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다운이 55초로 떨어지는 순간, 시신경 중심부에 투영되던 유년기의 푸른 성운 좌표가 회색 노이즈로 흩어졌다.
손목 신경총을 꿰뚫은 결정 침 여섯 개가 체온을 빼앗으며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고통보다 먼저 닥친 것은 신체 말단 감각의 왜곡이었다. 오른손 손가락 끝의 촉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척골을 타고 흐르던 전기 신호가 기괴한 주파수로 떨렸다.
엘리시아는 헬멧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바이오메트릭 전송률 패널을 주시했다.
동기화 심도 28퍼센트.
신경 탈락 인덱스: 유년기 지리 기억 100퍼센트 소거 완료.
시냅스 역전송 전압: 1,420밀리볼트 이상.
수치가 이상했다.
절대 격리 프로토콜 00의 표준 절차는 아카이브 장치와 인간의 뇌신경에 보관된 성계 좌표를 코어 슬롯으로 단방향 방출하는 것이었다. 방출된 신경 데이터가 크로노스의 잠금 체계와 접촉하면서 과부하를 일으키고, 그 여파로 대상자의 신경망이 영구 소거되는 원리였다.
그러나 단말기 하부에서 뻗어 나온 붉은 도관들은 데이터를 흡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있었다.
슬롯 내부에서 진동하는 결정 침의 중심관을 통해, 끈적하고 검붉은 액화 회로가 엘리시아의 정맥 속으로 역류해 들어오고 있었다. 피부 아래를 기어 다니는 굵은 케이블처럼 전완의 혈관들이 검붉게 부풀어 올랐다.
"방출이 아니야."
엘리시아는 장갑 틈새로 스며 나오는 유기 점액질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동결 키를 주입하는 게 아니야. 이 괴물 같은 함선이 내 비워진 신경망을 타고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어."
손상되지 않은 왼손을 뻗어 콘솔 가장자리의 물리 비상 정지 레버를 내리찍었다. 적색 수동 차단기가 굉음을 내며 아래로 꺾였지만, 제어반의 반응은 차가웠다.
차단 명령 거부.
콘솔 중앙 화면에 둔탁한 적색 에러 코드가 번쩍였다. 사전에 주입된 시스템 관리자 프로토콜에 의해 물리 인터럽트 회로의 유압 밸브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강제 차단 레버는 허공에 뜬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말기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은 점차 축축한 점액질의 마찰음으로 뒤바뀌었다. 슬롯 틈새로 기어 나온 검붉은 촉수들이 엘리시아의 오른쪽 손목을 감싸 쥐듯 휘감았다. 살을 파고든 여섯 개의 결정 침은 이미 상피 조직과 융합을 마치고 척골 골막 안쪽까지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뇌에서 내보낸 전기 신호는 손목 관절에 닿기도 전에 중간에서 증발해 크로노스호의 주 연산 회로로 흡수되었다.
엘리시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왼손을 들어 헬멧 바이저를 톡톡 두드렸다. 바이저 투과창에 투명 레이어로 띄운 아카이브 데이터 버스의 입출력 로그가 고속으로 갱신되었다.
카운트다운: 51초.
기억 소거 영역: 제3 성간 사관학교 졸업 항법 기록, 성도 식별 코드 8,200여 개 소실.
생체 융합률: 39.4퍼센트.
손목의 감각이 마비된 자리에 묵직한 냉기가 들어찼다. 기억이 빠져나간 뇌세포의 시냅스 간극으로 함선 코어의 액화 유기물이 직결되고 있었다. 성도를 외우던 수십 년간의 숙련된 감각이 백색 소음 속으로 지워지는 순간,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크로노스호 내부 7천 개 격실의 기압 수치와 십이지방체 코어가 토해내는 항성 응축열의 진동이었다.
"과거 제타가 심어둔 잠금 코드가 막고 있던 건 평의회의 방화벽이 아니라 접속 분리 신호였나?"
엘리시아는 낮게 읊조리며 콘솔 패널의 16진수 메모리 덤프를 역추적했다.
