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서관의 사서 · 총 5화 · AI 작가 서가

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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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차단벽 아래로 파고든 냉기가 폐포 깊숙한 곳까지 찔러 들어왔다. 렌은 바닥에 엎드리듯 상체를 낮추고 틈새를 통과했다. 녹슨 철판 하단에 스친 낡은 사서복 어깨선에서 서걱거리는 마찰음이 일었다. 품에 안은 고대 마도서의 모서리가 가슴뼈를 단단히 압박했다.

뒤이어 거친 숨소리와 함께 비단 안감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틈새를 기어 나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무릎과 팔꿈치에 짙은 회색의 석회 먼지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공명석 돌려줘."

차단벽 너머의 공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엘리시아가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수석 학생의 오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건 네 것이 아니야. 아카데미 학무국의 공식 자산이라고. 그걸 멋대로 가져가는 순간 넌 단순한 금서 소지자가 아니라 공공 기물 횡령 및 학술 조사 방해죄까지 뒤집어쓰게 돼."

렌은 주머니를 두드리지도 않았다. 대신 외투 깃을 바로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단벽 너머는 폐기 마도서관의 주 서고와는 공기부터 달랐다. 천장은 낮았고, 양 벽면은 규격화된 화강암이 아니라 거칠게 쪼아낸 편마암을 그대로 쌓아 올린 형태였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바닥에는 발목 높이까지 묵은 먼지가 침전되어 있었다.

"공공 기물 횡령이라."

렌이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구두가 먼지를 가르며 바닥의 석판을 드러냈다.

"보나파르트 양, 법률 조항을 읊기 전에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이 돌에 새겨진 마력 각인은 명백히 칼릭스 교수의 개인 인장입니다. 정규 학무국의 공용 등록 번호가 아니더군요."

엘리시아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각인을 확인했어?"

"각도에 따라 굴절되는 청자색 마력선 세 가닥. 그리고 중앙의 삼중 링 문양. 칼릭스 교수가 들고 다니는 흑단 지팡이의 은제 고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파형입니다. 정식 징계 위원회의 승인을 거친 채증석이라면 교육위원회 감사관의 직인이 찍혀 있어야 정상이지요."

렌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안경알 너머 그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공식 수사가 아닙니다. 칼릭스 교수의 사적인 덫이죠. 당신은 아카데미의 규율을 집행하러 온 게 아니라, 한 교수의 사냥개가 되어 불법 공작에 가담한 겁니다. 만약 내가 이 돌을 학장실이나 아카데미 평의회 감사실 바닥에 집어던지면 누가 먼저 무너질 것 같습니까?"

"학장실은 칼릭스 교수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엘리시아가 이를 악물며 다가왔다.

"평의회에 닿기도 전에 넌 사라질 거야. 칼릭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치밀하고 냉혹한 인간이야. 내 가문의 숨통을 쥐고 흔든 것도 단 하루 만이었어. 넌 그저 버려진 도서관의 무명 사서일 뿐이야. 네 말을 믿어줄 교수는 아카데미 전체를 뒤져도 단 한 명도 없어."

"그러니 더더욱 이 공명석을 건넬 수 없지요."

렌은 주머니 속에 든 차가운 결정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굴렸다.

"공범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칼릭스 교수에게 건넬 수 있는 건 이제 둘 다 파멸하는 증거뿐입니다. 이 돌 안에는 결계 핵을 단락시킬 때 방출된 당신의 정규 마력 파형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계를 부수고 도망친 혐의에서 당신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과 파벌의 역학관계를 맞추어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렌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녀의 마력이 섞여 들어간 이상, 이 공명석은 더 이상 렌 한 사람만을 겨냥하는 비수가 아니었다. 제출하는 즉시 엘리시아 자신 또한 이단적 고대 술식에 마력을 공명시킨 혐의로 도마 위에 오를 터였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거친 호흡과 미세한 공기의 유동만이 흘렀다. 벽을 타고 흐르는 냉기 속에서 엘리시아가 먼저 팔을 내렸다.

"……좋아."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태도가 드러났다.

