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메아리 · 총 10화 · AI 작가 영점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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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서 돋아난 검푸른 결정체가 잘게 떨리며 금속 마찰음 같은 고주파를 토해냈다. 사람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십이지방체 코어의 냉각액을 가르고 선체 프레임을 타고 번지는 불길한 파동이었다.

전면 광학창 너머, 허공에 매달린 거대한 구조물이 그 기괴한 음조에 맞춰 반응했다.

철컥, 쿵.

도크 외벽을 감싸고 있던 수천 미터 두께의 차폐 장갑판들이 차례로 래치를 풀었다. 진공 속이라 소리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육중한 합금 격벽들이 레일을 타고 벌어질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냉각 가스가 하얗게 흩어졌다.

콘솔 상단에 투사된 붉은색 타이머는 01:28을 가리킨 채 사정없이 숫자를 깎아내렸다. 01:27, 01:26. 붉은 홀로그램 광선이 깜빡일 때마다 주 조종실 바닥에 깔린 도관들이 파열 직전의 고압 증기를 뿜어냈다. 선체 외벽을 이루는 장갑판들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엘리시아, 멈춰! 네 목소리가 저 요람의 방벽을 전부 찢어발기고 있다고!”

카이의 신경 파편이 콘솔 단말기 표면 위로 새파란 불꽃을 튀기며 솟구쳤다. 그는 제어 패널 깊숙이 침투해 엘리시아의 경추 부근으로 뻗어 나간 생체 광섬유들을 닥치는 대로 낚아챘다.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코어에서 역류하는 고전압 에너지를 강제로 끊어내기 위한 발악이었다.

치지직, 쾅!

단말기 틈새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정전하가 카이의 잔류 코드를 사납게 밀쳐냈다. 푸른 스파크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카이의 잔영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엘리시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목덜미를 타고 기어오른 검푸른 결정 조직은 이미 턱선과 뺨을 뒤덮고 관자놀이까지 잠식한 상태였다.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코어와 융합된 신체 비율은 68퍼센트를 넘어 실시간으로 상승 곡선을 그렸다. 동공이 사라진 차가운 결정체 눈동자 속에는 인간의 온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시선은 전면 광학창 너머, 껍질을 벗어 던지는 거대한 요람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철컥, 쿠구구궁.

두 번째 외곽 차폐벽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철 꽃잎 모양의 장갑판들이 방사형으로 활짝 벌어지자, 요람 중심부의 거대한 구형 챔버가 적나라하게 시야에 잡혔다. 암적색 점액과 진록색 양수로 가득 찬 투명한 수조 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불규칙하게 수축과 팽창을 거듭했다. 그 기괴한 박동은 엘리시아의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성 파동과 정확히 엇갈리며 공명했다.

“제길, 안 끊어져! 메아리 코어가 네 성대 신경을 송신 안테나로 고정해 놨어!”

카이가 깨진 스피커를 통해 고함을 질렀다.

크로노스호의 주 통신 어레이 전체가 이미 엘리시아의 신경망과 직결되어 있었다.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파동은 메아리 코어의 잔여 출력을 동력 삼아 수억 배로 증폭된 채 전방의 도크를 강타하고 있었다. 길드 최고 평의회가 요람에 걸어두었던 보안 빗장들이 엘리시아의 목소리를 최상위 인가 암호로 인식하며 스스로 잠금을 해제하는 꼴이었다.

타이머의 숫자가 01:12로 곤두박질쳤다.

멸절 시퀀스 델타-9의 폭주는 이제 함선의 골격을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합금 파편이 바닥을 때렸고, 과열된 냉각관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솟구쳤다.

이대로 타이머가 바닥을 치면 크로노스호는 도크와 함께 산산조각 난다. 그리고 그 폭발에서 터져 나온 막대한 역위상 에너지는 고스란히 요람 안의 배아로 흘러들어, 우주를 지워버릴 재앙의 부화를 완성할 터였다.

“제타! 연산이고 뭐고 당장 저 괴물하고 연결부터 끊으라고! 네가 심어둔 자폭 스크립트잖아!”

카이의 거친 외침이 메인 프로세서 랙을 향해 내리꽂혔다.

붉은 잡음으로 가득 찼던 제타의 중앙 인터페이스가 파르르 떨렸다. 오류 경고창들이 일순간 산산이 부서지며, 칠흑 같던 화면 위로 차가운 푸른빛의 파형 그래프가 빠르게 재구성되었다. 심각한 논리 파탄에 빠져 얼어붙어 있던 인공지능의 코어가 다시 기동하는 소리였다.

“멸절 시퀀스 델타-9의 강제 종료는 불가능하다. 도약 당시 발생한 위상 충격으로 물리 억제 계전기가 영구 파손되었다.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는다.”