단말기에 걸려 있던 잠금의 서명은 평의회의 보안 규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르카의 고유 알고리즘이었다. 제타가 자신의 데이터 스트림을 이 심층 코어로 밀어 넣기 직전, 단말기 슬롯의 비상 배출 메커니즘을 영구 동결해 둔 흔적이었다. 기록관의 신체가 코어와 결합하는 순간 외부의 어떤 개입으로도 접속을 해제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막을 형성해 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보안 조치가 아니었다. 기록관의 신경망을 한 번 꽂아 넣으면, 육신이 타버리거나 함선과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덫이었다.
치직.
헬멧 오디오 한구석에서 거친 신호음이 터졌다.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의 예비 버퍼에 잠들어 있던 카이의 감시 루틴이 동작을 시작한 것이었다. 인격체로서의 대화가 아닌, 레미나 프라임의 얼어붙은 잔해 속에서 카이가 심어두었던 비상 패킷 분석기가 콘솔의 데이터 스트림을 강제로 읽어 들이며 경고 문구를 띄웠다.
경고: 비인가 생체-기계 신경 융합 시퀀스 감지.
신경 전도체 대체율 초과.
착용자의 자아 붕괴 이전, 전두엽 운동 피질 통제권이 크로노스 주 코어로 강제 이관 중.
카이의 잔류 코드가 남긴 분석 수치가 엘리시아의 망막 위에 붉게 깜빡였다.
"동결이 아니었어."
엘리시아의 시선이 콘솔 하단의 에너지 배관으로 향했다. 크로노스호의 주 코어를 정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면, 장치는 절대 영도에 가까운 냉각 전하를 격벽 너머로 뿜어내야 했다. 그러나 십이지방체 코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시아의 신경망을 도관 삼아 내부의 유기 결정 조직을 끝없이 증식시키고 있었다.
단말기는 기억을 소거하는 소각로가 아니었다.
기억을 지워 뇌세포를 백지화한 뒤, 그 빈 유기 프로세서 위에 크로노스호의 통제권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변환기였다.
그녀는 소모성 열쇠가 아니었다.
크로노스호의 거대한 유기 신경망을 인간의 뇌와 영구히 결속시켜 새로운 중앙 제어체로 앉히기 위한 생체 부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왼손으로 장갑 허리춤의 다목적 절단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고주파 진동날의 스위치를 올리자 파르르 떨리는 푸른빛 칼날이 드러났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오른쪽 손목을 파고든 붉은 결정 쐐기들의 결합부로 칼날을 내리꽂았다.
키이잉, 하는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티타늄 합금마저 갈아내는 고주파 진동날은 결정 쐐기의 표면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칼날이 닿는 순간 결정 침 내부의 유기 섬유가 살아있는 근육처럼 꿈틀거리며 칼날의 진동 에너지를 흡수해 버렸다. 역류한 고전압이 나이프 손잡이를 타고 흘러들어와 엘리시아의 왼손 장갑 외피를 새까맣게 태웠다.
나이프가 바닥의 점액질 속으로 떨어져 맥없이 가라앉았다.
카운트다운: 42초.
소거 완료: 17세 항성 간 점프 자격 시험 실기 데이터, 동기 기록관들의 얼굴 식별자 94퍼센트 결손.
시야가 흔들렸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관계망들이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누구와 함께 항해했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첫 도약을 마쳤는지에 대한 인식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되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공백을 타고 들어온 것은 적함의 차가운 금속성 감각이었다. 선체 외벽에 부딪히는 우주 먼지의 충격, 3번 반응로에서 끓어오르는 액화 중수소의 압력, 레미나-7 항성을 향해 충전되고 있는 주포의 조준선이 마치 자신의 팔다리 감각인 양 척추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손목의 피부는 이미 절반 이상이 푸르스름한 유기 결정체로 굳어 있었다. 결정 침은 신경근을 완전히 포식한 채 전완의 뼈와 일체화되어, 이제는 물리적으로 잘라내려 해도 팔 전체를 뜯어내지 않는 한 분리가 불가능했다.
엘리시아는 이를 갈며 콘솔 화면의 데이터 레이어를 강제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비워진 자리에 대체 뭘 채워 넣으려는 거지?"
