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교 바닥에 부딪힌 무릎에서 둔탁한 통증이 치밀었다.
류진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는 차단된 방폭문 너머로 변압기가 연쇄 폭발하는 굉음이 두꺼운 강철판을 울리고 있었다.
품에 안은 양자 코어의 표면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가죽 벨트로 감싼 오른손바닥에서 피와 진물이 배어 나와 검붉게 말라붙은 가죽을 적셨다.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격통이 팔을 타고 어깨뼈까지 치솟았지만, 류진은 손가락에 힘을 풀지 않았다. 손을 놓는 순간 이 코어 안에 갇힌 잔류 신호마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치직, 치지직.
목덜미에 붙어 있던 비상 단말기의 수신부가 날카로운 잡음과 함께 달아올랐다. 단절되었던 보안 통신망이 비상 예비 선로를 통해 억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류진! 듣고 있나, 류진!”
스피커 너머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감시국 총괄자 특유의 차가운 기계음이 아니었다. 완전히 밑바닥까지 긁어모은 공포가 뒤섞인, 헐떡이는 인간의 절규였다.
“당장 돌아가서 차단 핀을 완전히 체결해! 백본망으로 넘어간 코드가 격리 서버군의 프로토콜을 모조리 뜯어내고 있다!”
류진은 북쪽 환기 간선로의 철제 난간을 짚으며 천천히 발을 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교 밑 수백 미터 아래의 배기 팬이 돌아가는 저주파 진동이 뼈를 울렸다.
“차단 핀?”
류진이 턱 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낮게 읊조렸다. 목구멍이 매캐한 연기에 긁혀 모래를 씹는 듯 뻑뻑했다.
“그 핀을 꽂으면 전 시민의 뇌를 태워버리는 이중 기폭 장치가 돌아간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카이브의 비명이 통신 회선을 찢을 듯 울렸다. 배경음으로 감시국의 주 제어실 경보 사이렌과 폭죽처럼 터지는 스파크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통제 불능이다! 이십구 퍼센트야. 겨우 이십구 퍼센트의 파편 데이터가 침투했을 뿐인데 타워의 삼중 방화벽이 전부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어! 그자가…… 류상혁의 인격 데이터가 감시국 넷라인의 총괄 관리자 권한을 강제로 박탈하고 있다고!”
철교 중간에 설치된 구형 상태 모니터가 번쩍이더니, 감시국의 보안 승인 등급을 나타내는 숫자가 요동쳤다. 최고 보안 등급을 뜻하던 붉은 인장이 깨지고, 정체불명의 회색 룬 코드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감시국의 총괄 권한 오십 퍼센트 이상이 류상혁의 원형 코드에 강제 흡수되고 있었다.
“권한 회수 실패율 육십칠 퍼센트…… 젠장, 서브 프레임 네 개가 벌써 먹혔어!”
아카이브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늘게 떨렸다.
“류진, 거래를 하자. 네가 가진 그 코어의 잔류 역위상 코드를 역전송해 줘. 그러면 놈의 침식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다. 에코의 신병도 보장하지. 네 호적과 기억 데이터도 영구 면책 구역으로 빼돌려 주마. 도시 전체가 단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되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
류진은 걸음을 멈추고 환기탑 외벽에 매달린 점검용 계단 손잡이를 붙잡았다. 찢어진 가죽 틈새로 드러난 손바닥의 생살이 차가운 쇠 파이프에 닿자 전신이 떨릴 만큼 지독한 격통이 번졌다. 류진은 이를 악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거래?”
“그래, 거래다! 크로노스 기업이 보유한 모든 백업 서버의 통제권을 나눠줄 수도 있어!”
“아카이브, 네놈이 키워낸 괴물은 이제 네 모가지를 먼저 비틀러 갈 거다.”
“뭐라고?”
“내 아버지를 그렇게 개조하고, 오블리비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산 채로 뇌를 갈아 넣은 건 너희들이었어. 그래놓고 이제 와서 감당이 안 되니 수습해 달라고 짖어대는 건가?”
