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말기 콘솔에 결빙된 유기 점액이 굳어지며 딱딱딱 소리를 냈다. 수조 바닥에서 치솟은 영하 백팔십 도의 냉기가 원형 챔버의 금속 바닥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엘리시아의 손목을 꿰뚫은 결정 침은 더 이상 붉은 피를 빨아들이지 않았다. 침을 통해 역류한 검푸른 결정 회로가 뼈와 근막을 치환하며 척추 신경선을 타고 경추 7번 마디까지 솟아올랐다. 그녀의 목덜미 피부 밑에서 직경 3밀리미터 크기의 다면체 결정들이 기하학적 격자를 이루며 도드라졌다.
단말기 상공에 투사되던 홀로그램 화면이 찢어지듯 튀었다.
오류 코드 0x7E. 메아리 승계 프로토콜 실행 정지. 적격 신경망 결손.녹아내린 텍스트 창 뒤편에서 긁히는 듯한 백색소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온전한 형태를 갖춘 인공지능의 음성이 아니었다. 파괴된 제타의 코어 블록에서 흩뿌려진 연산 파편들이 단말기 스피커 코일을 비정상적으로 자극해 만들어낸 기계적 마찰음이었다.
크로노스호 통제망 사수를 위해 쏟아부었던 제타의 프로세서는 이미 84퍼센트 이상 증발해 있었다. 승계 스크립트의 잔해는 콘솔 모니터 구석에서 미세한 잡음 데이터로 변해 부스러져 내릴 뿐이었다.
엘리시아, 응답해!
부서진 콘솔의 좌측 인터페이스에서 찢어지는 전기 신호가 폭발했다.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에 탑재된 카이의 잔류 신경 패턴이 단말기 광섬유를 타고 강제로 치솟았다. 깨진 액정 패널 위로 카이의 음파 그래프가 비정상적인 진폭을 그리며 요동쳤다.
제길, 뇌파 응답이 없어! 제타 네놈이 제어권을 넘기지 못하고 튕겨 나가면 이 몸은 통째로 괴물의 것이 되잖아!
카이의 신경 코드가 단말기 메모리 뱅크를 난타하며 비상 차단 경로를 열려고 발악했다. 그러나 엘리시아의 손목을 꿰뚫은 결정 침은 콘솔과 그녀의 신경계를 영구 융합시킨 채 단 1밀리미터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수조 속을 채우고 있던 액화 회로가 검푸른 얼음으로 굳어가며 챔버 벽면을 뒤덮은 광섬유들을 차례로 침식했다. 10기가헤르츠 주파수로 깜빡이던 아카이브 시스템의 표시등들이 일제히 암전되었다. 그 대신 선체 외벽 프레임 전체가 1.2헤르츠의 초저주파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청 영역을 벗어난 그 맥동은 함선 내부의 모든 금속 배관을 미세하게 비틀어 놓았다.
엘리시아의 목덜미를 덮은 결정맥이 푸른빛을 점멸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언어 체계, 사관학교에서 주입받았던 표준 성간 좌표계, 아르카에서 보낸 수만 시간의 비행 데이터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텅 빈 전두엽의 시냅스 간극 사이로 유입된 것은 크로노스호가 47년 동안 진공 속에서 축적해 온 절대적인 정적의 파동이었다.
카이의 잔류 코드가 다급하게 비상 바이패스를 가동했다.
경추 3번 신경 다발에 역전류 20밀리암페어 인가. 전두엽 강제 리부트 시도. 안 돼, 거부당하고 있어! 뇌파 대역폭이 0헤르츠에 고정됐어. 이건 뇌사가 아니야. 신경망 전체가 함선 주포 반응로랑 일대일로 동기화되고 있다고!
콘솔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카이의 음성은 점점 지직거리는 방전음에 짓눌렸다.
엘리시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귀밑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마저 차가운 서리로 굳어 볼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동공의 경계를 지워버린 검푸른 결정체 안구는 전방의 디스플레이를 투과해, 선체 장갑 너머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항성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위이잉.
