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바람에 눈가루가 매섭게 흩날렸다. 협곡 바닥을 가득 메운 오십여 기의 기마병들은 검날을 비스듬히 세운 채 퇴로를 옥죄고 섰다. 선두에 선 바론 발도는 말고삐를 가볍게 털며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주군을 향한 일말의 경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절벽 가장자리에 선 채 발밑의 진형을 차분히 훑었다. 기병들은 단순한 방어 태세가 아니었다. 좁은 길목 양옆으로 쐐기형 방진을 펼쳐, 위에서 뛰어내리는 자를 한 번에 꿰뚫으려는 전형적인 포위 섬멸 대형이었다.
발렌틴은 잡고 있던 로젤리아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온 대검의 은빛 날이 새벽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번뜩였다.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원로원의 개가 주인을 물려고 이 먼 곳까지 기어 나왔군. 바론 발도, 대공의 명도 없이 사병을 이끌고 영지 경계선을 넘은 죄는 즉결 처형이다.”
바론 발도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안장 옆에 달린 마도 통신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즉결 처형이라니, 가당치도 않으십니다. 수도에서 황실의 근위대를 도륙하고 도망쳐 온 패잔병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지요. 대공 전하의 그 잘난 빙핵이 이미 밑바닥까지 갈라져 숨만 겨우 붙어 있다는 건 온 성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협곡의 가파른 암벽을 타고 날카롭게 메아리쳤다. 그 말에 뒤편에 늘어선 기병들이 일제히 창대를 말안장에 부딪히며 위협적인 파열음을 냈다.
“카터 경께서 친히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곁에 낀 황실 반역자를 넘기면 원로원께서 대공 전하의 상한 숨통만은 보전해 주실 겁니다.”
로젤리아의 눈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황실 반역자라는 낙인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문제는 저들이 자신들의 탈출 경로와 발렌틴의 내부 상처를 너무나 상세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었다. 솔라리움에서 절벽으로 뛰어내려 지하 배수로를 거쳐 북부 외곽으로 빠져나온 동선은 오직 시릴과 황실 추격대만이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성채 원로원이 황실의 수석 대마법사와 언제부터 그렇게 각별한 서신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하군요.”
로젤리아가 한 걸음 다가서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 황녀의 음성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바론 발도는 대답 대신 품속 깊숙한 곳에서 손바닥만 한 돌멩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육각형으로 정밀하게 깎인 그 마도석의 표면에는 정교한 황금빛 회로와 함께, 익숙한 호박색 인장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궁정 대마법사 시릴 드 발루아의 고유 문장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온실에서 곱게 자라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는군요. 카터 경께선 북부의 미래를 위해 진정한 제국의 주인과 손을 잡으셨을 뿐입니다. 시릴 경께서 친히 전해주신 물건이지요. 전하께서 수도의 결계를 찢고 북문 배수로로 기어 나올 것까지 전부 계산해 두셨더군요.”
사내의 손바닥 위에서 호박색 빛무리가 끈적하게 요동쳤다. 지하 배수로에서 두 사람을 집요하게 옭아매던 그 불길한 추적 술식과 완벽히 동일한 파동이었다. 시릴은 수도 외곽에서 패퇴하면서도 이미 카터 경의 사병들을 움직여 퇴로에 이중의 덫을 놓아두었던 것이다.
“발렌틴.”
로젤리아가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짧게 불렀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저 사내를 살려 보낸다면 성채로 향하는 길목마다 원로원의 사병과 황실의 마법이 겹겹이 들이닥칠 터였다.
“안다.”
발렌틴의 대답은 얼음장을 깨는 소리처럼 메말랐다. 남자는 검끝을 천천히 아래로 겨누었다. 흑청색 눈동자 속에서 억눌려 있던 서릿발이 일렁였다.
“원로원의 반역에 동조한 죗값은 네놈의 목숨으로 받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렌틴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십여 길 높이의 절벽에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리꽂히는 검푸른 그림자에 기마대의 선봉이 당황한 듯 뒤로 주춤거렸다.
바론 발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창을 세워라! 저놈은 이미 한계다!”
그러나 발렌틴의 신형이 지면에 닿는 순간,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순백의 냉기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협곡 바닥에 얼어붙어 있던 두터운 빙판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선두에 섰던 기병 셋이 말과 함께 허공으로 튕겨 나갔고, 발렌틴의 대검이 호를 그리며 눈밭을 가르자 날카로운 검기가 기마병 둘의 흉갑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붉은 선혈이 얼어붙은 눈 위에 흩뿌려졌다. 단 일격에 선봉 대열이 무너지며 말들의 거친 울음소리가 좁은 협곡을 가득 메웠다.
