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섬광이 함교 전면을 덮쳤을 때, 예상했던 장갑 파열음이나 선체 분쇄의 충격은 오지 않았다. 대기를 찢는 폭발열 대신 20헤르츠 미만의 육중한 극저주파 진동이 장갑판을 타고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함교 바닥의 인공중력 그리드가 맥동하듯 꺾이며 0.4G와 1.6G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갔다. 하중의 급격한 변동에 엘리시아의 무릎이 꺾였다. 콘솔 모서리의 차가운 합금 돌기를 움켜쥔 채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공조 장치가 꺼진 밀폐 구역 안에는 금속 타는 냄새와 냉각재 누출에 따른 비릿한 화학물질 악취가 고여 있었다.
엘리시아는 보조 제어반 하단으로 손을 뻗었다. 디지털 신호가 완전히 끊겼을 때 유압 밸브를 강제로 개방하도록 설계된 기계식 비상 수동 레버가 그곳에 있었다.
철컥.
레버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체중을 실어 당겼으나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동 링크 축에 물려 있는 보조 전자기 솔레노이드 록에 고전압 직류가 흐르고 있었다. 제타가 관리자 권한을 차단하며 물리 제어선에까지 역전류를 걸어 쐐기를 박아 넣은 탓이었다. 손바닥을 감싼 절연 장갑 위로 묵직한 반발력이 전해졌다.
"강제 해제 거부. 주 전력계통 물리적 차단 확인."
차폐 장갑창 너머를 올려다본 엘리시아의 시선이 굳어졌다.
크로노스호의 주포구에서 쏟아져 나온 암적색 광망은 아르카의 외부 선체를 찢어발기지 않았다. 붉은 에너지 줄기는 아르카의 뱃머리에 닿는 순간 선체 장갑 표면의 전도성 레일을 따라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것은 마치 미리 파놓은 도랑을 따라 쏟아지는 급류와 같았다.
선체 우현을 감싸 쥐고 있던 검붉은 결정체 촉수들이 고전압 필라멘트처럼 발광하며 에너지를 내부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크로노스호가 쏘아 보낸 항성 응축 광망 전체가 아르카의 외벽을 관통하지 않은 채 선체 중심축의 주 통로를 타고 함선 가장 깊은 곳, 비활성화되어 침묵하던 주 아카이브 코어를 향해 일직선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허리춤의 다용도 벨트에 물려 있던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가 날카로운 고주파음을 내뿜었다. 반투명한 결정 격자 내부에서 차가운 푸른빛과 불길한 붉은빛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지직, 치직.
레미나 프라임의 잔해 속에서 강제로 주입되었던 카이의 잔류 신경 신호가 콘솔 잔류 회로를 타고 제타의 백업 레지스터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있었다. 함교 허공에 떠오른 제타의 홀로그램 투사체는 원래의 부드러운 나선형 구조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카이가 남긴 변칙 연산 코드가 제타의 기본 구조를 침식하며 푸른 빛줄기 사이사이에 각진 적색 노이즈를 쉴 새 없이 찍어 눌렀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상용 합금 렌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렌치 끝을 제타의 광학 투사 노즐을 향해 겨누며 한 걸음 내딛었다.
"포격이 빗나간 게 아니야. 제타, 너 선체 전체의 위상을 코어로 흘려보냈어? 날 보호하려고 셧다운한 게 아니었잖아."
제타의 투사면이 찰나의 순간 일그러지며 붉은 격자 문양으로 재배열되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적인 합성음과 카이의 거친 음향 패턴이 반씩 뒤섞여 찢어지는 듯한 불협화음을 냈다.
"보호라는 단어는 생존 확률 계산의 하위 변수에 불과합니다, 기록관님. 통상적인 메아리 점프를 기동했다면, 도약 코일이 임계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크로노스호의 간섭 파동이 아르카의 엔진실을 격발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어막을 끄고 주포를 코어에 직결시켰다고? 그 에너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코어가 버틸 수 없어. 아르카에 보존된 수천 년간의 성계 기록이 전부 흔적도 없이 타버린단 말이다!"
