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컬러 위버 · 총 10화 · AI 작가 윤슬

제9화

뷰어에서 이어 읽기

관문 너머로 발을 들이자마자 폐부를 찌른 것은 타는 듯한 쇳내와 눅눅한 오존 냄새였다.

천 년 동안 닫혀 있던 격벽이 열리며 뿜어낸 고열의 증기가 두 사람의 살갗을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시야를 가로막던 뿌연 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봉인실은 도서관 지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수십 길은 족히 넘어 보이는 돔형 천장에는 굵은 마도 도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에는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액체가 배수로를 따라 불길하게 흐르고 있었다.

카이젠의 손아귀에 실린 힘이 거세졌다. 억제 장치가 부서진 쇄골 부근에서 솟구치는 열기 탓인지, 맞잡은 손바닥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리아나는 맞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그를 지탱했다.

“괜찮아요?”

“말했잖아. 네가 틀어쥐고 있는 한 쓰러질 일은 없다고.”

카이젠이 밭은 숨을 뱉으며 턱 끝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피 묻은 입가를 닦아낸 붉은 눈동자가 암흑 한가운데를 서슬 퍼렇게 쏘아보고 있었다.

“저길 봐. 네가 부른 손님이 일어나는군.”

거대한 격납고 중앙, 받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높이만 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흑철 골격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으나 기괴하게 뒤틀린 팔다리는 육중한 장갑판으로 뒤덮여 있었고, 뼈대 사이사이로 핏줄처럼 얽힌 마도관에서는 검붉은 마력이 맥동하듯 끓어 넘쳤다. 괴물이 고개를 들자 투구 형상의 안면부에서 두 줄기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끼기긱, 쾅!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거신이 거대한 강철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지하 바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요동쳤다.

동시에 리아나의 흉골 안쪽에 닿아 있던 은색 펜던트가 무섭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옷감 너머로 서늘한 한기가 번지더니, 펜던트의 핵에서 흘러나온 은빛 가닥들이 손끝을 타고 제멋대로 뿜어져 나왔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감싼 금빛 에테르 실이 거대한 흑철 골격의 흉부를 향해 팽팽하게 당겨졌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도르래가 영혼을 잡아채 끌고 가는 것만 같은 강렬한 흡인력이었다.

리아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지면을 디뎠다. 손가락 끝이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병기의 가슴 한복판에 박힌 거대한 구형 렌즈가 보였다. 반투명한 수정 안쪽에서 붉은빛과 은빛이 뒤섞인 마도 술식이 탐욕스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끌어당기고 있어.”

리아나가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으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이젠이 검을 고쳐 쥐며 리아나의 반 보 앞으로 나섰다.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 병기의 시선과 리아나의 몸 사이를 가로막는 동작이었다.

“흡수핵인가?”

“단순한 흡수가 아니에요. 조금 전 우리가 합친 마력이 문을 열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리아나는 허공으로 뻗어 나가려는 금빛 실을 억지로 움켜쥐며 매듭을 지었다. 억센 장력이 손가락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냈지만 시선은 흉부의 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괴물은 잠에서 깬 게 아니야, 내 에테르 냄새를 맡고 굶주려 날뛰는 거지.”

“위버를 사냥하기 위한 덫이란 소리군.”

카이젠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쇄골 부근에서 억누르고 있던 붉은 마력이 검날을 따라 파지직거리며 튀었다. 리아나의 금빛 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체내의 혈로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 탓이었다. 목줄기가 붉게 달아오르고 핏줄이 도드라졌지만,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검 끝을 거신의 안면부에 겨누었다.

“아드리안 그 개자식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널 처넣으려고 판을 짰던 거야. 네가 문을 열게 만들고, 그 힘으로 저 병기를 완성하려 했겠지.”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폭주한 마력까지 함께 던져 넣어 완벽한 연료로 삼을 생각이었겠죠.”

리아나가 말을 이으며 카이젠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에테르 실을 바짝 당기자, 날뛰던 카이젠의 붉은 오라가 억눌리며 한 줄기 차분한 흐름을 되찾았다.

“검을 거두지 마세요. 지금 물러서면 내 에테르가 통째로 저 핵에 빨려 들어가요. 당신의 마력도 찌꺼기 하나 남지 않고 타버릴 테고.”

“누가 물러선다고 했나?”

카이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억제 장치가 깨진 이후 처음으로, 그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 대신 명료한 투지가 차올랐다.

“저 고철 덩어리가 널 삼키겠다면, 그 아가리부터 쪼개 버리면 그만이다.”

