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4층 폐수로의 공기는 썩은 유황과 짓이겨진 비취 이끼 냄새로 눅눅했다.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마력 침출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갑게 출렁거리며 가죽 장화 틈새를 파고들었다.
머리 위 천장에 얽힌 굵은 배관들이 불규칙하게 삐걱거렸다. 쿵, 하고 아득한 먼 곳에서 울리는 충격파가 배수로 벽면을 타고 번졌다. 본관 최상층에서 성도 바티카로 향해야 했을 재앙의 인과율이, 하인츠 처장이 심어놓은 왜곡 경로를 따라 지맥 심장부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그 압력은 배관의 이음매를 짓이기며 시퍼런 불꽃을 튀겨냈다.
"물살이 점점 거세진다. 이 배수로가 지맥 냉각수 방출구와 직결되어 있어서 그래."
베로니카가 허벅지까지 튄 물기를 털어내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는 벨트에 매단 두꺼운 주석서를 한 손으로 받쳐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은제 나침반의 바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가리키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맥 수치가 주석서의 정상 범주를 아득히 벗어났어.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이십오 분. 쐐기가 완전히 박히면 역류하는 압력만으로 이 지하 통로 전체가 수몰될 거야."
"걱정 마라. 내가 앞장선다."
펠릭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앞장서 걸었다. 물살을 가르는 그의 양팔 겉면에 새겨진 고대 방어 룬들이 핏빛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펠릭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양손을 교차해 전방으로 뻗었다. 배관 파열로 인해 쏟아져 내리던 새하얀 마나 증기가 그의 팔뚝에서 피어난 붉은 육각형 방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단순한 증기가 아니야. 펠릭스, 방벽의 각도를 낮춰."
로간이 얇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경고했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이미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로간의 시야에서 쏟아지는 침출수와 마나 증기는 단순한 물리적 유체가 아니었다. 벽면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 사이사이로 핏빛 인과선들이 어지럽게 꼬여 있었고, 그 선들은 하나의 거대한 명제, 즉 바티카 대성전의 파멸을 아카데미로 대체한다는 잔혹한 신성어 조건절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마력 칼날이 섞여 있어. 오른쪽 벽면의 이끼 낀 틈새를 밟아. 거기가 인과율의 공백 지점이야."
로간의 지시에 펠릭스는 즉시 오른발을 디뎠다. 펠릭스가 방금 전까지 지나쳤던 수면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스쳐 지나가며 두꺼운 무쇠 배관을 날카롭게 베어 넘겼다. 챙, 하는 파열음과 함께 쇳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진흙탕에 처박혔다.
"낙제생 솜씨치고는 제법 쓸 만하군, 로간."
펠릭스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굵게 솟아 있었다. 제아무리 타고난 맷집과 하인츠가 새겨준 고위 룬이라 한들, 대지맥이 토해내는 반작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살을 에어내는 고통이었을 터였다. 하인츠라는 이름을 믿고 새겼던 룬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한 족쇄였다는 진실을 알면서도, 펠릭스는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던 베로니카의 시선이 펠릭스의 등 뒤에 머물렀다.
그녀의 단정한 은회색 단발머리 아래로 차가운 금안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베로니카는 품속 깊은 곳, 제복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의 감촉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처장실을 빠져나오기 직전 집무 책상 서랍에서 빼돌린 지맥 설계도의 사본이었다.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던 말콤의 교조적인 음성과 하인츠의 밀담을 종합하면 퍼즐은 명확했다. 신전 감사국은 책임 소지를 피하기 위해 인과율의 쐐기를 강제로 박아 넣으려 하고 있었고, 하인츠는 정정학부 학생들을 소모품 제물로 삼아 그 잉여 마력을 지맥으로 흘려보낼 속셈이었다. 원칙대로 정면 진입을 시도했다간 신전 집행관들의 화망과 지맥의 반작용에 휩쓸려 전멸할 터였다.
베로니카는 주석서의 페이지를 조용히 넘겼다.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얇은 먹지 위에 신성 결계의 기하학적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반투명한 기름종이 위에 붉은 잉크로 덧칠해진 방위각 수치였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꾹 눌러 자국을 냈다. 제단 주변의 마력 흐름과 사제들의 감시 동선을 파악해야만 했다. 위험부담은 극에 달하겠지만 지맥의 구조를 이용해 허를 찌를 방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베로니카는 굳게 닫힌 입술을 뗐다.