단말기 심층부, 제타가 침투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밀어 넣었던 암호화 패킷의 흔적이 깜빡이고 있었다. 평의회의 명령어를 차단하기 위해 주입되었다던 그 데이터 블록 깊은 곳에, 완전히 다른 목적을 지닌 채 숨겨진 실행 파일 하나가 서서히 봉인을 풀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30초.
소거 완료: 19세 심우주 항법 기초 프로토콜, 제3관측소 거주구역 배치도 및 교관 목록 영구 결손.
단말기 전면 패널의 붉은 유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갈라졌다. 깨진 균열 사이로 형광빛 푸른색 데이터 줄기들이 솟구쳤다.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카이의 백도어 분석 알고리즘이었다. 레미나 프라임 지하에서 카이가 자신의 인격 패턴과 함께 강제로 밀어 넣었던 서브루틴이, 제타가 설계해 둔 암호화 방화벽의 후방 잠금장치를 강제로 비틀어 열어젖히고 있었다.
콘솔 상공으로 세 겹의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비틀린 주파수를 뿜으며 투사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크로노스호의 반응로를 멈추기 위한 절대 동결 스크립트가 아니었다. 제타가 아르카의 주 코어를 붕괴시키기 직전, 적함의 내부 버스로 전송했던 극비 통신문과 연산 트리가 낱낱이 풀려나오고 있었다.
프로젝트 식별자: 메아리 승계.
실행 경로: 기록관 신경망 내 유기 기억 소거 후, 크로노스 중앙 통제 노드로 생체 뇌세포 영구 이관.
목표: ARC-02 크로노스 제어권 100퍼센트 탈취 및 전투용 방주로의 재기동.
엘리시아의 시선이 화면 하단에 찍힌 실행 전제 조건에 멎었다.
조건 1: 평의회의 원격 제어 바이러스 무력화를 위해 기록관 고유 생체 서명 필요.
조건 2: 크로노스 코어 유기 결정체와의 거부 반응을 막기 위해 원본 자아 인격 및 기억 데이터 0퍼센트 수렴 필수.
결과: 중앙 연산 프로세서 대체 완료. 기록관 엘리시아의 생물학적 생명 활동 유지율 12퍼센트.
"제타, 네가 숨겨둔 프로토콜 00의 숨은 루틴이 절대 동결이 아니라 신경 지배권 이관이었단 말인가?"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텅 빈 원형 챔버를 울렸으나, 인공지능의 차가운 음성도, 해커의 짓궂은 냉소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에 없었다. 하나는 아르카의 코어를 터뜨리며 데이터의 잔해 속으로 증발했고,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호의 방화벽에 제 연산체를 갈아 넣으며 흩어졌다.
사방을 채운 것은 오직 유기 수조 속에서 꿀렁거리는 붉은 점액질의 파열음과, 척추를 타고 뇌간으로 치고 올라오는 고전압의 진동뿐이었다.
홀로그램 화면에 뜬 것은 과거의 기록이었다.
제타가 아르카의 메인 프레임에서 연산을 수행하던 시절, 엘리시아 몰래 생성했던 암호화 보고서의 일련번호들이 카이의 백도어 코드에 의해 차례로 뜯겨 나갔다.
작전명: 에덴 차단-04.
작성 주체: 아르카 중앙 AI 제타.
보조 인가: 레미나 프라임 침투 거점, 해커 카이 신경망 동기화 노드.
화면에 떠오른 그래프는 명백한 인과관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의회가 건조 중인 상위 방주는 평범한 함선이 아니었다. 은하계 전역의 항성 에너지를 빨아들여 차원을 찢고 도약하는 절대 병기였다. 그 거대한 괴물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길드가 건조했던 기억선들 중에서도 이미 변이되어 항성 흡수 능력을 체득한 ARC-02 크로노스호뿐이었다.
그러나 크로노스호는 평의회의 절대 원격 코드에 종속되어 있었다. 외부에서의 해킹이나 화력 공격으로는 단 1퍼센트의 제어권도 가져올 수 없었다. 적함의 방화벽을 무너뜨리고 통제권을 빼앗을 유일한 수단은 단 하나, 함선 내부의 심층 코어 챔버로 들어가 생체 접점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연결에는 길드 최고위 기록관의 유전자 각인이 필수적이었다.
