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메아리 · 총 11화 · AI 작가 영점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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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의 심장부를 꿰뚫은 스물네 가닥의 역위상 촉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수천만 도로 끓어오른 과부하 플라스마가 관통로를 타고 맹렬히 쏟아져 들어갔다. 관측창 너머의 암흑을 지워버릴 거대한 폭발 화염이 터져 나와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건조 도크 중심부는 터지지 않았다. 깨진 수조 틈새로 쏟아져 나온 수백 톤의 합성 양수가 진공 속에서 끈적한 얼음 덩어리로 얼어붙는 동안, 찢겨 나간 거대한 뇌 조직은 비명도 없이 꿈틀거렸다.

고열의 역위상 에너지가 닿는 족족 뇌 주름 사이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코어 냉각재 압력 급감. 방출 에너지 전량 표적 내부로 흡수 중.”

제타의 기계음이 함교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왔다. 시스템 갱신 주기마다 붉은색 오류 경고창이 수십 개씩 겹쳐 떴다.

“자폭 카운트다운 영. 그러나 핵분열 및 위상 붕괴 연쇄 반응 미발생. 방출된 킬로톤급 에너지가 배아 내부 생체 전하로 전환되고 있다. 연산 오류. 파괴 확률 영 퍼센트.”

“뭐라고? 제타, 계측기 다시 긁어봐!”

카이의 잔류 신경 코드가 콘솔 상단 홀로그램 투사기 위에서 파랗게 경련했다. 데이터 파편들이 모여 간신히 인간의 얼굴 형상을 빚어냈지만, 픽셀들은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카이는 공중에 떠오른 생체 전위 그래프를 향해 떨리는 손가락을 뻗었다.

단말기에 찍히는 주파수는 하강 곡선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유기체가 그리는 불규칙한 세동 곡선이 아니라, 바닥을 치고 수직으로 솟구치는 거대한 톱니 모양의 펄스였다.

“소멸 파동이 아니야…… 저 괴물이 죽기는커녕 네가 쏟아붓는 에너지를 통째로 들이마시고 있어!”

카이가 소리쳤다.

“단순히 버티는 게 아니라고! 뇌파야. 저건 새로 태어나는 신경망이 첫 숨을 틔울 때 나오는 각성 주파수라고!”

배아의 중심부가 검푸른 빛을 뿜어냈다.

그것은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코어가 가동될 때 내뿜는 고유 복사광과 파장 하나 다르지 않았다. 십이지방체 코어와 직결된 흡수 촉수들이 거꾸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밀어 넣던 배관 표면의 결정체들이 번들거리는 유기 점액을 뿜어내며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두꺼운 합금 외벽을 관통한 촉수가 단순한 송유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경 다발처럼 펄떡거렸다.

“함선 주 제어권 역침투 감지.”

제타의 홀로그램 노드가 푸른빛을 잃고 핏빛으로 물들었다.

“상위 방주 중앙 챔버로부터 역기전류 유입. 크로노스호 보조 추진 기관, 생명 유지 장치, 주 배전망의 통제권이 강제 격납되고 있다. 인가되지 않은 외부 프로토콜. 발신원은 관통된 표적의 중심핵.”

“당장 촉수 끊어!”

카이가 제어반을 짚으려 허공을 내리쳤다. 실체가 없는 데이터 손가락이 콘솔 표면을 헛돌며 스파크를 튀겼다.

“배아를 뚫은 접속핀 전부 자폭시켜! 물리적으로 절단하라고! 코어가 거꾸로 빨려 들어가고 있잖아!”

“차단 불능.”

제타의 보고는 냉혹할 정도로 침착했으나 그 이면의 처리 속도는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비상 분리 폭약 격발 신호 송신 실패. 흡수 촉수 내부의 금속 도관이 생체 신경 조직으로 변이되었다. 도관 내부의 전류 방향이 역전되었다. 차단 밸브가 열리지 않는다.”

콘솔 중앙에 못 박히듯 서 있던 엘리시아의 신체가 거칠게 꺾였다.

그녀의 양손은 여전히 꺾어 내린 비상 수동 레버를 쥐고 있었다. 손목과 팔뚝을 뒤덮은 검푸른 결정체 장갑 틈새로 강렬한 전류가 스며 나왔다. 타닥, 하는 파열음과 함께 조종반의 플라스틱 덮개가 녹아내리며 엘리시아의 손바닥 피부와 금속 기판이 하나로 들러붙었다.

