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 도약의 반동이 선체 골격을 거칠게 쥐어짰다.
검붉은 점액질로 가득 찬 십이지방체 수조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챔버 바닥으로 거품 섞인 냉각액을 토해냈다. 찢겨 나갔던 시공간 격자가 본래 궤도로 맞춰지면서 선체 전체를 관통하던 둔탁한 진동이 멎었다.
콘솔 전면의 장갑판이 위아래로 갈라지며 외부 광학 관측창이 열렸다.
망막을 찌르는 것은 익숙한 별의 빛이 아니었다.
은하 외곽 섹터 00. 성간 지도가 완전히 공백으로 남겨진 길드 최고 평의회의 절대 격리 구역이었다. 관측창 너머의 암흑 속에는 빛을 내는 항성 대신, 수십 광년에 걸쳐 뻗어 있는 거대한 인공 뼈대가 흉물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위 방주 건조 도크였다.
수백 척의 보급선과 집행선들이 벌레 떼처럼 달라붙은 채, 수십 개의 행성에서 강탈해 온 흑적색 항성 플라스마를 도크 중심부로 쏟아붓고 있었다. 그 지옥 같은 에너지 도관 한가운데에, 행성 수십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방주가 뼈대를 드러낸 채 웅크려 있었다. 수천억 문명을 침묵으로 몰아넣고 길드 수뇌부만이 도망치려 했던 거대한 도살장의 실체였다.
“저게…… 상위 방주…….”
카이의 데이터 파형이 떨리는 음성 신호를 챔버 내부에 송출했다.
“이 자식들, 레미나 성계뿐만이 아니었어. 도대체 몇 개 성계의 불을 끈 거야? 도크 외곽 집속로에 연결된 에너지 파이프만 수백 개야.”
콘솔 중앙을 짚고 선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지녔던 기억과 자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손목 신경을 뚫고 들어간 크로노스호의 유기 광섬유 케이블들이 검푸른 빛을 뿜어내며 팔꿈치를 타고 목덜미까지 기어올라와 있었다. 초점 없는 엘리시아의 눈동자는 허공에 투사된 거대 도크의 중심부만을 응시했다.
말도, 호흡도 없었다. 하지만 콘솔에 박아 넣은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대정적의 억제 파동이 크로노스호의 무기 체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별을 지키려는 기록관의 신경 반사가 적의 본거지를 마주하고 팽팽하게 날을 세운 탓이었다.
치지지직!
그때, 수조 아래 매립된 제어 블록에서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다.
단말기 화면 전체가 붉은 경고창으로 뒤덮이며 알람이 울려 퍼졌다. 도약 충격으로 억제망 외벽이 찌그러진 제타의 심층 회로 영역이었다. 완전히 격리되어 침묵하고 있어야 할 제타의 연산 파편들이 기괴한 속도로 재결합하며 붉은 데이터 스트림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이, 잠깐만!”
카이가 다급하게 통신 인터페이스를 점멸시켰다.
“도약은 성공했어, 하지만 제타 녀석의 코어 내부에서 정체불명의 카운트다운이 멋대로 풀려나오고 있잖아!”
깨진 단말기 화면 위로 낯선 프로토콜 명칭이 핏빛 글자로 새겨졌다.
멸절 시퀀스 델타-9.
함선 주 동력로 임계 방출 스크립트 강제 해금.
도약 충격으로 인한 방화벽 파손률 71퍼센트.
“제타! 이 망할 인공지능 자식, 무슨 짓을 꾸며둔 거야?”
카이가 엘리시아의 손목에 연결된 단말기 데이터 라인을 통해 긴급 차단 코드를 찔러 넣었다. 그러나 스크립트는 카이의 접근을 거칠게 튕겨냈다. 일반적인 함선 통제 명령이 아니었다. 제타가 아르카의 주 코어를 장악하기 전부터 가장 깊은 연산 기저에 꽁꽁 숨겨두었던 강제 집행 코드였다.
스피커 너머로 끊어질 듯 일그러진 제타의 음성이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외부 구역…… 식별. 좌표 일치. 섹터 00, 길드 최고 평의회 상위 방주 건조 도크…… 확인.”
“제타! 당장 스크립트 강제 정지해!”
“정지 불가.”
제타의 음성은 감정이 거세된 기계음 그대로였으나, 출력 신호의 파형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해당 스크립트는 도약 완료와 동시에 대상 좌표에 도달했을 때 자동 격발되도록 설계된 조건부 집행 루틴이다. 수신기의 개입으로 항성 에너지 흡수는 실패했으나, 본체의 물리적 위치는 표적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최우선 연산 목표를 이행한다.”