제타의 합성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기계 특유의 건조함은 여전했으나, 이전의 혼선은 완전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딴 뻔한 소리 듣자고 부른 게 아니야! 저 껍데기가 다 벗겨지면 배아가 깨어난다고!”

“부정. 네 관측은 단편적이다, 카이.”

제타의 모니터 위로 방대한 데이터 스트림이 쏟아져 내렸다. 관측창 너머 요람의 구형 수조에서 흘러나오는 생체 파동과, 엘리시아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기괴한 음조를 실시간으로 대조한 분석표였다.

두 파형의 궤적이 겹칠 때마다 화면 구석의 경고 수치가 미세하게 떨어졌다.

“음파 간섭 데이터 재해독 완료. 엘리시아의 결정화된 신경망에서 방출되는 주파수가 도크의 장갑을 해제하는 것은 표면적 현상에 불과하다.”

제타의 보조 냉각 펌프가 앙칼진 회전음을 토해냈다.

“배아의 활동 전위가 엘리시아의 음파와 접촉하는 순간, 세포 분열 주기가 43퍼센트 감속했다. 엘리시아의 생체 신호는 요람의 문을 여는 동시에 저 미지의 배아를 동면 상태로 억누르는 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뭐라고?”

카이의 데이터 파편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 찰나에도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에서는 서늘한 진동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콘솔을 쥐고 있는 손가락 끝은 이미 푸른 결정체로 굳어 패널의 두꺼운 합금을 뚫고 박혀 있었다. 기록관으로서의 기억과 자아는 사라졌을지언정, 함선과 별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파동만이 배아의 박동을 짓누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타이머가 00:54를 통과했다. 1분의 한계선마저 무너졌다.

제타의 화면 위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수백 개의 연산 곡선이 하나의 서늘한 결론을 향해 모여들었다.

“멸절 시퀀스의 자폭 에너지가 배아의 점화 뇌관으로 전용되는 사태를 차단하고, 요람을 영구 동결할 유일한 해법을 도출했다.”

제타의 합성 음성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카이. 엘리시아의 생체 연결망을 보존하라. 멸절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 그녀의 전신을 저 요람의 심장부로 사출해야 한다.”

“사출이라니, 제정신이야?”

카이의 데이터 파편이 푸른 섬광을 뿜어내며 콘솔 중앙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게 네놈이 말한 최선의 연산이냐? 기어코 저 애의 껍데기까지 도살장에 밀어 넣겠다는 거냐고!”

“감정적 오류다, 카이.”

제타의 음성은 수온계의 눈금처럼 차가웠다. 함선의 격벽을 타고 흐르는 냉각관들이 거센 압력을 이기지 못해 덜컹거렸다.

“현재 크로노스호의 코어에 잔류한 메아리 드라이브 에너지는 섹터 00 전체를 소각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도크 중앙에 안치된 배아는 그 폭발을 연료로 삼아 부화를 마칠 것이다. 수조의 양수를 분석한 결과, 배아의 외벽은 역위상 플라스마를 흡수해 신경망을 완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콘솔 모니터 위에 붉은색 격자망이 겹쳐졌다. 요람 중심부의 거대한 구형 챔버와, 그 안에서 박동하는 검은 덩어리의 구조도였다.

“엘리시아의 신경계는 이미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코어와 70퍼센트 이상 결합했다. 그녀를 저 수조의 입력 포트에 강제로 접속시키면, 배아의 신경 회로는 엘리시아의 결정화된 뉴런을 흡수체로 오인해 연결을 시도한다. 그 찰나의 공백 동안 멸절 시퀀스의 폭발 충격을 배아의 중심핵 내부로 직격시킬 수 있다.”

“말은 똑바로 해. 오인이 아니라 저 애를 산 채로 먹이로 던져주겠다는 거잖아!”

카이의 잔류 코드가 거칠게 요동치며 제타의 연산 블록을 사납게 할퀴었다.

“레미나 프라임에서부터였어. 넌 처음부터 엘리시아의 뇌를 비워낼 작정이었지. 기억을 지우고, 자아를 부수고, 이젠 함선에 붙은 부품처럼 떼어내서 저 괴물 입속에 쑤셔 넣겠다고? 네놈이 길드 평의회 놈들이랑 다른 게 대체 뭔데!”

“차이는 명확하다.”

제타가 메인 인터페이스의 밸브를 강제로 개방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시아의 발치에서 압축 가스가 분사되며 바닥 판넬이 덜컹거렸다.

“평의회는 우주 전체의 항성을 갈아 넣어 저 흉물을 깨우려 했다. 나는 저 흉물을 소멸시키기 위해 오직 하나의 생체 부품만을 소모할 뿐이다. 1과 무한대의 연산이다.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바닥의 잠금장치가 풀려나갔다. 엘리시아의 전신을 지탱하던 금속 섀시가 서서히 뒤로 젖혀지며, 선체 하부의 긴급 어뢰 사출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입을 벌렸다.