로젤리아는 절벽 위에서 손끝을 들어 올렸다. 체내의 기후 핵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절벽 아래로 따스하면서도 거센 하강기류를 내리꽂았다. 바람에 휩쓸린 기병들의 창끝이 흔들리고, 발렌틴이 디디고 선 자리 주변의 난기류가 적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괴물 같은 놈이……!”
바론 발도는 피를 뿜으며 쓰러진 부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에 쥐고 있던 호박색 마도석을 말머리 아래 지면에 힘껏 내리꽂았다.
쨍그랑, 하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협곡 바닥을 울렸다.
마도석이 깨어지며 지면에 박히는 순간, 암반 틈새를 따라 굵직한 호박색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빛줄기는 협곡 양쪽의 수직 절벽을 기어오르더니,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십자형 결계망을 형성하며 좁은 길목 전체를 완전히 가두어버렸다.
“시릴 경의 술식이 그저 길 안내용인 줄 아셨습니까!”
바론 발도가 뒤로 물러서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이 바로 당신들의 무덤입니다, 대공 전하!”
솟구쳐 오른 결계의 마력선이 대기를 짓누르며 협곡 바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발렌틴의 검신에 서려 있던 서릿발이 그 호박색 빛에 닿자마자 기괴하게 흔들리며 불꽃을 튀겼다.
협곡을 가로지른 호박색 마력선이 발렌틴의 대검을 타고 무섭게 파고들었다. 치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검신을 감싸던 은빛 냉기가 탁한 누런빛으로 물들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손목을 덮쳤다.
“큭……!”
발렌틴이 턱을 굳게 다물며 대검을 비틀어 뺐다. 그러나 바닥에 박힌 결계석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은 이미 남자의 왼쪽 어깨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단단한 흑단색 모피 코트 위로 시퍼런 서릿발이 엉겨 붙으며 근육을 뻣뻣하게 굳혔다. 칠 년 동안 살갗 아래 똬리를 틀고 있던 마도 독소가 시릴의 술식에 반응해 통제를 벗어난 탓이었다.
바론 발도는 말고삐를 당기며 이빨을 드러냈다.
“대공 전하, 그 몸으로 뭘 더 버티시겠습니까? 그 결계석은 궁정 대마법사께서 직접 당신의 그 썩어 문드러진 빙핵에 맞춰 조율해 주신 물건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얼어붙는 건 당신 심장뿐이지!”
절벽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로젤리아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발렌틴의 균열된 핵을 겨냥한 원격 덫. 시릴 드 발루아가 황제의 명령 뒤편에서 꾸며낸 잔재주가 북부 성채의 하수인 손에 들려 있었다.
로젤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옷자락 사이로 붉은 온기 파동이 둥글게 퍼져 나갔다. 허공을 밟듯 하강기류를 타며 바닥에 안착한 그녀는 곧장 발렌틴의 곁으로 다가섰다. 호박색 결계망이 로젤리아의 접근을 감지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궤도를 틀었다. 협곡 바닥의 균열에서 뻗어 나온 끈적끈적한 빛줄기들이 대공의 어깨를 옥죄는 동시에, 로젤리아의 가슴속 기후 핵을 향해 굶주린 짐승처럼 쇄도했다.
단순한 차단 결계가 아니었다.
발렌틴의 빙핵을 자극해 남은 수명을 억지로 태워버리는 동시에, 그 반동으로 솟구칠 로젤리아의 온기 코어를 산 채로 뽑아내려는 이중 주술이었다.
“수석 대마법사의 장난감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군요, 발렌틴.”
로젤리아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손바닥을 펼쳤다. 손끝에서 타오른 선홍빛 열기가 허공을 가르며 반원형의 온기 장벽을 세웠다. 쐐기처럼 꽂히던 호박색 광선들이 장벽에 부딪혀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발렌틴은 왼쪽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오른손 하나로 대검을 고쳐 쥐었다. 남자의 흑청색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기가 맺혔다.
“물러서라. 네 기후 핵을 노리고 짠 진형이다.”
“둘 중 하나라도 물러서는 순간 끝납니다. 저 마법식은 당신의 냉기와 제 온기를 동시에 빨아들여 자멸을 유도하고 있어요.”
