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알리는 첫 번째 타종 소리가 공동 천장의 암반을 뒤흔들며 내려앉았다.
웅, 웅, 울리는 진동에 발밑의 매끄러운 바닥이 비명을 지르듯 떨렸다. 십오 미터 높이의 흑요석 대지맥 쐐기 표면에서 핏빛 줄기들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은빛 기름막 아래 감춰져 있던 붉은 광선이 맥박처럼 뛰며 제단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말콤의 손에 들린 은빛 축성 정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감사관의 홀쭉한 뺨에 새겨진 깊은 주름 사이로 경련이 일었다.
“소각 조항이라니……? 새파란 낙제생 놈이 감히 성스러운 축성을 모독하려고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교황청의 성무를 집행하는 본관 감사단이 어찌 제물이 된단 말이냐!”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당장 당신 감식봉으로 쐐기 밑바닥 성유 찌꺼기나 찍어 보십시오!”
로간은 쐐기 좌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소리쳤다. 과열된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보랏빛 안광이 안경 렌즈 너머로 차갑게 번뜩였다. 눈동자 주변의 실핏줄이 터져 붉은 피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유 백은의 눈물 아래 굳어 있는 세 갈래 지팡이 인장, 그 바로 밑바닥에 성도 총대주교의 황금 성좌 문장이 겹쳐 찍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주권절은 아카데미의 파멸이지만, 그 인과를 성도로 역류시키지 않고 완전히 닫기 위해 덧붙인 귀속절이 무엇인지 정말 모릅니까? 제단 주변의 마력 측정봉을 잡은 자, 즉 현장에 임석한 성도 감사관 전원의 생명력을 지맥 안정용 연소재로 묶어 두었습니다!”
“무슨…….”
말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의식용 망치를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 신전의 규정과 절차, 장비의 손괴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보신주의자의 감각이 등골을 서늘하게 긁어내렸다.
집행관 사제들이 서로의 얼굴을 두리번거리며 은빛 결계 사슬의 당김을 늦췄다.
그 찰나의 빈틈을 펠릭스가 놓치지 않았다.
“크윽……!”
거친 신음과 함께 펠릭스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양팔의 피부를 찢어발기며 푸른 불꽃을 뿜어내던 고대 룬의 반작용 때문에 소매가 피로 젖어 있었지만, 두 다리는 대리석 바닥을 단단히 딛고 있었다.
“하인츠 처장 그 노인네는…… 처음부터 날 지켜줄 생각 따윈 없었어. 룬 방벽을 펼칠 때마다 지맥의 충격이 내 살점을 파고들도록 족쇄를 채워뒀지. 너희라고 다를 것 같아?”
펠릭스가 핏빛으로 물든 양손을 맞부딪쳤다.
콰아앙!
팔뚝에 남은 마력의 찌꺼기를 모조리 긁어모아 쥐어짜 낸 푸른 충격파가 남서쪽 제단 구퉁이로 뻗어 나갔다. 방어가 아닌 순수한 파쇄의 힘을 담은 결계 덩어리가 거대한 쐐기를 지탱하는 지맥 배출구를 향해 직선으로 쏘아졌다.
“방해하게 두지 마라! 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제 하나가 소리치며 은박 탄환을 장전하려 했다.
“늦었어요!”
베로니카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며 허리춤에서 꺼낸 깃펜을 허공에 휘둘렀다. 주석서의 양피지에서 뜯겨 나온 금빛 수식들이 펠릭스가 쏘아 올린 결계 덩어리의 뒤꽁무니에 달라붙었다.
“궤적 보정, 칠 번 각도 편차 소거! 파쇄 축심을 배출 밸브 룬 회로에 강제 결속!”
베로니카의 정밀한 궤도 수정이 더해지자, 거칠게 날아가던 파쇄 결계가 날카로운 쐐기 형태로 변형되며 정확히 제단 남서쪽 기단부에 꽂혔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남서쪽 바닥을 덮고 있던 방어 룬 회로에 굵직한 균열이 터져 나갔다. 지맥의 붉은 줄기 하나가 방향을 잃고 허공으로 치솟으며 제단 주변의 삼중 차폐막이 크게 일렁였다.