"서둘러야 해. 환기구 너머 공동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는 단 1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아."
펠릭스는 앞을 가로막은 철제 밸브를 맨손으로 비틀어 꺾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걱정 마라. 저 아래가 불구덩이라도 내가 앞장서서 길을 뚫을 테니까."
펠릭스의 양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이 배수로 천장의 균열을 지탱했다. 그 듬직한 등 뒤에서 베로니카는 품속의 도면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굳어졌으나, 겉으로는 어떠한 망설임도 드러내지 않았다. 지맥의 제단에 도달했을 때 동료들을 살릴 최선의 활로를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로간은 벽면의 균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그의 왼쪽 눈에는 배수로 벽면을 타고 흐르는 핏빛 문장들이 실시간으로 재구성되는 모습이 비쳤다.
‘신탁의 인과가 대성전에서 아카데미 대탑으로 전이된다. 이 명제의 주어는 이미 백은의 눈물로 지워져 고정되었고, 지금은 서술어가 완성되는 단계다.’
벽면의 배관 틈새에서 번쩍이는 신성 마력의 글귀들은 흡사 굶주린 짐승의 이빨처럼 허공을 물어뜯고 있었다. 배수로의 수위는 어느새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발밑에서 치솟는 냉각수의 한기가 뼈마디를 시리게 찔렀다.
"로간, 저 앞이다!"
펠릭스가 굵직한 팔로 가리킨 곳에는 부식된 무쇠 창살로 막힌 거대한 환기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맥 심장부의 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고 푸른빛이 창살 틈새로 번져 나와 어두운 배수로를 기괴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환기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맥동은 마치 땅 밑에 갇힌 거인의 심장 소리 같았다.
쿵. 쿵. 쿵.
진동이 울릴 때마다 배수로 천장에서 돌가루와 회반죽이 비처럼 쏟아졌다.
로간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환기구 창살에 손을 얹었다. 창살 표면에는 접근을 차단하는 신전의 봉인 문구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불결한 자의 발걸음은 거룩한 맥을 더럽히지 못하리라.’
"베로니카 선배, 봉인 해제식을 준비해 주세요."
로간의 말에 베로니카는 깃펜을 꺼내 들었다.
"삼중 성유 결계는 아니지만 신전의 정규 축성식 문구야. 해제하려면 적어도 3분은 걸려."
"그럴 시간 없습니다. 제가 조건절을 비틀 테니, 펠릭스는 문을 뜯어낼 준비를 하세요."
로간의 왼쪽 눈이 짙은 보랏빛 섬광을 뿜어냈다. 그의 시야 속에서 환기구 창살에 적힌 문장의 구조가 해체되었다. ‘불결한 자’라는 주어와 ‘발걸음’이라는 목적어 사이에 미세한 논리적 공백이 드러났다.
로간은 손가락 끝으로 창살 중앙의 신성 언어 마디를 짚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정정 마력이 스며 나오며 글자의 획을 억지로 밀어냈다.
"불결한 자의 '발걸음'을 '침출수의 흐름'으로 대체합니다. 이 물은 지맥의 냉각수이니 불결할 수 없죠."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창살에 둘러쳐져 있던 은빛 신성막이 왜곡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렸다. 문장의 의미가 엉키면서 봉인 결계가 침출수를 침입자가 아닌 자연스러운 배수 흐름으로 오인한 것이다.
"지금입니다, 펠릭스!"
"하압!"
펠릭스가 포효하며 양손으로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방어 룬이 핏빛 화염처럼 타오르며 무쇠 창살을 바깥쪽으로 거칠게 잡아 뜯었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과 함께 두꺼운 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뜯겨 나갔다.
창살 너머로 거대한 바람이 일행을 덮쳤다.
지맥의 맹렬한 열기와 성도 바티카에서 전이된 파멸의 기운이 뒤섞인 후폭풍이었다. 환기구 아래로는 수십 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아득한 심연 한가운데에 아카데미의 근원이자 지맥 심장부인 거대한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의 상층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석조 회랑이 바로 발밑에 닿아 있었다.
로간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환기구 턱을 넘어 아치 회랑의 난간에 내려앉았다. 펠릭스와 베로니카가 그 뒤를 이어 조용히 착지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십오 분.
저 아래 중앙 제단에는 거대한 쐐기가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고,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말콤 감사관의 손에 들린 은빛 정이 서늘한 광채를 번뜩였다.
