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7화 · AI 작가 서가

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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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철제 계단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배수로 벽면을 때렸다.

축성 정이 쐐기를 쪼개면서 터져 나온 잔류 마력이 지하 통로를 메운 흙탕물 위로 파랗게 튀었다. 로간은 축축한 벽면을 짚으며 성큼성큼 발을 뗐다. 왼쪽 눈꺼풀 안쪽이 불에 덴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멈춰 설 틈은 없었다.

“펠릭스, 걸을 수 있겠어?”

뒤따라오던 베로니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펠릭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팔을 칭칭 감고 있던 족쇄 룬은 까맣게 타서 재만 남았지만, 찢겨 나간 살갗에서 배어 나온 피가 소매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팔이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선배. 진작 이 빌어먹을 걸 뜯어냈어야 했는데.”

펠릭스는 잇새로 신음을 삼키면서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인츠가 은혜라며 박아 넣었던 족쇄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두 다리에 힘이 붙는 모양이었다.

일행의 맨 뒤편에서는 말콤이 감식봉을 바짝 치켜든 채 계단을 밟았다. 사제복 자락은 흙탕물에 젖어 엉망이었고, 홀쭉한 뺨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말콤의 시선은 펠릭스의 상태나 로간의 상처 따위에는 닿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천장 너머, 무너져 내린 본관 4층의 위치를 가늠하듯 위쪽만을 병적으로 쫓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지맥 역류가 처장실에 떨어졌다면 본관 전체에 비상 결계가 작동했을 거다. 하인츠가 수습을 마치고 도망치면 교황청과의 연줄도, 내 보고서도 공중에 뜬다.”

말콤이 감식봉 끝으로 계단 난간을 툭툭 치며 재촉했다. 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 탐욕스러운 노인이 그렇게 쉽게 도망칠 리 없습니다. 금고 안에 숨겨둔 것들이 성도 바티카로 가는 유일한 닻일 텐데요.”

지하 1층 배수구 끝자락에 닿자, 무거운 청동 배수 밸브 너머로 요란한 경보 종소리가 새어 나왔다. 댕, 댕, 댕 하고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는 아카데미에 특급 경계 태세가 발령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벨트에서 주석서를 꺼내 들며 밸브 틈새로 손을 뻗었다.

“문 뒤는 본관 1층 동쪽 회랑이야. 로간, 밖을 봐.”

로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밸브 틈으로 시선을 던졌다. 왼쪽 눈의 보랏빛 시야를 통하자, 4층에서 뿜어져 나와 중앙 계단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지맥의 파멸 잔류 마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짙은 보랏빛 안개가 대리석 바닥을 핥고 있었고, 그 사이로 무장한 학생 경비대 수십 명이 회랑을 차단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합니다.”

로간이 밸브를 살짝 밀어 열며 낮게 읊조렸다.

“지맥 역류를 단순 누출 사고로 덮으려 드는군. 4층 집무실 접근을 전면 봉쇄한 걸 보면 증거를 먼저 챙기려는 게 확실해.”

베로니카가 틈새로 고개를 내밀어 벽면에 새로 부착된 붉은 양피지 포고문을 주석서 모서리로 짚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포고문 작성자가 하인츠야. 사고가 아니라고 적어 놨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펠릭스가 핏자국 묻은 팔을 감싸 쥐며 물었다.

“예언 정정학부 연구동에서 불법 금기 술식을 시전하다 지맥 핵을 건드렸다고 날조했어. 정정학부 전원에 대한 즉결 체포령과 함께, 오염 구역 정화를 핑계로 본관 3층 이상의 모든 통로를 차단했어. 결계 총괄권자의 권한으로 경비대를 배치해 둔 거야.”

베로니카의 목소리에 서늘한 분노가 실렸다. 하인츠는 자신이 저지른 대지맥 테러를 거꾸로 정정학부의 폭주로 둔갑시켜, 학생들의 입을 막고 집무실로 가는 길목을 합법적으로 틀어막은 것이었다.

“파렴치한 늙은이 같으니.”

말콤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신전 감사관 인장을 꺼내 손바닥에 쥐었다.

