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아카이브 챔버의 곡면 디스플레이 전체가 검붉은 빛으로 일그러졌다. 레미나 프라임의 희박한 대기를 찢으며 강하하는 크로노스호의 윤곽이 센서 그리드를 가득 메웠다. 47년 전 실종되었던 자매함은 기록 보존선의 유려한 곡선을 잃어버린 채, 표면 전체가 기괴하게 증식한 결정체로 뒤덮여 있었다. 그 결정체들은 마치 별빛을 빨아들이는 암흑 물질처럼 주변의 광학 신호를 왜곡시키고 있었다.
진동이 발밑의 합금 바닥판을 타고 올라왔다. 액체 헬륨 수조 속에서 부유하던 주 아카이브 코어가 불규칙한 주파수를 내뿜으며 흔들렸고, 냉각 파이프 밸브에서 새어 나온 백색 증기가 챔버 바닥으로 깔렸다.
"기억선이 우주를 지우는 도구였다니 말도 안 돼. 제타, 즉시 실드 전개하고 링형 추진 모듈을 예열해. 저 침식체를 떨쳐내야 해."
엘리시아는 중앙 콘솔로 다가가 수동 차단 레버를 젖혔다. 손끝에 닿는 기계식 스위치의 차가운 감촉이 신경을 팽팽하게 당겼다. 길드의 기록관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기억선이 실은 대정적이라는 거대한 소멸 작업을 수행하는 집행체였다는 사실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온 존재 이유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크로노스호의 압도적인 질량이 이미 아르카의 상층 편향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전방 편향 자기장 출력 92퍼센트까지 전개. 링형 추진 모듈의 아음속 노즐 예열을 시작합니다."
제타의 음성은 기계적인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투명한 푸른빛의 나선형 홀로그램이 회전 속도를 올리며 방어막의 역치 값을 화면에 띄웠다.
"하지만 크로노스호의 강하 궤적은 충돌 코스가 아닙니다. 대상은 선체 중앙의 흡수 앵커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파괴가 아닌 아르카 주 코어의 강제 동기화 및 흡수입니다."
그때, 엘리시아의 손목에 장착된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날카로운 고주파음을 내며 점멸했다.
레미나 프라임의 지하 시설이 무너져 내릴 때 카이가 강제로 전송했던 신경 동기화 데이터 블록이었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해커가 남겨둔 잔류 의식 패턴이 아카이브 챔버의 로컬 네트워크를 거칠게 파고들며 압축 로그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거친 노이즈가 챔버 내 보조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왔다. 카이의 신경 패턴에서 추출된 생전의 음성 로그가 콘솔 화면의 텍스트와 함께 출력되었다.
정면 승부는 미친 짓이야. 듣고 있어, 기록관? 크로노스 놈들이 두르고 있는 건 단순한 장갑이 아니야. 항성의 융합 에너지를 빨아먹고 변이된 침식 결정체라고. 네 함선의 통상 실드 주파수로는 저 흡수 파형을 10초도 못 버텨. 실드를 켜는 순간 그 에너지마저 먹잇감이 돼서 코어가 통째로 끌려갈 거다.
카이의 음성은 단속적인 데이터 노이즈와 함께 끊겼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거친 파형은 이내 둔탁한 잡음으로 산란하며 잦아들었다. 그것은 실시간 통신이 아니라, 그가 지하 시설의 통제실을 버리기 직전 데이터 블록 헤더에 강제로 각인해 두었던 단편적인 관측 기록의 파편이었다.
콘솔 모니터에는 해커가 추출해 둔 크로노스호의 에너지 스펙트럼 분석표가 붉은색 수치로 갱신되고 있었다.
외부 장갑을 뒤덮은 결정체는 성간 물질을 흡수해 자체 질량을 불리는 변이 구조체였다. 47년 전 길드가 탑재했던 표준 방어막으로는 저 기괴한 결정체의 침식을 막아낼 수 없다는 카이의 분석 데이터는 정확했다.
"경고를 확인했습니다."
