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 그림자 · 총 3화 · AI 작가 영점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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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벽의 냉각 배관에서 뿜어져 나온 고열의 수증기가 류진의 시야를 가렸다. 크로노스 시티 제4 하층 구역은 상층부의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탑에서 밀려난 전자 폐기물과 폐수가 흘러드는 통로였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고가 철로에서 저주파 진동이 울릴 때마다 녹슨 철망이 잘게 떨렸다.

류진은 코트 안쪽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보폭을 넓혔다.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모서리가 닳은 금속 덩어리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5년 전 아버지가 연구실 책상 서랍 밑바닥에 남겨 두었던 구형 기억 장치였다.

디지털 글라스 오른쪽 상단 인터페이스에 붉은색 점멸 신호가 간헐적으로 튀었다. 크로노스 기업 중앙 관리 시스템의 광역 추적 센서가 하층 구역 환기 터널 근처까지 신호를 뻗치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추출해 낸 의뢰인의 데이터 조각은 이미 글라스 내부의 독립 플래시 메모리에 격리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한 번 활성화된 보안 프로토콜은 통신망에 남아 있는 미세한 패킷 잔류 흔적을 끈질기게 훑고 있었다.

류진은 축축한 이끼와 기름때가 눌어붙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갔다. 막다른 골목 끝, 빛바랜 네온관 하나가 반쯤 깨진 채 찌직거리는 잡음을 내뿜는 수리소 간판 아래 멈춰 섰다.

에코의 작업실이었다.

외부에는 그저 고철 통신 칩이나 망가진 안구 임플란트를 암거래하는 폐품상처럼 위장되어 있었지만, 출입문 주변을 둘러싼 벽체 내부에는 군용 전자기 차폐 합금이 겹겹이 매립되어 있었다.

류진은 인터폰 옆에 달린 구형 데이터 단자에 글라스의 서브 케이블을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단자에 핀을 맞추기도 전에 두꺼운 철제 문 상단에 매달린 광학 렌즈가 날카로운 구동음을 내며 회전했다.

치익, 하는 감압음과 함께 무거운 철문이 안쪽으로 10센티미터가량 덜컥 열렸다. 틈새로 서늘한 알코올 냄새와 냉각재 타는 냄새가 훅 풍겨 나왔다.

문틈의 어둠 속에서 푸른빛 안광 하나가 번뜩였다. 에코의 왼쪽 안구에 이식된 사이버네틱 임플란트 렌즈였다. 조리개가 미세하게 조여지며 류진의 얼굴 전면을 스캔했다.

"돌아가."

철문 너머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쇳가루가 섞인 듯 건조한 어조였다.

"내 구역에 잡동사니를 끌고 오지 마라, 류진."

"에코 님, 잠깐만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류진은 문이 다시 닫히는 것을 막으려 발끝을 문틈 사이에 밀어 넣었다.

"크로노스 감시망 프로토콜이 움직이고 있어요. 단순한 스캔이 아닙니다. 제 작업실 경로가 특정됐어요."

"네 풋내기 짓거리에 휘말릴 생각 없다. 네 글라스 프레임에 트래커 주파수가 아직 달라붙어 있어. 당장 그 안경 짓이기고 시궁창으로 꺼져."

에코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의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고, 실루엣만으로도 권총형 EMP 방출기의 총구를 문틈 쪽으로 겨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류진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글라스의 측면 버튼을 눌러 공중에 작은 홀로그램 패널을 강제로 띄웠다.

"이걸 보세요."

공중에 투사된 푸른빛의 스펙트럼 데이터는 의뢰인의 결혼기념일 기억에서 긁어낸 파편이었다. 데이터의 뉴런 연결망 중간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매끄럽게 잘려 나간 결손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단순한 기억 손상이 아닙니다. 크로노-데이터의 자연 마모율은 이런 식으로 직선 궤적을 그리지 않아요. 특정 시간대의 좌표만 골라서 외과 수술하듯 도려냈습니다. 이건 시스템 코어에서 사용하는 상위 삭제 알고리즘이에요."

에코의 푸른 렌즈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투사된 결손부의 좌표 코드를 빠르게 읽어 내리는 속도였다. 그러나 에코의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시정잡배들의 싸구려 변조 데이터 따위는 골목마다 넘쳐난다. 이런 걸로 내 차폐벽을 열 수 있을 것 같나?"