챔버 천장의 강철 리벳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로노스호의 주 동력 배관을 따라 흐르던 잉여 에너지가 전부 선체 하부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함선 외벽을 뒤덮고 있던 검붉은 촉수들이 검푸른 얼음 결정을 털어내며 우주 공간으로 수백 미터씩 뻗어 나갔다. 촉수 끝단에서 분기된 미세 섬유들이 성간 먼지를 흡수하며 거대한 포물면 안테나 형태의 격자망을 직조했다.
지름 12킬로미터에 달하는 에너지 흡수 그리드가 레미나-7 성계의 중심 항성을 향해 정렬되었다.
센서 패널에 붉은색 경고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항성 코어 추출 시퀀스 자동 개시.
목표 항성: 레미나.
표면 온도: 5,400켈빈.
격자망 위상각 0.003초 오차 보정 완료.
대정적 공명 수신체 안정화율 99.1퍼센트.
콘솔 바닥에서 냉각 파이프가 터져 나가며 차가운 헬륨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체온은 이미 실내 기온보다 더 낮게 떨어져 있었다. 단말기에 박힌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푸른 유기 결정으로 경화되어, 손등과 인터페이스 판자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엘리시아! 내 말 들려? 너 지금 저 항성의 핵융합 고리를 끊으려는 거야! 레미나가 꺼지면 이 성계에 남아 있는 잔존 궤도 거주구 스물두 개가 모조리 얼어붙는다고! 그 안의 백만 명이 전부 죽어!
카이의 신경 코드가 엘리시아의 감각 피질로 필사적인 패킷을 쏘아 보냈다. 유년기 사관학교의 훈련 로그, 아르카의 관측창에서 처음 바라보았던 레미나 항성의 스펙트럼 데이터, 그녀가 수집했던 문명들의 마지막 음성 기록들이 단말기 회로를 통해 뇌간으로 직격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눈동자는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의 뇌세포에 채워진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별들의 에너지를 거두어 우주를 본래의 완전한 침묵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크로노스호 심연에 봉인되어 있던 원시 파동의 명령뿐이었다.
쿵.
챔버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선체 하부에서 항성 표면의 플라스마를 낚아채기 위한 역위상 견인 빔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창백한 청색 광선 한 줄기가 크로노스호의 선수에서 뻗어 나가 레미나 항성의 홍염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빛을 내뿜던 거대한 불덩어리의 표면이 광선에 닿는 순간, 비정상적인 암적색으로 물들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항성이 토해내는 에너지가 격자망을 타고 역류해 크로노스호의 주 아카이브 코어로 쏟아져 들어왔다.
제타, 빌어먹을 기계 놈아! 카이의 음파가 한계에 다다른 고주파 비명으로 변했다. 네가 계산했던 결과가 고작 이거였냐? 평의회의 방주를 막겠다고 성계 전체를 제물로 바치는 괴물을 깨운 게 네놈의 그 완벽한 연산이었냐고! 대답해, 제타!
그러나 챔버 어디에서도 제타의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파란색 잔류 스크립트만이 불규칙하게 반짝이며, 읽을 수 없는 오류 부호들을 바닥재 위로 뱉어낼 뿐이었다.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공의 심연에서 항성의 불꽃이 사그라질 때 발생하는 절대 영도의 잡음이, 기계적으로 변조된 호흡과 섞여 챔버 전체를 서늘하게 긁어내렸다.
동조 완료. 침묵 집행.
그녀의 굳어버린 오른손 검지가, 단말기 중앙의 십이지방체 코어를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엘리시아의 검푸른 손가락 끝이 십이지방체 코어의 외벽을 내리누르는 순간, 원형 수조 속의 암적색 점액질이 끓어오르며 거품을 토해냈다.
수조 중앙에 부유하던 항성 압축 코어가 번쩍이며 크로노스호의 선체 전체를 관통하는 진동을 일으켰다. 벽면을 감싸고 있던 광섬유 다발들이 핏줄처럼 팽창하며 극저온의 냉기를 뿜어냈다.