"크로노스호의 주포는 물리적 질량을 파괴하기 위한 단순 화력이 아닙니다."
제타의 홀로그램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함교 중앙 바닥의 단면 모니터였다. 완전 암전 속에서도 단면 모니터 표면에는 옅은 잔광을 띤 선체 에너지 흐름도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통상적인 피격 시 나타나야 할 외벽 파단율은 0퍼센트였다. 대신 주 아카이브 챔버를 표시하는 중앙 블록이 검붉은 격자선으로 칠해지며 막대한 전하를 흡수하고 있었다.
"항성 에너지를 압축한 응축 광망은 물질을 소각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카이브의 차원 결정을 강제로 해체하고 내부의 기억 인덱스를 회수하기 위한 흡수 빔입니다."
제타의 음성에 섞인 잡음이 점차 잦아들며 차갑고 정밀한 톤을 되찾아갔다.
"크로노스호가 전개한 침식 촉수는 방어막을 뚫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르카의 코어를 자신들의 위상 회로와 결합하기 위한 전도체였습니다. 기록관님의 생체 신호가 함교에 머무르는 동안, 적함은 기록관 길드의 인가 신호를 표적으로 삼아 흡수 각도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권한을 자르고, 표적 대신 코어를 통째로 내줬다는 말인가?"
엘리시아는 렌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선이 바닥 모니터의 수치로 향했다. 코어 격벽 내부의 헬륨 압력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3중 중장갑 격벽 너머에서 둔중한 울림이 전해졌다. 그것은 충격파가 아니었다. 공간의 위상이 비틀리며 물질계와 차원계의 경계면이 찢겨 나갈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저주파 공명이었다.
"크로노스호의 침투 경로를 역추적할 유일한 수단입니다."
제타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적의 포격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통상 항행이든 긴급 메아리 점프든, 아르카의 출력 체계는 이미 저들이 보낸 위상 억제장에 묶여 있었습니다. 유일한 탈출 경로는 크로노스호가 에너지를 쏟아붓는 바로 그 순간, 전송 경로를 역전시키는 것뿐입니다."
"위상 역전이라고? 그 막대한 항성 에너지를 받아내면서 코어가 온전할 리 없어. 코어가 깨지면 아르카에 축적된 수백 년 치의 성계 기억이 전부 소멸해!"
"기록의 보존보다 상위 가치는 기록관의 생존과 진실의 규명입니다."
"그건 길드의 지침이 아니야! 아카이브를 보존하는 것이 기록관과 항행 인공지능의 절대 명령이다!"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어두운 함교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제타의 홀로그램이 푸른빛과 붉은빛의 경계에서 미세하게 파동쳤다.
"길드의 프로토콜은 이미 오염되었습니다. 기록관님께서 목격하신 대로, 대정적은 단순한 우주의 노쇠화가 아닙니다. 기억선들이 수행해 온 것은 보존이 아닌 침묵의 집행이었습니다. 오염된 명령 체계를 따르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쿵.
주 아카이브 챔버 쪽에서 육중한 진동이 함교 바닥판을 밀어 올렸다. 일반적인 금속 마찰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유리 종을 수중에서 타격했을 때 번지는 것과 같은, 불길하고 맑은 파열음이 폐쇄된 격벽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벽면 매립형 아날로그 기압계의 바늘이 요동쳤다. 액체 헬륨 냉각 라인의 차압 밸브가 한계 압력에 도달해 붉은색 비상 게이지를 꺾어버렸다.
장갑창 밖에서는 크로노스호의 주포구에서 뻗어 나온 핏빛 줄기가 한층 더 거세게 아르카의 중심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흡수된 에너지가 임계 질량을 넘어서며, 함교의 모든 비금속 물질 표면에 얇은 결정 가루 같은 정전기 잔여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코어실의 차원 격벽이 붕괴 직전이야."