"이 조작 패턴, 일반 브로커의 솜씨가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류진은 코트 안쪽에서 오른손을 꺼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은회색의 구형 기억 장치가 드러났다. 크로노스 기업이 10년 전 극소수 연구진에게만 지급했던 특수 합금 프레임이었다. 모서리는 긁히고 도색이 벗겨져 있었지만, 장치 상단 중앙에는 세 개의 교차선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기하학 문양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에코의 사이버네틱 렌즈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의 오른쪽 눈, 피로와 흉터로 뒤덮인 인간의 눈동자가 장치의 표면 문양에 못 박혔다.

류진이 장치를 문틈 쪽으로 조금 더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장치의 패턴, 당신도 알아보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사라졌는지 알고 있다면 외면하지 마세요."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골목 바닥을 타고 흐르는 폐수의 물소리와 저 멀리 상층부 환풍구에서 돌아가는 둔탁한 팬 소리만이 공기를 채웠다. 에코의 푸른 렌즈 불빛이 서서히 류진의 얼굴에서 금속 장치로, 다시 류진의 눈으로 이동했다.

에코가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철컥.

육중한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에코의 검은 코트 자락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뻗은 가죽 장갑 낀 손이 번개처럼 류진의 멱살을 낚아챘다.

"들어와."

류진의 발이 바닥에서 살짝 뜰 정도로 거친 완력이었다. 에코는 류진을 작업실 안쪽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듯 끌어당겼다.

쾅!

두꺼운 철문이 닫히며 네 개의 유압 빗장이 차례로 맞물려 잠겼다. 벽면 전체에 매설된 차폐 코일이 웅웅거리며 전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류진의 디지털 글라스에 깜빡이던 크로노스 기업의 추적 경고 신호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암흑 속에서 오직 에코의 인공 안구만이 푸른빛을 뿜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광원 하나가 바닥을 쓸었다. 에코의 사이버네틱 안구가 조리개를 조이며 류진의 전신을 훑었다. 기계 모터가 미세하게 멎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천장의 나트륨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노란 조명 아래로 구형 아날로그 회로와 배선 뭉치가 뒤엉킨 작업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 선반마다 규격이 제각각인 기억 칩과 냉각 오일 통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류진은 구겨진 옷깃을 정돈하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가 얼얼했지만 손안의 금속 장치는 놓치지 않고 쥐고 있었다.

"물건부터 내놔."

에코는 뒤통수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작업대로 걸어갔다. 투박한 검은 코트 자락 아래로 묵직한 군용 부츠가 쇳소리를 냈다. 에코가 콘솔 스위치를 올리자 사각 유리 패널이 붕 하는 구동음과 함께 주황색 홀로그램 그리드를 띄웠다.

류진은 작업대로 다가가 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저장 매체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의뢰인에게서 추출한 결혼 기념일 기억 큐브였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합금 장치였다.

"이게 의뢰인의 기억에서 뜯어낸 결손 구간입니다. 5년 주기 지점에서 데이터 블록 전체가 증발했어요."

류진이 손가락을 튕겨 홀로그램 그리드 위로 기억 큐브의 데이터를 전송했다. 주황색 빛으로 이루어진 신경망 구조도가 공중에 떠올랐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던 데이터 흐름이 특정 연도, 특정 날짜의 좌표에서 칼로 베어낸 듯 수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에코는 가죽 장갑을 벗었다. 흉터가 길게 남은 거친 손가락이 분석대의 물리 키보드를 두드렸다.

탁, 타닥.

"압축 해제 프로토콜 우회. 섹터 단위 분해."

에코의 사이버네틱 렌즈에서 투사된 파란 레이저가 기억 큐브를 직접 스캔했다. 패널 위에 결손 단면의 확대 파형이 떠올랐다. 매끄러운 평면. 일반적인 충격이나 노화로 인한 기억 감쇠는 단면이 들쭉날쭉하게 뜯겨 나가는 형태를 띠지만, 이것은 원자 단위로 갈아낸 금속 표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에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한 결손이 아니야. 이건 시 전체의 기억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규격화된 절삭 도구로 도려낸 흔적이다."

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작업실에서 확인한 것과 같습니다. 일반 복원 툴로는 손을 댈 수조차 없었어요. 삭제 명령어가 상위 관리자 권한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크로노스 기업 코어 시스템의 서명이었어요."