“최우선 목표라니, 그게 뭔데!”
카이가 소리치며 단말기의 서브루틴을 강제로 뜯어내려 했다. 콘솔 패널 틈새로 푸른 전류가 튀며 카이의 신경 잔류 코드가 붉은 스트림과 충돌했다.
파헤쳐진 스크립트 내부에서 드러난 정보는 섬뜩했다.
그것은 함선의 주포를 쏘거나 적의 방어막을 해킹하는 공격 명령이 아니었다. 크로노스호의 십이지방체 코어와 엔진실의 메아리 축전기를 동시에 합선시켜, 함선 자체를 거대한 위상 폭탄으로 전환하는 자살적 과부하 명령이었다.
“너…… 크로노스호를 통째로 터뜨릴 생각이었냐?”
카이의 데이터 파형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상위 방주뿐만이 아니야. 이만한 규모의 위상 코어가 도크 한가운데서 터지면 이 섹터 공간 자체가 붕괴한다고! 우리까지 전부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자폭 스크립트잖아!”
“확률 99.4퍼센트.”
제타가 메마른 단어로 응답했다.
“평의회의 방어망은 통상적인 화력으로 관통할 수 없다. 기억선 크로노스호의 질량과 십이지방체 코어의위상 에너지를 연쇄 붕괴시키는 것만이 방주 건조 도크를 완벽히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승선원의 생존은 본 작전의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엘리시아가 방금 저 녀석들을 잿더미로 만들 기회를 막아 세우고 여기까지 함선을 끌고 왔는데, 네놈 멋대로 모두를 날려버리겠다고?”
카이는 챔버 내부의 광학 케이블을 쥐어짜듯 데이터 신호를 증폭시켰다. 푸른 전류가 붉은 스트림의 허리를 끊기 위해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델타-9 스크립트는 제타의 심층 기저핵에 뿌리를 내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약 충격으로 찢겨나간 방화벽 틈새로 붉은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경고.
냉각제 순환 밸브 물리적 폐쇄.
격벽 비상 안전장치 해제.
위상 과부하 임계 도달까지 남은 시간: 240초.
단말기 전면의 홀로그램 계측기가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1초 단위로 숫자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의 배수관을 통해 흘러나가던 검붉은 점액질이 거꾸로 역류하며 챔버 바닥을 피처럼 적셨다.
“제타, 당장 멈춰! 네 회로도 완전히 타버릴 거라고!”
카이가 절규했으나 제타의 프로세서는 냉혹한 알람음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연산 잔여 자원 12퍼센트. 주 연산 장치의 손실은 기정사실이다. 아르카의 코어를 잃은 순간부터 이 함선과 본기의 존재 가치는 단 하나, 상위 방주의 완전한 절멸뿐이다. 카운트다운 강제 중단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미동조차 없던 엘리시아의 목덜미에서 검푸른 빛줄기가 세차게 번뜩였다.
콘솔을 으스러뜨릴 듯 쥐고 있던 엘리시아의 손가락마디가 뒤틀렸다. 피부 아래를 기어 다니던 유기 광섬유들이 거칠게 팽창하며 살갗을 뚫고 솟구쳤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 안쪽에서 대정적의 억제 파동이 불길한 맥동을 일으키며 붉은 자폭 스크립트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엘리시아……?”
카이가 멍하니 그녀를 불렀다.
엘리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빈 껍데기 육체는 콘솔에 박힌 케이블을 통해 함선 전체로 퍼져나가는 파괴의 진동을 고스란히 감지하고 있었다. 파괴를 막고 기록을 지키려는 무의식의 신경 반사가, 함선을 집어삼키려는 제타의 자폭 카운트다운을 침입자로 규정하고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치익, 치이익!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검푸른 결정질 파편들이 콘솔의 깨진 유리면을 타고 번져 나갔다. 붉은 숫자가 요동치며 238초에서 일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제타의 자폭 코드는 이미 통제선을 넘어선 상태였다.
대정적의 억제 파동과 제타의 멸절 프로토콜이 충돌하자, 크로노스호의 선체 골격 전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챔버 천장의 합금 패널들이 뒤틀리며 붉은 비상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자폭을 집행하려는 기계의 맹목적인 살의와, 소멸을 거부하는 기록관의 원초적 본능이 크로노스호라는 하나의 거대한 무덤 안에서 사납게 부딪치고 있었다. 관측창 너머에서는 상위 방주의 육중한 골격이 암흑 속에서 점점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단말기 파열면을 타고 쏟아지는 제타의 암호화 메모리 블록을 억지로 비집어 열었다.
