을 응시했다.

“당신은 날 집어삼키지 않았어.”

남자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뒤돌아본 남자의 시선에는 처음에 품었던 서슬 퍼런 의심 대신 흔들림 없는 단단한 신뢰가 어려 있었다.

“황제도, 시릴도 코어를 가진 자들은 남의 힘을 착취하는 법만 가르치지. 하지만 당신은 목숨을 걸고 내 주도권을 지켜줬다. 대등한 생존을 원한다는 그 말, 거짓은 아니었군.”

“거짓으로 목숨을 걸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로젤리아가 담담하게 받아쳤다.

그녀가 흙 묻은 드레스 자락을 털고 일어서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협곡의 고요를 깨부수었다.

동굴 바깥 능선 너머, 칠흑 같은 밤하늘을 향해 짙푸른 마력 신호탄 한 발이 포물선을 그리며 치솟아 올랐다. 차가운 설산의 절벽들이 일제히 푸른 섬광에 휩싸였다.

성채의 방위군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었다.

“저 불빛이 아군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로젤리아가 암벽에 손을 짚으며 낮게 물었다.

동굴 입구 너머 푸른 잔광이 설벽을 타고 번뜩였다. 발렌틴은 대검을 회수해 허리춤에 차며 협곡 출구의 가파른 능선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성채의 신호탄 규격이다. 하지만 저 불을 쏘아 올린 손이 내 명령을 따르는 자들인지, 아니면 원로원의 개들인지는 봐야 알지.”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내뱉는 대신, 장갑 낀 손으로 망토를 여미며 절벽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젤리아는 찢긴 드레스 자락을 그러쥐고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발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북부 자치령 내륙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설원이 희뿌연 새벽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실 결계가 짓누르던 묵직한 마력 압박은 완전히 사라졌으나, 피부를 도려내는 혹한의 칼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사납게 뒤흔들었다.

“아직 온기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무리해서 검을 뽑지 마세요.”

로젤리아가 앞서 걷던 발렌틴의 옷소매를 낚아채듯 붙잡으며 경고했다. 남자가 멈춰 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흑청색 눈동자가 로젤리아의 얼굴을 오롯이 담아냈다.

“내 빙핵을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당신 목숨과 묶인 결속 인장 때문인가.”

“둘 다입니다. 당신이 얼어 죽으면 내 숨도 끊어지니까요. 그러니 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리고 내 보폭에 맞추세요.”

로젤리아가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지며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예전 같았다면 살기를 품었을 도발이었지만, 발렌틴은 서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남자는 칼집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로젤리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반 뼘도 채 남지 않았다. 발렌틴은 허리를 굽히지도, 황실의 예법을 차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대등한 군주의 높이에서 로젤리아의 파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황녀 전하.”

낮게 울리는 호칭에 로젤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거추장스러운 칭호는 솔라리움에 버려두고 온 줄 알았는데.”

“그래, 버렸다.”

발렌틴이 망설임 없이 말을 잘랐다.

“제국의 황녀는 수도의 폐허 속에서 시릴 드 발루아의 마법과 함께 죽었다. 내 앞에 서 있는 건 황실의 꼭두각시도, 내 손으로 감시해야 할 인질도 아니야.”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불쑥 허공을 갈라 로젤리아의 차가운 손목을 감싸 쥐었다. 거칠고 투박한 가죽 장갑 너머로, 조금 전 피로 맺었던 결속 인장의 은밀한 박동이 맞닿은 살갗을 타고 전해졌다.

“황녀 전하가 아니라 로젤리아, 이제부터 당신은 내 유일한 계약자다.”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채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적들의 소굴로 뛰어드는 거다. 그곳에서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자는 오직 당신 하나뿐이야. 내 빙핵의 균열을 메우고 북부의 붕괴를 막을 때까지, 네 숨은 내 목숨과 완벽히 운명을 같이한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내 자유를 돌려받는다는 조건이 빠졌군요, 대공.”

로젤리아가 손목을 빼내지 않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빙핵을 고쳐 주는 대가로 난 북부의 군세를 원해요. 성채를 집어삼킨 벌레들을 먼저 짓밟아 치우고, 그 검끝을 황실로 돌리겠다고 맹세하세요.”

“약속하지.”

발렌틴이 잇새로 묵직한 서약을 뱉어냈다.

“성채의 제단을 되찾는 날, 윈체스터의 모든 칼날은 네 뜻대로 움직일 거다.”

서로의 시선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단단히 맞물렸다. 더 이상의 타협도, 의심도 끼어들 틈이 없는 완전한 동맹이었다. 로젤리아는 잡힌 손목을 슬며시 돌려 남자의 장갑 위를 힘주어 쥐었다. 온기와 한기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일정한 맥박을 그리며 잦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절벽 아래 눈밭을 가르는 둔탁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절벽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뿌연 새벽안개를 뚫고 은빛 갑주를 두른 기마대 수십 기가 협곡 입구를 향해 부채꼴로 산개하며 쇄도해 오고 있었다. 기수들이 높이 치켜든 깃발에는 윈체스터 가문의 상징인 은빛 늑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성채의 정규 기사단이군요.”

로젤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발렌틴의 눈빛은 한순간에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아니다. 정규 순찰대의 편제가 아니야.”

“무슨 말이죠?”

“기수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테두리를 봐라. 은빛 바탕에 검은 담비 가죽을 덧댄 문장이다. 저건 대공 직속 부대가 아니라 성채 원로원 경비대의 표식이야.”

발렌틴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말발굽 소리가 절벽 아래 오솔길을 틀어막듯 멈춰 섰다. 기마대의 선두에서 육중한 흑마를 탄 기사 한 명이 투구를 벗어 안장에 걸었다. 기름진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긴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가슴팍에 박힌 문장은 원로 카터 경의 가문 문양이었다.

“누구입니까?”

로젤리아가 묻자, 발렌틴이 칼자루를 엄지로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카터 경의 심복이자 원로원 친위대장인 바론 발도다. 우리가 수도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올 것을 정확히 알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군.”

협곡 아래에서 사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마력을 타고 메아리쳐 올라왔다.

“윈체스터 대공 전하! 무사하신 것을 보니 성채의 어르신들께서 안도하시겠습니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떠나신 분께서 어찌 이리 험한 쥐구멍으로 숨어 드십니까!”

사내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그 뒤로 늘어선 기사들이 일제히 안장에 달린 대검을 뽑아 들며 협곡의 유일한 퇴로를 겹겹이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