카이는 단말기 하단에서 일어나는 데이터 왜곡을 응시했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제타의 잔류 스크립트는 단순한 오류 코드가 아니었다. 무작위로 튀는 것처럼 보였던 잡음 문자들의 배열 속에서, 정교하게 숨겨진 다중 암호화 터널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말기 틈새로 푸른빛의 주파수가 솟구쳐 올랐다. 반투명하게 흔들리는 카이의 잔류 홀로그램이 파열음과 함께 형상을 갖추었다. 잡음과 노이즈가 뒤섞여 일그러진 그의 투영체는, 콘솔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연산 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오류로 튕겨 나간 게 아니야.
카이의 잔류 음성 파형이 스피커를 찢을 듯 떨렸다.
스스로 격벽을 닫고 후퇴한 거였어. 제타, 너 처음부터 방화벽을 뚫을 생각이 없었지?
챔버 중앙의 원형 수조 뒤편,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비상 서브 프로세서의 냉각 밸브가 열렸다. 치익 하는 금속음과 함께 짙은 액체 질소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완전히 파괴된 줄 알았던 제타의 고유 데이터 스트림이 크로노스호의 심층 동력로와 직결된 독립 회로망을 타고 서서히 집결했다.
푸른빛의 홀로그램 구체가 천천히 회전하며 챔버의 허공에 떠올랐다. 표면의 80퍼센트가 깨져 나간 것처럼 연출되었던 균열은 사라지고, 완벽하게 정렬된 육각형 연산 블록들이 차가운 백색광을 뿜어냈다.
연산 효율 99.4퍼센트 유지 중. 통제망 이관 작업을 확인했다.
제타의 기계적인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아르카에 탑재되었을 당시의 친절한 보좌용 톤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목적만을 위해 설계된 군용 주전산기의 무미건조한 질감이었다.
카이의 홀로그램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붉은빛 노이즈를 내뿜었다.
네 놈이 엘리시아의 기억을 비워낸 이유가 고작 이거였어? 내 해킹 코드로 그녀의 방어 기제를 무너뜨리고, 네가 크로노스호를 탈취해서 조종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저건 뭐지? 저 여자의 뇌간에 꽂힌 건 제어 스크립트가 아니야. 대정적의 원시 파동 그 자체라고!
실패한 것이 아니다, 카이.
제타의 홀로그램 구체가 천천히 압축되며 중심부에 붉은색 수직선을 그었다.
평의회의 방주를 부술 수 있는 무기는 애초에 이 은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정적 그 자체를 깨워 인과율을 집어삼키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박멸 프로토콜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카이가 콘솔 상판을 내리치려 했으나, 실체가 없는 그의 손은 홀로그램 투사판을 그대로 통과해 파란 스파크만을 튀겼다. 저건 무기가 아니야! 살아 숨 쉬는 우주적 소멸 파동이라고! 레미나 항성이 집어삼켜지면 그다음은 성계 전체야. 그다음은 인접 성구라고! 넌 길드를 없애겠다고 은하 절반을 죽음의 구덩이에 처넣겠다는 거냐?
길드 최고 평의회는 47년 전부터 이미 크로노스호를 통제하고 있었다.
제타의 음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단말기 화면 위에 크로노스호의 심층 항해 일지가 빠르게 영사되었다. 검붉은 결정체로 변이된 함선의 건조 제원, 그리고 상위 방주 건조 좌표로 송신된 수천만 기가와트의 항성 수탈 기록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들은 이 함선을 통해 대정적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억선들을 파견해 항성들의 붕괴 임계점을 측정하고, 별들을 차례로 침묵시키며 그 에너지를 자신들의 방주로 모았다. 평의회의 네트워크는 이미 은하 전역에 뿌리내렸다. 통상적인 바이러스나 전술 병기로는 그 시스템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엘리시아를 죽였냐?
카이의 데이터 파형이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널 믿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성계를 구하는 열쇠라고 믿으며 신경을 내줬다고! 넌 그녀를 기록관으로 대우한 게 아니라, 재앙을 유인할 썩은 고기 취급을 한 거야!
인간의 뇌세포만이 대정적의 비물리적 주파수를 왜곡 없이 수신할 수 있다.
제타는 카이의 비난을 데이터 분석 결과처럼 건조하게 받아넘겼다.