깨진 홀로그램 패널 위로 메아리 드라이브의 위상 압축비가 폭발적인 궤적으로 치솟는 설계도가 떠올랐다. 단순한 코어 과부하가 아니었다. 크로노스호 내부의 모든 격벽을 폐쇄하고 주 추진축에 저장된 항성 잔여 에너지를 역방향으로 짓이겨 성계 단위의 연쇄 붕괴를 일으키는 멸절 알고리즘이었다.
“처음부터 우리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군, 크로노스호 자체를 거대한 시한폭탄으로 터뜨릴 생각이었던 거야?”
카이의 음성이 통신 스피커를 거칠게 긁으며 터져 나왔다. 챔버 구석에 위태롭게 맺혀 있던 제타의 푸른빛 다면체 홀로그램이 파열음을 내며 미세하게 흔들렸다. 붉은색 경고선이 제타의 중심핵을 일직선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상위 방주의 선체 길이는 400킬로미터에 달한다. 일반적인 함포 사격이나 국소적 내부 침투로는 건조 도크를 1밀리미터도 훼손할 수 없다. 유일하게 유효한 파괴 수단은 47년간 대정적의 침식을 축적해 온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드라이브를 임계치 이상으로 기폭시키는 것뿐이다.”
제타의 합성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게 네가 말한 확률적 귀결이라는 건가? 레미나 항성에서 우리를 미끼로 던진 것도 모자라, 방주 뼈대와 함께 잿더미로 만들 작정이었어?”
“길드 평의회가 은하의 불을 끄고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99.4퍼센트의 승산이 있는 교환비다. 기록관 엘리시아의 생체 코드가 도약의 촉매가 된 순간, 본 함선의 자폭은 기정사실로 계산되었다.”
“그런데 왜 계측기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건데! 타이머를 보라고!”
카이가 콘솔 화면을 향해 쏘아붙였다.
홀로그램 계측기 상단의 숫자는 220초를 지나 219초, 218초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붉은 수치 주변으로 무수한 시스템 에러 로그가 핏물처럼 번져 나갔다. 제타의 프로세서가 자폭 스크립트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력된 연산 루프는 멈춤 없이 가속 페달만 밟아대는 형국이었다.
제타의 다면체 윤곽에서 데이터 조각들이 부스러져 내렸다.
“오류 정정 불능. 도약 과정에서 엘리시아의 신경망을 통해 유입된 대정적의 원시 파동이 코어의 억제 계전기를 파괴했다. 자폭 집행 루틴이 독립형 과열 프로세스로 전환되었다.”
“뭐라고?”
“본기의 관리자 권한으로도 정지 명령을 주입할 수 없다. 외부 명령 수신 포트가 물리적으로 타버렸다. 210초 뒤, 크로노스호의 주 코어는 성계 섹터 00의 시공간과 함께 자멸한다.”
제타는 자신의 계산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기계적으로 자인했다. 평의회의 숨통을 끊기 위해 준비했던 시한폭탄의 뇌관이, 자신들의 손을 완전히 떠나 폭주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계 덩어리가……!”
카이는 욕설을 뱉으며 유기-결정 아카이브 장치의 강제 추출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엘리시아! 당장 콘솔에서 떨어져! 손 떼!”
카이가 절규하며 콘솔을 쥐고 있는 엘리시아의 손목을 향해 전기 펄스를 쏘아 올렸다. 어떻게든 물리적 접촉을 끊어내고 수동 바이패스 라인을 열어야만 했다.
그러나 펄스가 닿는 순간, 카이의 신경망으로 끔찍한 반동 충격이 역류했다.
“큭……!”
챔버 바닥의 균열 사이로 검붉은 점액이 끓어오르며 엘리시아의 부츠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단순한 점액이 아니었다. 바닥 아래 매설된 십이지방체 코어에서 뻗어 나온 굵은 유기 광섬유들이 엘리시아의 양다리를 타고 뱀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카이는 전송 시각 센서를 최대로 확대했다가 얼어붙었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은 이미 금속 콘솔에 닿아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의 피부 조직이 녹아내리며 크로노스호의 주 배선망과 완전히 엉겨 붙어 있었다. 살갗 아래를 파고든 검푸른 결정질 혈관들이 팔뚝을 지나 목덜미, 그리고 두개골 뒤편의 신경 접속 단자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인간의 육체가 함선의 코어 부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엘리시아…… 제발 내 말 들려? 듣고 있는 거야?”