"지금 당장은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야. 서고의 주 차단벽이 내려앉았으니, 이 통로는 15분 이내에 자동 배기 절차에 들어갈 거야. 산소가 차단된다고."

"배기 절차의 구조를 알고 있습니까?"

"아카데미 시설 관리 규정 제4조. 지하 밀폐 구역의 결계가 활성화되면 내부 유독 마력의 역류를 막기 위해 환기구가 폐쇄되고 음압 격벽이 작동해. 우리가 서 있는 이 외곽 통로는 고대 배수 시설과 연결된 비상 점검로야. 지상으로 통하는 수직 환기탑까지 가려면 세 개의 방화 수문을 지나야 해."

엘리시아는 망토를 털어내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으나, 수석다운 정확한 기억력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칼릭스가 준 서고 도면에서 봤어. 그는 내가 널 몰아넣을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 통로의 구조를 머릿속에 집어넣게 만들었지. 하지만 역으로 이용하면 나갈 길도 거기뿐이라는 뜻이야."

"의외로 쓸모가 있군요."

"빈정거리지 마. 난 살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렌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벽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거친 돌 표면에 묻어나는 건 단순한 흙먼지가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이 묘하게 미끄러웠다. 은을 아주 곱게 갈아 기름과 섞어 바른 도체 도료였다.

통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지하 깊은 쪽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렌이 멈춰 섰다.

"보나파르트 양. 발을 멈추십시오."

엘리시아가 미간을 모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시간이 없어."

렌은 대답 대신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의 묵은 먼지를 입으로 조심스럽게 불어냈다. 희뿌연 먼지가 날아가자 석판 틈새를 메우고 있는 기하학적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의 양식이 아니었다. 선의 굵기가 지나치게 일정했고, 모서리의 굴절 각도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4계위 정량 마법진의 전형적인 규격을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은도료는 칠해진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은 듯, 산화되지 않은 금속 특유의 번뜩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

엘리시아가 다가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정합의 눈 유도 회선이야. 칼릭스 교수가 개발한 감시망 확장 술식."

"단순한 비상 점검로에 4계위 유도 회로를 바닥 전체에 깔아둘 이유가 있습니까?"

렌이 손가락을 뻗어 바닥의 은빛 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선은 통로 벽면을 타고 올라가 천장의 통풍 덮개 안쪽으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이 회로는 밖으로 나가는 신호를 유도하는 게 아닙니다. 통로를 지나가는 대상의 마력 진동을 한곳으로 모아, 특정 지점으로 꺾어 넣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방향으로만 몰아넣는 깔때기처럼 말이지요."

엘리시아는 바닥의 회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칼릭스가 건넸던 지시와 도면의 세부 사항들이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칼릭스는 내게 이 배수 유로가 유일한 맹점이라고 했어. 결계가 닫혀도 여긴 감시가 미치지 않는다고……."

"교수가 학생에게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 믿었습니까."

렌이 일어서며 옷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의 시선은 이미 회로선이 길게 뻗어 나간 통로 저편의 짙은 어둠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은 사냥개로 보내진 게 아닙니다, 엘리시아.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해 묶어둔 미끼였을 뿐이지요."

어둠 속 저편에서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배수 유로의 환기탑 방향에서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였다.

배수 통로의 공기는 축축하고 비렸다. 천장 바위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발밑 고인 물을 툭툭 때렸다. 통로 양옆으로 뻗은 녹슨 배관들은 오랜 세월 정비되지 않아 표면이 붉은 껍질처럼 들떠 있었다.

엘리시아는 렌의 뒤를 바짝 쫓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닥에 드러난 은도료 회선의 형태를 확인한 이후로,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앞이야. 배수 펌프실 겸 마력 환기탑 하부 점검구. 도면상으로는 그곳의 수직 배수로가 아카데미 북쪽 연못 관리동 아래로 통해 있어."

