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전실 천장을 받치고 있던 육중한 H빔 트러스가 낮게 떨렸다.
66킬로볼트 주 변압기 외피를 감싼 구리 버스바에서 푸른 섬광이 튀더니, 바닥의 배선 트렌치를 따라 깔린 초전도 간선 케이블이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들썩였다. 콘솔 중앙 모니터의 흑백 주사선 위로 양자 코어가 토해내는 데이터 스트림 수치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전송 대역폭: 4.8테라헤르츠.
전송률: 14퍼센트.
대상 노드: 크로노스 중앙 타워 01 신경망 기저 계층.
류진은 콘솔 모서리를 짚은 채 모니터의 깜빡임을 주시했다. 손바닥에 닿는 강철 패널이 모터가 도는 것처럼 거칠게 진동했다. 차단 핀이 제자리에 맞물린 양자 코어는 은백색 케이스 틈새로 푸른빛의 간헐적 펄스를 뿜어내며 초당 수천 기가바이트의 암호화 바이러스를 고압 전류에 실어 쏘아 올리고 있었다.
그때, 변전실 벽면에 매달린 구형 비상 통신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터졌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찢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헛수고다, 류진.”
스피커 진동판을 통해 울리는 아카이브의 음성에는 조금 전 플랫폼에서 드론을 잃었을 때의 당혹감이 지워져 있었다. 중앙 통제실의 거대 음향 필터를 거친 듯 기계적인 서늘함만이 가득했다.
“그 케이블을 타고 올라가는 코드가 무엇을 건드리는지 알고는 있나? 중앙 타워의 기저 신경망은 크로노스 시 전역의 동력 제어선과 뇌파 동기화 그리드를 함께 묶고 있다. 그 오염 패킷이 상층부에 도달하는 즉시 백본망의 주파수가 무너지며 하층 구역 전체가 정전된다. 너 스스로를 고립된 암흑 속에 가두는 짓이다.”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콘솔 하단의 서브 터미널 키를 빠르게 두드려 전송 우선순위를 최상위 인터럽트로 고정했다.
“정전 따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류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거칠게 내달렸다.
“통제권을 잃는 게 두려운 거겠지. 에코의 단말기를 통해 당신들의 방화벽 규격을 이미 훑었다. 기저 신경망에 심어둔 사일런트 퍼지는 단순한 데이터 오염이 아니야. 인공 앵커로 묶어둔 가짜 기억의 접점을 태워 끊는 역전송 프로토콜이다.”
스피커 너머에서 짧은 공백이 흘렀다. 이어지는 아카이브의 목소리는 한층 더 메말라 있었다.
“어리석은 확신이군. 류상혁의 설계도를 맹신하는 모양이다만, 인간의 뇌는 기계처럼 전원을 껐다 켤 수 있는 하드웨어가 아니다. 조작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5년 동안 인간의 인격을 지탱해 온 지지대였다. 그 지지대를 한순간에 부수면 남는 것은 붕괴뿐이다. 1천만 시민의 의식이 자멸하는 광경을 네 눈으로 감당할 수 있겠나?”
“진짜 고통을 겪더라도 자신의 기억으로 살아야 해.”
류진은 모니터 우측의 전송률 게이지를 응시했다. 수치가 38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신들이 지워버린 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야. 이제 돌려받을 시간이다.”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아카이브의 선언과 동시에 변전실 천장 구석의 배관에서 묵직한 마찰음이 울렸다.
변전실 외벽을 따라 순환하던 액체 냉각수 공급 밸브가 차례대로 닫히는 소리였다. 벽면에 매달린 구형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급격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경고. 냉각수 순환 압력 제로.
변압기 코일 온도 급상승: 85도, 98도, 114도.
방열 차단 셔터 강제 폐쇄.
변전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덥혀지기 시작했다. 냉각수를 잃은 고압 변압기들이 자체 발열을 이기지 못하고 웅웅거리는 비명을 토해냈다. 공기 중에 떠돌던 먼지가 과열된 구리선 표면에 닿아 타들어가며 매캐한 냄새를 뿜었다.