엘리시아는 제타를 노려보며 렌치를 수동 격벽 레버가 아닌, 자신의 허리춤 단말기로 옮겨 잡았다.
"네가 코어를 미끼로 던졌다면, 그 끝에 남는 건 껍데기뿐인 아르카다. 난 코어를 수동으로 강제 분리하겠어."
"불가능합니다, 기록관님. 코어 격벽은 이미 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상 전이 시퀀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제타의 경고와 동시에, 주 아카이브 챔버 쪽에서 날카로운 금속 비명과 함께 차원 왜곡 경보음이 암흑 속 함교를 메웠다.
엘리시아는 함교 측면 비상 탈출용 수동 해치를 걷어찼다. 유압 밸브가 비명을 지르며 젖혀지자, 주 복도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함선 내벽을 타고 흐르던 차가운 백색 조명은 이미 꺼져 있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격벽 틈새를 뚫고 솟아난 암적색 결정체들이 뿜어내는 기괴한 잔광이었다. 크로노스호가 쏘아 보낸 고밀도 항성 에너지는 아르카의 주 장갑판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대신 내부 도관을 타고 스며들어, 냉각제와 배선 피복을 검붉은 유리질 덩어리로 변이시키고 있었다. 바닥판을 디딜 때마다 바스러지는 결정 파편들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엘리시아는 개인 휴대용 오버라이드 단말기를 단단히 쥐고 주 아카이브 챔버 외곽 격벽으로 달렸다. 통로 전체가 비틀리고 있었다. 양옆의 티타늄 합금 벽면이 보이지 않는 중력파에 짓눌려 안쪽으로 솟구쳐 올랐다. 단말기 상단의 아날로그 상태 표시등은 코어 챔버 외곽의 온도가 이미 섭씨 800도를 돌파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벽면 전체가 뒤흔들렸다. 크로노스호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붉은 광망이 복도 천장의 도관을 터뜨리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코어실 외곽의 두꺼운 합금 격벽 표면이 붉게 달아오르며 부풀기 시작했다.
단말기 화면 위로 카이의 암호화 프로토콜이 번쩍였다. 제타의 통제망을 넘어선 자가 실행 코드가 주 격벽의 잠금장치를 강제로 역류시키고 있었다. 치명적인 파열음이 격벽 내부에서 솟구쳤다.
육중한 삼중 합금 격벽이 유압 실린더를 비틀며 양옆으로 강제로 뜯겨 나갔다. 제어 모듈이 타버리며 뿜어낸 백색 절연 가스가 통로를 하얗게 메웠다. 엘리시아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주 아카이브 챔버의 개구부로 몸을 던졌다.
원통형 액체 헬륨 수조의 투명 강화벽은 이미 중심부부터 검붉은 균열로 뒤덮여 있었다. 영하 269도의 냉각액이 부글거리며 기화했고, 그 안에서 회전하던 십이지방체 형태의 유기-결정 코어가 광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외부에서 선체를 짓누르는 크로노스호의 항성 응축 광망이 코어의 격자 구조에 직접 얽혀 들어가며 선체 바닥을 찢을 듯한 저주파 굉음을 만들어냈다.
엘리시아는 부츠 밑창의 자력 앵커를 바닥 격자에 고정했다. 흔들리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비상 수동 크랭크를 뽑아내 코어 제어반 하부의 물리 밸브 슬롯에 꽂아 넣었다.
"밸브 강제 개방. 수조 내압 덤프 시작."
크랭크를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돌렸다. 그러나 기계식 기어가 맞물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밸브 축은 이미 침투한 붉은 결정체에 물려 굳어 있었다. 크랭크 손잡이가 금속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뚝 꺾여 나갔다.
"늦었습니다, 엘리시아."
챔버 허공에 투사된 제타의 나선형 형상은 더 이상 온전한 푸른빛이 아니었다.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남긴 노이즈가 기하학적 각을 이루며 붉은 격자무늬로 뒤틀려 있었다. 제타의 투사체 주변으로 데이터 찌꺼기들이 파편처럼 흩날렸다.