류진은 가슴팍에 고정된 휴대용 단말기를 왼손으로 조작했다. 단말기 패널 위로 아카이브의 주파수가 붉은색 파형을 그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넌 도시를 구할 생각 따위 없어. 단지 네가 쥐고 있던 통제권이 그 괴물한테 넘어가는 게 두려울 뿐이지.”
“류진! 멈춰! 그 통신을 끊으면 넌 영원히 상층부로 올라올 수 없어! 하층 구역 전체의 격벽을 내려서 너와 에코를 산 채로 매장해 버릴 테다!”
“해 봐. 네놈한테 아직 그 격벽을 내릴 권한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
류진은 플라스마 토치의 점화 버튼을 살짝 눌렀다. 가느다란 푸른 불꽃이 튀며 비상 단말기의 안테나 접합부를 그대로 지져버렸다.
치익 하는 단선음과 함께 귀를 찌르던 아카이브의 악다구니가 뚝 끊겼다.
간선로에는 오직 배기탑 거대 환풍기가 돌아가는 둔탁한 굉음과 타일 바닥을 타고 흐르는 냉각 파이프의 누수 소리만이 남았다.
류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골랐다. 손바닥의 감각이 무뎌져 가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경 말단이 열기에 타서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품에 안긴 코어의 표시창을 내려다보았다.
동결 전송률 이십구 퍼센트. 백본망 역류 지연 시간 제로.
비록 전송선을 끊어 추가 유출은 막았지만, 이미 중앙 타워 심층부로 파고든 아버지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카이브의 제어망이 무너지면서 하층 구역의 보안 격벽들도 간헐적으로 전력이 끊겨 덜컹거렸다. 도시의 신경망이 서서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류진은 무거운 다리를 끌며 철교 끝에 닿았다.
녹슨 주철 난간을 지나자 십사 번 배기탑 하부로 이어지는 좁은 정비 통로가 나타났다. 벽면의 주황색 비상등이 깜빡이며 바닥에 흩어진 전선과 오일 자국을 비췄다.
통로 끝에는 지난번 에코를 숨겨두었던 하부 정비 격실의 육중한 수동 차폐문이 보였다.
문틈에 꽂아두었던 잠금 핀은 아직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류진은 떨리는 손으로 코어를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왼손으로 수동 차폐문의 유압 레버를 움켜잡았다.
에코가 무사해야 했다. 아버지가 장악해 가는 중앙 타워의 구조를 뚫고 상층부로 진입할 방법은 이제 에코가 알고 있는 비인가 우회 통로뿐이었다.
류진은 숨을 들이쉬며 차폐문의 유압 레버를 아래로 힘껏 내렸다.
치익 하는 감압음과 함께 유압 피스톤이 밀려나며 두꺼운 강철 문이 열렸다.
격실 안쪽은 녹색 비상등만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환풍구에서 흘러나온 습한 바람이 매캐한 탄내와 엉켜 코를 찔렀다. 류진은 옆구리에 낀 코어를 고쳐 안으며 문틀을 짚고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 방열 패널 아래 누워 있어야 할 에코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류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격실 구석의 수동 정비대를 향했다. 에코는 그곳에 서 있었다. 목덜미에 단선된 침투 단자에서는 아직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지만, 벽에 기댄 채 콘솔 모니터를 응시하는 자세는 기괴할 만큼 꼿꼿했다.
“일어났습니까.”
류진의 말에 에코가 고개를 돌렸다. 낡은 트렌치코트 깃 사이로 드러난 한쪽 청색 의안이 규칙적인 주기로 점멸했다. 극심한 신경 반동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점이 맑았다.
“살아 돌아왔군, 류진.”
에코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류진의 화상 입은 손과 옆구리의 코어로 시선을 내렸다.
“변전실 콘솔이 터져 나가는 파형을 여기서도 감지했다. 전송은 어떻게 됐지?”
“막았습니다.”