하인츠의 서약을 지탱하던 외곽 조건절 하나가 부서진 것이다.
“이 빌어먹을 학부 놈들이……!”
말콤이 망치를 치켜들며 소리쳤으나, 집행관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부서진 남서쪽 기단부가 아니라, 로간이 가리켰던 흑요석 쐐기 좌대의 이음매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남서쪽 배출구가 깨지며 마력의 균형이 무너지자, 쐐기 밑바닥의 성유가 부글거리며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겉을 감싸고 있던 은빛 피막이 얇아진 틈새로 검붉은 술식의 잔상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것은 아카데미의 마법 체계가 아니었다. 성도 바티카 감사부의 특수 봉인술에서만 쓰이는 고유한 은닉 서약의 파동이었다.
“말콤 감사관! 쐐기에 정을 박아 축성을 끝내는 순간, 당신 발밑의 감사관 전용 문양부터 불타오를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갈망하던 차기 수석 감사관 자리는, 지하에서 뼈도 남지 않고 타 죽은 자에게 주어지지 않아요!”
로간의 서늘한 일침이 말콤의 귓전을 후벼 팠다.
두 번째 종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뎅, 뎅, 하는 쇠북 소리가 뼈마디를 울릴 때마다 쐐기 표면의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증기가 짙어졌다. 이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몇 번의 종소리뿐이었다.
말콤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목숨과 출세를 저울질하는 사제의 계산적인 본능이 극도로 치솟았다.
“거짓이면…… 네놈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벨 것이다.”
말콤이 이를 갈며 품속에서 감식봉을 꺼내 들었다. 백은으로 도금된 감사관 전용 감식봉 끝부분에서 푸르스름한 진실 규명 술식이 피어올랐다.
말콤은 축성 정을 쥔 손을 내리고, 떨리는 걸음으로 쐐기 밑바닥에 다가섰다. 그리고 로간이 지목한 세 갈래 지팡이 인장의 접합부, 은빛 기름이 거품을 뿜어내는 균열 속으로 감식봉의 뾰족한 끝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치이익!
성유와 신성력이 맞부딪치며 유황 타는 냄새와 함께 지독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감식봉 상단의 세공 보석이 푸른빛을 내뿜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보석 내부의 핵이 썩은 핏빛으로 물들더니, 감식봉 전체를 타고 신전 감사부 고유의 경보 문양이 시뻘겋게 번져 나갔다.
감식봉을 타고 역류한 마력이 제단 바닥의 은밀한 회로를 강제로 깨워 올렸다.
파지지직!
공동 허공에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계약 문장들이 영사막처럼 떠올랐다.
하인츠의 세 갈래 지팡이 인장과 성도 바티카 총대주교의 황금 성좌 문장 바로 아래, 일반적인 감식으로는 절대 읽어낼 수 없도록 백은의 눈물로 덮어두었던 특수 조건절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본 신탁의 인과가 아카데미 대탑에 안착함과 동시에, 현장 참관 사제단의 영혼과 육신을 영구 회수하여 대지맥의 반동을 상쇄하는 소각재로 귀속함.’
선명하게 허공에 박힌 글귀를 바라보는 말콤의 눈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손에 쥐고 있던 축성 정이 덜그럭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색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은빛 정의 맑은 쇳소리가,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지하 공동의 소음을 가르고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바닥을 구르던 축성 정이 제단 모서리에 부딪혀 멈췄다.
말콤의 턱 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홀쭉한 두 뺨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시체처럼 파리해졌다. 허공에 시뻘겋게 떠오른 글귀는 성도 감사부의 고유 봉인 술식 그대로였다. 바티카 총대주교청의 인가가 없으면 결코 새겨질 수 없는 문구, 그리고 그 아래 확실하게 찍힌 하인츠의 세 갈래 지팡이 인장.
“소각재……? 내가, 성도의 감사관인 내가……?”