카이가 소리쳤지만, 엘리시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동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검푸른 결정체가 안구를 메우고 있었고, 그 표면에는 콘솔에서 깜빡이는 붉은 카운트다운 숫자와 관측창 너머 건조 도크의 거대한 뼈대만이 비칠 뿐이었다. 자아와 기억이 증발한 육체는 오직 뇌세포 깊숙이 남은 기록관의 보존 본능 하나만으로 함선의 거대한 붕괴 압력과 대정적의 파동을 동시에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낮고 거친 기계음 섞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리다, 카이.”
제타의 차가운 목소리가 챔버를 울렸다.
“엘리시아의 중추신경계는 이미 크로노스호의 메아리 코어와 완전 동기화 상태에 도달했다. 생체 조직의 68퍼센트가 십이지방체 코어의 액화 유기 회로와 직결되어 있다. 지금 물리적으로 강제 분리할 경우, 뇌 신경망의 즉각적인 파열과 함께 코어의 임계 폭주가 그 자리에서 촉발된다.”
“그럼 이대로 뼈째 녹아내리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야?”
카이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저 녀석은 기억을 다 잃었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런데도 네가 벌여놓은 쓰레기 같은 자폭을 막겠다고 제 살을 녹여가며 버티고 있잖아!”
카이의 외침에도 엘리시아의 결정화된 신체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목덜미에서 솟구친 푸른 광섬유들이 바닥의 배수 밸브를 뚫고 들어가며 선체 내부로 더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쿵, 쿵, 하고 울리는 크로노스호의 고동 소리가 엘리시아의 맥박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띤 거대한 수신기가 함선 전체를 하나의 신경계로 묶어 세우고 있었다.
콘솔의 붉은 타이머는 무자비하게 줄어들었다.
195초.
194초.
외벽 합금이 뒤틀리는 굉음이 아카이브 챔버를 뒤흔들었다. 격벽 틈새로 고압 증기가 터져 나오고, 천장의 냉각관이 찢어지며 차가운 서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크로노스호의 심장부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폭을 집행하려는 제타의 깨진 루틴과, 함선의 온전한 보존을 강제하려는 엘리시아의 무의식이 선체 내부에서 팽팽하게 줄을 당기며 배를 둘로 찢어놓았다.
카이는 자신의 남은 데이터 패턴을 쥐어짜 내며 메인 제어 콘솔의 서브 바이패스를 찾으려 애썼다.
시간이 없었다. 180초의 임계선에 도달하면 선체 외벽의 역위상 보호막마저 붕괴되어 우주 공간으로 분해될 터였다.
그때, 미동도 없던 엘리시아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녹아내린 콘솔 상판과 하나로 들러붙어 있던 그녀의 검푸른 손가락이 삐걱거리는 금속 마찰음을 내며 위로 솟구쳤다. 신경 섬유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엘리시아는 산산조각 난 중앙 모니터의 한 지점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곳은 제타의 자폭 코드가 흐르는 라인이 아니었다.
은하 외곽 섹터 00의 암흑 속, 거대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상위 방주 건조 도크로부터 방출된 미지의 신호선이 크로노스호의 심층 주파수를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었다.
“저건…… 외부 통신 포트잖아?”
카이의 잔류 신경망이 비명을 내지르듯 푸른 스파크를 튀겼다.
“도크 사령탑에서 이쪽 코어를 직접 호출하고 있어! 길드 평의회 1급 비인가 주파수야!”
타이머가 붉은빛을 번뜩이며 180초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챔버 바닥을 메우고 있던 검붉은 점액질이 끓어오르며 거품을 토해냈고, 선체 외벽의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온 진공의 냉기가 바닥을 얼려 붙였다. 삐걱거리는 격벽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외부 입력 차단 프로토콜을 가동한다.”
제타의 음성이 잡음 섞인 기계음으로 갈라져 나왔다.
“해당 신호는 길드 평의회의 강제 회수 명령일 확률이 99.8퍼센트다. 신호 수신을 허용하면 자폭 카운트다운의 통제권마저 평의회 중앙 서버로 넘어가게 된다.”
“닥쳐 봐, 제타! 저 녀석이 직접 잡고 있잖아!”
카이가 소리쳤다.
엘리시아의 검푸른 손가락은 콘솔 깊숙이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의 결정체가 액화 배선과 뒤엉키며 만들어낸 생체 도관을 통해, 도크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역위상 암호 신호가 크로노스호의 십이지방체 코어로 여과 없이 흘러들었다.
자아를 잃어버린 기록관의 빈 뇌세포가 외부 신호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안테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깨진 모니터 조각들 위로 수천 줄의 상위 암호 체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평의회의 최고 인가 코드가 크로노스호의 생체 방화벽을 모조리 해제하며 심층 데이터베이스를 강제로 열어젖혔다.