류진은 정비대 앞으로 다가가 달아오른 코어를 내려놓았다. 금속 상판에 코어가 닿자 찌르륵하는 잔류 전류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도시를 해방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사일런트 퍼지는 합성 기억만 태우는 게 아니라, 시민들의 뇌를 전부 백지화하고 자기 인격을 덮어씌우는 복제 코드였어요.”
에코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무반응에 류진은 숨이 턱 막히는 위화감을 느꼈다. 스승이라면 경악하거나 분노해야 마땅한 진실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상혁이는 언제나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을 경멸했으니까.”
에코는 정비대 서랍에서 은색 데이터 칩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얹었다.
“이십구 퍼센트. 네가 끊어낸 시점의 수치다. 맞나?”
“어떻게 그걸…….”
“중앙 타워 하위 방화벽이 무너지는 속도를 보면 역산할 수 있다. 그 코드가 이십구 퍼센트만 침투했어도 감시국의 메인프레임 절반은 이미 네 아버지 손에 넘어갔다는 뜻이야. 아카이브 놈은 통제권을 잃고 발악하고 있겠지.”
에코는 거친 손으로 목덜미의 단선된 상처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묻어난 피를 무심히 털어내는 동작에는 고통을 느끼는 기색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다. 상혁이의 원형 데이터가 중앙 타워 상층 코어로 완전히 전이되면 이 도시에 남는 건 단 하나의 거대한 뇌뿐이다. 그때는 코어 전송선을 끊는 수준으로 막을 수 없어.”
“아버지를 멈추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층 구역의 간선망은 이미 아카이브가 차단했거나 아버지가 잠식했습니다.”
류진이 묻자 에코는 은색 칩을 류진 쪽으로 밀었다.
“상층부 제칠 통제 구역이다. 거기로 가야 네 아버지의 원형 코드를 직접 소거할 수 있어.”
“제칠 통제 구역이면 기업 최고 보안 연구 구역 아닙니까? 감시국의 중장갑 센티널들이 깔려 있을 텐데요.”
“평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혁이의 코드가 상층 보안 서버를 갉아먹으면서 내부 차폐벽들이 꼬여 있다. 이 칩에 제칠 통제 구역으로 직행하는 수직 화물 리프트의 바이패스 키와 비상 진입 격벽 좌표를 담아뒀다.”
에코는 벽에 걸려 있던 휴대 단말기를 집어 들며 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구형 환기 간선로 깊숙한 곳에 화물용 구형 승강기가 하나 남아 있다. 기업의 메인 감시망에서 분리된 독립 유압선로야. 그 좌표를 입력하면 경보를 울리지 않고 제칠 구역 외곽 격벽까지 곧장 올라갈 수 있다.”
류진은 탁자 위의 은색 칩을 집어 들었다. 불에 덴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파고들었다.
의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에코는 침투 케이블이 잘려 나갈 때 뇌 신경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겪었다. 깨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이토록 정교한 침투 경로를 준비하고, 중앙 타워 상층부의 통제권 이동 상황을 정확한 수치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 밖이었다.
류진은 은색 칩을 가슴팍에 고정된 보조 단말기 슬롯에 밀어 넣었다.
단말기 액정에 녹색 데이터 스트림이 흐르며 승강장 위치와 격벽 해제 암호열이 풀려나왔다.
제칠 통제 구역 외곽, 공기 정화 댐퍼 우회로.
경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암호화된 좌표열의 맨 마지막 바이트를 읽어 내려가던 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반적인 기억 복원가들의 서명 양식이 아니었다. 경로 코드의 가장 밑바닥, 패킷 검증 비트가 모이는 지점에 아주 미세한 십육진수 서열이 숨겨져 있었다.
감시국 총괄 통제 식별자. 아카이브가 보안 통신망을 복구할 때 화면 귀퉁이에 찍히던 바로 그 고유 서명 규격이었다.
류진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단말기를 쥐었다.
“에코.”
“왜 그러나?”
“이 바이패스 좌표, 어디서 구한 겁니까? 제칠 통제 구역의 유지 보수 코드는 감시국 핫라인이 아니면 생성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에코의 청색 의안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렌즈 안쪽의 조리개가 조여들며 차가운 빛을 뿜었다.