말콤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뒤편에 도열해 있던 사제 집행관들도 공포에 질려 석궁을 쥐었던 손을 내렸다. 그들의 발치 아래로 붉은 화염 마력이 뱀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쐐기의 반동을 흡수할 제물로 지정되어, 축성이 끝나는 즉시 산 채로 불태워질 운명이었다.
“학사처장 그 늙은 여우 놈이 감히 교황청 감사단을 불쏘시개로 삼으려 들어?”
말콤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권위와 체면 따위는 순식간에 벗겨졌다. 차기 수석 감사관 자리로 영전시켜 주겠다던 하인츠의 밀담은 전부 거짓이었다. 바티카의 추기경 자리를 홀로 차지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된 감사단 전원을 재앙의 뒤처리에 쓸 소모품으로 팔아넘긴 것이다.
세 번째 종소리가 지하 공동을 뒤흔들었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흑요석 쐐기가 맹렬하게 진동했다. 백은의 눈물이 부글거리며 뿜어내는 은빛 증기가 천장을 메우고, 제단 바닥에 새겨진 신성어 회로들이 붉은 피를 토하듯 솟구쳐 올랐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일 분 남짓이었다.
“멍하니 서 있을 시간 없어요, 말콤 감사관.”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두꺼운 주석서를 빼내어 펼치며 성큼 다가섰다. 금빛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종이 열두 번을 다 채우면 서약의 명제는 쐐기에 영구 고정됩니다. 당신과 부하들이 잿더미로 변하는 건 바로 그 순간이고요. 살고 싶다면 감사단의 결계 간섭 권한을 즉시 넘겨요.”
“이단 부서의 계집 주제에 감히 내게 명령을……!”
말콤이 본능적으로 사제의 콧대를 세우려다 말을 멈췄다. 그의 장화 코앞까지 뻗어 나온 붉은 인과선이 사제복 자락을 사납게 그을리고 있었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열기가 다리통을 타고 올라오자, 말콤의 계산적인 머릿속이 번개처럼 회전했다.
여기서 학생들을 체포하겠다고 버티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한다. 성도의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말콤이 바닥에 나뒹굴던 축성 정을 낚아채듯 주워 들었다. 은빛 표면에는 여전히 신전 감사관의 고유 제어 문양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하인츠 놈의 직인은 성도 총대주교청의 인가와 이중으로 묶여 있다! 단순한 파쇄 결계 따위로는 절대 안 깨져! 강제로 건드렸다간 지맥의 반동이 쐐기 전체를 폭발시킬 거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요.”
제단 남서쪽 기둥을 등지고 겨우 버텨 선 펠릭스가 피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짓씹듯 뱉었다. 양팔을 짓누르던 족쇄 회로는 아직 붉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남서쪽 지맥 배출구에 박아 넣은 룬 파편 덕분에 간신히 지맥의 역류를 억누르고 있었다.
로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쐐기 표면의 균열을 똑바로 응시했다. 왼쪽 눈동자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사납게 일렁였다.
“반동을 상쇄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축성 정에 걸린 감사관 전용 간섭 코드를 역회전시키면, 쐐기에 주입된 신성어의 주어와 목적어가 일시적으로 분리됩니다. 그 틈에 남서쪽 결계를 터뜨리고 명제를 비틀 겁니다.”
로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말콤은 그 창백한 얼굴과 타오르는 왼쪽 눈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낙제생이라고 무시했던 학관의 풋내기가, 교황청의 고위 사제들조차 해독하지 못하는 특급 신탁의 구문 구조를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네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공동 전체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바위 부스러기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말콤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품속에서 은박으로 장식된 소형 인장석을 꺼내 축성 정의 손잡이 홈에 거칠게 박아 넣었다.
딸깍!
정의 끝부분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쐐기 형태의 은박 칼날이 역방향으로 톱니를 드러내며 삐걱거리는 기계음을 토해냈다.
“성도 감사관 코드, 테트라-칠-공-삼.”
말콤이 이를 갈며 축성 정을 로간을 향해 던졌다.