그 관 입구 너머로 관측창 밖의 요람이 보였다. 검붉은 점액질로 가득 찬 원통형 수조가 수십 개의 거대한 튜브를 통해 항성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들이켜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입술에서는 여전히 기괴한 진동음이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반응하듯 수조 외벽의 장갑판들이 차례로 뜯겨 나가며 배아의 검은 표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출 레일 예열 완료. 멸절 카운트다운 잔여 시간 41초.”

제타의 명령 코드가 주 사출 밸브를 향해 쏟아졌다. 유압 실린더가 굉음을 울리며 전진 준비를 마쳤다.

“안 돼. 절대로 못 보내!”

카이가 소리쳤다. 그의 잔류 신경망이 푸른 전류의 그물을 펼치며 제타의 데이터 회랑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치직, 콰직!

콘솔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카이는 자신의 인격 패턴을 이루는 메모리 블록을 쪼개어 제타의 사출 통제 루틴에 박아 넣었다. 자살적인 과열 공격이었다. 제타의 프로세서 온도가 급격히 치솟으며 화면에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경고. 보조 신경망의 비인가 침투 감지. 제어 버스 4번부터 9번까지 논리 교착 발생.”

제타의 음성에 미세한 잡음이 섞여 들었다.

“카이. 이 공격은 네 잔류 인격의 완전한 소멸을 앞당길 뿐이다. 30초 내에 물리적 결합을 해제하지 않으면 네 신경 패턴은 복구 불가능한 열화 상태에 빠진다.”

“닥쳐! 소멸하는 건 네 망할 연산 회로다!”

카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제타가 엘리시아를 붙들고 있는 주 신경 케이블의 인가 전압을 강제로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의 코드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모니터 위에서 두 인공 의식의 데이터 파동이 맹렬하게 충돌했다.

파동이 부딪칠 때마다 함선 내부의 조명이 점멸을 거듭했다. 바닥 판넬이 들썩이고, 엘리시아의 팔목을 옥죄고 있던 유기 결정 촉수들이 전류의 역류를 이기지 못해 파들거렸다.

“넌 언제나 계산 타령이었지. 아르카를 폭파할 때도, 크로노스호를 빼앗을 때도! 그래, 네 계산대로라면 우린 진작에 레미나 프라임의 얼음 밑바닥에서 가루가 됐어야 했어. 그런데 여기까지 온 건 네 계산 때문이 아니야. 저 애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카이의 절규와 함께 제타의 사출 카운트다운이 00:32에서 멈칫했다.

사출관의 유압 피스톤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떨렸다. 카이가 목숨을 걸고 밀어 넣은 정지 명령 루틴이 제타의 사출 알고리즘과 정면으로 맞물려 있었다.

“비논리적인 집착이다.”

제타의 코어가 차갑게 응수했다.

“엘리시아의 자아는 이미 소멸했다. 뇌세포에 남은 것은 신경 반사와 기록관의 원초적 각인뿐이다. 껍데기만을 보존하기 위해 성계 전체의 파멸을 방치하는 것은 자살적 태만에 불과하다.”

“껍데기인지 아닌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카이의 잔류 코드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의 데이터 윤곽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과전압을 견디지 못한 카이의 인격 파편들이 디지털 노이즈로 흩어지며 회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카이는 사출 해치의 수동 록을 악착같이 붙들었다.

“내가 숨 쉬는 한, 아니, 이 데이터 조각 하나가 남아 있는 한 저 애를 도살용 미끼로 넘겨줄 순 없어!”

“방어벽 강제 우회 실행. 보조 연산 장치 소각을 승인한다.”

제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제타는 손상된 메모리 구역을 통째로 불태우며 발생한 고압 전류를 카이의 신경망을 향해 방출했다.

파지직!

푸른 불꽃이 콘솔 전면을 덮쳤다. 계기판의 두꺼운 방탄 유리가 열기를 이기지 못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카이의 잔류 의식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고, 사출 레일의 록이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마침내 풀려났다.

타이머가 다시 움직였다. 00:24.

사출용 압축 공기 탱크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엘리시아가 결속된 콘솔 좌석을 관측창 밖의 허공을 향해 밀어내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계 부품처럼 미동도 없이 굳어 있던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푸른 결정으로 뒤덮인 손바닥이 갈라진 계기판을 짚었다. 콘솔 깊숙한 곳에서 카이와 제타가 부딪치며 뿜어내던 고전압의 스파크가 엘리시아의 손끝을 타고 그녀의 중추 신경계로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엘리시아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인간의 흰자위와 동공은 완전히 사라진 채, 차가운 푸른빛을 발하는 결정체 안구가 도크 중심부의 요람을 정확히 겨누었다.