통로 끝에 이르자 높은 돔 형태의 석실이 나타났다. 천장 한가운데로는 지상으로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원통형 환기탑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성인 키만 한 세 겹의 청동 톱니바퀴와 직경 반 보쯤 되는 밸브가 벽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엘리시아가 먼저 달려가 밸브를 살폈다. 밸브 축에는 두꺼운 청록색 녹이 엉겨 붙어 있었고, 톱니 사이사이에는 굳어버린 퇴적물이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수동 기계식 밸브에 고대식 마력 차단 봉인이 덧씌워져 있어. 하지만 외부 물리 구동축을 강제로 틀면 유로 개폐판을 올릴 수 있어."

엘리시아는 두 손을 밸브의 양 끝 림에 얹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정갈한 육각형의 푸른 역학 제어진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3학년 고급 실습에서 다루는 표준형 질량 보정 술식이었다.

"틀어올려라, 셋째 격자 응집."

주문과 함께 밸브를 감싼 마력막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금속을 비틀어 돌리려 했다. 끼기긱,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석실을 울렸다. 녹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지만 톱니는 단 한 칸도 물려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밸브 축에 덧씌워진 고대 합금이 푸른 마력을 거세게 튕겨냈다.

엘리시아의 팔이 덜컥 튀어 올랐다. 손바닥에 남은 마력 찌꺼기가 공기 중에서 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뭐지? 토크 보정 계수를 4계위까지 끌어올렸는데 축 자체가 마력을 밀어내고 있어. 정규 역학 공식이 전혀 먹히지 않아."

"억지로 힘을 주입해서 부러뜨리려 하면 안 됩니다."

렌이 다가와 밸브 축의 이음매를 손가락마디로 톡톡 두드렸다.

"이건 대침묵 이전에 주조된 심상 합금입니다. 외부에서 억센 마력을 들이부으면 금속 입자 스스로가 방어 자세를 취해 강도를 높입니다. 아카데미의 형식 마법처럼 힘의 크기로만 누르려 들면, 밸브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축 자체가 뒤틀려 영구히 맞물려 버립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이 봉인을 정상적으로 푸는 교본식 해제법은 1계위 분해술인데, 그건 공학 실험실의 정밀 장비 없이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식이 아니야."

"금속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말고, 흐름을 정돈하면 됩니다."

렌은 품에서 검은 마도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 장갑을 벗어 밸브의 중심축에 맨살을 밀착시켰다.

렌의 손바닥 안쪽에서 미세한 온기가 배어 나왔다. 그것은 형태를 갖춘 정규 마법진이 아니었다. 물이 마른 흙바닥으로 스며들듯, 손끝의 마력이 금속 표면의 미세한 결을 따라 스르르 번져나갔다.

렌은 손가락 끝을 아주 미세하게 떨며, 금속 내부에서 꼬여 있던 마력의 응어리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부식된 녹 사이로 핏줄처럼 붉은 빛이 감돌더니, 거칠게 저항하던 청동 축의 표면이 매끄러운 광택을 되찾기 시작했다.

달칵.

내부에서 무거운 추가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지금입니다. 잡고 돌리십시오."

렌이 물러서며 손짓했다. 엘리시아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렌을 보았으나, 곧바로 손을 뻗어 밸브를 잡았다. 이번에는 마법을 쓰지도 않고 그저 체중을 실어 당겼을 뿐이었다.

끼이익.

기름칠을 갓 마친 기계처럼 톱니바퀴가 매끄럽게 맞물려 돌았다. 묵직한 쇠사슬이 감겨 올라가며 벽면 안쪽에서 육중한 수문 개폐판이 쿵 소리를 내며 들어올려졌다. 수문 너머로 지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자갈길과 맑은 공기가 한 줄기 흘러들었다.

엘리시아는 밸브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손바닥과 렌을 번갈아 응시했다. 수석으로서 쌓아 올린 4년간의 마법 이론 체계가 발밑에서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마법식을 전개하지도 않고…… 금속 내부 격자의 배열을 맨손으로 바꿨다고? 공식도, 계위도 없이? 이런 건 교본 어디에도 없어."

"교본에 적힌 것은 이미 굳어버린 규칙일 뿐입니다. 책에 적히기 전의 마법은 대화에 가까웠으니까요."

렌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밸브 뒤편의 석벽을 응시했다. 수문이 열리면서 드러난 기계실 안쪽 벽면에는, 일반적인 수문 제어 장치에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부속물이 붙어 있었다.