“역회전 술식이 돌아가면 삼십 초 동안 감사부 직인의 결속이 풀린다. 늙은 여우 놈의 직인을 지워 버려라. 날 속이고 이 지하에 생매장하려 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만들어!”
로간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날아오는 축성 정을 단단히 받아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차가운 은빛 감촉 너머로 신전의 엄격한 규문과, 그것을 거꾸로 뒤집는 해제 공식이 왼쪽 눈을 통해 투명하게 흘러들어왔다.
다섯 번째 종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로간은 거대한 흑요석 암괴를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뒤편에서 베로니카가 주석서를 펼쳐 들고 집행관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퇴로를 확보했고, 펠릭스가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며 남서쪽 지맥 관의 균열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이제 쐐기의 심장부에 박힌 거짓 명제를 부숴버릴 차례였다.
축성 정의 은빛 날이 로간의 손바닥 안에서 날카롭게 진동했다. 손잡이 안쪽의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며 푸른빛 불꽃을 뿜어냈다.
로간은 망설이지 않고 흑요석 암괴의 심장부를 향해 내달렸다. 지맥의 핏빛 줄기들이 사방에서 튀어 오르며 바닥을 짓이겼다. 달아오른 돌바닥의 열기가 가죽 장화 밑창을 뚫고 올라왔다.
“펠릭스, 남서쪽 관이야! 지금 부숴!”
로간의 외침과 동시에 펠릭스가 제단 기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펠릭스의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이 붉은 핏빛으로 터져 나갔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펠릭스는 이를 악문 채 파쇄 결계의 칼날을 남서쪽 배출구 이음매에 그대로 짓이겨 박았다.
쩌적, 쾅!
남서쪽 배출구를 틀어막고 있던 하인츠의 결계 관이 산산조각 났다. 지맥의 반작용이 배출구를 잃고 요동치며 쐐기 중심부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로니카가 주석서를 펼쳤다. 깃펜 끝에서 번진 잉크가 허공을 가르며 말콤의 사제단이 쏘아대던 은박 탄환의 잔해들을 튕겨냈다.
“로간! 결속이 풀리는 건 고작 삼십 초야! 서둘러!”
여섯 번째 종소리가 지하 공동의 천장을 울렸다.
로간은 거대한 흑요석 암괴 앞에 무릎을 꿇고 축성 정을 양손으로 쥐었다. 왼쪽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던 보랏빛 불꽃이 맹렬하게 번져 나가며 쐐기 표면의 문장을 낱낱이 분해했다.
백은의 눈물로 덧칠해진 기름막 아래, 신성어로 새겨진 사악한 문맥이 드러났다.
‘성도 바티카 대성전의 멸망을 루미나리스 아카데미 대탑에 귀속하며, 계약의 증표로 참관 사제단과 정정학부의 숨을 태운다.’
로간은 축성 정의 톱니를 쐐기 중앙의 하인츠 직인에 정면으로 찍어 넣었다.
콰득!
은박 칼날이 흑요석을 파고들며 역회전 코드가 작동했다. 푸른빛 술식이 백은의 눈물을 밀어내며 문장의 뼈대를 강제로 벌려 놓았다. 주어와 목적어의 결속이 끊어지며 글자들이 허공에서 붉게 비틀거렸다.
“목적어를 바꾼다.”
로간은 손바닥에 맺힌 피를 축성 정의 홈에 문질렀다. 보랏빛 안광이 문장의 빈틈을 꿰뚫었다.
“신탁의 파멸을 흡수할 대상은 아카데미가 아니라, 하인츠 처장의 개인 금고 좌표로 수정한다.”
하인츠가 본관 4층 처장실 금고에 새겨둔 차폐 결계의 인장. 조금 전 처장실에서 훔쳐본 밀약 서약서의 마력 파장이 로간의 왼쪽 눈을 통해 축성 정으로 흘러들어갔다.
로간은 신성어의 문맥을 비틀어 찍어 눌렀다. 파멸을 가리키던 화살표가 아카데미 전체에서 본관 4층 하인츠의 은밀한 밀실로 꺾여 들어갔다.