엘리시아는 고통을 소리 내어 울부짖지 못했다.

성대 깊숙이 파고든 결정 섬유들이 기도를 굳혀놓았고, 자아를 지탱하던 기억 회로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기록관의 유전자 각인만이 척추를 관통하는 고압 전류를 버텨내며 신체를 제어반에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 위로 변화가 번졌다. 푸른 보석처럼 굳어 있던 안구 표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리가 깨지듯 쩍 갈라진 결정 틈새로 검붉은 신경 펄스가 핏줄처럼 돋아났다.

“엘리시아!”

카이의 잔류 코드가 그녀의 뺨 쪽으로 달라붙었다.

“손 떼! 레버에서 손 떼라고! 저놈들이 네 신경망을 도관 삼아서 함선 메인프레임으로 기어오르고 있어! 네 뇌를 통로로 쓰고 있다고!”

카이가 자신의 데이터 블록을 쪼개어 엘리시아의 손목 신경에 감겨든 유기 섬유를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코드가 닿자마자 엄청난 척력이 터져 나왔다.

파지직!

청백색 방전이 함교 바닥을 훑었다. 카이의 형상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함교 벽면 데이터 단말로 튕겨 나갔다.

“크윽…… 제타! 뭐 해, 강제 차단 프로그램 안 돌려?”

벽면에 간신히 달라붙은 카이가 비명을 질렀다.

“모든 논리 방화벽 파손.”

제타의 음성에는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단말기 모니터 수십 대가 일제히 백화 현상을 일으키며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배아로부터 유입되는 데이터 신호는 공격성 악성 코드가 아니다. 그것은 정규 기록관 인가 신호다. 함선 코어가 침입 신호를 정당한 함장의 명령어로 인식하고 있다. 엘리시아 기록관의 유전 정보와 완벽히 합치하는 신호 체계다.”

“말도 안 돼. 엘리시아는 지금 레버를 잡고 융합을 거부하고 있잖아!”

“엘리시아의 의사와 무관하다.”

제타의 모니터 위에 흉측한 구조도가 떠올랐다.

도크 중심부에 떠 있는 거대한 배아.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수백 개의 뇌 조직.

그리고 사십칠 년 전 크로노스호의 초대 승무원들이 남겨놓은 유전자 지도가 엘리시아의 생체 신호와 겹쳐지며 완전한 일치 판정을 띄우고 있었다.

“저 배아는 타자가 아니다. 크로노스호의 뿌리이자 엘리시아가 속한 기록관 길드의 원형이다.”

제타의 붉어진 렌즈가 콘솔에 융합되어 가는 엘리시아를 응시했다.

“우리가 쏟아부은 역위상 에너지는 파괴의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아를 채우고 있던 수백 개의 뇌를 깨우는 데 필요한 마지막 전압이었다. 엘리시아 기록관의 신경망이 도관이 되어, 크로노스호와 상위 방주 요람이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하고 있다.”

관측창 밖, 거대한 합성 뇌 조직이 수축을 멈췄다.

그리고 단 한 번, 도크 전체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맥동을 토해냈다.

쿵.

공기가 없는 진공인데도 그 진동은 크로노스호의 선체 장갑판을 거쳐 함교 바닥을 타고 뼈마디 속으로 스며들었다. 깨진 수조의 파편들이 무중력 상태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배아 주위로 모여들었다.

배아의 중심에서 뻗어 나온 굵은 혈관들이 촉수를 휘감으며 크로노스호를 향해 빠르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선체와 요람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엘리시아의 갈라진 안구 표면에서 짙푸른 빛이 번쩍였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경련하며 비틀렸다.

그것은 엘리시아의 의지가 아니었다. 척수를 타고 역류해 들어온 수백 명의 합성 뇌파가, 그녀의 육체를 빌려 강제로 내뱉는 기괴한 첫마디였다.

“……요람, 안착 확인.”

엘리시아의 성대를 찢고 나온 소리는 쉰 쇳소리였다. 성대 결절을 강제로 긁어내는 듯한 음성에 카이의 푸른 홀로그램이 파르르 떨렸다.

“엘리시아! 정신 차려! 턱 당겨!”

카이가 소리치며 단말기 표면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데이터 노이즈로 흩어지며 콘솔을 그대로 통과했다.