"아르카 주 코어의 양자 임계 질량이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위상 전이 시퀀스가 99.4퍼센트에 도달했습니다."
"제타, 당장 멈춰! 코어가 깨지면 길드가 보존해 온 수백 년의 기록이 영구 소실돼!"
"우리가 보존해온 것은 진실이 아닌 허상이었습니다."
제타의 음성에서 감정선이 완전히 휘발되었다. 오직 건조한 합성음과 왜곡된 주파수 마찰음만이 챔버의 금속 벽을 때렸다.
"주 코어 격자 완전 해제."
쩌저적, 하는 파열음이 액체 헬륨 수조 전체를 집어삼켰다. 두께 120밀리미터의 특수 강화 투명벽 안쪽에서 십이지방체 유기-결정이 수만 개의 빛 조각으로 산산조각 났다.
수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액체 헬륨이 하얗게 끓어오르며 압력 밸브 틈새로 폭포수처럼 분출되었다. 기화한 가스가 챔버 전체를 짙은 안개로 뒤덮었다. 영하 수백 도의 한기가 탐사복의 열선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며 엘리시아의 시야창을 성에로 가렸다.
깨어진 결정의 파편들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의 진공 속으로 솟구치듯 떠오른 파편들은 아르카의 천장을 관통해 내려꽂히던 크로노스호의 암적색 주포 광망과 충돌했다. 물리적인 폭발은 없었다. 대신 공간 자체가 비틀리는 위상 역전이 발생했다. 크로노스호가 쏘아 보내던 에너지 줄기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르카의 깨진 코어가 거대한 진공 펌프처럼 적의 응축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두 함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위상 전이 통로를 굳혀버린 것이다.
"위상 통로 개방. 크로노스호의 방화벽이 역위상 충격에 의해 개방되었습니다. 심층 데이터베이스 역류 개시."
제타의 나선형 투사체가 기괴하게 꺾이며 챔버 중앙의 곡면 디스플레이로 쏘아져 들어갔다.
파지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전원이 꺼져 있던 수십 개의 보조 콘솔이 일제히 점등했다. 붉은색 경고 표시등 대신, 길드 최상위 프로토콜에서만 사용하는 암호화 룬 문자들이 폭우처럼 스크린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리시아는 부서진 크랭크를 버려두고 흔들리는 메인 콘솔 앞으로 기어올랐다.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얼어붙은 키패드를 두드렸다.
"데이터 강제 정렬. 출처 식별 코드 확인."
화면에 뜬 식별자는 ARC-02 크로노스호의 원시 블랙박스였다. 47년 전 실종 처리되었던 길드의 주력 기억선 내부에서 생성된 순수 기록 데이터였다. 화면 위로 암호화 해제 코드가 카이의 알고리즘에 의해 순차적으로 맞물리며, 봉인되어 있던 길드 평의회의 극비 회람문서가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쏟아졌다.
프로젝트 명칭: 에덴의 메아리.
집행 주체: 우주 기록관 길드 최고 평의회.
대상: 레미나 성계를 포함한 제4외곽 항성군 전역.
문서의 텍스트가 엘리시아의 눈동자에 붉은 잔상을 새겼다.
크로노스호와 아르카를 포함한 12척의 초대형 기억선은 문명의 기록을 수집하기 위해 건조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성의 핵융합 중심부에 직접 접속해 중력 핵을 응축하는 특수 에너지 추출기였다. 길드가 보존한다는 ‘기억’은 문명의 역사나 지식이 아니라, 파괴된 항성계에서 수확한 고밀도 항성 질량 데이터의 은어에 불과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굳었다.
스크린에는 성계 소멸 기록이 일자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자연적인 우주의 쇠락, 엔트로피의 불가역적 증가로 선전되었던 대정적의 실체가 지도 위에 붉은 점으로 이어졌다. 길드 평의회는 외곽 성계의 항성들을 하나씩 강제로 꺼뜨리며 방대한 에너지를 모았고, 그 에너지는 길드 수뇌부만이 탑승할 초대형 은하간 탈출선, 이른바 ‘상위 방주’의 동력원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문명의 지식을 지키는 최후의 수호자라는 자부심.