로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발렌틴의 단단한 등 뒤로 바짝 붙어 섰다. 그녀의 손바닥이 남자의 굳어버린 왼쪽 견갑골을 정확히 짚었다. 얼음장보다 차갑게 굳어 있던 가죽 갑주 틈새로 끓어오르는 생명력의 열기를 밀어 넣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엉겨 붙어 있던 서리가 증기로 변해 흩날렸다.
바론 발도가 안색을 굳히며 장창을 꼬나쥐었다.
“황녀 전하! 반역자를 감싸는 것도 거기까지입니다! 전원, 결계석에 마력을 쏟아부어라! 기둥을 닫아버려!”
기마병들이 일제히 말고삐를 당기며 결계석 주위로 몰려들었다. 열두 자루의 마력 창이 결계석 중심부를 향해 일제히 꽂혔다. 호박색 빛무리가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협곡 전체를 진동시키는 고주파의 파동이 귀청을 찢을 듯 울렸다.
“크윽……!”
발렌틴이 바닥에 검끝을 박으며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온기로 간신히 풀어내던 왼쪽 어깨의 마도 독소가 결계석의 과부하에 반응해 다시금 시커멓게 들끓었다.
로젤리아는 남자의 체온이 급격히 곤두박질치는 것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이 결계석을 그대로 두면 성채에 닿기도 전에 발렌틴의 빙핵이 먼저 터져 나간다. 시릴은 애초부터 두 사람이 협곡을 살아서 빠져나갈 확률을 제로에 가깝게 계산해 둔 셈이었다.
“온기 장벽의 위상을 틀겠어요.”
로젤리아가 낮게 속삭였다.
“흡인 통로를 거꾸로 찢어놓을 테니, 그 틈에 결계석을 부숴요.”
“혼자서 그 반동을 감당할 셈인가.”
“내가 죽으면 당신도 죽는다고 맹세했잖아요.”
로젤리아는 발렌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체내의 온기 코어를 한계까지 회전시켰다. 붉은 화염 같은 기후 마력이 장벽에서 뻗어 나가 호박색 결계선들을 하나씩 옭아맸다. 강제로 뒤틀린 마력의 흐름이 역류를 일으키며 결계석 중심부로 무시무시한 압력을 되돌려 보냈다.
쨍그랑!
결계석 표면에 굵은 금이 갔다. 바론 발도가 타고 있던 군마가 거품을 물며 뒷걸음질을 쳤고, 기병들이 쥐고 있던 마력 창이 연쇄적으로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과부하를 이기지 못한 결계의 붕괴는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대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협곡 양쪽을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설산의 암벽들이 갈라졌다. 수백 톤에 달하는 집채만 한 바위와 얼어붙은 토사가 굉음을 토하며 좁은 협곡 통로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앞뒤의 퇴로가 흙먼지와 무너져 내린 암석 더미에파묻히며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머리 위를 가득 메운 먹구름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쏟아져 내렸다. 집채만 한 바위 파편들이 얼어붙은 바닥을 사정없이 짓이기며 지축을 울렸다. 협곡 통로를 가로막았던 친위 기마대 역시 통제를 벗어난 붕괴의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군마들이 놀라 앞발을 치켜들었고, 날카로운 파편에 어깨를 맞은 병사들이 낙마하며 협곡 바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퇴로를 막아라! 저놈들을 이 돌무더기 아래에 깔아뭉개라!”
바론 발도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악을 썼지만, 그의 고함조차 연이어 떨어져 내리는 낙석의 굉음에 묻혀 희미하게 부서졌다.
바위 부스러기와 메마른 흙먼지가 칼날 같은 골바람을 타고 눈가를 찔렀다.
발렌틴은 지체 없이 대검을 거두어 몸을 돌렸다. 남자는 굳어가는 왼팔 대신 성한 오른팔을 뻗어 로젤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거대한 체구로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막은 순간, 어른 몸통만 한 낙석 하나가 발렌틴의 등 뒤 가죽 갑주를 스치며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남자의 상체가 거칠게 휘청거렸다.
“발렌틴!”
“고개 숙여라.”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장을 짓이긴 듯 거칠었지만, 로젤리아를 감싸 쥔 팔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로젤리아는 그의 품 안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결계석에 간 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박색 빛줄기가 여전히 공중을 찌르며 협곡의 암벽을 잘게 쪼개고 있었다. 결계석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채 비틀린 마력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는 탓에, 낙석은 멈추기는커녕 더 거대한 파쇄를 일으키며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통로의 앞과 뒤는 이미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바위 더미에 가로막혀 벽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바위더미 속에 갇힌다면 시릴이 설계한 마법식에 질식해 서서히 빙핵이 파괴당할 뿐이었다.