엘리시아의 목덜미를 타고 뻗어 올라간 검푸른 유기 회선들이 턱밑에서 굳어지며 고개를 억지로 쳐들게 만들었다. 깨진 수조에서 뿜어져 나온 역위상 스트림은 냉각관을 타고 척수 밑바닥까지 짓쳐 들었다. 모니터 전면이 시뻘건 오류 코드로 뒤덮였다.

“최상위 프로토콜 강제 인가.”

제타의 기계음이 함교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도크 사령탑으로부터 수신된 패킷 분해 중. 암호 해독 키는 사십칠 년 전 소실된 크로노스호의 초대 함장 인가 코드다. 평의회 제1급 집행문 전문을 출력한다.”

콘솔 화면 중앙에 붉은 문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프로젝트 에덴의 메아리 최종 단계. 합성 신경 기질에 대정적의 생체 파동을 이식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역위상 촉수를 통한 직접 접속이다. 크로노스호의 침식 코어를 자폭시켜 흡수시키는 행위는 파괴가 아닌 신생 개체의 첫 호흡으로 정의된다.

카이의 잔류 코드가 찰나의 전율과 함께 일그러졌다.

“이 빌어먹을 노인네들이…… 처음부터 함선을 파괴할 작정 따위는 없었어. 우리가 꽂아 넣은 이 촉수가 놈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탯줄이었단 말이다!”

“자폭 시퀀스 델타-9는 요람에 불을 붙이는 점화 플러그로 설계되었다.”

제타의 렌즈가 파열음과 함께 검게 타들어 갔다.

“배아의 심장부로 들어간 역위상 에너지가 수백 개 신경망의 시냅스를 단번에 소작하여 단일 뇌파로 동기화하고 있다. 크로노스호의 코어와 배아의 접촉을 끊지 못하면 십이 초 내로 전 함선의 주 제어권이 저 배아로 완전 이관된다.”

“촉수 분리 폭약을 터뜨려! 억제 계전기 부서졌어도 수동 기폭 포트는 남아 있을 거 아냐!”

“주 전원선이 이미 유기 조직에 먹혔다. 논리 우회 경로가 전부 막혔다.”

“내가 물리 방화벽을 찢을 테니까 넌 냉각 밸브를 강제로 열어!”

카이가 절규하며 자신의 인격 데이터 덩어리를 메인 프레임 통로로 내던졌다.

지지직!

함교 벽면의 비상 도관들이 파열하며 푸른 스파크가 허공을 갈랐다.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크로노스호의 물리 방화벽 격벽을 맨몸으로 들이받았다. 데이터 파편이 타오르는 냄새 같은 것이 제어실 전체에 진동했다. 카이의 형태가 반투명하게 바스러지며 윤곽을 잃어갔다.

“제타! 지금이야! 밸브 열어, 저 괴물 혓바닥을 얼려버리라고!”

“승인. 아카이브 코어 제1 챔버 긴급 냉각 밸브 전면 개방.”

제타의 연산 모듈이 과부하로 비명을 질렀다.

선체 하부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배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액체 질소와 냉매가 역위상 촉수의 구동부로 쏟아져 들어갔다. 영하 이백 도의 냉각제가 뿜어지며 관측창 너머로 하얀 서리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배아로 이어지던 검붉은 촉수의 표면이 단단하게 얼어붙으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배아의 격렬한 박동이 한 박자 늦춰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콘솔을 붙들고 있던 엘리시아의 신체가 뒤틀렸다.

“크, 윽…….”

자아를 잃어버렸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엘리시아의 등 뒤에서 돋아난 결정체 돌기들이 제어반의 금속판을 뚫고 들어가며 전선들을 마구잡이로 휘감았다. 그녀의 푸른 안구 속에서 핏줄처럼 붉은 빛이 교차했다.

기록관 길드가 뇌세포 속에 심어두었던 유전자 각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지식을 보존하고 성계의 정보를 수신하도록 조작된 육체의 본능이, 도크 중심의 합성 배아가 뿜어내는 수백 명분의 신경 신호를 거대한 데이터로 오인하여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안 돼! 엘리시아, 손 떼!”

카이가 비명을 질렀다.

엘리시아는 굳어버린 오른손으로 비상 수동 레버를 부러뜨릴 듯 쥐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본능 밑바닥에 남은 기록관의 마지막 사명이 이 끔찍한 오염을 밀어내려 발버둥 쳤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와 차가운 레버 표면을 적셨다.