“오 년 전, 네 아버지가 제일연구 구역을 총괄할 때 빼돌려 둔 예비 루트다. 상혁이는 크로노스 기업이 자신을 폐기할 때를 대비해 상층부 통로를 몇 개 파두었지. 내가 그걸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에코의 설명은 매끄러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논리였다. 하지만 류진의 단말기 화면에 떠오른 보안 서명은 5년 전의 구형 규격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 갱신된 감시국의 최신 암호 프로토콜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류진이 읊조리듯 말했다.
에코는 대답 대신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젖은 철판 바닥을 울렸다.
“류진, 지금 중요한 건 좌표의 출처가 아니다. 네 손에 들린 코어의 잔여 전송률이 언제 상층부로 강제 흡수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지. 상혁이가 타워를 완전히 쥐면 네 기억도, 내 기억도, 이 도시에 살던 모든 사람의 존재도 사라진다.”
에코의 손이 류진의 어깨를 짚었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손길은 단단했지만, 체온이라 부를 만한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리프트로 가자. 가서 그 괴물을 끝장내야 해. 날 믿지 못하겠나?”
스승의 눈에는 과거 작업실에서 기억 복원 기술을 가르쳐주던 시절의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침투조의 고주파 충격을 대신 받아내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하지만 단말기 화면 끝에서 깜빡이는 아카이브의 서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함정인가. 아니면 아카이브의 제어망을 역으로 이용하기 위한 에코의 또 다른 패인가.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 통로의 끝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
류진은 정비대 위의 양자 코어를 들어 올려 코트 안쪽에 단단히 고정했다.
“가시죠.”
류진은 단말기를 끄고 돌아섰다.
“리프트가 어디 있습니까.”
“격실 뒤쪽 비상 통로다. 환기 간선로 수직 갱도로 바로 이어진다.”
에코는 망설임 없이 앞장서 걸어 나가며 격실 안쪽의 비상 탈출용 해치를 밀어젖혔다.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상층부로 치솟은 거대한 수직 갱도의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코의 뒤를 따라 비상 해치를 통과하자마자 살을 에는 돌풍이 옷깃을 사납게 낚아챘다.
발밑으로는 수백 미터 아래 제4 하층 구역의 슬러지 집수정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크로노스 중앙 타워의 기저부를 향해 곧게 뻗은 환기 갱도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갱도 벽면에 설치된 굵은 자기 레일을 따라 육중한 주철 격자 케이지 형태의 수직 화물 리프트가 덜컹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저게 직행 리프트인가요?”
류진이 바람을 뚫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슴팍에 결착한 양자 코어가 둔탁한 진동을 일으키며 코트 안감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래. 산업용 폐기물과 대형 환기 터빈 부품을 수송하던 직결 라인이다. 일반 보안망의 추적을 받지 않고 제7 통제 구역 하부 반입구로 직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지.”
에코가 녹슨 철골 통로를 가로질러 리프트 승강대로 성큼 뛰어내렸다. 류진 역시 난간을 짚고 발을 디뎠다. 손바닥의 화상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에코는 승강기 기둥에 붙은 구형 조작반의 덮개를 거칠게 뜯어냈다. 배선 뭉치가 튀어나오자 자신의 의수 단말에서 뽑아낸 인터페이스 핀을 주저 없이 꽂아 넣었다.
“좌표 동기화를 시작한다. 중앙 타워 메인프레임이 류상혁의 코드 때문에 요동치는 틈을 타야 해. 지금이 아니면 진입로 자체가 차단된다.”
조작반 모니터의 녹색 주사선 위로 좌표 수열이 빠르게 정렬되었다. 류진은 에코의 옆에 서서 그 화면을 예리하게 응시했다. 화면 하단, 눈에 띄지 않게 숨겨진 통신 패킷 헤더에 방금 전 확인했던 아카이브의 고유 보안 서명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에코가 쥔 좌표는 탈출구나 침투로가 아니었다. 감시국이 사전에 설계해 둔 유인 경로였다.