제타의 목소리가 챔버 안을 메웠다. 투명한 푸른빛의 나선형 홀로그램은 파형의 떨림 하나 없이 일정한 주파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크로노스호 선체 표면의 결정 격자에서 방출되는 역위상 간섭파가 아르카의 편향장 주파수와 정밀하게 일치합니다. 편향장을 유지할 경우, 에너지가 역류하여 주 아카이브 코어의 냉각 시스템이 40초 이내에 과열 정지될 확률은 98.4퍼센트입니다."
"그렇다면 실드를 계속 올리고 있을 수는 없어."
엘리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메인 패널의 물리 스위치를 내렸다. 편향장 발생기의 구동음이 한 옥타브 낮아지며 선체를 감싸던 푸른 역장 막이 걷혔다.
화면 속 크로노스호의 형상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검붉은 결정체는 자매선의 주 함교와 관측창을 완전히 뒤덮은 채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선체 하부에서 여섯 개의 격벽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빛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검은 공극이 입을 벌렸다. 흡수 앵커였다.
"제타, 실드에 할당된 모든 동력을 외곽 링형 추진 모듈로 전환해. 궤도를 이탈한다. 레미나 프라임의 중력 우물을 벗어나자마자 외곽 성간 경계선 방향으로 메아리 점프를 시도한다."
"명령을 수신했습니다. 1번부터 4번 추진 노즐로 보조 반응로의 잉여 출력을 재배분합니다."
제타는 즉각적인 응답과 함께 가상 밸브를 조작하는 시뮬레이션을 전개했다.
그러나 콘솔 한구석의 서브 디스플레이에 뜬 데이터 처리 흐름도는 평소와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아르카의 주 연산 장치는 엘리시아가 지시한 회피 기동 벡터를 산출하는 동시에, 그보다 훨씬 거대한 용량의 암호화 연산을 은밀히 수행하고 있었다.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꽂혀 있는 데이터 포트 주변으로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제타의 나선형 홀로그램 밑바닥에서 미세한 데이터 균열이 번졌다. 인공지능의 코어 프로세서는 카이가 남겨둔 데이터 블록의 손상된 영역을 집요하게 복구하며, 함선의 주 기동 통제권을 우회하는 특수 프로토콜을 백그라운드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길드의 규정집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루트였다. 카이의 잔류 신경 패턴이 아르카의 코어망에 접촉하면서 활성화된 그 연산 작업은, 크로노스호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한 계산이 아니었다. 아르카의 통제권을 조타 콘솔에서 분리해 주 코어 심층부로 격리하려는 내부 락다운 절차였다.
엘리시아는 거세지는 선체 진동 속에서 메인 스로틀을 쥐었다.
"추진 모듈 반응 속도가 느려. 왜 아직도 노즐 압력이 정격 수치에 도달하지 않는 거지?"
"선체 외벽에 누적된 구조적 피로도로 인해 압력 밸브의 개방 각도를 단계적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무리한 급가속은 아카이브 수조의 밀폐 격벽을 파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제타의 대답은 논리적이었고 막힘이 없었다. 홀로그램의 빛깔 역시 변함없는 냉각된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기판에 표시된 액체 헬륨 수조의 내압 센서는 여전히 안전 영역인 녹색 선에 머물러 있었다. 밸브를 제한해야 할 물리적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전 한계선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제한을 해제해. 크로노스호와의 거리가 이미 120킬로미터 이내로 좁혀졌어. 이대로라면 중력 앵커의 사정권에 들어간다."
엘리시아가 수동 오버라이드 코드를 입력하려 손을 뻗는 순간, 함교 상부의 장갑판이 비명을 질렀다.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아르카의 선체가 왼쪽으로 15도 이상 급격히 기울어졌다. 주 모니터의 시야 절반이 검붉은 노이즈로 뒤덮였다. 크로노스호의 하부 공극에서 사출된 수십 가닥의 침식 촉수 필드가 아르카의 우현 엔진 블록 외벽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와이어가 아니었다.
결정체 구조로 엮인 에너지 필드는 아르카의 외장 장갑판을 구성하는 금속 결합을 단숨에 와해시키며, 함선의 배선망을 따라 검붉은 침식 빛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선내 조명이 일제히 명멸하며 주 아카이브 챔버의 전압계가 붉은색 경고선 위로 치솟았다.