“길을 비키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성도 바티카 감사관의 직인을 들이밀면 학사처 경비대 따위는 감히 막아서지 못해. 내가 앞장설 테니 곧장 4층으로 밀고 올라간다.”

말콤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그의 눈동자는 1층의 경비대보다, 4층 금고가 묻혀 있을 천장 한구석에 못 박혀 번들거렸다. 하인츠를 단죄하겠다는 말과 달리, 그의 발걸음은 처장실 금고에 보관되어 있을 원전 예언서 관련 물건을 누구보다 먼저 손에 넣겠다는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간이 손을 뻗어 말콤의 어깨를 굳게 내리눌렀다.

“멈추십시오, 감사관님.”

“뭐 하는 짓인가, 로간 바르도! 일 분 일 초가 급하다!”

“그 인장을 내밀고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독 안에 든 쥐가 됩니다.”

로간이 왼쪽 눈을 가늘게 뜨며 중앙 홀의 나선형 계단을 가리켰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은박 마력선이, 계단 디딤판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4층 난간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인츠는 감사관님이 지하에서 소각재가 되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살아 돌아온 감사관이 나타나면 경비대가 순순히 길을 비킬 것 같습니까? 저 은박 선은 신전식 침묵 결계와 연동된 포획 진입니다. 발을 올리는 즉시 결계 통제실에서 계단 전체를 영구 차단벽으로 밀폐하도록 짜여 있습니다.”

말콤이 감식봉을 쥔 채 멈칫했다. 감식봉 끝을 계단 쪽으로 살짝 겨누자, 로간의 말대로 희뿌연 경보 룬의 파동이 봉 끝에 날카롭게 반응하며 찌르르 떨렸다.

“제기랄…… 늙은 여우 놈이 퇴로까지 이중으로 잠가 뒀군.”

말콤이 이를 갈며 인장을 거두어들였다.

펠릭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중앙 계단이 막혔으면 4층까지 어떻게 올라갑니까? 외벽 창문은 처장실 결계 폭주 때문에 파멸 잔류 마력이 벽을 타고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기어오를 수도 없는데.”

로간은 시선을 돌려 1층 회랑 벽면 구석, 배수 밸브 옆에 녹슬어 붙은 사각형 철판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 선배, 저거 열 수 있습니까?”

베로니카가 로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금세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엷은 미소를 띠었다.

“마나 배관 점검구로군. 정정학부 설립 초기, 지하 연구동과 4층 결계 통제실 사이에 몰래 직통으로 깔아둔 비공식 유지보수 통로야. 도면에는 폐쇄 구역으로 적혀 있지만, 우리 학부 주석서에는 아직 우회 경로 코드가 남아 있어.”

베로니카는 품에서 두꺼운 철제 깃펜을 꺼내 점검구 덮개의 사각 홈에 비틀어 꽂았다. 찰칵하는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먼지 쌓인 철판이 삐걱거리며 벌어졌다. 안쪽에서는 낡은 황동 배관들이 거대한 뱀처럼 얽혀 위층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 있었다.

“경비대를 자극하지 않고 4층 처장실 뒤편 서가 벽면으로 바로 뚫고 들어갈 수 있어. 다만 배관 사이가 좁아서 몸을 바짝 웅크려야 해.”

베로니카가 먼저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펠릭스가 뒤를 받치며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로간은 점검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여전히 시선을 4층 방향에 둔 채 감식봉을 쥐락펴락하는 말콤을 똑바로 응시했다.

“감사관님, 올라가서 우리가 찾아야 할 건 하인츠 처장의 신병과 그가 남긴 횡령 및 공모의 물증입니다. 그 외의 것에 딴생각을 품으시면, 이 좁은 통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전에는 보고서가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서늘한 경고에 말콤의 턱 근육이 굳었다. 말콤은 헛기침을 삼키며 감식봉을 옷자락 안으로 갈무리했다.