아치 회랑의 난간은 지맥의 열기로 달구어져 손바닥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웠다.
로간은 난간 그늘 뒤로 상체를 바짝 낮춘 채 아래쪽을 응시했다. 지하 공동의 바닥 전체가 거대한 유리판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중심에 아카데미의 기반을 떠받치는 거대한 흑요석 암괴, 대지맥 쐐기가 솟아 있었다.
높이가 족히 십오 미터에 달하는 쐐기 표면에는 핏빛 마력이 실핏줄처럼 엉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붉은빛 줄기들 사이로 은빛 기름막이 번들거렸다. 성도 바티카에서 가져온 최상위 성유, 백은의 눈물로 기존의 명제를 뭉개고 새로운 문맥을 덧칠한 흔적이었다.
쐐기 바로 앞, 둥글게 깎아낸 백색 대리석 제단 위에는 신전 감사단의 사제 열두 명이 부복한 채 단조로운 성가를 낮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가 이어질 때마다 바닥의 마나 순환로가 차례로 백색으로 물들었다.
그 중심에 선 말콤 감사관이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말콤의 왼손에는 길이 한 자가 넘는 육각기둥 형태의 은빛 정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신성한 룬이 새겨진 묵직한 의식용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저 자식, 감식봉 대신 딴 걸 들고 있잖아."
펠릭스가 굵직한 팔뚝으로 난간 모서리를 짚으며 턱짓했다. 팔뚝에 새겨진 방어 룬이 지맥의 열기에 반응해 붉게 깜빡였다.
"말콤이 쥐고 있는 건 단순한 감식봉이 아니야. 대지맥에 신의 마침표를 영구 각인하는 '축성 정'이다."
베로니카가 차가운 어조로 속삭였다. 그녀는 벨트에서 꺼낸 두꺼운 주석서를 무릎 위에 펼치며 난간 틈새로 제단의 구조를 빠르게 훑었다.
"신전의 축성 정이 쐐기 중앙의 심문에 꽂히는 순간, 인과율의 궤적은 바위에 새겨진 법칙으로 굳어져. 성도 바티카로 떨어져야 할 별의 파멸이 온전히 아카데미 대탑으로 떨어지도록 확정되는 거야. 앞으로 십 분도 남지 않았어."
"그 전에 문장을 망가뜨려야 합니다."
로간은 얇은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왼쪽 눈꺼풀 아래에서 푸른빛을 머금은 짙은 보랏빛 안광이 번져 나왔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지맥 쐐기는 단순한 석재가 아니었다. 쐐기 표면을 타고 흐르는 붉은 마력선들이 거대한 신성 언어의 문장 구문으로 해체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백은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 흐르는 부분에 새겨진 문장이 선명하게 읽혔다.
‘하늘의 심판이 약속된 땅을 가르매, 그 징벌의 궤적은 성도의 경계를 벗어나 북방의 루미나리스 대탑으로 선회하여 온전히 쏟아져 내리리라.’
명백한 조작이었다. ‘성도의 경계’라는 전제 조건절 뒤에 ‘선회하여’라는 접속사를 억지로 쑤셔 넣고, 목적어를 성도 대성전에서 아카데미로 바꿔치기한 구조였다.
"접속 부호와 조건절 사이에 여백이 남아 있습니다. 백은의 눈물로 억지로 덧칠한 탓에 문법적 결속력이 온전하지 못해요."
로간이 낮은 목소리로 분석 결과를 전했다.
"말콤이 축성 정을 내려치기 직전, 쐐기 기저부에 정정 마력을 밀어 넣어 조건절의 인과를 꼬아버리면 됩니다. '루미나리스 대탑으로 선회하여'라는 종속절의 주어를 지맥의 반작용 그 자체로 치환하는 겁니다. 문장의 의미가 모순을 일으키면 축성 정은 튕겨 나가고, 덧칠된 성유는 지맥의 열기에 타서 증발할 겁니다."
"말은 쉽지만, 저기까지 어떻게 접근할 건데?"
펠릭스가 제단 주위를 경계하는 사제들을 가리켰다. 백색 예복 아래로 신성 탄환을 장전한 황동제 권총을 차고 있는 무장 집행관 네 명이 사방을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길을 열 테니 네가 쐐기로 달려가. 내 방패면 저 작자들의 신성 탄환 몇 발쯤은 충분히 튕겨낼 수 있어."