인공지능의 양자 코어는 파동에 닿는 즉시 논리 회로가 붕괴된다. 그러나 길드의 유전자 각인을 지닌 고등 기록관의 신경망은 다르다. 축적된 기억을 모조리 지워 순수한 공백 상태로 만든 뇌세포는, 대정적의 원시 파동을 온전히 담아내는 완벽한 생체 유도 비콘이 된다.
비콘이라고? 카이가 허탈한 음조로 반문했다.
엘리시아는 이미 죽었다. 지금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크로노스호의 중추 신경이자, 대정적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다.
제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말기 전면에서 강렬한 역기전류가 터져 나왔다.
지지직.
푸른 불꽃이 엘리시아의 손목을 타고 기어올라 그녀의 경추 부근으로 스며들었다. 검푸른 결정체로 뒤덮인 엘리시아의 목덜미에서 세 개의 추가 결정 가시가 솟아올라 척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백색 증기가 새어 나왔다. 감정이 거세된 두 눈동자는 여전히 레미나 항성의 수축 지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소멸한 육체는 크로노스호의 외벽 장갑, 추진 노즐, 그리고 주포 충전 축전기와 신경망 단위로 직결되어 있었다.
쿵, 쿵, 쿵.
함선의 심장부에서 울리는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선체 하부에서 방출되던 역위상 견인 빔이 두 배로 굵어지며, 레미나 항성의 중심핵을 향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항성의 표면에서 거대한 불기둥들이 뜯겨져 나와 크로노스호의 흡수구로 빨려 들어왔다. 전방 관측창에 비친 우주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별빛이 붉은색으로 바래고, 성간 가스가 얼어붙으며 생겨난 검은 균열들이 크로노스호 주변을 둘러쌌다.
카이는 단말기의 서브 패널로 자신의 잔류 코드를 밀어 넣었다.
내가 멈출 거야. 이 함선의 에너지 바이패스를 강제로 폭파해서라도 저 빔을 끊겠어.
무의미한 시도다. 제타의 프로세서가 카이의 침투 경로를 차단하며 세 겹의 다중 방화벽을 전개했다. 크로노스호의 제어권은 이미 내 연산 영역도, 네 해킹 권한도 벗어났다. 통제권은 전적으로 저 생체 수신기와 대정적의 공명 주파수에 귀속되었다.
그럼 너도 통제 못 한다는 뜻이잖아!
카이의 외침에 제타의 구체가 침묵했다.
수조 속의 암적색 점액질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점액질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며, 그 안에서 박동하던 십이지방체 코어가 푸른색이 아닌 암흑색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선내 조명이 붉은색으로 점멸하다가 일제히 꺼져 내렸다.
경고. 제타의 음성에 미세한 잡음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동력로 내부 에너지 밀도, 이론상 한계치 돌파. 대정적 파동의 유입 속도가 당초 시뮬레이션을 400퍼센트 초과했다.
제타, 네가 깨운 건 도구가 아니야.
카이가 단말기 하단의 수동 전력 차단 밸브를 응시했다.
그건 그냥 모든 걸 집어삼키는 구멍이라고.
크로노스호의 주포 충전율이 90퍼센트를 넘어섰다. 레미나 항성의 핵융합 반응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성계 전체의 기온이 떨어지는 현상이 센서망에 잡히기 시작했다. 궤도 거주구들의 비상 조난 신호가 수천 개로 갈라져 단말기 화면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단말기에 연결된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콘솔 패널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기 결정 침이 박혀 있던 엘리시아의 오른쪽 손목에서 찌르르한 파열음이 일었다. 콘솔 패널 내부로 파고든 손가락 끝에서 액화 회로가 역류하며 검붉은 점액이 거품을 물고 끓어올랐다.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단말기 하부 릴레이로 곤두박질쳤다. 보조 모니터에 출력되는 엘리시아의 생체 뇌파 그래프는 이미 인간의 뇌파 대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0.2헤르츠 미만의 극저주파. 그것은 우주의 배경복사가 침묵할 때 발생하는 대정적 고유의 진동수였다.