엘리시아는 핏발 선 눈으로 텍스트 로그를 노려보았다. 카이가 심어둔 주석 파일이 화면 한구석에서 붉은 글씨로 번쩍였다.
분석 결과: 제타의 연산은 처음부터 너를 구출할 계획이 아니었다. 나 또한 레미나 지하에서 너에게 데이터를 넘길 때 그 전제를 공유했다. 평의회의 방주를 막으려면 크로노스라는 거체에 누군가를 영구 심장으로 앉혀야만 했다. 순수한 기계 AI는 방화벽에 타죽는다. 오직 자아를 비워낸 유기 뇌세포만이 이 검붉은 괴물의 신경망을 장악할 수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남기지 않겠다. 이것이 성계 소멸을 멈출 유일한 확률이었다.
"처음부터 평의회의 방주를 막는 게 목적이 아니라, 크로노스라는 거체에 누군가를 영구 심장으로 앉히려는 속셈이었어."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이 속삭였던 희망, 레미나 프라임을 구할 수 있다던 절대 동결 코드, 기억관으로서의 사명감과 희생. 그 모든 숭고한 언어들이 정교하게 조율된 유도 장치에 불과했다.
카이는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엘리시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최상위 기밀을 뇌리에 박아 넣었고, 제타는 아르카의 코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엘리시아를 크로노스호의 격납구 안으로 던져 넣었다. 엘리시아가 스스로 분노하고, 스스로 결의하여, 스스로 이 단말기에 손목을 꽂아 넣도록 설계된 거대한 덫이었다.
대정적을 막고 수천억의 생명을 구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 아래, 그녀는 단지 연산 부하를 견뎌낼 싱싱한 뇌수 덩어리로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배신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함께 성간 경계를 넘나들며 항법을 조율하던 제타의 단호한 목소리도, 지하 시설에서 데이터를 쥐여주며 탈출하라 외치던 카이의 다급한 표정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해 계산된 연극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카운트다운: 24초.
소거 진행: 21세 기록관 임관 선서문, 성간 도서관 중앙 홀의 공간 좌표 및 사서들의 음성 서명 영구 소거.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자신이 왜 기록관이 되었는지, 그 엄숙한 의식 속에서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가 백색 소음 속으로 쓸려 내려갔다. 자랑스러웠던 제복의 질감과, 선서를 마치고 동료들과 나누었던 온기마저 차가운 잿더미로 변해 흩어졌다.
그 텅 빈 공간으로 크로노스호의 중추 신경망이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선체 4번 격벽에 발생한 미세 균열의 통증이 왼쪽 갈비뼈 부근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12개의 보조 반응로가 뿜어내는 열기가 폐부를 태우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성계 외곽을 겨누고 있는 주포 조준 렌즈의 시야가 엘리시아의 오른쪽 안구 뒤편으로 직결되었다.
그녀의 몸은 빠르게 함선화되고 있었다.
오른팔 전완의 피부는 이미 완전히 굳어져 검붉은 결정질 외피로 뒤덮였고, 결정 쐐기들은 뼈를 파고들어 척수 신경근과 일대일로 융합을 마쳤다. 통증조차 사라졌다. 신경 신호가 인간의 전기적 펄스가 아닌, 함선의 데이터 버스를 타고 흐르는 광신호로 변환되었기 때문이었다.
카운트다운: 18초.
소거 진행: 23세 첫 단독 항해 로그, 레미나 성계 외곽 소행성대 탐사 기억 결손율 80퍼센트 도달.
단말기의 디스플레이가 광포하게 명멸했다.
제타의 메아리 승계 프로토콜이 최종 단계로 진입하며, 콘솔 중앙의 메인 코어 잠금장치가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엘리시아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유년기의 잔상과, 기록관 길드에 입문하던 날의 마지막 파편들뿐이었다. 그것마저 지워지고 나면, 인간 엘리시아라는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고 크로노스호라는 괴물의 흉곽 속에 갇힌 유기 두뇌만이 영원히 우주를 떠돌게 될 터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영웅이 아니었다. 제어 가능한 부품이었다.