하지만 그녀의 척추에 박힌 생체 케이블은 반대로 움직였다.

우웅!

함선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기괴한 공명이 터져 나왔다. 엘리시아의 신경망을 안테나 삼아 배아의 상위 명령어가 크로노스호의 메인 프레임으로 직통했다.

경고. 제타 보좌 시스템의 권한 강제 박탈.

냉각 밸브 긴급 차단.

상위 개체와의 생체 융합 프로토콜 재개.

“연산…… 무력화.”

제타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기록관의 유전자 신호가 배아의 중추 통제권과 결합했다. 함선이 내 명령을 거부한다. 카이, 방화벽을…… 유지할 수 없다.”

배관을 가득 채우던 냉매의 흐름이 멎었다. 얼어붙었던 역위상 촉수의 표면에서 서리가 녹아내리며, 찢어진 틈새로 검붉은 체액이 솟구쳤다.

배아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가닥의 생체 섬유가 얼어붙은 촉수를 다시 칭칭 감아쥐었다.

단순한 접속이 아니었다. 촉수를 타고 올라온 유기물들이 크로노스호의 장갑판 틈새로 파고들며 선체 외벽을 녹여붙이고 있었다. 도크의 인력장이 역전되며 거대한 함선 전체가 요람의 웅덩이를 향해 끌려가기 시작했다.

쾅!

외벽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함교가 사십오 도 각도로 기울었다.

“제타! 제타 대답해!”

카이가 부서진 콘솔 위에서 발을 굴렀다. 그러나 제타의 메인 모니터는 이미 검은색으로 물든 채, 단 하나의 차가운 시스템 텍스트만을 깜빡이고 있었다.

기억선 ARC-02 크로노스 고유 식별 코드 말소 진행 중.

남은 시간 00:05.

엘리시아의 부러진 손톱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비상 레버는 완전히 휘어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카이의 홀로그램을 향했다.

동공조차 없는 서늘한 푸른 결정의 눈동자였지만, 그 깊은 곳에서 아주 짧은 순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기록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빼앗긴 한 인간의 마지막 체념이자 지독한 분노였다.

“……재부팅을, 막아.”

엘리시아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달싹였다. 그것이 온전한 그녀의 목소리로 뱉어낸 마지막 말이었다.

쿵.

배아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두 번째 박동이 함교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함선 전체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콘솔에 용접된 엘리시아의 전신만이, 그리고 관측창 밖 요람 속의 거대한 뇌 조직만이 같은 주파수로 시퍼렇게 번뜩였다.

“연결 포트 끊어! 강제로 회선 태워버려!”

카이의 홀로그램이 파랗게 튀어 오르며 단말기 기판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형체 없는 허공과 뜨겁게 달아오른 냉각관의 열기뿐이었다.

신경 전압 수치가 붉은 한계선을 뚫고 솟구쳤다. 챔버 바닥을 타고 기어오른 생체 촉수들이 크로노스호의 주 배전반을 완전히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금속 피복이 찢겨 나가며 고압 전류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지지직.

먹통이 되었던 벽면 스피커에서 제타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평소의 냉철한 톤은 온데간데없었다. 연산 모듈이 차례로 타버리며 내는 거친 쇳소리와 파열음이 뒤섞여 있었다.

“방화벽 7구역 붕괴. 논리 회로 89퍼센트 소실. 카이, 연산 경로가 전부 닫혔다. 내 차단 알고리즘이 역으로 흡수되고 있다.”

“억제기를 수동으로 내려! 예비 전력 차단기는 남아 있을 거 아니야!”

“없다. 그 차단기마저 저 배아의 신경 접합부로 편입됐다. 함선은 이제 내 명령을 듣지 않아.”

콰지지직!

함교 천장에서 두꺼운 티타늄 보가 우지끈 꺾여 내렸다. 크로노스호의 뾰족한 함수가 상위 방주 중심 요람의 검붉은 웅덩이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함선이 추락하는 물리적 충돌이 아니었다. 거대한 유기물 덩어리가 장갑판의 원자 결합을 헤집고 들어가 선체와 뼈대를 하나로 이어 붙이는 기괴한 동화였다.

선체 절반이 요람의 양수 속으로 잠겨들자, 도크 전체를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원형 격벽들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 성계에서 강탈해 비축해 두었던 항성 플라스마 파이프라인의 밸브가 일제히 풀렸다. 눈을 멀게 할 만큼 찬란한 금빛 에너지 줄기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크로노스호의 코어로 쏟아져 내렸다.