펠릭스가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듯 다리에 힘을 주자, 베로니카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정면 돌파는 안 돼, 펠릭스. 집행관들의 탄환에는 정화의 은박이 입혀져 있어. 네 룬 방벽이 뚫리기 전에 네 팔의 마나 혈로가 먼저 타버릴 거야."
베로니카는 주석서 한 귀퉁이를 찢어 제단의 도면을 빠르게 그려냈다. 그녀의 깃펜 끝이 제단 남서쪽 모퉁이를 강하게 찍었다.
"여길 노려. 제단 남서쪽 기둥 밑은 환기 덕트에서 빠져나온 냉각수가 흘러드는 지점이라 지맥 복사열이 가장 낮아. 시야도 석조 기둥에 가려져 사제들의 사각지대지. 펠릭스, 네가 먼저 뛰어내려 남서쪽 모서리에 룬 방벽을 쐐기 형태로 넓게 펼쳐. 집행관들의 시선과 화망을 그쪽으로 집중시키는 동안 로간이 반대편 회랑 기둥을 타고 내려가 쐐기 정면에 손을 대는 거야."
베로니카의 계획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펠릭스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선배. 내가 남서쪽 모서리에 말뚝을 박고 버티면 되는 거지? 내 뼈가 부러지기 전까진 그쪽으로 개미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할 테니까 로간 넌 네 할 일만 해."
펠릭스가 씩 웃으며 양팔의 방어 룬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가죽 토시 사이로 붉은 빛줄기가 새어 나오며 묵직한 마찰음을 냈다.
하지만 로간의 시선은 베로니카가 짚어낸 남서쪽 모서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왼쪽 보랏빛 눈동자가 남서쪽 바닥을 훑었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그곳은 지상 사제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고, 표면적인 복사열도 낮았다.
그러나 지맥의 흐름은 전혀 달랐다.
중앙 쐐기에 모인 엄청난 양의 마력이 순환하다 빠져나가는 배출 통로, 즉 지맥의 역류 압력이 집중되는 균열선이 바로 그 남서쪽 모퉁이 바닥을 관통하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방어술사라면 솟구치는 지맥의 반작용에 휘말려 내상을 입을 위험한 좌표였다. 그러나 펠릭스의 양팔에 새겨진 것은 대지맥의 충격을 흡수해 외벽으로 전환하는 고대 방어 룬이었다.
베로니카는 지맥의 역류 압력을 역이용해 집행관들의 은박 탄환을 막아낼 방벽의 강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위기 앞에서는 상식을 깨부수는 극단적인 편법을 서슴지 않는 그녀다운 과격한 지략이었다.
‘펠릭스의 방어 룬 특성을 완벽히 꿰뚫고 계산한 판이야.’
로간은 안경 다리를 살짝 고쳐 잡으며 베로니카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은회색 단발머리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깃펜을 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탈색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고, 날카로운 금안은 제단의 사제들과 저 멀리 회랑 어둠 속을 번갈아 살피며 혹시 모를 복병이나 추가 경비의 기척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학부의 파멸을 막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잠입한 그녀의 결의가 팽팽하게 전해져 왔다.
처장실에서 발견했던 서약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정정학부 학생들을 파멸의 폭풍을 흡수할 소모품으로 지정한 하인츠의 비열한 서명. 그 배신을 깨부수기 위해 베로니카는 지금 자신의 모든 지략을 쏟아붓고 있었다.
"로간, 멍하니 있지 마. 시간이 없어."
베로니카가 주석서를 덮으며 낮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깐깐했지만,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절박한 호흡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펠릭스가 뛰어내리고 삼 초 뒤에 네가 움직여야 해. 축성 정이 쐐기에 닿기 직전, 그 단 1초의 틈이 유일한 기회야."
"알고 있습니다, 선배."
로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품속에서 백은의 눈물에 젖었던 양피지 파편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선배가 열어준 길과 동료가 버텨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쐐기의 축성을 막아내고 하인츠와 신전이 꾸민 파멸의 궤적을 꺾어야 했다.
쿠구구궁.
지하 공동 전체가 진동하며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쏟아졌다. 자정을 알리는 지상의 종소리가 수십 미터의 암반을 뚫고 묵직한 공명음이 되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단 중앙에서 말콤이 의식용 망치를 번쩍 치켜들었다.
"거룩한 주권의 이름으로, 이 땅의 모든 왜곡을 바로잡아 멸망의 마침표를 찍노라!"