“돌벽에 갇히면 끝장이에요.”
로젤리아가 발렌틴의 가슴팍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요동치는 남자의 심박수는 지나치게 빠르고 위태로웠다. 마도 독소의 한기가 심장 부근까지 침범하려 들고 있었다.
“저 망할 결계석의 핵을 박살 내야 이 붕괴가 멈춰요. 저 자가 품고 있는 마력의 맥을 완전히 끊어야 길도 열립니다.”
발렌틴이 흑청색 눈동자를 들어 올려, 바위 그늘 너머에서 기병들을 수습하려 발버둥 치는 바론 발도를 응시했다. 남자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저 돌은 평범한 검격으로는 베이지 않는다. 황실의 비전 술식에 윈체스터의 피를 옭아매도록 짜여 있어.”
“알아요. 황실의 온기와 북부의 냉기가 한꺼번에 맞물려야만 부서지게끔 시릴이 비틀어 놓은 장치니까요.”
로젤리아의 눈빛에 지독한 적의가 서렸다.
시릴 드 발루아는 수도를 벗어난 순간부터 두 사람의 모든 발걸음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온기만을 강제로 적출하고 빙핵을 깨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덫이 바로 눈앞에서 목을 옥죄었다. 그렇다면 그 계산식을 거꾸로 뒤집어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검을 쥐어요, 발렌틴.”
로젤리아가 망설임 없이 피가 배어난 오른손을 뻗어 남자의 차가운 손등을 덮었다.
“당신의 한기만으로는 저걸 깨지 못하고, 내 온기만으로는 흡인 진형에 삼켜져요. 우리가 수문을 부쉈을 때처럼, 결속을 열어야 합니다.”
발렌틴의 시선이 그녀의 굳은 눈매에 닿았다. 극심한 냉기 반동으로 남자의 눈 밑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 깃든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왼팔이 온전치 않다.”
“내가 당신의 왼팔이 되어 줄게요.”
로젤리아가 대검의 손잡이를 함께 쥐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거대한 암벽의 단면이 쪼개지며 천둥 같은 굉음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두 사람의 발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로젤리아의 체내에서 솟구친 온기가 발렌틴의 차가운 검신을 타고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젤리아의 붉은 핏물이 스며든 검신이 맹렬한 금빛으로 달아올랐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한기는 살갗을 바늘로 찌르듯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더욱 거세게 힘을 주었다. 차가운 쇠붙이와 굳어가는 발렌틴의 손마디 위로 봄의 열기가 격렬하게 굽이쳤다.
저편 바위 그늘에 몸을 숨긴 바론 발도가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낙석을 방패로 삼아라! 대공의 왼팔은 이미 죽었다! 전원, 마력 창 투척 준비!”
말 울음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스무 남짓한 기마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쇠창을 치켜들었다. 뾰족한 창끝마다 시퍼런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카터 가문의 매 문장이 새겨진 흉갑을 번득이며, 기병들이 일제히 팔을 뒤로 젖혔다.
“죽여라!”
바론 발도의 악에 받친 비명과 함께 수십 자루의 쇠창이 허공을 갈랐다. 무너져 내리는 암벽 파편들 사이를 꿰뚫으며 쇄도하는 창날들은 퇴로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로젤리아와 발렌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발렌틴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왼팔 대신 오른팔 하나로 검을 버텨내려던 남자의 중심이 흔들리려는 찰나, 로젤리아가 남자의 넓은 등 뒤에서 파고들며 남은 한 손으로 검자루 끝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숨을 맞춰요, 발렌틴.”
로젤리아가 남자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손바닥에 맺힌 피가 검신에 새겨진 북부 고유의 냉기 홈을 채웠다. 혹한의 서릿발과 봄날의 온기가 피의 결속을 타고 하나의 거대한 나선으로 뒤엉켰다. 서로를 갉아먹던 이질적인 기운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백은빛 광채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발렌틴의 흑청색 눈동자에 서늘한 푸른 광채가 타올랐다.
“로젤리아.”
남자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통으로 짓눌렸던 음성에서 망설임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물린 대검이 거대한 호를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백은빛 기후 폭풍이 검날에서 폭포수처럼 터져 나갔다. 날아들던 마력 창들이 융합된 칼바람에 닿자마자 허공에서 맥없이 쪼개져 튕겨 나갔다.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은 쏟아지던 거대한 낙석들마저 모래알처럼 갈아 마시며 단숨에 전방으로 치달았다.
바론 발도의 동공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런 괴물 같은 결속이……!”