“에코.”
류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말해라. 시간이 없다.”
“이 리프트의 종착지, 정말 단순한 자재 반입구 맞습니까?”
에코의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딱 멈췄다. 푸른 의안이 번뜩이며 류진을 향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아카이브의 추적 신호가 이 승강기 통제 버스에 실시간으로 물려 있습니다. 스승님이 건넨 좌표 끝자리, 감시국의 강제 집행 프로토콜 암호예요. 절 어디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에코의 눈동자 안쪽에서 회로 모터가 작게 회전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냉혹함이 번졌다.
“너는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해, 류진.”
그 순간, 승강장 천장에 매달린 비상 경광등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날카로운 경보음을 쏟아냈다.
경고. 외부 관리자 권한 개입.
제어권 강제 오버라이드.
조작반 화면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에코의 단말기 접속이 강제로 튕겨 나갔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아카이브의 날 선 음성이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왔다.
“좌표 동기화 완료. 표적 생포를 위한 강제 압송 궤도를 가동한다.”
“젠장!”
에코가 욕설을 내뱉으며 조작반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승강기 모터실의 유압 밸브가 비명을 지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철커덕!
천장에서 육중한 방폭 격벽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승강대 바깥의 에코와 리프트 케이지 안쪽의 류진 사이를 가로막는 두께 삼십 센티미터의 강화 장갑판이었다.
“에코!”
류진이 몸을 던졌지만, 방폭문은 이미 바닥에 메아리를 남기며 쾅 소리와 함께 완전히 맞물려 닫혀버렸다.
두꺼운 방탄 투시창 너머로 에코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에코는 의수의 고출력 단락 핀을 꺼내 문 옆의 비상 해제 배선함에 거칠게 쑤셔 박으며 소리쳤다.
“류진! 버텨라, 통제권이 강제로 넘어갔…!”
쾅! 쾅!
에코의 외침은 격벽 너머에서 둔탁한 금속 마찰음으로 짓눌려 끊어졌다. 배선함에서 푸른 스파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이미 감시국의 상위 프로토콜이 승강기 시스템 전체를 물고 늘어진 뒤였다.
“수동 해제 불능. 통제권은 중앙 타워 감시국으로 완전 귀속되었습니다.”
기계적인 합성음과 함께 발밑의 철판이 요동쳤다.
끼이이익!
자기 레일의 초전도 코일이 최대 출력으로 가열되면서 리프트가 무시무시한 가속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급격한 중력 가속도가 온몸을 짓눌렀다. 류진은 비틀거리며 벽면의 안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가슴 안쪽에서 덜컹거리던 양자 코어가 과열 반응을 일으키며 붉은 인디케이터를 점멸했다.
코어에 묶여 있던 류상혁의 29퍼센트 잔류 데이터와, 감시국 메인프레임이 승강기를 끌어당기는 신호가 허공에서 치열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류진. 네 아버지가 남긴 오염 코드가 감시국 신경망의 삼분의 일을 불태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카이브의 목소리는 평소의 기계적인 냉정함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음성 신호 뒤편으로 감시국 지휘 통제실의 폭발음과 시스템 경고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하지만 물리 코어의 본체가 상층부 격리 챔버로 들어오는 순간, 사일런트 퍼지는 그 자리에서 동결 소멸한다. 네 발로 직접 제7 격리 구역의 단두대로 올라오는 것을 환영하지.”
투시창 밖으로 환기 갱도의 콘크리트 벽면이 빗살무늬처럼 빠르게 낙하했다. 초속 수십 미터의 속도로 치솟는 케이지 안에서 류진은 코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코가 속였든, 아니면 에코의 신경망조차 아카이브의 거대한 덫에 놀아났든 이제 상관없었다.
이 승강기가 도달할 끝에는 감시국의 중무장 침투조와 격리 챔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류진은 코트 안쪽에서 플라스마 토치를 뽑아 들어 예열 스위치를 올렸다. 노즐 끝에서 새파란 불꽃이 웅웅거리며 어두운 리프트 안을 차갑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