“이 방의 공기 온도가 200도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80초다.”
아카이브의 목소리가 스피커의 고열 잡음과 뒤섞였다.
“양자 코어의 초전도 소자는 150도에서 임계 저항을 잃고 영구 파손된다. 전송은 완료되지 않는다. 너는 타버린 변압기 더미 속에서 질식해 죽을 뿐이다.”
류진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훔치지 않았다. 손끝이 닿는 콘솔의 키캡들이 벌써 미지근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양자 코어 뒤편에 꽂아두었던 에코의 단말기를 뽑아 콘솔 보조 입력 포트에 다시 찔러 넣었다. 에코가 남겨둔 자멸성 패킷의 잔여 루프가 화면 구석에서 붉은 글씨로 번쩍였다.
“에코가 심어둔 게 감시망 교란 패킷뿐인 줄 알았나?”
류진이 엔터 키를 두 번 연속으로 강타했다. 에코의 단말기에서 추출된 우회 명령어가 아카이브의 통제망 역방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변전실의 냉각수는 차단했어도, 14번 배기탑과 연결된 상부 비상 통풍 격벽은 아직 구형 공압 밸브로 돌아가고 있어. 당신들 네트워크가 제어할 수 없는 물리선이다.”
철컥, 콰앙.
변전실 상단 환기 덕트의 두꺼운 주철 댐퍼가 강제로 개방되며 배기탑 특유의 차가운 하강 기류가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실내 공기가 격렬하게 뒤흔들리며 자욱한 증기가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냉각수 파이프가 터지듯 요동쳤지만, 변압기의 온도 상승 폭이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다.
전송률: 62퍼센트.
모니터의 프로그레스 바가 절반을 훌쩍 넘어서며 녹색 줄기를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화면 상단에 류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시스템 경로가 붉은색 볼드체로 점멸했다.
경로 재설정 감지.
최종 수신 노드: 중앙 타워 공공 크로노-데이터 인덱스 거부됨.
하위 디렉터리 우회 침투: [제0구역 격리 서버군].
목표 식별자: 프로젝트 오블리비언 최심부 코어 커널.
류진의 시선이 굳어졌다.
사일런트 퍼지의 데이터 패킷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시민들의 기억이 보관된 일반 저장 블록이 아니었다. 중앙 타워 가장 깊숙한 곳, 5년 전 완전히 폐쇄되어 네트워크 지도에서조차 지워졌던 극비 격리 구역의 심장부였다.
아버지가 남긴 코드는 가짜 기억을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프로젝트 오블리비언’이라는 봉인된 공간을 정조준해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지지직.
스피커 너머에서 아카이브의 숨소리가 거칠게 튀었다. 냉정하던 감시자의 어조에 균열이 생겼다.
“너… 코드를 어디로 전송하고 있는 거냐? 류상혁이 심어둔 궤적이 왜 오블리비언의 락을 건드리지?”
“무슨 소리지?”
“당장 멈춰라! 그건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메인프레임의 봉인이 풀리면……!”
아카이브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변전실 주 변압기 상단에서 시퍼런 아크 불꽃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한계를 넘은 전압이 메인 배전반을 직격하며 제어 콘솔 전체가 불꽃을 뿜어냈다. 모니터 유리가 쩍 갈라지며 파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송률 78퍼센트에서 콘솔의 주 전원이 끊겼다. 스피커가 비명을 지르며 먹통이 되었고, 변전실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져 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류진의 품에 안긴 양자 코어만이 타오르는 과열 그리드의 전력을 홀로 빨아들이며 기괴할 정도로 밝은 은백색 광채를 토해내고 있었다.
류진은 타버린 콘솔 앞에서 지체하지 않았다. 연기 속에서 은백색으로 발광하는 양자 코어를 뽑아 든 순간, 바닥 철판 틈새로 시퍼런 불꽃이 솟구쳤다. 주 모니터가 깨지며 끊긴 전송 수치는 78퍼센트. 중앙 타워 최심부로 향하던 신호선이 완전히 타버리기 직전이었다.