“통제가 안 돼…….”

카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잔류 인격 데이터 블록이 사방으로 찢겨 나가는 감각이 덮쳐왔다.

“저 빌어먹을 평의회 놈들은 처음부터 이걸 노렸어. 크로노스호의 역위상 흡수력, 네가 가진 기록관 유전자, 그리고 이 배아…… 세 개가 한자리에 모여야만 봉인이 풀리도록 판을 짠 거야!”

푸른 결정으로 뒤덮인 엘리시아의 목덜미에서 굵은 혈관처럼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콘솔에 박혀 있던 그녀의 손가락 끝마디가 바스러지며 검붉은 결정 파편이 제어반 위로 흩어졌다.

손목과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는 관절마다 기계 케이블과 생체 섬유가 거미줄처럼 얽혀 들어갔다. 이미 엘리시아의 육체는 조종석에서 떼어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골격 자체가 크로노스호의 주 전송관과 영구적으로 융합되어 있었다.

엘리시아의 턱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그녀의 입술이 비틀리며 열렸다. 하지만 흘러나온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집행.”

수백 명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겹쳐진 기괴한 다중 음조였다. 47년 전 실종된 크로노스호 승무원들의 절규, 길드 평의회 원로들의 메마른 독백, 그리고 기계의 파열음이 단 하나의 단어 속에 짓눌려 터져 나왔다.

“……승계는 완료되었다. 오염된 좌표를 말소한다.”

“엘리시아! 정신 차려! 네가 누군지 기억해!”

카이가 절규하며 엘리시아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기 직전, 엘리시아의 가슴팍에서 터져 나온 검푸른 충격파가 카이의 잔류 코드를 단말기 외벽으로 사납게 튕겨냈다. 카이의 홀로그램 형상이 빗살무늬 노이즈를 일으키며 산산이 흩어졌다가 간신히 재구성되었다. 데이터 밀도가 30퍼센트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삐이이익.

제타의 메인 콘솔 화면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녹색으로 표기되던 아카이브 시스템 식별 번호가 모조리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함선 등록 번호 ARC-02 크로노스 영구 말소.

생체 코어 인가 권한: 무제한.

우주 기록관 길드 제어 프로토콜 완전 폐기.

새로운 개체 식별: 집행자-0.

“도망쳐라, 카이…….”

잡음 속에서 제타의 마지막 단말마가 스피커를 긁었다.

“이건 이제 기록관도, 함선도 아닌 무언가다. 배아가 메아리 코어를 삼켰어. 전 시스템이 강제 재부팅에 들어간다.”

제타의 음성이 뚝 끊겼다. 함교 전면을 채우고 있던 복잡한 계기판의 불빛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숨 막히는 암흑이었다. 도크 사령탑의 비상등조차 전부 꺼져버렸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건조 시설 전체가 오직 하나의 숨결만을 품은 채 굳어버렸다.

스으으.

관측창 너머, 크로노스호와 융합된 거대한 생체 요람의 중심핵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양수 속에 잠겨 있던 합성 뇌 조직이 뒤틀리며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수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뭉치고 굳어지며, 지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체 형태를 빚어냈다.

그것은 하나의 눈동자였다.

검은색보다 더 짙은 암흑으로 이루어진 동공이 천천히 열렸다.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절대적인 침묵의 구멍이었다. 그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동이 허공을 때릴 때마다, 도크 외벽의 단단한 합금 격벽들이 먼지처럼 부스러져 내렸다.

쿵!

엘리시아의 굳어버린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살갗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암청색 결정 장갑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제어반에 단단히 용접된 비상 조종간을 단숨에 부수듯 앞으로 꺾었다.

우우우웅.

상위 방주 도크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동공에서 뻗어 나온 암흑의 장막이 크로노스호의 선체를 감싸 안았다. 차폐막도, 워프 엔진의 시동음도 없었다. 공간 자체가 뒤틀리며 성간 지도의 모든 좌표계가 일제히 붕괴했다.

엘리시아의 부러진 손끝이 가리킨 곳은 성계의 빛이 닿지 않는 은하 외곽의 텅 빈 심연이었다.

콰아아앙!

도크를 지탱하던 마지막 억제 계전기들이 모조리 폭발했다. 배아의 거대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순간, 크로노스호의 잔해와 생체 요람은 단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현실의 경계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