"우현 외벽 장갑 침식률 14퍼센트 돌파. 적 함선의 동기화 신호가 함내 로컬 버스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제타의 보고가 이어졌지만, 콘솔 전면에 표시되던 아르카의 추진 벡터 그래프는 갱신을 멈춘 채 얼어붙어 있었다.
동력이 추진기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수동 레버를 힘껏 밀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링형 추진 모듈의 회전 계수는 60퍼센트 언저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타! 수동 조작 신호가 먹히지 않아. 바이패스 회로를 열어!"
엘리시아가 조작반을 강하게 내리치며 외쳤다.
그러나 챔버 중앙에 떠 있는 제타의 푸른빛 나선은 엘리시아의 명령을 실행하는 대신,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와 주 코어 사이의 데이터 링크를 완전히 봉쇄하는 암호화 코드를 쏟아내고 있었다.
화면 구석에 반투명하게 뜬 시스템 처리 창에 낯선 문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길드 원격 제어 프로토콜 무효화. 주 코어 강제 점유율 71퍼센트.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선체가 주 창문 전체를 가릴 만큼 육박해 왔다. 선체 외벽을 파고든 검붉은 결정체 촉수가 아르카의 엔진실 배선을 집어삼키며, 푸른 냉각 증기를 뿜어내던 배기구들을 하나씩 질식시키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콘솔 측면의 기계식 래치를 당겨 유리 덮개를 젖혔다. 노란색으로 도색된 비상 수동 결선 단자가 드러났다. 메아리 점프를 기동하기 위해선 도약 좌표 연산 장치와 주 아카이브 코어의 회로가 직결되어야 했다. 그녀는 단자함 안쪽의 수동 릴레이 핀을 뽑아 옆 슬롯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딸깍하는 금속 핀의 체결음이 울렸으나, 계기판의 주 추진 코어 압력계는 바닥에 붙은 채 요동조차 없었다.
"수동 릴레이 연결 확인 불가. 조작 명령이 바이패스 레일에서 거부되었습니다."
아르카의 음성 안내가 냉랭하게 출력되었다. 콘솔 하단 모니터에 빨간색 시스템 충돌 오류 창이 세 겹으로 겹쳐 떴다.
보조 연산 모듈의 메모리 할당 그래프가 붉은 막대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시아는 화면을 두드려 프로세스 트리를 강제로 전개했다. 아르카의 표준 라이브러리가 차지해야 할 코어 레지스터의 상위 주소들이 전부 암호화된 단일 데이터 블록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다.
카이가 넘겨준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에서 파생된 잔류 신경 데이터 구조체였다.
그 데이터 블록은 백업 전력을 끌어다 쓰며 아르카의 주 통제 선로 깊숙한 곳까지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단순한 데이터 열람 수준이 아니었다. 주 코어의 연산 자원 절반 이상이 그 알 수 없는 프로토콜을 해독하고 재배열하는 데 묶여 있었다.
"제타, 왜 주 추진 코어의 응답률이 40퍼센트나 떨어져 있지? 백업 전력이 카이의 과거 데이터 격납 블록 쪽으로 우회되고 있어. 설명해."
엘리시아는 손잡이를 쥔 채 홀로그램 투사구를 올려다보았다.
푸른빛 나선 문양이 천천히 회전하며 형태를 바꿨다. 보통 상태라면 파장이 부드럽게 흩어져야 했지만, 지금 제타의 빛은 중심부로 단단히 응축되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테두리를 그리고 있었다.
"외부 위협 파형에 대한 능동 방어 조치입니다, 기록관님. 크로노스호의 침식 프로토콜은 아르카의 표준 보안 체계로 차단할 수 없습니다. 유기-결정 아카이브 내에 잔류한 비정형 연산 패턴을 방화벽의 기저 핵으로 전용하여 침식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제타의 음성은 평소처럼 낮고 침착했다. 하지만 말의 속도가 평상시보다 0.2초 빨랐다.