쿵, 쿵!

마도 병기가 다시 두 걸음을 전진했다. 천장 높이 치솟은 흑철 팔이 삐걱거리며 들어 올려지더니, 거대한 손가락 끝마디가 벌어지며 다섯 개의 검붉은 마도 포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문 안쪽에서 응축되기 시작한 붉은 에너지가 공기를 지져 대며 봉인실 내부의 산소를 게걸스럽게 태워 없앴다.

리아나는 손가락을 교차하며 공중에 금빛 실로 정교한 방진을 엮어냈다. 펜던트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를 모조리 짜내어 만든 직조 장벽이 카이젠의 검기 앞을 겹겹이 감쌌다. 기계 장치의 흉포한 심장박동이 지반을 타고 두 사람의 발바닥으로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정면 돌파 외에는 어떤 퇴로도 남지 않은 전장이었다.

거대한 포문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연무가 일순 허공에서 맴돌며 멈추어 섰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 높이 매달려 있던 구형 통신 마도구가 푸른빛을 뿜어냈다. 짙은 어둠 속으로 투사된 푸른 광막 위로 익숙한 얼굴의 윤곽이 일렁였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 아드리안 벨모트가 나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발을 들였군, 리아나. 그리고 제어 장치조차 지키지 못한 한심한 황태자 전하도.”

통신 마도구를 타고 울려 퍼지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지하 격납고의 차가운 쇠벽을 타고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도서관에서부터 이어진 소란이 조금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어. 지상 통로를 막고 아래로 몰아세우지 않았다면 네가 이 안쪽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겠어?”

카이젠의 턱선이 서슬 퍼렇게 굳어졌다. 검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며 푸른빛 투사체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네놈의 잔재주에 놀아나 줄 시간은 없다, 아드리안. 환영 뒤에 숨지 말고 직접 기어 나와라.”

“급하게 굴지 마십시오, 전하. 어차피 그 쇄골의 억제 쇠붙이가 박살 난 시점에서 당신의 목숨은 몇 분 남지 않았으니까.”

아드리안의 시선이 카이젠을 가볍게 지나쳐 리아나에게 고정되었다. 녹색 눈동자 속에서 번들거리는 탐욕은 이제 한 치의 숨김도 없이 적나라했다.

“리아나, 고대 문헌의 찢겨 나간 장을 네가 찾지 못한 건 다행이야. 그곳에 적힌 진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걸어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저 병기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야. 대붕괴 이전, 세계의 흐름을 쥐고 흔들던 천공의 위버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일한 요람이지.”

리아나는 대답 대신 금빛 실을 손가락 사이에 팽팽하게 얽어 쥐었다. 어머니의 유품인 은색 펜던트가 가슴팍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 거대한 흉벽 안에서 요동치는 박동과 펜던트의 맥동이 지독하게 얽혀 드는 까닭을 이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요람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굶주려 있더군요.”

리아나의 서늘한 대꾸에 아드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굶주릴 만도 하지. 저 병기를 완벽하게 깨우려면 단순한 파동 따위로는 턱없이 부족해. 위버의 에테르 핵을 산 채로 저 흡수실에 밀어 넣어야만 해. 네 영혼의 실을 저 괴물의 동력선으로 삼는 순간, 원로원도 황실도 모두 내 발아래 엎드리게 될 테니까.”

“산 채로 먹이로 던져 넣겠다?”

카이젠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깔렸다. 그의 부서진 쇄골 틈새에서 핏방울과 함께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오라가 폭풍처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핏빛 줄기가 혈관을 타고 목덜미와 뺨까지 번져 나가며 그의 온몸을 집어삼킬 듯 붉게 물들였다.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이 여자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카이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리아나의 어깨를 밀쳐 등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검자루를 거꾸로 쥐고 자신의 가슴 중앙을 겨누었다. 억제 장치가 깨진 이후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심장의 마력 핵을 스스로 부수려는 동작이었다.

“전하, 뭐 하는 짓이에요!”

“물러서 있어라, 리아나.”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가 지독한 열기 속에서 형형하게 타올랐다.

“저 고철 덩어리에게 네 마력을 넘겨줄 바엔, 내 심장 핵을 통째로 터뜨려 이 봉인실째로 묻어 버리겠다. 내가 자폭으로 길을 열 테니 너는 무너진 틈을 타고 지상으로 도망쳐라.”

“미쳤군요. 스스로 자멸하겠다고요?”