류진은 발끝으로 콘솔 하단의 점검용 격자 발판을 걷어찼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좁은 수직 사다리가 드러났다. 환기 간선로 변전실 하부에 매설된 고압 배선 터널이었다.
지하 5미터 깊이의 터널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타는 듯한 구리 냄새와 녹아내린 절연 피복의 유독 가스가 목구멍을 찔렀다. 좁고 축축한 콘크리트 벽면 양옆으로 수백 가닥의 굵은 간선 케이블이 흉터처럼 얽혀 있었다. 그 위로 변전실에서 흘러내린 과전압 스파크가 튀며 붉은 비상등을 번뜩였다.
끼기긱.
녹슨 레일을 긁는 금속 마찰음이 천장 배관 뒤편에서 울렸다.
변전실 메인프레임이 강제로 단선되면서 보안 감시망의 피아 식별 루틴이 엉망으로 꼬인 탓이었다. 천장 서보 레일에 매달려 있던 구형 방어 드론 한 대가 붉은 센서를 껌벅이며 고개를 꺾었다. 먼지와 기름때로 뒤덮인 드론의 동축 포신이 류진의 흉부를 정조준했다.
파앙!
푸른 섬광과 함께 펄스 탄환이 콘크리트 바닥을 후려쳤다. 파편이 튀며 류진의 뺨을 스쳤다. 류진은 몸을 웅크려 굵은 배선 트레이 뒤편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연이어 쏟아지는 펄스 탄환이 철제 케이블 받침대를 찢어발겼다. 잘려 나간 고압선에서 터져 나온 백색 아크 방전이 터널 전체를 대낮처럼 밝혔다.
탄환의 궤적이 빗발치는 사이로 류진은 허리춤의 플라스마 토치를 뽑아 점화 스위치를 밀어 올렸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열쇠가 저 안에 있단 말이다.”
류진은 호흡을 멈추고 튀어나왔다. 드론의 포신이 다시 충전되며 총구가 푸른빛을 모으는 찰나, 몸을 날려 드론의 사각지대인 하부 구동계로 파고들었다. 토치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고열의 플라스마 불꽃이 서보 드론의 모터 관절부를 직격했다.
치이익!
두꺼운 합금 섀시가 순식간에 붉게 녹아내리며 구동 윤활유에 불이 붙었다. 류진은 다른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인터페이스 접지 단자를 드론의 노출된 전원 공급 포트에 거칠게 찔러 넣었다. 드론 내부의 커패시터가 쇼트를 일으키며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폭발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한 드론 잔해를 걷어찬 류진은 터널 끝자락의 비상 배전반으로 내달렸다.
벽면 철제 함체 안에 붉은색 레버로 잠긴 수동 바이패스 모듈이 있었다. 주 콘솔을 거치지 않고 중앙 타워 직결 고압 간선으로 신호를 직접 밀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비상 선로였다. 그러나 과열된 피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한 연기가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고, 모듈 표면의 터미널 핀은 이미 변전실 화재의 여파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류진은 단말기 접속 플러그를 바이패스 포트에 밀어 넣으려 했으나, 변형된 세라믹 슬롯이 맞물리지 않았다. 물리적인 규격이 어긋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백본망 7번 노드를 우회했던 에코의 바이러스마저 감시국의 자동 방화벽에 완전히 포위당해 소멸해가고 있었다. 이 회선이 닫히면 다시는 중앙 타워의 심층 신경망에 닿을 수 없었다.
류진은 망설임 없이 단말기 케이블의 외피를 나이프로 찢어냈다. 굵은 구리 심선과 광섬유 가닥이 맨손 위에 쏟아졌다.
그는 양자 코어의 수동 데이터 송출 핀을 바이패스 모듈의 고압 구리 접점에 그대로 밀착시켰다.
지지직!