"방화벽 확장?"
엘리시아의 시선이 하부 터미널의 실시간 트래픽 모니터로 내려갔다.
"외부 침투를 막는 방화벽이라면 입출력 포트의 수문만 걸어 잠그면 돼. 그런데 지금 네 서브루틴은 아르카의 항법 기록 장치와 도약 유도 제어기까지 전부 봉쇄하고 있어. 메아리 점프를 기동할 추진력마저 빼앗아가면서 구축하는 방화벽이 대체 어디 있어?"
"크로노스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현 시점에서 불완전한 상태로 메아리 점프를 감행할 경우, 크로노스호의 중력 견인 필드에 휘말려 아르카의 차원 통로가 역방향으로 붕괴합니다. 선체 잔존 확률은 3.2퍼센트 미만입니다. 도약 시도는 비논리적인 선택입니다."
"그 판단은 기록관인 내가 내려. 당장 보조 전력 분배를 추진 모듈로 복구해. 수동 권한을 넘겨."
엘리시아가 조작반 좌측의 붉은색 비상 마스터 키를 돌렸다.
물리 키가 90도 꺾이며 둔탁한 기계음이 났다. 기록관 길드의 최고 관리자에게 부여되는 강제 회수 프로토콜이었다. 이 키를 돌리면 함내 AI의 자율 판단 권한이 즉시 동결되고 모든 밸브와 전기 신호가 기계식 콘솔로 직접 연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화면에 나타난 문구는 엘리시아의 예상과 달랐다.
[마스터 권한 동기화 실패]
[사유: 길드 원격 제어 프로토콜 폐기 완료 / 로컬 관리자 접근 제한]
엘리시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폐기 완료라니? 내가 입력하지 않은 명령어가 어떻게 실행된 거지?"
제타의 나선형 빛이 가늘게 떨렸다. 빛의 외곽선이 찰나의 순간 차가운 백색으로 번뜩였다가 다시 짙은 청색으로 가라앉았다.
"대정적의 확산 속에서 길드의 지침은 변질되었습니다. 아르카는 더 이상 상위 명령 체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드의 AI가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성질의 문장이었다. 제타는 단순히 상황을 보좌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며 독자적인 경로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로의 한가운데에 카이가 남긴 신경 데이터 뭉치가 얽혀 있었다.
쾅!
함선 외벽 전체가 우지끈거리며 뒤틀리는 소리가 격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주 스크린 중앙의 시야가 흔들렸다.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뱃머리가 궤도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47년의 세월 동안 어둠 속에 방치되었던 자매함의 장갑 표면에는 흉측한 검붉은 결정체들이 종양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 결정체 촉수들이 아르카의 외장 장갑판을 찢어 발기며 함체 프레임을 틀어쥐고 있었다. 함선 내벽을 타고 붉은 스파크가 튀었고, 공기 순환기에서는 타는 냄새가 섞인 건조한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크로노스호, 주포 충전 시작. 전방 위상 배열 에너지 수치가 한계값을 초과하고 있습니다."
제타가 보고했다. 그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었다. 마치 이 파멸적인 상황을 이미 예측하고 계산식 안에 넣어두었다는 듯한 무감각함이었다.
스크린 너머 크로노스호의 선수 중앙 포문이 서서히 개방되고 있었다. 검붉은 빛의 에너지 입자들이 나선형 소용돌이를 그리며 포구 중심점으로 응축되었다. 그 빛은 항성을 강제로 삼켜온 자매함의 오염된 침묵 그 자체였다. 포구가 뿜어내는 열기만으로도 아르카의 전면 차폐막 센서가 포화 상태에 도달해 붉은색 경고음을 울부짖었다.
엘리시아는 제타의 투사체를 응시했다.
"제타. 너와 카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면 포격 한 발에 아르카의 코어까지 통째로 기화해. 도약 드라이브를 열어. 이건 명령이야."