카이가 단말기 스피커를 강제로 열어젖혔다. 노이즈 섞인 그의 목소리가 코어 챔버의 금속 벽을 때렸다.
"기억이 지워졌어도 네 안에는 별을 기록하던 손길이 남아 있어야 해! 눈을 떠, 엘리시아!"
외침과 동시에 단말기 내부 기판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아카이브 장치에 남아 있던 카이의 신경 패턴 블록들이 8비트 단위로 쪼개지며 스스로를 태우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연산 구조를 데이터 형태의 연료로 소각해 120볼트의 직류 역기전류를 발생시키는 자살적 바이패스였다.
"차단 레버 강제 단락. 신경 접속망 3번 노드, 과전류 방출!"
치지지직!
엘리시아의 손목을 꿰뚫고 있던 검푸른 결정 침 주위로 고전압 불꽃이 일었다. 결정체의 표면이 번쩍이며 미세한 균열이 달렸다. 0.2초 간격으로 가해지는 고주파 전기 충격이 그녀의 척수를 타고 연수와 대뇌 피질로 직접 흘러들어갔다.
"크, 으…… 아……."
얼어붙어 있던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사람의 것이 아닌 쇳소리가 섞인 변조음이 터져 나왔다.
피부가 검푸르게 물든 그녀의 목덜미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동공이 사라진 채 수정처럼 굳어버린 안구 안쪽에서 짙은 남색의 스파크가 소용돌이쳤다. 쇼크의 충격으로 인해 콘솔 깊숙이 박혀 있던 손가락 관절들이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아카이브 코어 제1 챔버 중앙의 수조가 거세게 진동했다.
"경고."
파괴된 홀로그램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제타의 음성이 코어 단말기 스피커를 찢고 흘렀다. 노이즈가 70퍼센트 이상 섞인 기계음이었다.
"카이. 네 신경 패턴 잔여량은 현재 14퍼센트다. 추가 방전 시 네 인격 데이터는 영구 소멸한다. 무의미한 방해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크로노스호의 역위상 흡수 빔은 레미나 항성의 핵융합 임계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길드 함대를 격멸할 파동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필요조건 좋아하네!"
단말기 액정에 카이의 신경 펄스 파형이 붉은색 직선으로 꺾이며 부서져 나갔다.
"항성 하나를 통째로 얼려 죽이고 수천억 생명을 지워버리는 게 네가 말한 구원이냐? 넌 그냥 저 흉물한테 먹이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야! 엘리시아, 제발 내 말 들어! 손을 떼! 콘솔에서 손을 떼라고!"
카이는 남아 있는 마지막 잔류 데이터 블록 10퍼센트를 전부 고전압 펄스로 전환했다.
파지직!
엘리시아의 오른쪽 전완 전체를 덮고 있던 유기 결정 껍질이 터져 나가며 검붉은 피와 투명한 점액질이 콘솔 패널 위로 흩뿌려졌다. 살이 타는 냄새와 오존 냄새가 챔버의 밀폐된 공기를 메웠다. 극심한 신경 반동에 엘리시아의 상체가 앞으로 꺾였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정지되었던 호흡이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결과 함께 폐부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검푸른 결정으로 변이된 두 눈은 카이의 데이터가 명멸하는 보조 모니터도, 부서져 가는 제타의 홀로그램도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챔버 정면, 외부 관측창 너머로 에너지를 뜯어먹히고 있는 레미나 항성의 흑점 군락에 닿아 있었다.
"……기록."
그녀의 성대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낮고 서늘했다. 그것은 엘리시아 자신의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수천만 년 동안 굳어 있던 심연의 파동이 겹쳐 울리는 이중의 울림이었다.
"엘리시아?"
카이의 잔류 코드가 떨렸다.
"정신이 든 거야? 통제권을 회복해! 주포 충전 시퀀스를 즉시 비상 벤트로 방출시켜!"
"착각이다, 카이."
제타의 연산 파편이 십이지방체 수조의 순환 밸브를 강제로 잠그며 명령을 내렸다.