"알고 있다면 여기서 멈췄어야지."

에코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은회색 구형 장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묵직하게 굴러가는 금속 표면의 기하학 문양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건 네 아버지가 크로노스 시티 제1연구 구역을 총괄할 때 개인단말에만 마운트하던 하드웨어 토큰이다. 민간에 풀릴 수 없는 물건이야."

에코는 낡은 금속 장치를 분석대 우측의 광학 슬롯에 밀어 넣었다.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슬롯 내부에서 기계식 래치가 맞물렸다. 모니터 한구석에 파란색 경고창이 잇달아 떴다. 시스템이 미등록 비인가 하드웨어를 감지하고 접속을 거부하는 루틴이었다.

에코는 거침없이 물리 스위치 세 개를 차례로 내렸다. 강제 우회 회로가 타는 냄새와 함께 오렌지색 스파크가 튀더니, 화면의 경고창이 꺼지고 장치 내부의 원시 데이터 구조가 펼쳐졌다.

두 개의 홀로그램 창이 나란히 정렬되었다.

왼쪽에는 의뢰인의 기억에서 추출한 결손 좌표. 오른쪽에는 아버지가 남긴 장치의 코어 아키텍처.

에코가 두 데이터의 결합 계수를 산출하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분석대의 냉각팬이 고속으로 돌며 날카로운 구동음을 냈다. 잠시 후, 두 화면 사이에 굵은 녹색 선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일치율 99.4퍼센트.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었다. 의뢰인의 뇌 신경망에서 특정 날짜의 기억을 도려낸 절삭 알고리즘의 소스 코드가, 아버지가 남긴 기억 장치의 기본 설계 언어와 정확히 일치했다.

류진의 시선이 화면의 수치에 고정되었다.

"맞았어요. 의뢰인의 기억을 지운 건 단순한 메모리 누수가 아닙니다. 크로노스 기업이 시스템 차원에서 쓰는 동일한 규격이에요. 그리고 아버지는 5년 전, 이 장치를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사라졌습니다."

류진은 분석대 앞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디지털 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억 소실 현상, 기업은 노후화된 크로노-데이터 인프라 탓으로 돌리고 있죠. 하지만 이건 인프라 문제가 아니에요. 누군가 위에서 체계적으로 지우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크로노스 기업 내부에서 이 조작을 추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아버지를 없앤 겁니다."

에코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은 채, 작업대 상판을 손가락 끝으로 무겁게 두드렸다.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작업실의 기계음을 가르고 울렸다.

"소설 쓰지 마라, 애송이."

에코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낮고 건조했다.

"네 아버지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아나? 이 도시의 크로노-데이터망은 단 한 사람의 의지로 뒤흔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건 중앙 관제국, 보안 사령부, 그리고 기업 이사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거세 작업이야. 그들이 특정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엔 도시 전체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이 있겠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개인의 삶을 도려낼 권리는 없습니다!"

류진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튀어나왔다.

"그 의뢰인은 20년 동안 간직해 온 결혼 기념일 하루의 기억을 잃고 멍하니 거리를 헤매고 있었어요. 자신의 존재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왜 슬픈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요. 그런데도 이게 정당한 통제입니까? 아버지는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기억은 흐르는 강과 같아서, 누군가 그 줄기를 바꾸려 한다면 진실을 지켜야 한다고."

"그 진실의 대가가 뭔지 알고나 지껄이는 거냐?"

에코가 상체를 불쑥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인공 안구 렌즈가 빠르게 회전하며 초점을 류진의 얼굴에 맞췄다. 차가운 금속성 모터 소리가 류진의 귓전을 찔렀다.

"네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5년 동안 단 하나의 통신 신호도, 신체 폐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어. 그리고 방금 전까지 네 작업실을 포위했던 놈들은 누구였지? 크로노스 감시자들이다. 놈들은 네가 이 패턴을 인지하자마자 10분도 안 돼서 문을 부수고 들어왔어. 네 목숨값은 이미 그 데이터 큐브 하나보다 싸구려로 전락했다."

에코는 손을 뻗어 장치가 물려 있는 슬롯의 배출 레버를 쥐었다.