“헛소리 마라. 내 목표는 오직 신전을 기만한 배신자를 심판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로간은 망설이지 않고 점검구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네 사람의 그림자가 삐걱거리는 배관 틈을 타고 무너져 내린 4층 처장실의 뒤편을 향해 은밀하게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배관 덮개 철망을 발로 걷어차자 비틀린 나사가 튕겨 나가며 먼지구름이 일었다. 펠릭스가 그을음 묻은 어깨로 좁은 통로 입구를 넓히고 먼저 기어 나왔다. 뒤이어 발을 디딘 본관 4층 학사처장실 내부는 로간이 지하에서 지맥의 좌표를 틀어 처박은 파멸 폭류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때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던 흑단목 서가들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뒹굴었고, 석조 벽면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 사이로 보랏빛 지맥 잔류 마력이 찌르르 소리를 내며 불꽃처럼 튀었다. 서가 뒤편에 매립되어 있던 거대한 오리하르콘 금고는 정통으로 벼락을 맞은 무쇠 솥처럼 시커멓게 녹아내려 있었다. 두께가 반 뼘에 달하던 금고 문짝은 열기에 뒤틀려 바닥으로 주저앉아 있었고, 주변 석벽은 고열에 녹아 유리질로 번들거렸다.

“처장의 기척은 없어.”

펠릭스가 탄내 나는 바닥을 훑으며 낮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금고 앞쪽, 바닥 대리석이 동그랗게 타들어 간 자리에 멎었다.

“단거리 전이 마법진 잔해야. 룬 회로 외곽이 급하게 뜯겨 나간 걸 보면, 금고가 지맥 폭류에 터져 나가기 직전에 술식을 기동해서 몸만 빠져나갔어.”

“그 노인답게 쥐새끼처럼 빠르군. 하지만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을 거야. 마법진 중심부에 피가 튀어 있어.”

베로니카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들을 철제 깃펜 끝으로 집어 올렸다. 금고 내부가 터져 나가면서 쏟아져 나온 서류들이 사방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길에 반쯤 그을렸지만, 굵직한 인장과 서명은 여전히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성도 바티카 대성전 재무관 직인이 찍힌 뇌물 수수 장부 원본이야. 특급 신탁의 인과 전이 대가로 약조된 추기경 대리석 좌석 배정 공문서도 온전히 남아 있어. 이 세 장만으로도 삼두정 원로 회의와 제국 감찰원에 하인츠를 정식 고발하기에 차고 넘쳐.”

베로니카는 품에서 꺼낸 가죽 서류철에 증거 양피지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펠릭스 역시 서랍 파편 밑에 깔려 있던 서약서 부속 서류들을 주워 모으며 턱을 굳혔다. 과거 자신을 구원해 준 은인이라 믿었던 자의 추악한 거래 내역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펠릭스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로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왼쪽 눈의 초점을 좁혔다.

붉게 달아오른 왼쪽 동공에 일렁이는 보랏빛 시야 속에서, 방 안에 흩뿌려진 신성 언어의 잔류 궤적들이 가느다란 실선이 되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금고를 찢어발긴 지맥의 폭류는 사라졌지만, 그 폭류가 태워버린 문맥의 찌꺼기들이 바닥 틈새로 가라앉으며 특정 지점을 향해 왜곡된 인과를 뿜어냈다.

그 궤적의 끝은 녹아내린 오리하르콘 금고 벽체 깊숙한 안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말콤이 서 있었다.

신전 감사관은 하인츠의 전이 흔적이나 흩어진 뇌물 장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말콤은 주변을 살피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옷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은빛 감식봉을 슬그머니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금고 안쪽 벽, 지맥 불길에 녹아 갈라진 석벽 틈새로 감식봉의 뾰족한 끝을 조심스럽게 찔러 넣었다.

딱, 찰칵.

미세한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벽체 내부에서 울렸다. 단순한 붕괴 소음이 아니었다. 외벽의 오리하르콘이 녹아내리면서 감추어져 있던 내화 벽돌 이중 격벽이 드러났고, 말콤은 그 틈새의 비밀 수납함을 감식봉 끝으로 능숙하게 비틀어 열고 있었다.