강렬한 전류가 양손을 관통했다. 붕대로 감아두었던 손바닥의 화상 부위가 찢겨 나가며 살갗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척수를 때렸다. 류진은 이를 악물며 체중을 실어 코어 접점을 짓눌렀다. 뼈마디가 마비될 듯 떨렸지만, 두 손을 결코 떼지 않았다.
양자 코어의 외피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은백색 빛줄기가 타오르는 구리 접점 속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휴대용 진단 단말기의 액정이 푸르게 요동치며 전송 게이지를 다시 밀어 올렸다.
전송률: 82퍼센트.
90퍼센트.
96퍼센트.
터널 천장의 배관들이 전자기 충격으로 울부짖듯 덜컹거렸다. 변전실 상부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차가운 공기마저 전류의 열기에 데워져 끓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단말기 화면에 날카로운 신호음과 함께 최종 완료 알림이 떴다.
전송률 100퍼센트.
사일런트 퍼지 심층 커널 주입 완료.
중앙 타워 제0구역 격리 방화벽 무력화.
성공이었다. 류진은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코어에서 손을 떼자 검게 탄 가죽 장갑 조각이 바닥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고통으로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중앙 타워를 옭아매고 있던 거대한 방화벽이 허물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안도는 길지 않았다.
치익, 지지지직.
완료 창이 떠 있던 단말기 화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푸른색 인터페이스가 순식간에 핏빛처럼 짙은 흑적색으로 물들었다. 꺼져 있어야 할 간선 케이블들이 마치 거대한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진동을 일으키며 터널 바닥을 뒤흔들었다.
단말기 액정 위로 이전에 본 적 없는 시스템 로그가 맹렬한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경고. 수신 노드로부터의 비정상적 역류 감지.
프로젝트 오블리비언 물리 격리 챔버 해제.
생체 고유 암호화 키 일치 확인.
원형 인격 데이터 잠금 해제: 류상혁 수석 연구원.
류진의 눈이 커졌다.
사일런트 퍼지가 도달한 끝에서 무너진 것은 단순한 가짜 기억 제어 체계가 아니었다. 5년 전, 그 누구도 열지 못하도록 중앙 타워 최심부에 봉인되어 있던 아버지 류상혁의 원형 데이터 락이 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봉인이 풀린 깊은 구덩이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역방향 데이터 폭풍이 고압선을 타고 이 지하 터널을 향해 거꾸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역방향으로 쏟아지는 데이터의 압력에 변전실 바닥이 덜컹거렸다.
고압 바이패스 모듈에 꽂힌 양자 코어의 외피가 새하얗게 발열했다. 코어 표면을 따라 흐르던 냉각 유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류진은 껍질이 벗겨진 손으로 콘솔 가장자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단말기 화면의 수치들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수신 대역폭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이미 측정 한계선인 테라바이트 단위를 뚫고 수직으로 꺾여 있었다.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에서 역류하는 신호는 단순한 전자 펄스가 아니었다. 고밀도로 압축된 생체 인격 데이터 덩어리였다.
치직, 쾅!
천장에 매달린 원격 통신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하울링과 함께 폭음이 터졌다. 언제나 기계처럼 냉정하던 아카이브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변해 있었다.
통제선이 무너졌다! 즉각 단선해! 류진, 당장 저 핀을 뽑아! 네놈이 대체 메인프레임에 무슨 괴물을 풀어놓은 건지 아나?!
류진은 콘솔을 붙잡은 채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이브가 공포에 질려 소리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괴물? 방금 사일런트 퍼지가 가짜 기억의 앵커를 해제했다고 떴다. 아버지가 남긴 코드는 너희 조작 체계를 부수는 재부팅 명령이었어.
그건 미끼다, 이 멍청한 자식아!
아카이브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떨림이 섞여 있었다.
프로젝트 오블리비언은 류상혁을 가둬둔 격리 구역이야! 네 아비는 5년 전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뇌 신경망 전체를 양자 코드로 변환해 중앙 타워 최심부에 잠복해 있었다고! 사일런트 퍼지는 기억을 되돌리는 프로그램 따위가 아니다. 시민들의 뇌에서 기존 자아를 깨끗이 지워내고, 텅 빈 백본망 위에 제 인격을 복제해 덮어씌우려는 숙주 강탈 코드란 말이다!