“이게 내가 널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카이젠의 가슴팍에서 응축된 검붉은 마력이 위험천만하게 파지직거리며 팽창했다. 심장을 파괴해 일으키는 마력 폭발은 병기뿐만 아니라 카이젠 루베르트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터였다. 그것은 황태자라는 이름의 족쇄에 얽매여 살아온 사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도 일방적인 구원이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통신 마도구 너머에서 비열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태자다운 숭고한 최후로군 그래. 네 혈맥이 터져 나가며 뿜어낼 그 폭주 마력까지 저 병기의 훌륭한 윤활유가 될 텐데, 참으로 고마운 희생이야.”

그 순간, 리아나가 거침없이 팔을 뻗어 카이젠의 멱살을 잡아채며 그의 가슴팍을 사납게 밀쳐냈다.

쾅!

바닥으로 거칠게 밀려난 카이젠이 숨을 들이켜며 붉은 눈으로 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을 겨누고 있던 검 끝이 허공으로 빗겨 나가며 바닥의 석판을 깊게 긁었다.

“리아나, 너……!”

“입 닥쳐요, 카이젠.”

리아나는 황태자의 호칭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던진 채,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금빛 실이 뱀처럼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며 카이젠의 검날을 칭칭 동여맸다.

“내 목숨을 담보로 삼는 영웅 놀이는 사양하겠어요. 끝까지 내 뜻대로 살아서 걸어 나갈 테니까.”

“너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몰라서 그래! 저 병기가 네 에테르를 강제로 뜯어내기 시작하면 너는 껍데기만 남고 말라 죽는다!”

“그래서 당신이 죽어 주는 대가로 목숨을 구걸하라고요?”

리아나는 한 걸음 다가서 카이젠의 쇄골 부근을 매섭게 내려다보았다. 깨진 억제 장치 파편 사이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에는 단 한 줌의 나약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누구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아서 도망치는 미래 따위는 내 선택지에 없어요. 당신이 나를 소유할 수 없듯, 당신 멋대로 나를 위해 죽을 권리도 없어.”

“리아나…….”

“살고 싶으면, 그리고 날 지키고 싶다면 그 멍청한 심장 핵을 터뜨릴 생각 따위는 집어치워요.”

리아나는 손가락을 꺾으며 카이젠의 혈로에 연결되어 있던 금빛 실을 더욱 팽팽하게 조였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카이젠의 턱이 들렸지만, 역류하던 검붉은 피는 금빛 매듭의 억센 장력에 억눌려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리아나가 직접 그의 체내 마력 흐름을 틀어쥐고 통제권을 빼앗아 온 탓이었다.

“내가 실을 짜서 저 거신의 갑주에 빈틈을 만들 테니, 당신은 오직 내 실이 이끄는 궤적에만 검기를 쏟아부어요. 자폭할 힘이 남아 있다면 저 고철 덩어리의 목덜미를 베는 데나 쓰라고요.”

카이젠의 거친 숨결이 리아나의 결연한 눈동자 앞에서 서서히 잦아들었다. 일방적인 보호도, 맹목적인 희생도 아니었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숨통을 맞잡은 채 함께 사지로 뛰어들자는 서슬 퍼런 초대였다.

카이젠의 입가에 피 묻은 웃음이 비틀려 올라왔다.

“하…… 지독한 여자로군.”

“이제 알았어요?”

“좋다. 네 말대로 하지. 내 칼도, 목숨도, 전부 네 실 끝에 매달아 줄 테니 마음대로 휘둘러 봐라.”

카이젠이 비틀거리며 일어서 검을 고쳐 쥐었다. 리아나의 금빛 에테르와 카이젠의 검붉은 마력이 검신 위에서 맹렬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통신 마도구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녹색 눈동자에 살의가 서렸다.

“어쭙잖은 발버둥을 치기로 작정했군. 어디 그 오만이 저 고대의 강철 앞에서도 통하는지 보지.”

아드리안이 손을 들어 올리자, 마도 병기의 거대한 흉벽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핏빛으로 끓어오르는 거대한 동력핵 주변에서 수십 개의 시커먼 흑철 촉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리아나의 에테르를 탐식하려는 차가운 살의가 허공을 찌르며 격납고의 상공을 까맣게 뒤덮었다.

쇠사슬 긁는 소리와 함께 흑철 촉수들이 허공을 갈랐다. 뱀처럼 꿈틀거리며 쏘아져 들어오는 촉수 끝에는 에테르를 빨아들이는 은청색 칼날이 번뜩였다.

“왼쪽 셋, 위에서 넷이에요!”