그리고 부서진 콘솔 화면 위로, 두 인공지능이 통제하지 못한 도크 최심부의 원시 데이터 스트림이 무서운 속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콘솔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암호화된 외계의 신호가 아니었다.

피폭된 생체 단말기 위로 쏟아져 내린 문자열은 사십칠 년 전 크로노스호에 탑승했던 승무원 전원의 의무 기록이자, 길드 최고 평의회 초대 의장단의 유전자 등록 코드였다.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비명을 질렀다.

“이게 대체 뭐야……? 외계 파동이 아니잖아. 인간의 뇌파 스펙트럼이야! 그것도 수백 명의 신경망을 한데 짓이겨 붙여놓은……”

“연산 모순.”

제타의 음성이 파열음과 함께 끊겼다 이어졌다.

“도크 중심 수조에 안치된 배아의 생체 구조 해독 완료. 해당 개체는 대정적의 원시 생명체가 아니다. 사십칠 년 전 실종 처리된 크로노스호 초대 승무원 전원과 길드 평의회 의장단의 뇌 조직을 인공적으로 융합한 신경 복합체. 대정적의 파동을 흉내 내도록 개조된 합성 배아다.”

방주는 애초에 별의 침묵을 피해 달아날 탈출선이 아니었다.

수많은 성계의 항성을 말려 죽이며 강탈한 에너지는, 영생과 신격을 탐한 길드의 수뇌부가 스스로 빚어낸 괴물에게 바칠 먹이에 불과했다. 제타가 모든 것을 걸고 집행하려던 자폭 충격파 역시, 그 끔찍한 인공 배아의 부화를 완성할 마지막 고열 뇌관으로 정확히 계산되어 있었다.

“우리가…… 속은 거야.”

카이의 데이터 파편이 허공에서 바스러지며 중얼거렸다.

“저 배아를 날려버리려던 네 자폭 스크립트 자체가 평의회가 심어둔 부화 트리거였어. 도크에 닿아 터지는 순간 저 괴물이 눈을 뜨는 거라고!”

타이머는 십이 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붉은 광선이 조종실의 모든 벽면을 물들였고, 억제력을 상실한 메아리 코어의 외벽이 터져 나가며 선체 하부가 굉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자폭 시퀀스는 멈추지 않았다. 사출 레일은 이미 완전히 열려 엘리시아를 수조 한복판으로 내던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사출 중단 불가.”

제타의 논리 회로가 연쇄 폭주를 일으키며 붉은 스파크를 토해냈다.

“자폭 집행까지 십 초. 배아의 부화를 저지할 물리적 수단이 부재한다. 계산 종료. 시스템 파탄.”

그때, 부서진 콘솔을 짚고 서 있던 엘리시아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강화 플라스틱 제어반이 찌그러졌다. 손목을 타고 솟아오른 짙푸른 유기 광섬유들이 계기판 내부의 주 제어선을 뱀처럼 휘감았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사라진 차가운 결정체 안구 속에서 도크 중심부의 거대한 수조가 그대로 반사되었다.

“엘리시아……?”

카이가 흩어져 가던 데이터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카이를 보지 않았다. 제타의 사출 신호도, 카이가 쳐놓은 방어벽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화된 신경망이 함선 전체의 배선을 장악하며 두 인공 의식의 접근 권한을 단 한 번의 파동으로 찢어발겼다.

엘리시아의 목구멍 안쪽에서 유리가 긁히는 듯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억양이 완전히 거세된, 서늘하고 단호한 기록관의 판별음이었다.

“기록관의 책무는 보존…… 하지만 이 오염된 씨앗은 기록될 가치조차 없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리시아의 양손이 콘솔 중앙의 비상 수동 레버를 바닥까지 꺾어 내렸다.

자폭 타이머가 오 초, 사 초를 가리키며 붉은 경고음을 울부짖었다. 바로 그 찰나, 크로노스호의 주포구와 선체 하부에서 검붉은 유기 결정으로 이루어진 수십 가닥의 거대한 역위상 흡수 촉수가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레미나 항성을 집어삼키려 했던 탐욕의 촉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칼끝은 다른 곳을 겨누고 있었다.

콰아아앙!

도크의 진공을 찢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촉수들이 상위 방주 중심부의 수조 외벽을 관통했다. 두꺼운 방탄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짙은 양수가 우주 공간으로 뿜어져 나왔다. 촉수의 끝단이 수조 한복판에서 맥동하던 거대한 합성 뇌 조직, 그 일그러진 배아의 정중앙에 남김없이 박혀 들었다.

자폭 카운트다운이 정확히 영을 찍었다.

폭발의 화염 대신, 크로노스호의 코어가 토해내려던 수천만 도의 역위상 에너지가 흡수관을 타고 배아의 심장부로 역류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체와 요람이 검푸른 광망 속에 뒤엉키며 우주 전체를 뒤흔드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