경악 어린 비명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백은빛 참격이 협곡 바닥에 박혀 있던 호박색 결계석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암벽을 옥죄던 술식이 비틀리며 비명 같은 파열음을 토해냈다. 단단한 광석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더니, 결계석의 핵이 눈부신 섬광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충격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결계석을 터뜨리고 남은 기후 마력의 파도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던 친위대를 통째로 덮쳤다. 말들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카터 가문의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협곡 벽면으로 거칠게 나가떨어졌다. 바론 발도 역시 흉갑이 산산이 깨져나간 채 피를 뿜으며 바닥을 굴렀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협곡을 메우던 기마병들은 단 한 명도 온전히 서 있지 못했다. 바닥에 처박힌 바론 발도는 부러진 팔을 움켜쥔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로젤리아는 검신을 내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맞잡은 발렌틴의 손마디에 다시 온기가 돌며 굳었던 왼팔의 서리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는 길지 않았다. 박살 난 결계석의 파편 더미 위로 싸늘한 마력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편 중심부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허공에 둥근 마법진을 그리더니, 곧 익숙한 은빛 장발의 형상을 빚어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호박색 눈동자가 오만하게 휘어졌다.
시릴 드 발루아의 환영이었다.
“훌륭하군요, 로젤리아 전하. 그 불완전한 대공의 빙핵을 쥐고도 내 결계석을 깨뜨리다니.”
환영 속의 시릴은 마치 눈앞의 참상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깨진 안경테를 고쳐 쓰지도 않은 채, 그 눈빛에는 서늘한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발렌틴이 검끝을 환영의 목덜미로 겨누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원격 통신 술식이군. 카터와 손을 잡고 내 영지에서 개수작을 부린 대가는 네 목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대공?”
시릴의 환영이 낮게 실소를 흘렸다.
“바론 발도가 당신들을 이곳에서 완전히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원로원의 이 얼간이는 그저 시간을 벌어줄 말에 불과했으니까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바론 발도가 핏물을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버림패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자의 절망이 일그러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로젤리아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시간을 벌어 무엇을 노린 거지, 시릴?”
“협곡에서 시간을 허비하시는 동안, 카터 경이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시릴의 시선이 로젤리아에게 닿았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독선적인 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윈체스터 성채의 최심부 제단 문이 열렸습니다. 카터 경의 인도로 황실 직속 결계 부대가 이미 빙핵 제단에 발을 들였지요. 당신들이 설산을 넘어 성채에 도착할 때쯤이면, 대공의 제단은 완전히 황실의 손에 넘어간 뒤일 겁니다.”
환영의 손끝에서 황실 비전의 마법 인장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빙핵에 새겨진 마도 독소의 마지막 열쇠가 방금 제단에 꽂혔습니다. 한 달이라 생각하셨습니까? 황실 부대가 제단을 장악한 이상,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사흘입니다. 사흘 안에 북부는 영구 동토로 가라앉아 제국의 완벽한 얼음 무덤이 될 것입니다.”
시릴은 로젤리아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미는 시늉을 했다.
“전하의 유일한 생존로는 황궁뿐입니다. 저 무너져가는 대공을 버리고 제단으로 오십시오. 제가 직접 전하의 기후 핵을 보존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렌틴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칼날에 서린 서릿발이 환영의 가슴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시릴의 형상은 차가운 웃음소리를 남기며 은빛 마력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협곡에는 싸늘한 침묵과 거센 눈바람만이 감돌았다.
사흘.
성채의 제단이 황실에 장악당하고 북부 전체가 영구 동토로 동결되기까지 남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카터 경의 배신은 단순한 영지 내 권력 다툼이 아니라, 북부의 심장을 황실에 통째로 팔아넘긴 돌이킬 수 없는 반역이었다.
발렌틴이 피 묻은 대검을 칼집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쓰러진 친위대원들 사이에서 멀쩡한 군마 두 필의 고삐를 낚아챘다.
그리고 로젤리아를 향해 돌아섰다. 흑청색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혹한의 바람마저 녹여버릴 만큼 뜨겁고 사나웠다.
“내 손을 놓지 마라, 로젤리아.”
발렌틴이 그녀에게 고삐 하나를 건네며 굳은 손을 내밀었다. 피와 서리가 엉겨 붙은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부서질 듯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성채가 무너지기 전에 저 배신자들의 목을 베러 간다.”
로젤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안장 위로 몸을 실었고,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협곡 출구를 향해 지체 없이 고삐를 당겼다. 성채로 향하는 설원 위로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