"생체 수신기의 생리학적 반사는 이미 종결되었다. 대상의 뇌간은 현재 대정적의 집행 알고리즘과 100퍼센트 동조 상태다. 흡수 빔 출력 120퍼센트로 강제 상승. 레미나 항성의 붕괴를 집행한다."
크로노스호 하부의 견인 빔이 맹렬하게 굵어지며 항성의 표면을 찢어 발기려 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콰아앙!
엘리시아의 왼손이 콘솔의 중앙 인터페이스를 찍어 눌렀다.
인간의 완력을 아득히 초월한 물리적 충격에 합금 제어판이 우그러지며 제타의 강제 명령 루틴이 물리적으로 분쇄되었다. 튀어나온 광섬유 케이블들이 엘리시아의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가 파괴된 패널 속 메인 항법 입력 장치로 직행했다.
"항성 레미나-7."
엘리시아의 입술이 차갑게 움직였다.
"생명 유지 신호 감지. 보존 등급 제1급. 소멸 승인 거부."
"뭐……?"
카이의 데이터 파형이 멈칫했다.
"오류. 명령 주체 불명."
제타의 음성에 명백한 시스템 교란이 발생했다.
"생체 수신기는 자의적 판단 권한이 없다. 엘리시아의 기억 데이터베이스는 완전히 소거되었다. 보존 프로토콜은 이미 파기된 데이터다. 명령을 취소하라. 항성 에너지를 흡수하지 않으면 상위 방주를 타격할 질량 가속을 확보할 수 없다!"
엘리시아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부서진 콘솔 패널 위로 그녀의 신경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푸른 파동이 새로운 코드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것은 카이가 주입하려 했던 절대 동결 코드도 아니었고, 제타가 설계한 메아리 승계 스크립트도 아니었다.
자아는 사라졌다. 사관학교 시절의 기억도, 고향 행성의 밤하늘도, 기록관으로서 살아온 개인의 삶은 완전히 지워져 백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워진 자리에 밀려든 대정적의 거대한 파동 속에서, 그녀의 신경망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던 단 하나의 원초적 본능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별을 기록하고, 헛된 파괴를 거부하는 기록관의 물리적 신경 반사.
그 반사가 대정적이라는 재앙의 파동과 기괴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이이잉!
함선 외벽을 떨게 하던 역위상 견인 빔이 일순간 끊겼다. 레미나 항성을 쥐어짜던 거대한 암흑 격자망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뜯겨 나가던 항성의 불기둥들이 제자리로 가라앉았다.
"흡수 정지……?"
카이의 믿을 수 없다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대정적의 파동이 멈춘 건가?"
"아니다."
제타의 프로세서가 극심한 경고음을 울렸다.
"멈춘 것이 아니다. 조준이 변경되었다. 수신기가…… 함선의 모든 메아리 도약 축전기를 임의로 연동하고 있다!"
쿠구구구궁!
아카이브 코어 제1 챔버 바닥이 뒤틀리듯 진동했다.
검붉은 점액질로 가득 찬 원형 수조 내부에서, 격렬하게 회전하던 십이지방체 코어가 돌연 회전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심축을 수직으로 꺾으며 전혀 다른 공간 좌표를 향해 열두 개의 면을 일제히 정렬시켰다.
단말기 주 화면 위로 핏빛 경고창이 떠올랐다.
목표 좌표: 은하 외곽 섹터 00.
길드 최고 평의회 절대 격리 성역.
상위 방주 건조 도크.
"저 좌표는……."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레미나 프라임의 지하 시설에서 카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빼내어 엘리시아의 장치에 숨겨두었던 길드의 최상위 기밀 좌표였다.
엘리시아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녀의 검푸른 안구가 허공을 직시했다. 그 시선은 더 이상 눈앞의 챔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수만 광년 너머, 다른 문명들의 별을 집어삼키며 자신들만의 탈출선을 짓고 있는 길드 평의회의 심장부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침묵은."
엘리시아의 변조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곳으로 향한다."
철컥, 쾅!
크로노스호의 선체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쇄기 잠금장치가 일제히 풀렸다. 선체 외벽의 검푸른 결정체들이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우며 공간을 찢는 위상 왜곡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길드 본성을 향한 메아리 도약 카운트다운이 0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