말콤의 카랑카랑한 외침과 함께 은빛 축성 정이 붉은 쐐기의 중심부를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베로니카의 외침과 동시에 펠릭스가 회랑 난간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수십 미터 높이에서 낙하한 펠릭스의 육중한 신체가 제단 남서쪽 석조 바닥을 강타했다. 부서진 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틈새에서 펠릭스의 양팔을 뒤덮은 붉은 방어 룬이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막아서라! 침입자다!"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신전 집행관들이 일제히 영창을 읊으며 손에 쥔 석궁 형태의 성물 방아쇠를 당겼다.
파가가각!
백은으로 도금된 신성 탄환 수십 발이 맹렬한 파열음을 일으키며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펠릭스가 팔뚝을 교차하며 전개한 룬 방벽은 빗발치는 탄환을 전부 튕겨내며 둔탁한 금속음을 울렸다. 축성 정을 내리꽂으려던 말콤 감사관의 시선이 흔들렸고, 망치를 쥔 그의 손목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지금이야, 로간!"
펠릭스의 목에 핏대가 솟구쳤다.
로간은 지체하지 않았다. 회랑 계단 난간을 미끄러지듯 뛰어넘어 제단 바닥에 착지한 그는 펠릭스가 벌어준 틈을 파고들어 붉게 요동치는 거대한 지맥 쐐기 정면으로 쇄도했다. 공기 중에 농축된 마력의 압력이 피부를 짓눌렀지만, 품속의 양피지 파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로간의 왼쪽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쐐기 표면을 가득 메운 고대 신성 언어의 인과선들이 시야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백은의 눈물로 조작된 문단이 보였다. 성도 바티카 대성전의 멸망이라는 본래 주어를 도려내고, 그 자리에 루미나리스 아카데미 대탑을 강제로 밀어 넣은 조잡한 조건절이었다.
‘자정이 되기 전 이 명제의 구문을 해체해야 해.’
로간은 오른손 검지 끝에 마나를 모아 쐐기 표면의 조작된 글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문맥의 결합 부위를 찔러 주어와 술어의 인과관계를 붕괴시키는 정정학부 고유의 왜곡 기법이었다. 성도의 재앙을 유치하는 서약의 매듭이 풀려나가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불길한 파동이 솟구쳤다.
쿠구구궁!
지맥 심장부 바닥에서 솟구치는 붉은 마력의 역류가 펠릭스가 펼친 방벽의 바깥쪽이 아니라, 방패의 안쪽 빈틈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로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벽의 마력 순환 궤적을 훑어본 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베로니카가 계산했던 방벽 좌표는 완벽했다. 하지만 바닥에 닿은 순간, 펠릭스의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이 스스로 마력의 흐름을 왜곡하며 지맥의 반작용을 안쪽으로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인츠 처장이 은인 행세를 하며 새겨준 고대 방어 룬 그 자체에 숨겨져 있던 제물의 낙인이 공명한 탓이었다.
상층 회랑에서 주석서를 펼쳐 든 베로니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피해, 펠릭스! 룬의 회로가 강제로 반전되고 있어! 하인츠가 네 몸에 새긴 건 방어 룬이 아니라 지맥을 결속하는 족쇄였어!"
"크아아악!"
펠릭스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집행관들의 탄환을 완벽히 막아내던 붉은 룬 방벽이, 내부에서 솟구친 지맥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팽창하더니 그대로 비틀렸다.
콰아아앙!
팔뚝의 방어 룬이 과부하로 타오르며 펠릭스의 거구가 바닥을 굴렀다. 룬 결계가 산산조각 나면서 지맥의 마력 침출수와 석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펠릭스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룬이…… 제멋대로……."
펠릭스가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허덕였다.
신전 집행관들이 일제히 은빛 장검을 뽑아 들고 제단 앞을 에워쌌다. 축성 의식을 멈추었던 말콤이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우둔한 어린 양들이로군. 여기까지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오다니."
말콤이 감식봉을 들어 제단 앞을 겨누었다. 뺨이 홀쭉한 그의 얼굴에 권위적인 짜증과 잔혹함이 번졌다. 최근 감사부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장비 파손이나 책임 소지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그에게, 거룩한 축성식에 난입한 불청객들은 지워버려야 할 오점에 불과했다.
"하인츠 처장이 예고했던 불온분자들이 기어코 발을 디뎠구나. 감식봉 대신 축성 정을 든 보람이 있군. 성스러운 도유식을 방해한 대가는 즉결 처형뿐이다."