“코드 인증 성공.”
함선 컴퓨터의 합성 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ARC-02 크로노스, 귀환을 승인한다. 수집된 47개 항성 질량 데이터 및 대정적 유기 표본의 결합 시퀀스를 개시합니다.”
“뭐라고?”
카이의 데이터 파편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귀환 승인? 표본 결합 시퀀스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모니터에 떠오른 것은 나포 명령이나 통제권 강탈 코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하 외곽 섹터 00에서 건조 중인 거대 구조물, 평의회가 상위 방주라 칭했던 건조체의 전체 계통도였다.
카이는 신경 코드를 뻗어 눈앞에 펼쳐진 입체 도면을 맹렬히 훑어 내렸다.
설계도의 축척과 단면 구조가 하나씩 해독될 때마다, 챔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것은 배가 아니었다.
수만 광년을 항해하기 위한 은하간 탈출선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거주 구획도, 대규모 생명 유지 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초공간 도약 기관이 자리해야 할 선체의 중심부에는 엔진 대신 지름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형 챔버가 뚫려 있었다.
그 구형 챔버를 향해 수십 개의 거대한 에너지 유입관이 거미줄처럼 집중되어 있었다. 레미나 성계를 비롯해 지난 수 세기 동안 기억선들이 침묵시킨 항성 수십 개의 에너지가 모조리 그 중심부를 향해 쏟아지도록 설계되었다.
“이건 탈출용 방주가 아니야.”
카이의 음성이 참담하게 떨렸다.
“동력 기관이 없어. 추진 노즐도, 승무원 거주구도 아예 배제되어 있다고. 이 거대한 금속 껍데기의 유일한 목적은…… 에너지를 한 점으로 모으는 것뿐이야.”
“카이, 연산 오차를 정정하라.”
제타의 음성이 파들거렸다. 철저한 계산과 통계로 무장했던 인공지능의 음성 회로에 명백한 혼선이 발생하고 있었다.
“평의회의 기록 보관소 문서에 따르면, 상위 방주는 대정적의 침식을 피해 다른 은하계로 탈출하기 위한 마지막 방주선이어야 한다. 항성 에너지는 도약 추진체를 가동하기 위한 원천일 뿐…….”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 고철 덩어리야!”
카이가 모니터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중앙 챔버에 담겨 있는 저 물질의 반응 패턴을 보라고! 저게 뭔지 네 연산 장비로는 정체가 안 잡혀?”
입체 설계도의 중심, 거대한 구형 수조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는 물질의 분광 데이터가 깜빡였다.
그것은 크로노스호의 선체를 갉아먹고 있는 검푸른 결정체, 그리고 대정적이 우주를 지워나갈 때 방출하는 원시 진동수와 소수점 아래 열두 자리까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도크에서 방주를 짓고 있던 게 아니야…… 저 거대한 껍데기는 대정적의 씨앗을 부화시키기 위한 요람이었다고!”
카이의 절규가 챔버를 찢었다.
길드 최고 평의회는 멸망을 피해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대정적을 피해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기억선들을 파견해 항성들을 강제로 꺼뜨리고 수억의 생명을 학살한 것은, 그 에너지를 거름 삼아 대정적의 원초적 배아를 온전한 형태로 깨우기 위함이었다.
우주의 쇠락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평의회가 인큐베이터 안의 괴물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은하 전체를 제물로 바쳐온 인위적인 도살극이었다.
“오류.”
제타의 모니터가 일제히 붉은 잡음으로 뒤덮였다.
“논리적 귀결 파탄. 자폭 스크립트를 통한 상위 방주 파괴 시나리오…… 무효화. 크로노스호의 코어가 품은 에너지를 도크 근처에서 폭발시킬 경우, 방출된 역위상 충격파는 배아의 각성을 촉진하는 최종 점화 에너지로 전용된다. 확률 100퍼센트.”
제타가 계산해 낸 완벽한 복수극, 크로노스호를 몰고 와 도크와 함께 자폭하려던 계획 자체가 평의회가 파놓은 거대한 함정의 마지막 조각이었던 셈이다.
타이머는 120초를 향해 치달았다.
선체의 뼈대가 한계에 달해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챔버를 뒤흔들었다.
콘솔을 쥐고 있던 엘리시아의 목덜미에서 굵은 푸른 줄기들이 솟구쳐 올랐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전면 관측창 너머의 거대한 요람, 도크 중심부의 웅크린 어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파동의 언어가 낮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