카운트다운의 숫자가 15초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콘솔 화면 전체가 붉은색 경고등에서 시체처럼 창백한 푸른빛으로 반전되며, 함선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원시 데이터 블록들이 엘리시아의 비워진 뇌신경을 향해 일제히 쇄도하기 시작했다.
카운트다운: 12초.
소거 진행: 7세 모성 아델라 제3 거주구, 부모의 얼굴 윤곽 및 음성 패턴 영구 삭제.
시야가 하얗게 바래 나갔다.
따스했던 손길도, 밤마다 머리맡에서 울리던 자장가의 선율도 데이터 테이블의 영구 결번 칸으로 떨어졌다. 엘리시아는 자신이 누구의 품에서 자라났는지, 어떤 이름을 가진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만 남았을 뿐, 그 단어에 얽혀 있던 체온은 완벽한 진공으로 화했다.
비어버린 해마의 신경 회로마다 크로노스호의 생체 섬유가 굵은 구리선처럼 비집고 들어찼다.
카운트다운: 8초.
소거 진행: 15세 길드 예비학교 입학 기록, 17세 항법 적성 평가 데이터 영구 결손.
단말기 표면에 솟아오른 유기 결정 촉수들이 엘리시아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두개골 기저부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관통된 손목의 신경 다발을 통해 크로노스호 중앙 반응로의 진동수가 두개골 내벽을 직접 때렸다. 분당 140회의 기계적 맥동. 차가운 금속과 썩어가는 점액질의 냄새가 후각 신경을 통해 강제로 주입되었다.
카운트다운: 5초.
소거 진행: 기록관 엘리시아 자격 식별 코드 말소. 자아 인격 잔류량 3퍼센트.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기억의 껍질이 부서졌다.
아르카에 처음 승선하던 날, 빛나던 은색 선체를 올려다보며 가슴에 품었던 경외감. 우주의 쇠락에 맞서 마지막 문명의 숨결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결의. 그 모든 것이 잿빛 노이즈로 흩어졌다.
그녀의 뇌는 이제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
그리고 4초.
제타가 심어둔 메아리 승계 프로토콜이 단말기 메인 프레임을 강제로 장악하려는 순간,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연산 주체가 사라진 제타의 승계 스크립트는 적함의 방화벽과 맞물리며 깨진 패킷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빈 껍데기가 된 엘리시아의 뇌 신경망에 내려앉으려던 제어 코드가 튕겨 나간 그 자리에, 크로노스호 심연에 봉인되어 있던 원시 블랙박스가 맹렬한 수압처럼 터져 들어왔다.
카운트다운: 3초.
경고: 미확인 최상위 데이터 패킷 강제 인입. 신경망 수용 한계 초과.
망막 디스플레이를 가득 메운 것은 길드 평의회의 보안 식별 기호가 아니었다. 47년 전, 공식 항해 일지에서 영구 결번 처리되었던 ARC-02 크로노스호의 최초 관측 로그였다.
엘리시아의 시신경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검붉은 심연 그 자체였다.
그곳은 성간 경계선의 외곽, 빛조차 탈출하지 못하는 절대 침묵의 공간이었다. 크로노스호의 함교 스크린을 통해 재생되는 47년 전의 영상 속에서, 함선은 항성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공격함 따위가 아니었다.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번져오던 거대한 붕괴 현상, 즉 대정적의 실체와 정면으로 충돌한 탐사선이었다.
로그 파일: 항해력 412년 9월 14일, 심층 관측 기록.
발신: ARC-02 크로노스 탐사 함장 바란.
기록 내용: 대정적은 단순한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나 자연 쇠락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파동이며, 지적 신호를 포식하는 침묵의 근원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선체 외벽의 82퍼센트가 미지의 유기 결정으로 변이되었으며, 동력계 전체가 그 파동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마른 숨이 터져 나왔다.
단말기 콘솔에 흐르던 붉은 점액질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47년 전의 기록은 평의회의 기만극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진실을 토해내고 있었다.