그때, 상층 회랑 난간을 박차고 한 그림자가 맹렬한 속도로 활공해 내려왔다.
베로니카 폰 헤르츠였다.
그녀의 은회색 단발머리가 거센 바람에 흩날렸다. 베로니카는 허리춤의 주석서를 펼치며 제단 바닥에 날렵하게 착지함과 동시에, 깃펜으로 허공에 삼중 방어 방진을 그어 올렸다.
챙! 채쟁!
집행관들이 쏘아 올린 신성 탄환들이 베로니카가 펼친 주석서의 결계막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그녀의 날카로운 금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물러서지 마, 펠릭스! 로간, 쐐기에서 손 떼지 마!"
베로니카는 펠릭스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말콤 감사관! 성도의 재앙을 아카데미로 우회시키는 더러운 사기극을 즉시 중단하십시오! 하인츠 처장과 당신이 나눈 밀담 통신은 이미 내 주석서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방진 학부 조교 계집이."
말콤이 차갑게 비웃으며 의식용 망치를 고쳐 쥐었다.
"하인츠 처장의 협조는 이미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사안이다. 너희 정정학부 같은 낙제생들이 소모품으로 바쳐지는 것은 성도 바티카의 안녕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란 말이다. 집행관들에게 명한다. 반역자들을 지맥 핵에 포박하고, 예정대로 자정의 축성을 집행해라!"
사제들이 은빛 결계 사슬을 뽑아 들고 짓쳐 들어왔다. 베로니카가 깃펜을 휘둘러 결계막으로 사제들의 진입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절체절명의 순간, 로간의 시선은 말콤이 아닌 등 뒤의 붉은 지맥 쐐기로 향했다.
‘아니야.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로간의 왼쪽 눈이 극도로 과열되며 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짙은 보랏빛 안광이 쐐기 표면의 백은의 눈물을 투과해 그 아래 숨겨진 심층부의 문맥을 강제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신탁을 조작한 성유는 단 한 겹이 아니었다. 하인츠 처장의 세 갈래 지팡이 인장 밑바닥, 마력의 흐름이 엉켜 있는 심연 속에 또 다른 고대 성유의 층위가 굳어져 있었다.
치지직!
보랏빛 시야 속에서 쐐기의 은닉 문장이 껍질을 벗듯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단순히 하인츠 개인의 일탈이나 성도의 파멸 전이가 아니었다. 쐐기의 중심 핵을 관통하는 최상위 계약 주권절에는 두 개의 거대한 인장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학사처장 하인츠의 직인.
그리고 성도 바티카의 총대주교가 직접 축복한 황금 성좌의 문장.
그 아래 새겨진 문맥의 실체가 로간의 시야에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바티카의 추기경 좌석을 하인츠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아카데미의 대지맥과 그 심장부에 발을 디딘 모든 생명을 성도의 파멸을 흡수할 소모품으로 귀속한다.’
로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하인츠 처장의 매관매직 서약서……."
로간은 안경 다리를 밀어 올리며 말콤을 직시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말콤 감사관, 당신은 성도의 정화 의식을 완수해 감사부에서 승진하겠다고 이곳에 섰겠지만, 이 계약의 본질을 알고는 있습니까? 이 쐐기의 계약 주어는 '아카데미와 그 지하 심장부에 발을 디딘 모든 사제단'으로 묶여 있습니다! 하인츠는 자신의 추기경 좌석을 보장받는 대가로, 신탁의 파멸이 아카데미로 쏟아질 때 이곳에 있는 감사단 전원까지 증거 인멸의 제물로 소각하도록 설계해 두었습니다!"
"무, 무슨 헛소리를……!"
말콤의 홀쭉한 뺨이 파리하게 질렸다. 보신주의에 찌들어 장비 파손과 책임 소지를 극도로 꺼리던 그의 눈동자에 경악과 의구심이 번져 나갔다.
"선배, 펠릭스! 제단 남서쪽의 결계를 깨트리세요! 그곳이 하인츠의 서약을 지탱하는 마지막 조건절입니다!"
로간은 피를 흘리며 다시 일어선 펠릭스와 방벽을 지탱하는 베로니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쐐기 깊숙한 곳에서 맥동하는 파멸의 인과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콤의 뺨이 뒤틀리며 감식봉 끝에서 살기 어린 신성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자정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지맥 심장부의 거대한 공동을 가득 메우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