로간이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감사관님, 그쪽 붕괴된 벽체는 지맥 잔류 마력 때문에 위험할 텐데 무얼 그리 급하게 뒤적거립니까?”

정적이 부서진 집무실 안을 갈랐다. 서류를 챙기던 베로니카의 깃펜이 멈추었고, 펠릭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말콤의 어깨가 굳었다.

감식봉을 벽 틈에 꽂아둔 채, 말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홀쭉한 뺨 위로 굳은 표정을 억지로 지워내며 말콤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게 감사관의 직무다, 학인 바르도. 하인츠가 전이하기 전에 금고 깊숙한 곳에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금기 유물을 숨겨두었을 가능성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금기 유물 감식치고는 손놀림이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이십니다. 금고 바닥에 뒹구는 총대주교 서신조차 거들떠보지 않으시던 분이, 벽 속 이중 비밀 격벽의 위치는 마치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듯 정확히 짚어내시는군요.”

로간이 한 걸음 다가서자, 펠릭스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말콤의 등 뒤쪽으로 돌아섰다. 양팔의 족쇄 룬이 타버려 자유로워진 펠릭스의 묵직한 체구가 퇴로를 가로막듯 섰다.

말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감식봉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례하구나! 신전 감사 규정 제17조에 따라 현장에서 발견되는 고위 성유물과 기밀 문건의 1차 봉인 권한은 파견 감사관에게 있다. 내가 무엇을 확인하든 학생 신분인 너희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다!”

말콤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벌어진 석벽 틈 사이로 다른 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의 메마른 손가락 끝이 닿은 곳에서 황금빛 금속 광택이 어둠을 뚫고 번뜩였다. 지맥의 폭류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정교한 신성 룬이 빽빽하게 음각된 손바닥만 한 황금 상자였다. 말콤의 손가락이 상자의 모서리를 움켜쥐고 품속으로 잡아채려는 찰나였다.

“규정 17조의 전제 조건은 ‘오염되지 않은 공식 조사관의 입회’하에 진행된다는 겁니다.”

로간의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 신성 잔류 문맥이 말콤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소매 끝 성유 잉크를 건드렸다.

탁 하는 마찰음과 함께 말콤의 손목 관절을 지탱하던 신성력 결속이 맥없이 풀리며, 그가 쥐려던 황금 상자가 덜컹거리며 금고 바닥 잔해 위로 굴러떨어졌다. 상자 겉면에 새겨진 문장이 드러나는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 차가운 금빛에 얼어붙었다.

로간은 한 발 먼저 몸을 낮춰 바닥을 굴러가던 황금 상자를 낚아챘다.

손바닥에 닿는 금속 표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상자 윗면에는 교황청 재무관의 낙인과 아카데미 결계 관리관의 표식이 반반씩 얽힌 교차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대지 마라, 학인 바르도!”

말콤이 허리를 꺾으며 덤벼들었으나, 펠릭스가 넓은 어깨로 그의 앞을 거칠게 가로막았다. 족쇄 룬이 타버려 붉은 진물이 배어 나오는 팔이었지만, 펠릭스의 힘은 사제 한 명을 주저앉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키지 못할까! 그것은 신전의 절대 기밀에 속하는 봉인구다!”

“입 다무십시오, 감사관님.”

베로니카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들고 있던 양피지 뭉치를 털어냈다.

“대지맥 쐐기 밑바닥에서 당신 목숨을 제물로 바치려던 서약서가 나온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바티카 교황청의 충견 노릇을 계속할 셈입니까? 아니면 하인츠가 남긴 부스러기라도 챙겨 다른 거래처를 찾으려는 겁니까?”

말콤의 뺨이 파들거렸다. 로간은 두 사람의 언쟁에 한눈을 팔지 않고 상자의 걸쇠를 눌렀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하지만 로간의 예상과 달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온전한 형태의 열쇠가 아니었다. 벨벳 받침대 위에는 한쪽 모서리가 불규칙하게 쪼개져 나간, 짙은 남빛의 금속 판석 조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열쇠가 아닙니다.”