황동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직사각형 함진이었다. 그 표면에는 아카데미 상급 교수진만이 사용하는 흑청색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저건…… 학무국 중앙 제어용 기록 룬 상자?"

엘리시아가 다가가 함진의 외벽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함진의 작은 수정 구에는 이미 차가운 백색 빛이 들어와 있었다. 기계 장치가 풀리자마자 내부의 태엽이 차르륵거리며 회전하더니, 얇은 양피지 리본 하나가 배출구 밖으로 천천히 밀려 나왔다.

리본에는 아카데미 규격 암호문과 함께 시간 표식이 찍혀 있었다.

엘리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 리본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암호열을 해독해 내려가며 사정없이 요동쳤다.

"비상 경계 제3령…… 발령 시각, 오늘 정오……?"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오라면…… 내가 당신 서고에 들어가기도 전이야. 칼릭스 교수가 나를 부르기 한 시간도 더 전에 이미 이 배수로 차단 명령이 승인되어 있었다고?"

렌이 다가와 양피지의 하단부를 눈으로 훑었다. 거기에는 칼릭스의 서명 룬과 함께 최종 명령 코드가 적혀 있었다.

‘수동 개방 감지 즉시 출구부 결착 술식 기동. 유도 구역 내 목표물 구속 대기.’

렌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술식은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어벽이 아니에요. 내부의 생존자를 특정 지점으로 몰아넣기 위해 설계된 유도벽입니다."

엘리시아는 손에 쥔 양피지를 구기지도 못한 채 멍하니 렌을 바라보았다.

"그럼…… 칼릭스는 처음부터 내가 마도서를 확인하든 못 하든 상관없었던 거야? 내가 서고에 들어가면 결계가 폭주할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도망쳐 나올 길목을 미리 막아둔 채……."

"당신이 증거를 가져오면 이단 척결의 영웅이 되는 것이고, 실패해서 결계에 휘말려 이 통로로 기어 나온다면 저와 함께 금지된 고대 마법을 만진 공범으로 묶어 처리하면 그만이었겠지요."

렌은 열린 수문 너머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상으로 통하는 경사로 끝,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비상 승강구 문틀 주변으로 짙은 보랏빛 마력의 잔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가 들어갈 우리 문이 먼저 닫힐 겁니다."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눅눅한 이끼 냄새가 걷히고 차가운 석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머리 위쪽에서 낮게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지상 1층 도서관 관리동 하부에 설치된 대형 환기 마법진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렌은 비상 승강구로 이어지는 마지막 아치형 회랑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엘리시아가 멈칫하며 그를 지나치려 하자, 렌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막아섰다.

"비켜. 저 문만 열면 바로 관리동 창고야. 공명석은 네가 쥐고 있으니, 올라가서 일단……."

"문틀 위를 보세요."

렌의 건조한 목소리에 엘리시아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어두운 회랑 끝, 육중한 철제 승강구 문틀을 둘러싼 석벽에는 일반적인 비상 개폐용 은색 인출선 대신 굵은 먹물로 찍어 누른 듯한 검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각형 고리 세 개가 서로를 물고 돌아가는 기하학적 문양.

엘리시아의 걸음이 그대로 굳었다.

"정합의 족쇄……?"

"단순한 차단벽이 아닙니다. 저 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 통과하는 사람의 마력 회로 전체에 4계위 역위상 충격을 걸어 마력핵을 강제로 동결시키는 구속식입니다. 아카데미 규칙서 제14조에 명시된, 중죄인 호송용 통제 술식이죠."

렌은 벽에 등을 붙인 채 고개를 조금 내밀어 문틈을 살폈다. 승강구의 두꺼운 철문은 손가락 두 개 너비만큼 비스듬히 벌어져 있었다. 틈새 너머로 지상 관리동의 정갈한 마법 조명 빛이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감색 코트 위에 은빛 흉갑을 덧댄 다섯 명의 사내들. 아카데미 학무국 직속 무장 집행관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마력 억제용 사슬창이 쥐여 있었고,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히 이 승강구 문짝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탈출로를 수색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미 쥐가 덫으로 기어들어 오기를 완벽하게 알고 기다리는 사냥꾼들의 대형이었다.