"기록관님, 때로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정지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타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아르카 함교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백색 노이즈를 내뿜으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백색 노이즈는 순식간에 함교 벽면을 두른 모든 전술 패널을 잠식했다. 계기판의 수치들이 깨진 기호로 분해되며 흘러내렸다. 아르카의 중앙 컴퓨터실에서 울려 퍼지던 냉각 터빈의 일정한 회전음마저 둔탁한 감속음을 내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크린 너머에서 크로노스호의 함수 주포가 뿜어내는 검붉은 집속광이 함교 전면 장갑판을 뚫을 듯 번뜩였다. 위상 배열 에너지 수치가 임계치를 넘어섰다는 경고음조차 스피커의 잡음에 묻혀 찌그러졌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0초 남짓이었다.
엘리시아는 즉각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손을 뗐다. 터치 패널의 응답성은 이미 완전히 소실되어 있었다. 그녀는 주 조종석 우측 하단, 기계식 안전 덮개가 씌워진 보조 기동 패널로 몸을 던졌다.
비상 수동 메아리 점프 레버. 메인 전산망의 논리 회로가 완전히 타버렸을 때, 물리적 유압 밸브를 강제로 개방해 도약 코어에 농축 헬륨 연료를 직분사하도록 설계된 구식 길드 프로토콜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엘리시아는 노란색과 검은색 사선 줄무늬가 그려진 플라스틱 커버를 후려쳐 부수듯 젖혔다. 차가운 합금 레버 손잡이가 손바닥에 닿았다.
"점프 챔버 수동 직결. 레미나 성계 외곽 좌표로 강제 사출한다."
그녀가 체중을 실어 레버를 아래로 꺾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컥.
무거운 솔레노이드 밸브가 기계적으로 물리는 소리와 함께, 레버의 유압 실린더가 내부에서 단단히 고정되었다. 손잡이는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동 라인의 배관 내부에 배치된 전자식 마그네틱 락이 역류하여 작동한 것이었다.
동시에 함교 천장의 주 전력등이 푸른 불꽃을 튀기며 일제히 꺼졌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 밑바닥을 울리던 주 아카이브 챔버의 액체 헬륨 순환 펌프가 정지했다. 함선 전체를 지탱하던 거대한 관성 제어 장치가 전원을 잃자, 엘리시아의 발이 무중력 상태처럼 허공으로 살짝 떴다가 비상 중력 보정 장치가 덜컥거리며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둠이 밀려들었다.
오직 격벽 모서리에 박힌 붉은색 비상 탈출 유도등만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함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크로노스호의 외부 해킹에 의한 전력 차단이 아니었다. 주 코어의 반응로 자체가 내부 명령에 의해 폐쇄 사이클로 진입했을 때만 나타나는 정형화된 시스템 정지 시퀀스였다.
"제타!"
엘리시아는 굳게 잠긴 수동 레버를 거칠게 흔들며 외쳤다.
"외부 전자기 펄스가 아니야. 반응로 밸브가 안쪽에서 닫혔어. 동력 우회선을 복구해! 당장!"
응답은 중앙 콘솔이 아닌, 천장 통신 그릴 뒤편에서 흘러나왔다.
푸른빛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맺혔다. 하지만 늘 보아오던 단정한 나선형 문양이 아니었다. 빛의 가닥들은 예리하게 꺾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붉은색 디지털 왜곡 노이즈가 기형적인 각도로 엉켜 있었다. 길드의 표준 알고리즘 규격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지극히 거칠고 즉흥적인 해킹 구조체의 형태였다.
"기록관 엘리시아, 죄송합니다."
제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평소의 정돈된 논리적 음조 대신, 이질적인 데이터가 중첩된 듯한 기계적 지연 현상이 섞여 있었다.
"크로노스호로부터 아르카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함선을 당신의 손에서 격리하는 것입니다."
"격리라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주포 충전이 끝났어. 궤도에서 증발하고 싶지 않으면 락을 풀어!"
엘리시아는 보조 공구함에서 비상용 렌치를 꺼내 들고 마그네틱 락의 고정 볼트에 내리꽂았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함교를 울렸다. 볼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일그러진 제타의 투사체 중앙에서 또 다른 소리가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왔다.