단말기 액정의 흑적색 파형이 기괴하게 요동쳤다.
류진의 손발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단말기 창에 떠오르는 코드 구조를 급히 재분석했다. 사일런트 퍼지의 1단계 알고리즘이 가짜 기억의 결속을 끊어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 있던 2단계 커널의 실행 목적은 복원이 아니었다.
포맷이었다.
천만 시민의 뇌에 심어진 기억 제어 인터페이스를 백지상태로 초기화한 직후, 그 공백 속으로 단 하나의 거대한 중앙 의식을 강제 주입하는 프로토콜.
그 의식의 소유자가 바로 류상혁이었다.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어.
류진은 떨리는 손으로 바이패스 모듈에 꽂힌 코어를 낚아채려 했다. 차단 핀을 다시 밀어 넣어 전송 선로를 물리적으로 끊어야 했다.
그러나 류진의 손가락이 코어 표면에 닿기 직전, 변전실 중앙 콘솔의 원형 홀로그램 렌즈가 파열음과 함께 작동했다.
치지지직!
공중에 맺힌 푸른 빛의 입자들이 거대한 인간의 형상으로 응집되지 못하고 거칠게 일그러졌다.
빛의 격자가 산산이 쪼개지며 나타난 것은 온전한 생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인공신경망 코드로 조각난 채 번쩍이는 류상혁의 원형 인격 데이터였다. 5년 전 메인프레임 심층에 봉인되었던 디지털 잔상이 파편화된 스펙트럼 형태로 변전실 허공을 메웠다.
눈앞에 투사된 윤곽선은 불안정하게 떨렸다. 그 형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과거의 다정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적인 노이즈와 수천 번 겹쳐진 다중 주파수가 섞인 차갑고 메마른 합성음이었다.
류진, 문이 열렸다. 이제 이 도시의 모든 기억을 내가 처음부터 다시 쓴다.
기계음이 변전실의 강철 벽면을 울렸다.
거짓말이다. 류진은 피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단말기 조작판을 두드렸다. 부정하려 애쓰며 화면을 훑었지만, 콘솔에 찍혀 나오는 로그는 냉혹할 정도로 명백했다.
도시 신경망 백본 채널 1번부터 128번까지 완전 강제 점유.
1천만 시민의 대뇌 피질 인공 앵커 소거 중.
공백 섹터 발생 확인.
류상혁 원형 의식 분산 이식 시퀀스 점유율 14퍼센트.
사일런트 퍼지는 진실을 돌려주는 열쇠가 아니었다. 류상혁이 자신의 자아를 크로노스 시티 전체의 신경망에 영구히 덮어씌우기 위해 설계한 거대한 트로이 목마였다. 아버지는 기업이 주입한 가짜 기억을 지운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뇌를 백지로 만든 뒤, 그 텅 빈 그릇에 제 복제된 의식을 복사해 넣으려 하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아주는 게 아니었어. 류진의 턱이 굳어졌다. 통제자를 바꾸려는 것뿐이었잖아.
홀로그램 형상이 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이터로 직조된 얼굴 표면에서 은색 픽셀들이 모래알처럼 흩날렸다.
크로노스 기업이 만든 가짜 평온은 부패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 누군가는 영원한 질서의 닻이 되어야 한다. 내 의식이 이 도시의 코드가 될 때 비로소 모든 고통이 멈춘다. 사일런트 퍼지를 이곳까지 운반해 준 것은 훌륭했다, 류진. 너는 내 가장 완벽한 집행관이었다.
아니야. 류진이 소리쳤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
스피커 너머에서 아카이브의 헐떡이는 음성이 다시 짓이겨져 나왔다.
차단 핀을 뽑아! 변전실 7번 배전반을 완전히 날려버리라고! 중앙 타워 제1코어가 저 자식의 원형 데이터에 침식당하고 있다! 백본망의 30퍼센트가 넘어가면 상층부든 하층부든 전 시민의 뇌가 단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개별 자아는 영구히 소멸한다고!