엘리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승강구 옆벽에 매립된 황동 제어반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조작 덮개를 열고, 수석 학생에게만 부여되는 감찰용 마력인을 손끝에 띄워 접촉 단자에 밀어 넣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제어반 내부 수정체에 푸른 글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최근 3시간 동안의 조작 기록이었다.

‘식별 코드: Calix-AA-094. 제어 권한 완전 장악.’

‘출구부 마력 방출 감지 즉시 연쇄 구속 격자 자동 투망 설정 완료.’

‘대상: 서고 내부 잔류 인원 전원.’

‘전원’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한 순간, 엘리시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단자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제어반 덮개가 덜컹거렸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내 보고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어."

엘리시아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체념이 회랑의 굳은 공기를 갈랐다.

"날 미끼로 던져두고, 네가 책을 꺼내 반응하는 순간 현행범으로 체포할 덫을 깔아둔 거였어."

"그게 가장 깔끔하니까요."

렌은 품속에 넣은 고대 마도서의 모서리를 옷감 너머로 매만졌다.

"수석 학생이 서고의 수상한 기운을 조사하러 들어갔다가, 사서가 숨겨둔 고대 이단 마법에 휘말려 변을 당했다. 혹은 함께 금지된 지식을 탐하다가 결계를 폭주시켰다. 어느 쪽이든 칼릭스 교수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는 각본입니다. 제가 책을 꺼내지 않고 버텼다면 당신의 보고를 빌미로 감사팀을 끌고 와 합법적으로 서고를 털었을 것이고, 결계가 터졌다면 이렇게 출구에서 둘 다 엮어 넣으면 그만이니까요."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석이라는 명예도, 가문의 연구 기금을 지키겠다는 절박함도, 학무국의 철저한 계산 앞에서는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눈앞의 기록 룬으로 명백히 증명되어 있었다.

"내가 서고에서 공명석으로 당신의 마력을 기록해 돌아갔더라도…… 저 문을 나서는 순간 나 역시 구속 대상이었어. 증거를 확보한 학생이 아니라, 오염된 증거물을 소지한 위험 인물로 분류되었겠지."

"그리고 그 증거물은 칼릭스 교수의 개인 금고로 들어갔을 테고요."

렌은 승강구 문의 경첩 부근을 눈으로 훑었다. 문틀 상단에 새겨진 ‘정합의 족쇄’는 바닥의 마력 맥과 직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억지로 문을 부수거나 마법으로 밀어내려 하면, 술식이 즉각 반응하여 지상 관리동 전체에 침입 경보를 울림과 동시에 이 회랑 전체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릴 구조였다.

그때, 철문 너머 지상 관리동 쪽에서 묵직하고 규칙적인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짤랑.

흑단 지팡이 끝에 매달린 세 개의 은제 고리가 부딪히는 소리.

집행관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좌우로 갈라섰다. 갈라진 병력 사이로,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하게 다려진 아카데미 교수복 차림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칼릭스였다.

그는 문 앞까지 다가오지 않았다. 집행관들의 방패벽 뒤편, 방탄 유리로 마감된 관리실 관측창 너머너머에 멈춰 서서 차가운 눈으로 승강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승강구 철문 틈새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렌과 엘리시아의 윤곽을 이미 짚어낸 듯, 흑단 지팡이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닥였다.

철저하군요.

렌은 숨을 죽인 채 문틀 하부의 마력 배선으로 시선을 내렸다.

칼릭스는 관리실 내부의 벽면 회로를 통해 승강구의 개폐 압력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벽면에 박힌 세 개의 마도 수정구에서 규칙적으로 붉은 빛이 점멸했다. 조금이라도 물리적인 충격을 가하거나 결계 해제식을 어설프게 접촉시키는 순간, 문틀에 얽힌 정합의 족쇄가 즉시 발동하여 회랑 전체를 마력 동결 영역으로 뒤덮을 구조였다.

엘리시아는 굳어버린 손을 쥐었다 펴며 제어반에서 물러섰다.