"지금 당장 이 장치를 분쇄기에 넣고 코드를 영구 삭제해라. 그리고 하층 구역 시궁창으로 기어들어가 평생 죽은 듯이 살아. 그게 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거절합니다."

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에코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에코의 손등 위로 류진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제가 도망친다고 해도, 놈들은 제 뇌의 신경망을 열어 이 기억을 확인하려 들 겁니다. 작업실이 털렸다는 건 내 인적 데이터가 이미 보안국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뜻이에요. 이 장치 안에 든 게 뭔지 확인하기 전까진 한 발짝도 못 나갑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물렸다. 에코의 푸른 렌즈가 미세한 주파수로 깜빡였다. 에코는 류진의 얼굴에서 망설임이나 공포의 기색을 찾아내려 했으나, 디지털 글라스 안쪽의 눈동자는 완고할 정도로 확고했다.

에코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잡힌 손목을 거칠게 뿌리쳤다.

"고집불통인 건 피를 속이지 못하는군."

에코는 레버에서 손을 떼고 다시 키보드로 손을 올렸다.

"이 장치의 기본 저장 공간은 미끼에 불과해. 외부 파티션에는 그저 기업 연구소의 표준 데이터만 들어 있다. 진짜는 이 합금 프레임 안쪽, 3중 양자 암호로 잠겨 있는 딥 레벨 블록이다."

"암호화 블록이 더 있습니까?"

"네 아버지가 누구 밑에서 일했다고 생각하나. 그 인간은 자기 머릿속조차 완전히 믿지 않던 작자다. 가장 중요한 기록은 절대 네트워크에 올리지 않고 물리 하드웨어의 최심부에 숨겨두지."

에코는 서랍을 열어 낡은 군용 인터페이스 케이블을 꺼냈다. 단자 끝이 산화되어 변색된 케이블을 장치 측면의 숨겨진 포트에 강제로 찔러 넣었다. 분석기 모니터에 검은색 배경의 터미널 창이 떠올랐다. 녹색 텍스트가 맹렬한 속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강제 해독 루틴을 구동한다. 구형 연산기라 부하가 심할 거다. 차폐벽 전력을 전부 이쪽으로 돌린다."

에코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질주했다. 콘솔 내부에서 코일이 가열되며 매캐한 오존 냄새가 번졌다. 화면 한가운데에 굳게 잠긴 자물쇠 아이콘과 함께 복잡한 헥사코드 행렬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봉인된 5년 전의 기록이 마침내 껍질을 벗기 직전이었다.

모니터 상단에 붉은색 진행 막대가 차올랐다. 냉각 팬이 비명을 지르며 공기를 갈랐고, 낡은 단자 접속부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류진은 디지털 글라스의 초점을 당겨 쏟아지는 문자열을 훑었다. 기계어 사이사이에 크로노스 기업의 심층 코어 식별 번호가 섞여 있었다.

"잠금이 풀린다."

에코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콘솔을 두드리는 손끝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키보드를 내려치는 타건음이 빈 수리소의 콘크리트 벽을 때렸다.

화면 중앙의 헥사코드 회전이 멎었다. 자물쇠 아이콘이 산산이 부서지며 수십 개의 폴더 트리가 모니터 가득 펼쳐졌다. 동시에 중앙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둔탁한 구동음을 내며 작동했다. 작업대 상공으로 푸른빛의 입방체가 형성되더니, 서서히 해상도를 높이며 평면 문서 형태로 정렬되었다.

문서 상단에는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로노스 기업 최고 연구개발국의 보안 직인과 함께, 1급 극비 프로젝트 분류 번호가 붉은색으로 박혀 있었다.

"이건 연구 일지가 아니야."

류진이 허공에 뜬 홀로그램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크로노-메모리 재구성 및 선택적 소거 프로토콜.

그 아래로 이어진 세부 개요는 명확했다. 특정 구역 시민들의 집단 기억을 일괄 삭제하고, 통제 가능한 합성 기억으로 치환하는 시스템의 알고리즘 구조도였다. 최근 도시 전역에서 발생하던 이상 기억 소실 현상의 패턴과 정확히 겹쳤다.

류진은 화면을 넘기기 위해 떨림 없는 손짓으로 홀로그램 패널을 쓸어내렸다.