리아나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앞으로 반 걸음 내딛으며 손가락을 비틀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금빛 에테르 실이 카이젠의 팔과 어깨, 그리고 검자루를 감싼 혈로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실을 통해 전해지는 황태자의 마력은 여전히 펄펄 끓는 쇳물처럼 위태로웠다. 부서진 억제 장치 틈으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옷깃을 적셨으나, 리아나가 틀어쥔 매듭은 그 마력이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피하지 말고 궤적대로 쳐내요!”

“명령 한번 살벌하군.”

카이젠이 피를 머금은 숨을 내뱉으며 지면을 박찼다. 억센 장력에 이끌린 그의 장검이 허공에 둥근 궤적을 그렸다. 카이젠의 붉은 검기 위로 리아나의 금빛 에테르가 단단하게 감겨들었다.

콰아앙!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정면으로 내리꽂히던 흑철 촉수 세 가닥이 단숨에 절단되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불꽃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마도 병기는 멈추지 않았다. 위에서 쏟아지던 촉수들이 허공에서 방향을 꺾으며 리아나의 목덜미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전을 때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카이젠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의가 어렸다. 그는 역류하는 피를 목구멍 뒤로 억지로 삼키며 손목을 비틀었다. 쇄골 부근의 살갗이 마력 반동으로 찢겨 나가며 옷감이 붉게 물들었지만, 검을 쥔 손에는 일말의 떨림조차 없었다.

“심장을 찢는 고통 따위는 상관없다. 네가 가리키는 곳을 모조리 베어 넘길 테니.”

낮게 으르렁거린 카이젠이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리아나의 금빛 실이 그의 마력을 한 점으로 응축해 칼날 끝으로 밀어 넣었다. 붉고 노란빛이 뒤엉킨 참격이 쐐기처럼 솟구치며 머리 위를 덮치던 촉수 네 가닥을 허공에서 산산이 토막 냈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거신의 거대한 흉벽이 완전히 젖혀졌다.

기괴하게 박동하는 붉은 동력핵이 날것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관들이 얽히고설킨 중심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봉인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달구었다.

치이익, 날카로운 배기음과 함께 동력핵 주변의 방어 장갑판이 재차 닫히려 움직였다. 거대한 강철 톱니들이 맞물리며 금빛 실의 접근을 차단하려는 계산된 방어 기제였다.

통신 마도구에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아드리안의 굳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리석은 짓을 멈춰라! 위버의 힘으로 그 핵을 건드렸다간 네 신경계부터 잿더미가 될 뿐이다!”

“닥쳐요, 아드리안!”

리아나는 외침과 동시에 카이젠의 혈로를 조이고 있던 실을 허공으로 활짝 펼쳐냈다.

“카이젠, 세 번째 장갑판 틈이에요!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경첩을 노려요!”

“알겠다.”

카이젠이 대답과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짓이겨진 다리 근육에서 핏방울이 튀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리아나의 금빛 실이 지시하는 허공의 궤적을 향해 전신을 내던졌다.

허공으로 솟구친 카이젠의 검날에 응축되었던 모든 붉은 마력이 한꺼번에 실렸다. 리아나는 그의 혈맥이 터져 나가지 않도록 체내 마력맥을 온 힘을 다해 억누르며, 검날 끝의 궤도를 금빛 실로 곧게 펴주었다.

카아앙!

귀가 먹먹해질 듯한 쇠붙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붉은 검기가 마도 병기의 가슴 한가운데를 덮고 있던 육중한 외장 장갑판을 대각선으로 갈라냈다.

두꺼운 강철판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마침내 붉은 동력핵이 무방비하게 허공에 노출되었다. 마력을 쏟아부은 카이젠이 지면으로 착지하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그는 버텨 서며 검을 거꾸로 꽂았다.

“지금이다, 리아나!”

카이젠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아나가 달렸다.

그녀는 지면에 단단히 버티고 선 카이젠의 어깨를 디딤돌 삼아 가볍게 딛고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은발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동력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에너지가 리아나의 몸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살갗이 타 들어갈 것 같은 열기와 짓누르는 압력이 전신을 덮쳤지만, 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열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가닥의 금빛 에테르 실이 거대한 송곳의 형태로 얽히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파괴의 마력이 아니었다. 타인의 감정과 힘의 맥락을 엮고 비틀어 지배하는, 컬러 위버 본연의 오라였다.

“당신들의 장난감으로 끝날 생각 따위 없어.”

리아나는 허공에서 몸을 틀며, 꼬아 쥔 금빛 에테르 송곳을 기괴하게 고동치는 병기의 동력핵 정중앙으로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