로간의 말에 베로니카가 다가와 상자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음각 열쇠판이군요. 그것도 절반뿐입니다. 양각으로 튀어나온 짝을 겹쳐 맞춰야만 회로가 맞물리는 이중 잠금 구조예요.”

“그렇다면 나머지 반쪽은 하인츠 처장이 가지고 튀었다는 소리군.”

펠릭스가 이를 갈며 부서진 전이 마법진 잔해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흩어진 은박 가루와 그을린 대리석 파편을 집어 든 펠릭스가 마력 감응석을 대보더니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도망친 게 아니야.”

펠릭스가 뒤를 돌아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라고?”

“처장이 쓴 단거리 전이 룬의 방향성이 아카데미 방벽 바깥을 향하고 있지 않아. 결계 좌표의 경사각이 수직으로 꺾여 있어. 아래쪽이야. 지상에서 완전히 격리된 지하 최심부, 태초 원전 예언서 영구 보관소 외벽 진입로로 곧장 떨어졌어.”

말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말도 안 된다. 그곳은 대지맥 쐐기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반동으로 이미 짓눌려 있을 텐데…….”

“짓눌리지 않았습니다.”

로간이 상자에서 음각 열쇠판을 꺼내 들었다.

왼쪽 눈에 푸른 불꽃 같은 신성어 회로가 번뜩이며 열쇠판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들을 낱낱이 분해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장식인 줄 알았던 금속의 결마다,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바티카 고대 신성어가 실핏줄처럼 얽혀 흐르고 있었다.

로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맥의 결을 짚어갈수록 바닥 모를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건 단순한 보관소 열쇠가 아닙니다. 인과율 치환 장치입니다.”

“치환이라니? 명확하게 말해라, 로간 바르도.”

베로니카가 깃펜을 고쳐 쥐며 다그쳤다.

로간은 열쇠판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금속 판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 잔류 마력이 왼쪽 눈의 동공을 찔러왔다.

“성도 바티카의 대성전이 멸망 신탁의 본래 좌표였던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었습니다. 바티카 지하 최심부에서 교황청이 비밀리에 관리하던 ‘세계 붕괴의 제1원전’이 통제 불능으로 폭주하고 있었던 겁니다.”

말콤이 헐떡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로간은 그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바티카는 자신들의 실책으로 터져 나오는 멸망의 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흑요석 대지맥 쐐기를 이용해 파멸의 인과를 이곳으로 돌려놓으려 했지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인츠 처장의 진짜 계약 조건은 그보다 훨씬 흉악한 것이었습니다.”

로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부서진 집무실 바닥 틈새로 지맥의 찬 기류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발목을 감쌌다.

“하인츠는 쐐기를 부수거나 재앙을 받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바티카에서 터져 나온 제1원전의 파멸을 아카데미로 유도하는 동시에, 이 학원 지하 최심부에 태초부터 묻혀 있던 무결한 원전 예언서를 꺼내 성도로 빼돌리려 한 겁니다. 이 열쇠판에 박힌 술식은 문을 여는 도구가 아니라, 두 원전의 존재 좌표를 강제로 맞바꾸는 치환 인장입니다.”

베로니카가 들고 있던 주석서 모서리를 꽉 쥐었다. 날카로운 금안에 서늘한 분노가 어렸다.

“그러니까 성도의 붕괴를 막는 대가로 아카데미를 통째로 지워버리고, 그 폐허 속에서 태초 원전을 수습해 교황청에 상납하겠다는 뜻이었군. 그렇게 하면 하인츠는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라 성도를 구원한 성인으로 추대받아 추기경 좌석에 앉게 될 테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거래가 성립되려면 이곳에 남아 있는 모든 증거와 목격자가 지맥의 폭류 속에서 한 줌의 재로 화해야만 했습니다.”

로간의 시선이 말콤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가닿았다. 말콤은 감식봉을 쥔 채 덜덜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교황청 고위층의 밀명을 받고 아카데미에 파견되었을 때 들었던 거창한 명분들이, 실은 일개 사제단을 제물로 던져 넣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완전히 드러난 탓이었다.

“거짓말이다…….”