일곱 번째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정이었다.
쿠구구구궁!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지하 공동을 찢었다. 십오 미터 높이의 거대한 흑요석 쐐기가 버티지 못하고 수직으로 갈라졌다. 중심부에 박혀 있던 하인츠의 직인이 보랏빛 불꽃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동시에 붉은 핏빛으로 날뛰던 지맥의 폭류가 쐐기 상단으로 솟구치지 못하고, 지하 배수로를 타고 본관 4층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지상 쪽에서 건물이 뒤틀리는 육중한 파열음이 메아리쳐 내려왔다.
“커헉!”
펠릭스가 자리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양팔을 옭아매던 하인츠의 족쇄 룬이 완전히 부서져 검은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말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동강 난 쐐기를 바라보았다. 감식봉 끝에 맺혀 있던 붉은 낙인이 사그라들며 사제단을 짓누르던 영혼 소각의 압박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말로…… 궤도를 돌려놓았단 말인가? 특급 신탁의 인과율을, 일개 학생이…….”
말콤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로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왼쪽 눈에서 피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안경을 벗어 피를 닦아내던 로간의 발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채였다.
두 동강 난 흑요석 쐐기의 가장 깊은 핵, 은빛 기름조차 닿지 않았던 틈새에서 떨어져 나온 손바닥만 한 판석 조각이었다.
로간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룬 문자가 아니라, 고대 제국 시절의 엄격한 관인과 함께 금박으로 상감된 특수 계약 조항이 새겨져 있었다.
베로니카가 깃펜을 집어넣으며 다가왔다.
“로간, 괜찮아? 눈은…….”
“괜찮습니다, 선배. 그것보다 이걸 보십시오.”
로간이 건넨 판석 조각을 받아 든 베로니카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콤 역시 다급하게 다가와 판석 위로 시선을 던졌다.
“이건…… 교황청 최고 재무관의 사적 서명이다. 하인츠 이 교활한 늙은이가, 대체 무엇을 넘겨받기로 하고 이 짓을 벌인 거지?”
로간이 판석의 가장 아래쪽에 새겨진 작은 문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왼쪽 눈에 남은 잔광이 그 글귀를 선명하게 비췄다.
‘성도 바티카는 하인츠에게 추기경의 관을 수여하며, 그 대가로 아카데미 붕괴 직후 노출될 지하 최심부의 태초 원전 예언서 영구 보관소 인계권을 온전히 교황청에 귀속한다.’
정적이 지하 공동을 감쌌다.
하인츠의 목적은 단순한 자리보전이나 아카데미의 파멸 그 자체가 아니었다. 재앙을 유도해 결계를 무너뜨리고, 그 아래 묻혀 있던 태초의 원전 예언서를 통째로 교황청에 팔아넘기려 했던 것이다.
“원전 예언서 영구 보관소…….”
베로니카가 낮게 읊조렸다. 주석서를 쥔 손가락 끝이 파얗게 질려 있었다.
“우리 정정학부가 목숨을 걸고 결함을 고쳐온 그 원본들이, 하인츠의 손에 넘어갈 뻔했다는 소리야.”
로간은 판석 조각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 천장 너머에서 지맥의 충격을 정통으로 받아낸 본관 4층 처장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하인츠 처장이 아직 살아 있을 겁니다. 재앙의 궤도를 개인 금고로 틀었으니, 제 발로 증거를 수습하러 움직이겠지요.”
로간이 얇은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펠릭스가 베로니카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말콤은 굳은 얼굴로 감식봉을 고쳐 쥐었다.
“감사관님, 이제 당신의 보고서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확실해졌을 텐데요.”
로간의 서늘한 물음에 말콤은 입술을 짓이기며 감식봉 끝을 세웠다.
“본관으로 간다. 내 손으로 그 늙은 여우의 목덜미를 잡아야겠어.”
네 사람의 발걸음이 무너져 내린 지하 공동을 뒤로하고 지상을 향해 빠르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