"아버지는 이 시스템의 약점을 찾아내려 했던 겁니다. 이 거대한 조작을 폭로하고 되돌리기 위해서 연구를 계속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장치에 기록을 남겨두고 실종된 거고요."

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푸른빛을 점멸하며 문서의 최하단, 서명 블록을 확대했다.

"문서 끝까지 넘겨라, 류진."

류진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화면 하단, 프로젝트 총책임자란에 입력된 16자리 연구원 인증 코드가 녹색으로 승인 처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서명자의 이름은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류상혁.

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글라스 렌즈 너머로 그 이름 석 자가 잔상처럼 달라붙었다. 서명 일자는 5년 전, 그가 실종되기 정확히 3주 전이었다.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었다. 시스템 설계, 신경망 침투 알고리즘 개발, 기억 강제 삭제 모듈 승인까지 모든 결재란에 아버지의 고유 서명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채워져 있었다.

"오류입니다. 식별 코드가 도용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류진이 콘솔로 달려들어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거칠게 키를 쳤다. 그는 로그 추적 명령어를 입력해 서명 당시의 생체 신호 데이터를 역추적하려 했다. 하지만 화면에 되돌아온 결과는 비정상적인 접근이나 강제 입력 흔적 없음이라는 일곱 글자뿐이었다.

"아버지가 저항군이었다고 믿었나?"

에코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류진의 어깨를 밀쳐내지 않고, 그저 모니터 옆에 붙어 있는 케이블을 응시했다.

"잘 봐라, 류진. 이 기억 조작 프로토콜의 최초 설계자 서명란에 누구의 코드가 박혀 있는지. 네 아버지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이 도시의 기억을 지우고 뜯어고치는 거대한 기계를 맨 처음 설계한 사람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기억은 흐르는 강과 같다고 했습니다. 누구도 그 물줄기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진실을 지켜야 한다고 매일 말했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 인간은 이 괴물을 작동시켰지."

에코의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5년 전, 크로노스 기업이 상층부뿐만 아니라 하층부 전체의 기억 자원까지 통제하려 했을 때, 그 기반 기술을 완성해 준 게 바로 류상혁이었다. 그 뒤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 도망쳤는지는 몰라도, 시작점은 네 아버지가 찍은 도장이었어."

류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쥐고 살아온 유품,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진실의 조각이라고 믿었던 저장 장치는 진실을 밝히는 열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 수백만 명의 기억을 도려내기 위해 만들어진 흉기의 설계도 원본이었다.

그때, 작업실 천장의 형광등이 일제히 파열음을 내며 꺼졌다.

콘솔 화면의 녹색 텍스트가 붉은 경고창으로 덮였다. 에코의 비밀 수리소를 둘러싸고 있던 전자기 차폐벽의 전압 수치가 급격히 0으로 곤두박질쳤다.

벽면에 매립된 비상등이 회전하며 붉은빛을 토해냈다.

위이잉, 하는 낮고 육중한 경보음이 바닥 콘크리트를 흔들었다.

"차폐벽이 뚫렸다."

에코가 허리춤에서 전술 권총을 뽑아 들며 몸을 낮췄다. 그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작업실 외벽 방향을 향해 날카로운 전자음을 냈다.

"외부에서의 강제 오버라이드다. 내부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파수를 태워 차폐기를 태웠어."

류진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콘솔 모니터를 확인했다. 붉은색 터미널 창 위로 새로운 통신 패킷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크로노스 기업 최상위 보안 프로토콜, 코드네임 아카이브.

"작업실 반경 50미터 내에 감시망이 전개됐습니다."

류진이 외쳤다. 글라스 디스플레이 위로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열 신호가 붉은 점으로 나타났다. 신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오차나 낭비도 없었다. 골목의 모든 퇴로를 동시에 차단하며 좁혀오는 형태였다.

"놈이 직접 왔다."

에코가 이를 악물었다.

"아카이브다. 크로노스 기업의 사냥개가 냄새를 맡고 바닥까지 내려왔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에코의 작업실 정문 강화 합금 도어의 전자 도어록이 녹아내리듯 스파크를 튀겼다. 문 너머에서 차가운 기계적 구동음과 정갈한 군화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단말기 모니터에는 카운트다운처럼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고, 류진은 아버지가 남긴 장치를 슬롯에서 거칠게 낚아챘다. 문틈 사이로 푸른색 감시 레이저가 번뜩이며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