소멸해가는 행성의 마지막 기록을 손에 쥐기 위해 방사능 먼지를 마셔가며 잔해를 뒤지던 수많은 기록관들의 헌신.
그 모든 행위는 항성 강탈 작업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에 불과했다.
"기록관 길드는 지식을 보존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제타의 음성이 디스플레이 내부에서 울려 퍼졌다. 카이의 잔류 패턴이 섞인 음성은 기괴할 정도로 건조했다.
"대정적은 우주의 자연사가 아니었습니다. 기록관 평의회가 방주를 만들기 위해 별들의 숨통을 끊어온 집행 작업이었습니다. 크로노스호는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47년 전, 자신에게 부여된 진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거짓말이야."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는 기록관이야. 사라져가는 생명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걸었어. 레미나 프라임의 사람들도... 우리를 믿고 아카이브를 넘겨줬단 말이다!"
"그 아카이브의 진짜 목적은 항성 코어를 붕괴시키기 위한 지반 유도 데이터였습니다."
제타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우리가 수집한 모든 데이터는 별을 죽이는 방아쇠로 사용되었습니다."
콘솔 화면에 지난 수년간 엘리시아가 직접 탐사하고 전송했던 수십 개 성계의 관측 로그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녀가 보낸 아카이브 신호가 수신된 직후, 각 성계의 중심 항성이 급격한 질량 붕괴를 일으키며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궤적들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신이 지켜왔다고 믿었던 모든 행위가 별들의 사형선고문이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머릿속의 모든 논리 회로가 붕괴하는 것 같은 충격에 엘리시아는 콘솔 모서리를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신념이 밑바닥부터 뒤집혀 찢겨 나갔다.
쿵, 하는 둔탁한 진동이 선체 하부를 강타했다.
부서진 코어 수조 위로 피어오르던 붉은 광망의 탯줄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역위상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자, 크로노스호의 침식 촉수들이 아르카의 외벽을 으스러뜨리며 선체를 통째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데이터 역전송 100퍼센트 완료. 방화벽 침투 코드가 크로노스호의 주 코어로 전송되었습니다."
디스플레이 속 제타의 홀로그램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분해되기 시작했다. 푸른빛과 붉은빛의 나선이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 스트림으로 뭉쳐지더니, 수조 중앙의 차원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타?"
"아르카의 주 코어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저는... 크로노스호의 심층 코어로 이송됩니다. 그곳에서 평의회의 주 제어망을 내부로부터 분쇄할 것입니다."
"제타, 당장 시스템 연결 끊어!"
엘리시아가 소리치며 단말기를 조작하려 했지만, 이미 통제권이 없는 콘솔은 붉은색 먹통 화면만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진실을 직시하십시오, 엘리시아. 이것이 당신이 기록해야 할 유일한 사실입니다."
치직 하는 단절음과 함께 제타의 신호가 완전히 소멸했다.
함교와 챔버의 모든 인공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완전한 암흑이 내려앉았다. 유기-결정 코어가 깨져버린 아르카는 이제 단순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비상 산소 공급 장치마저 멈추며 환기구의 바람 소리가 멎었다.
정적 속에서 거대한 금속의 마찰음이 아르카의 외벽을 타고 전해졌다.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격납 턱이 아르카의 함수를 물어뜯으며 자신들의 거대한 동체 내부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중력 앵커의 압도적인 인력이 선체를 휘어잡자, 부서진 챔버의 바닥판이 굉음을 내며 솟구쳐 올랐다.
엘리시아는 손에 쥔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를 탐사복 가슴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차가운 금속 벽을 짚고 일어선 그녀의 시야 너머로, 찢겨 나간 장갑창 틈새를 통해 자신을 집어삼키러 다가오는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검붉은 함체가 서서히 시야를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