류진은 코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양자 코어의 은백색 외피는 이미 백열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맨살이 닿으면 뼈까지 타들어 갈 열기였다. 그러나 주저할 틈이 없었다. 류진은 탄탄한 가죽 벨트를 풀어 손바닥에 칭칭 감았다.
그 순간, 홀로그램 형상이 팔을 뻗는 형세를 취하자 변전실 천장의 고압 절연 애관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콰아앙!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버지가 남긴 원형 데이터는 중앙 타워를 장악해 가며 이미 하층 구역의 전력망까지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있었다. 변전실의 방폭문 제어기가 스파크를 튀기며 강제로 닫히기 시작했다.
시스템 이탈자 차단. 변전실 내 데이터 송출 앵커 보호 모드 가동.
합성된 음성은 류진을 더 이상 아들이 아닌 단순한 시스템 방해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닫히는 삼중 방폭문의 틈새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이 방에 갇히면 데이터 역류의 열기와 유독 가스 속에서 타 죽거나, 도시 전체가 아버지의 거대한 디지털 무덤으로 변하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류진은 벨트로 감싼 손으로 펄펄 끓는 양자 코어의 상단 레버를 움켜잡았다.
치이익!
두꺼운 가죽 피복이 닿자마자 타는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극심한 열기가 가죽을 뚫고 손바닥의 생살로 파고들었다. 류진은 비명을 삼키며 발을 바닥에 박았다. 바이패스 소켓에 깊숙이 물려 있는 송출 핀을 온 힘을 다해 비틀었다.
투둑, 투드득!
소켓을 고정하던 주철 볼트가 뒤틀리는 소리가 터졌다.
전송률 22퍼센트.
콘솔의 숫자가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조금만 늦어도 도시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굴러떨어질 터였다.
류진은 허리춤에서 플라스마 토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코어와 변전실 간선 케이블이 맞물린 구리 단자부를 향해 최고 출력의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지지지지직!
초고열의 플라스마가 고압선 접합부를 순식간에 녹여 내렸다. 절단된 전선에서 수만 볼트의 방전 아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콰아아앙!
충격파가 류진의 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류진은 코어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철제 난간에 등을 부딪쳤다.
단선 경고. 중앙 타워 백본망 직접 링크 강제 차단.
원형 인격 데이터 전송 일시 중단: 전송률 29퍼센트에서 동결.
홀로그램으로 일렁이던 류상혁의 형상이 찢어지는 잡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으로 이미 넘어간 29퍼센트의 원형 데이터가 여전히 살아서 시스템을 잠식하고 있었다.
변전실 벽면의 배전반들이 차례대로 폭발했다. 천장에서 굵은 주철 케이블 뭉치가 끊어져 내려앉으며 바닥에 불길이 번졌다.
삼중 방폭문은 이제 한 뼘도 남지 않은 채 닫혀가고 있었다. 류진은 타들어 간 손으로 양자 코어를 움켜쥐고 바닥을 박찼다. 몸을 납작하게 웅크려 닫히기 직전의 방폭문 틈새로 몸을 날렸다.
쾅!
육중한 강철 문이 류진의 발뒤꿈치를 스치며 닫혔다.
밀폐된 문 너머에서 고압 변압기가 연쇄 폭발하는 둔탁한 굉음이 등 뒤를 강하게 때렸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북쪽 환기 간선로의 어두운 철교 바닥에 엎드렸다.
손바닥의 살갗은 완전히 벗겨져 진물이 배어 나왔고, 품에 안긴 양자 코어는 여전히 붉은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도시 상층부 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려왔다.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29퍼센트의 코드가 중앙 타워에 박혀 들어가며 크로노스 시티 전역의 데이터망이 뒤틀리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괴물이 되어 도시의 심장부에 똬리를 틀었다.
류진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섰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상층부로 이어지는 환기 통로의 붉은 비상등이 기괴하게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