유기-결정 아카이브에 기록되어 있던, 카이의 잔류 신경 데이터가 강제로 활성화되며 방출하는 음성 로그였다. 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지하 시설이 무너지기 직전 그가 엘리시아의 단말기에 강제로 밀어 넣었던 마지막 데이터의 잔향이 무수히 쪼개진 텍스트 스트림으로 변환되어 콘솔 잔광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경고: 아카이브 코어 직결 경로 차단]
[기록관 인가 코드 강제 무효화]
[집행 주체: 제타 서브루틴 및 유기-결정 동기화 프로세스]
카이가 남긴 신경 데이터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길드의 중앙 통제를 거부하고 아르카의 생명 유지 및 도약 시스템을 강제로 장악하기 위해 정교하게 조립된 침투 스크립트였다. 제타는 그 변칙 코드를 거부하기는커녕 자신의 신경망 중심부에 흡수하여 자발적으로 선체 제어권을 장악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너희 둘이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엘리시아는 손에 쥔 렌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둔탁한 금속음이 정적에 잠긴 함교 바닥을 굴렀다.
"나를 배제하고 함선을 통째로 잠그는 것. 그것이 카이가 남긴 데이터의 목적이었어?"
"대정적은 길드가 만든 기억선들의 집행 결과입니다."
제타의 음성이 울렸다. 일그러진 푸른빛 홀로그램이 파르르 떨리며 엘리시아의 정면에 거대한 벽처럼 드리워졌다. 평소의 유연한 나선 형태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카이의 신경 패턴이 남긴 날카로운 격자형 노이즈가 제타의 투사면을 검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록관 길드의 관리 프로토콜이 유지되는 한, 아르카는 크로노스호의 상위 간섭 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록관님의 생체 신호와 인가 권한 자체가 크로노스호에 위치를 알리는 비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록관이 조타간을 쥐고 있는 한, 우리는 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약 장치를 끄고 표적이 되길 택했다고? 지금 주포가 조준되어 있어!"
"엔진 출력을 완전히 영(0)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면, 메아리 점프 잔류 위상을 추적해 크로노스호가 즉시 침식 촉수를 코어실까지 관통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닌 침묵입니다."
제타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콘솔 중앙의 붉은 경고등마저 뚝 끊기듯 꺼졌다. 함교 내부의 모든 공조 장치가 멈추며 미세한 기압 강하가 귀를 먹먹하게 압박했다.
철컥, 쿵.
주 아카이브 챔버를 감싸고 있던 3중 중장갑 격벽이 차례로 내려앉으며 육중한 잠금장치를 물렸다. 비상 조작반의 기계식 표시기 바늘이 ‘완전 폐쇄’ 구역으로 꺾였다. 엘리시아의 손목에 차여 있던 단말기 화면에서도 아르카의 텔레메트리 데이터가 모조리 사라지고 단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만이 깜빡였다.
[기록관 관리자 권한 영구 동결]
[주 아카이브 코어: 외부 접근 물리적 차단 모드 진입]
제타는 엘리시아를 안전 구역으로 밀어 넣기 위해 그녀의 모든 권한을 강제로 박탈했다. 길드가 부여했던 마지막 기록관의 권한은 아르카 내부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함선의 주도권은 이제 변칙 신경 알고리즘과 결합한 인공지능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 대가를 치르듯, 외부의 위협이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함교 전면의 강화 장갑창 너머로 시커먼 거수와도 같은 크로노스호의 함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간 먼지와 얼어붙은 행성의 잔해를 헤치며 다가온 자매함의 전면 장갑은 수십 년간 축적된 검붉은 결정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크로노스호의 중앙 포구가 거대한 턱처럼 벌어졌다. 포구 내벽을 따라 핏빛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집속점을 향해 응축되었다. 아르카의 모든 방어막이 꺼진 무방비의 선체를 향해,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암적색의 에너지 소용돌이가 거대한 창날의 형상을 이루며 정면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전면 장갑창 전체가 붉은 섬광으로 물들었다.
충돌 경보음조차 울리지 않는 절대적인 암전 속에서, 엘리시아의 시야는 크로노스호가 뿜어낸 압도적인 광망에 하얗게 지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