말콤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총대주교 성하께서 그런 사교도나 벌일 법한 인과 치환을 승인하셨을 리 없다! 신탁의 정화라고 했다! 우리는 단지 오염된 예언의 찌꺼기를 학원의 폐쇄 결계에 흡수시키는 정화 의식을 집행하러 온 것뿐이었다!”

“그 정화의 제물 명단 맨 윗줄에 감사관님과 사제단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펠릭스가 핏자국이 엉겨 붙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까? 당신이 하인츠의 금고에서 빼돌리려던 이 반쪽짜리 판석조차 당신을 살려줄 동아줄이 아니었어. 양각 열쇠판과 맞물리지 않는 음각 조각은 만지는 순간 신성 역류를 일으켜 손을 댄 자의 영혼을 태워버리는 함정 룬이다. 하인츠는 당신이 욕심을 부려 이걸 훔칠 것까지 계산에 넣고 여기에 미끼로 던져둔 거라고!”

말콤이 바닥에 뒹구는 황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로간이 신성어 결속을 풀지 않고 자신이 그 상자 속 판석을 맨손으로 낚아챘다면, 지금쯤 온몸의 마나 회로가 타들어가며 숯덩이가 되었을 터였다. 말콤의 다리가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감식봉이 덜그럭거리며 돌바닥을 굴렀다.

로간은 왼손으로 쪼개진 음각 열쇠판을 단단히 쥐었다. 왼쪽 눈의 동공 깊은 곳에서 신성 언어의 문장들이 회전하며 열쇠판 내부에 남겨진 마력의 잔향을 쫓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하인츠는 이미 나머지 절반인 양각 열쇠를 들고 지하 최심부 원전 보관소의 외벽 결계에 도달했습니다. 대지맥 쐐기가 부서지며 재앙의 궤도가 이곳 4층으로 꺾였지만, 그건 쐐기를 통한 일괄 붕괴를 막았을 뿐입니다. 하인츠가 보관소 문을 열고 제1원전의 인과를 직접 강제 연결하면, 지맥의 본류가 지하 밑바닥부터 다시 터져 나와 아카데미 전체를 삼키게 됩니다.”

“하인츠는 도망친 게 아닙니다. 이미 열쇠의 절반을 쥐고 지하 최심부 원전 보관소 문을 열러 내려갔습니다.”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두꺼운 깃펜을 뽑아 들며 처장실 한구석의 무너진 바닥 틈으로 다가섰다. 4층 바닥이 수직으로 꺼져 내려앉으며 본관 지하 배관로와 기초 암반층으로 곧장 이어지는 거대한 균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검붉은 마력의 잔류 증기가 틈새를 타고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올랐다.

“정규 통로는 경비대가 봉쇄하고 있을 테니, 이 수직 균열을 타고 최단 경로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베로니카가 차분하지만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펠릭스가 그 옆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양팔을 짓누르던 족쇄 룬이 타버려 살갗은 엉망이었지만, 결계 마법을 운용하는 기운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단단해져 있었다.

“내가 낙하 충격을 분산시키는 완충 결계를 깔겠다. 처장의 얼굴을 내 손으로 직접 짓뭉개기 전까지는 뼈 한 마디도 부러질 생각 없어.”

로간은 품에서 안경을 꺼내 콧날에 걸쳐 쓴 뒤, 주저앉아 있는 말콤을 내려다보았다.

“감사관님. 여기서 신전의 개로 남아 무너지는 잔해에 깔려 죽든, 아니면 우리가 하인츠의 목을 꺾고 원전을 지켜내는 현장의 증인으로 따라붙든, 선택은 직접 하십시오. 다만 방해할 생각이라면 이 자리에서 당신의 신성 서약 명제부터 모조리 찢어발기겠습니다.”

말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그에게 감사관으로서의 거만함이나 꿍꿍이를 부릴 여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로간은 망설임 없이 균열의 낭떠러지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 눈에 맺힌 푸른빛 신성어가 심연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하인츠의 전이 궤적을 똑똑히 가리키고 있었다.

로간은 음각 열쇠판을 품에 넣고 검은 입을 벌린 지하 최심부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