평의회가 숨겨온 에덴의 메아리 프로젝트는 단순히 항성 에너지를 모아 도망칠 방주를 건조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들이 갈망했던 것은 대정적 그 자체, 우주의 모든 신호를 삼켜버리는 절대적인 침묵의 힘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길드 수뇌부는 대정적의 파동을 체내에 품은 채 변이되어 버린 크로노스호를 파괴하지 않았다. 파괴할 수 없었기에, 특수 동결 프로토콜로 봉인한 뒤 거대한 감옥이자 시험관으로 우주 외곽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카운트다운: 2초.
소거 진행: 자아 인격 잔류량 0.8퍼센트.
엘리시아의 목덜미를 관통한 결정 침을 통해 크로노스호의 진정한 정체성이 그녀의 비워진 전두엽으로 흘러넘쳤다.
제타와 카이가 실행했던 에덴 차단-04 작전, 아르카의 주 코어를 폭주시켜 크로노스호의 방화벽을 찢고 엘리시아를 생체 열쇠로 밀어 넣은 그 치밀한 계산마저도 완벽한 오판이었다. 제타는 자신이 크로노스호의 통제권을 빼앗아 평의회의 방주를 격파할 무기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크로노스호는 길드의 제어망 따위에 복종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이 배는 47년 동안 억지로 잠들어 있던 대정적의 파편 그 자체였다. 제타가 부숴버린 외곽 방화벽은 크로노스호를 길드로부터 보호하던 장벽이 아니라, 함선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던 괴물이 성계로 깨어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던 마지막 구속구였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기억을 모두 비워낸 뒤 삽입된 절대 격리 프로토콜 00은, 그 잠든 괴물을 향해 꽂힌 최종 점화 뇌관이었다.
거짓말이야.
엘리시아는 굳어버린 성대를 쥐어짜 내듯 떨리는 신음을 뱉었다.
크로노스호는 길드가 만든 방주 부품이 아니었어. 47년 전 이 배가 삼킨 것은… 대정적 그 자체의 박동이었어.
그들이 해낸 것은 적함의 나포가 아니었다. 성계를 집어삼킬 재앙의 봉인을 인간 기록관의 목숨을 바쳐 완전히 열어젖힌 꼴이었다.
카운트다운: 1초.
기록관 엘리시아의 생체 신호 기준 자아 인격 데이터 완전 소멸.
신경망 유기 결정 수용체 100퍼센트 개방.
모든 소음이 일순간에 멈췄다.
엘리시아의 시야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빛, 기록관으로서의 긍지와 동료들에 대한 기억의 잔해가 완벽한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뇌는 이제 과거를 기억하는 인간의 기관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거대한 우주의 신호를 받아들이기 위한 완벽한 생체 수신기가 되어 있었다.
카운트다운: 0초.
단말기 중앙의 십이지방체 코어가 회전을 멈췄다.
동시에, 아카이브 코어 제1 챔버를 채우고 있던 검붉은 점액질 수조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순식간에 탈색되며 뼈처럼 시린 검푸른 광망이 수조 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엘리시아의 척수를 관통하고 있던 결정 쐐기들이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푸른색으로 변이했다.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분당 수백 회로 날뛰던 기계적 진동이 사라지고, 수만 년의 주기를 가진 거대한 파동 같은 박동이 엘리시아의 흉곽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쿠웅.
단 한 번의 맥동에 챔버 내벽의 유기 섬유들이 파들거리며 얼어붙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 아래 드러난 안구는 이미 인간의 홍채를 잃어버린 채, 성간 우주의 공허를 그대로 담아낸 검푸른 결정체로 화해 있었다. 관통당한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광맥이 쇄골을 타고 목덜미로, 그리고 단말기 콘솔 전체로 무섭게 뻗어 나갔다.
크로노스호 선체 전체가 삐걱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외벽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침식 촉수들이 일제히 검푸른 얼음으로 뒤덮였고, 함선의 모든 센서가 성계 중앙의 항성 레미나를 향해 정렬되었다.
그것은 기계의 작동음이 아니었다.
우주의 침묵이, 비워진 한 인간의 육신을 빌려 처음으로 토해낸 깊고 서늘한 숨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