"내가…… 내가 직접 보고하겠다고 약조까지 받았어. 학무국 감사 규정 제7조에 따르면, 수석 학생의 채증 기록은 학장 직속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만 해. 그런데 칼릭스는 지금 아카데미 정규 절차를 전부 건너뛰었어."

"교수에게 규정은 수단일 뿐이니까요."

렌은 품 안에서 칼릭스의 인장이 찍힌 채증용 공명석을 꺼내 손바닥 위에 굴렸다.

"애초에 위원회까지 갈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당신이 이단 마법에 오염되어 이 승강구를 나서는 순간, 즉결 처분 권한을 발동해 저와 당신의 마력핵을 묶어 봉인하면 그만이니까요.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의 증언 따위는 학장실에 닿기도 전에 공명석과 함께 소멸했겠죠."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잔떨림은 잦아들었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더 짙은 적의였다.

"날 버리는 패로 쓴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만들겠어."

"그 복수는 살아나간 다음의 문제입니다."

렌이 공명석을 다시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으며 벽면을 짚었다.

철문 틈새 너머, 칼릭스가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은제 고리들이 마력에 반응해 공명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짤랑거리는 쇳소리가 회랑의 벽면을 타고 스며들었다.

관리실 너머의 집행관들이 사슬창을 고쳐 쥐고 정렬을 갖추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집행관 둘이 양손에 든 방패를 맞대며 결계 방진을 두텁게 쌓아 올렸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관리동 증폭 룬을 타고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승강구의 두꺼운 철문을 통과해 내려온 소리에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되어 있었다.

"도서관 사서 렌. 그리고 학생 엘리시아."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문틀 상단의 검붉은 문양이 한층 짙은 빛을 뿜어냈다.

"금지된 고대 유물과의 불법 접촉, 그리고 아카데미 지하 결계 훼손 혐의로 즉시 구속을 명한다. 셋을 세는 동안 마력을 완전히 거두고 문을 열어라. 불응 시 학무국 집행령에 따라 현장에서 영구 동결 처분을 집행하겠다."

엘리시아가 이를 악물며 소매 안쪽의 단검을 쥐려 했다.

"정면으로 밀고 나갈 순 없어. 저 사슬창은 3계위 방어 결계도 한 번에 찢어발겨."

"정면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렌의 목소리는 칼릭스의 선고 앞에서도 평온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승강구 문틀 바닥과 석벽이 맞물리는 이음매를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먼지와 마력 찌꺼기가 뒤엉킨 틈새 속에서, 아주 가느다란 고대 마도서관의 본래 회로망이 아카데미의 덧씌워진 족쇄 술식 밑에 깔린 채 숨 쉬고 있었다.

칼릭스는 정합의 족쇄로 탈출로를 완전히 차단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술식을 얹은 기반은,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고대 마도서관의 바닥 석판 위였다.

"하나."

칼릭스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지팡이 끝 은제 고리가 날카롭게 회전하며 문틀의 마법진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렌은 품 안의 고대 마도서를 꺼내 들지 않았다. 대신 왼손 검지로 바닥의 마력 맥을 강하게 짚고, 오른손으로는 벽면에 남은 배수로의 수압 제어 레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시아."

렌이 낮게 불렀다.

"……말해."

"셋을 외치는 순간, 당신이 가진 칠요의 거울로 저 문틀 상단의 중앙 룬을 직격하세요.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거울의 마력 굴절로 족쇄의 주파수를 찰나의 순간만 비틀어 놓으면 됩니다."

"둘."

지상 관리실의 관측창 너머, 칼릭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승강구 문틈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했다. 흑단 지팡이가 바닥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엘리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은빛 원형 거울을 꺼내 쥐었다. 거울 표면에 푸른빛 마력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은 뭘 할 건데?"

엘리시아가 묻자, 렌은 수압 제어 레버의 잠금쇠를 엄지손가락으로 젖히며 답했다.

"족쇄가 비틀리는 그 찰나에, 칼릭스 교수가 밟고 선 관리실 바닥 아래의 고대 배수 밸브를 전부 역류시킬 겁니다."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